1998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뜻밖에 머나먼 미국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을 접수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계시는 유기종목사님이 보내온 편지였다. 목사님은 미주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组织神学)을 가르쳤다.

미 ”스타 조. 앞으로 3년간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유기종목사님은 나의 의향을 문의했다.

당시 나는 이미 텔례비죤방송국에서 다년 간 기자와 편집으로 근무하였다. 나는 안해와 딸애를 둔 가장이었고 40대를 바라보는 지숙한 직장인이었다. 유기종목사님이 권장하는 미국행은 섣불리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막중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직장을 사직하고 한국행, 일본행, 미국행을 선택한 동료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대학시절에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대해 각별한 흥취를 가졌다. 어린 시절에 “미 제국주의는 종이범에 불과하다”라는 어록을 외우며 씩씩하게 성장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미국의 저명한 기자 애드가 스노가 집필한 “중국의 불은 별”(中国的红星-西行慢记)을 접하고 장차 기자로 될 꿈을 키웠다.

나는 또 양계초 선생이 미국 방문 후 집필한 “중국 청년들에게 알리는 글”(告中国青年之书)을 읽었다. 다년간 서방세계의 영어권에서 탁월한 문필가로 활약한 임어당 선생의 문집 “인생의 귀속”(人生的归宿)도 탐독했다. 그밖에 대문호 호적 선생과 량 실추 선생의 문집도 두루 접했다.

당시만 하여도 나는 글 속에서 보았던 미국이 어쩐지 중국과는 수화상극의 나라로 느껴졌다. 나에게 미국은 흡사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으로 난해한 세상으로 각인되었다.

1999년 2월의 어느 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한겨울이었다. 나는 퇴근하려고 원고지를 정리했다. 그때 숙직실의 박 할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박 할아버지는 불쑥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조 기자는 참 좋겠네. 남들이 부러워하는 미국으로 가게 되였구먼. 한턱 푸짐하게 칭커(请客)하세.”
나는 의아한 눈길로 편지를 개봉했다. 중국라디오텔례비죤방송총국에서 보내온 편지였다. 돌아오는 5월에 미국 뉴욕에서 “국
제텔례비죤특집프로평의회”가 개최된다. 미국콜롬비아텔례비죤방송협회에서 중국 대표팀을 이번 평의회에 요청했다.

중국라디오텔례비죤총국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평의회에 참가할 32명의 대표를 선발했다. 선발된 대표는 3월 15일 전으로 평의회에 추천할 특집 프로와 함께 중국라디오텔례비죤총국에 출국신청을 제기해야 하였다.

사실 이해 1월에 내가 제작한 “중국 조선족 사회의 변천”이란 40분 분량의 TV 다큐 프로가 길림 텔레비 방송국 저널에서 방송되여 호평을 받았다. 중국라디오텔례비죤총국에서는 나보고 이 프로를 새롭게 제작하여 출국 신청을 하라고 통지했다.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도무지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북경에서 장거리전화가 걸려왔다. 하루속히 출국 신청을 결정하라는 단속을 받았다. 결국 나의 미국행은 거짓말 같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성사되었다.

한국인 직원과 함께 

1999년 5월 8일 북경공항은 찬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나는 아메리카 NW-88항공기 편을 탑승하고 뉴욕으로 향발했다. 우리 일행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32명의 기자와 편집으로 조직되였다. 심수 대학에서 방송학을 강의하는 구양 위(欧阳伟) 교수가 동행했다. 마침 나의 옆좌석에 배치되었다.

나는 300달러의 미화를 간직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다년간 빠듯한 월급쟁이 신세라 미화 300달러는 내가 미국으로 갖고 가는 전부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300달러의 미화보다 더욱 근심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지금 천당이 있다는 미국으로 가는가? 아니면 지옥이 있다는 미국으로 가는가? 나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떨렸다.

조선시대의 선비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热河日记)를 집필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사상을 주장했다. 1780년 박지원은 팔촌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입연(入燕) 사절단 일원으로 2~3개월간 청나라를 견학했다. 그는 연경(燕京)으로 입문하는 도중에 청나라의 선비들과 부지런히 필담(笔谈)을 나누었다. 중국의 각종 문물제도에 대한 소중한 기록으로 되였다. 귀국 후 그는 26권에 달하는 방대한 “열하일기”를 집필했다.

