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메리카 견문

 

우리 일행은 5월 8일 오후 뉴욕의 케네디공항에 도착했다. 와 경국(王庆国) 단장의 인솔하에 순조롭게 입국심사에 통과되었다. 당시만 하여도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이여서 중국인에 대한 입국심사가 별로 까다롭지 않았다.

대형 관광버스가 공항 입구에서 우리 일행을 대기하였다. 중국인 가이드 마빈(马斌)이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일행은 명의상 미국콜롬비아텔례비죤방송협회의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실상은 뉴욕에 자리 잡은 중국 인력 행사에서 조직한 미국 관광팀이었다

40대 후반의 마빈은 고향이 중국 산시 성 태원이었다. 1970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감숙성의 오지에서 지식청년생활을 하였다. 1977년 그는 서남 정법대학(西南政法大学)에 진학하였고 졸업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87년 그는 공비류학생으로 미
국 컬럼비아대학에 파송되었다. 이미 법학석사학위를 수여받았고 미국 영주권도 취득하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중국인 관광팀을 안내하는 전직 가이드로 뛰고 있었다.

“나는 1970년대에 지식청년으로 감숙성의 오지에서 생활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세월이 억울했다. 1980년대 말에 나는 국비류학생으로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당시 나는 만인이 선망하는 행운아였다. 지금 나는 중국인 가이드로 하루하루 빡빡한 일정을 뛰고 있다. 그래도 삶의 보람을 느낀다. 이곳은 별다른 구속이 없다. 특별한 규제도 없다. 나는 여태껏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마빈은 열띤 목소리로 흥겹게 연설했다. 그러나 나는 도리여 오리무중에 빠졌다.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한 마빈이 무엇 때문에 여행사의 가이드로 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장성 뷔페(长城快餐)란 헌 수판이 걸린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뉴욕관광에 나섰다. 첫 코스는 뉴욕 맨해튼의 시대 광장이었다.
각종 네온등이 밤거리를 대낮같이 밝혀주었다. 끝 모르는 인파가 홍수같이 밀려왔다. 각양각색의 피부색에 각양각색의 복장, 각양각색의 표정에 각양각색의 언어.
“아니?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다채로운 것이었구나"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안사장님과 함께 

사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북경의 왕부정 거리나 상해의 남경로에서 바글바글 끓어대는 인파를 목격했다. 중국인 특유의 씨글벅쩍한 전경에 눈시울이 시리고 두 귀가 먹먹했다. 그러나 경악하는 마음은 별로 없었다.

밤 9시경에 우리 일행은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 청사”의 110층 옥상에 올랐다. 불야성을 이룬 맨해튼의 야경에 저도모르게 “야-호-”가 입 밖으로 튕겨 나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별난 곳도 다 있지?”
칼날같이 우뚝우뚝 솟은 빌딩들이 주옥같은 령롱한 불빛을 토했다. 빌딩 숲 사이로 꿈틀거리는 불줄기는 흡사 거대한 불용을 방불케 했다. 밤하늘의 황홀한 은하수가 고스란히 지상에 드리웠다. 불현듯 “천하리 밤의 이야기”가 상기되었다.

다음날 오전 8시. 우리 일행은 “국제텔례비죤다큐프로평의회”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장에는 으레 세계 각국에서 모여온 방송인들로 대성황을 이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일행뿐이었다.

60대의 미국인 남자가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체크무늬의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미국인 남자는 콜롬