박지원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오랑캐의 것이라도 우리 것만 나으면 반드시 따라배워야 한다. 청기와 한 장, 벽돌 한 장도 비록 오랑캐의 것이지만 제조술이 우리 것만 월등하면 허심탄회하게 배워야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빌어 부국유민(富国裕民)의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유교의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이단의 글로 취급되었다. 나라의 문풍을 어지럽힌 조잡한 글로 타매당했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 박지원은 청죽 같은 절개로 죽는 그날까지 “이용후생”의 사회개혁사상을 설파했다. “열하일기”는 선비 박지원의 “동심의 세계”였다.

1920년대 중국의 선비 구추백(瞿秋白)은 “어향기정”(俄乡纪程), “신어국유기”(新俄国游记), “적도 심사”(赤都心史)를 집필했다. 구축 백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조간신문”(晨报)의 기자 신분으로 당시의 모스크바를 견학했다.

구추백은 “어향기정”의 서문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나는 환경의 변화를 갈망하였다. 개성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나는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였다. 중국 사회의 새로운 생존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한 푼의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미래의 생명과 생명의 미래는 나로 하여금 부득불 현재의 고통을 인내하게 하였다. 눈물을 머금고 잠시나마 낡은 사회를 리탈하게 하였다.” 
(我要求改变环境,去发展个性,求一个“中国问题”的相当解决。
略尽一分引导中国社会新生路的责任。“将来”里的生命,“生命”
里的将来,使我不得不忍耐“现在”的隐痛,含泪暂别我的旧社会)

구추백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무한한 동경심을 가졌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드팀없는 탐구열에 심취했다. “어향기정”은 중국의 선비 구추백의 “동심의 세계”였다.

비행기가 만여 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기창으로 보이는 바깥 세계는 찬란한 햇빛과 뭉게뭉게 피여난 구름뿐이었다.
“태산에 오르니 세상이 좁쌀알만큼 작아 보이네”
(登泰山 小于天下)
나는 불현듯 옛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개탄하였는가를 뒤늦게 깨달았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나는 저도 몰래 석가여래가 보았다는 “십 방 세계”(十方世界)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두 눈을 비벼가며 두리번두리번 살펴도 석가여래의 “십 방 세계”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나는 미국에 체류하였다. 지난 수년간 매일 머리 들어 미국의 밝은 달을 쳐다보았다. 어느 날 문뜩 이런 시구가 떠올랐다.
“미국의 달은 밝기도 하다네. 그러나 달 하나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네. 밝은 쪽은 천당이라네. 어두운 쪽은 지옥이라네.”

2005년 4월 나는 불야성을 이룬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편에 탐승했다. 술덤벙 물텀벙 겁 없이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지 꼭 6년 만에 찾아온 귀국행이었다. 6년 전 북경공항을 떠날 때였다. 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석가여래의 “십 방 세계”를 애타게 찾았다. 그것이 어제 일 같건만 어느덧 6년 세월이 흘렀다.

지난 6년간 나는 고된 세월 속에서 불현듯 육안의 “십 방 세계”를 찾았다. 그러나 석가여래가 보리수 아래서 “대각”(大觉)을 수련해 성취했다는 심령의 “십 방 세계”는 귀국하는 그날까지 끝내 찾지 못했다.

나는 태평양을 날아넘는 귀국길에서 문뜩 불경을 수련하는 스님들이 즐겨 외우는 한마디 경구가 떠올랐다.
“모든 인간에게는 천국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가 주어졌다. 그러나 같은 열쇠로 지옥의 문도 열수 있다.”

불교의 천국은 극락세계를 뜻한다. 그러나 살아서는 갈수 없는 곳이다. 죽어야만 갈수 있는 곳이다. 죽어서도 보살이 되여 열반
에 들어야 극락세계로 갈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 수련의 극치를
“위 중생 고위 보살”(为众生故为菩萨)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는 극락세계가 없다. 오직 천당과 지옥만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선택을 받은 자는 죽어서도 천당으로 갈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저주와 버림을 받은 자는 죽어서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는 극락세계가 없다. 오직 천당과 지옥만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축복과 선택을 받은 자는 죽어서도 천당으로 갈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저주와 버림을 받은 자는 죽어서도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무엇 때문에 부귀한 자는 하느님의 축복과 선택을 받았는가? 무엇 때문에 빈한한 자는 하느님의 저주와 버림을 받았는가?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충성스러운 기독교들에게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선물하였는가? 천당과 지옥은 따로따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불가분의 하나였는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비행기는 한점의 불꽃이 되요 동녘을 향해 날아갔다.
“머리 들어 밝은 달 쳐다보고 고개 숙여 고향땅 그리워하네” 
타향살이에 지쳐버린 나는 귀국길에서 또다시 시성 이태백의 “오언절구”를 떠올렸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다년간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2005년 미국에 체류. 현재 자유기고인으로 활약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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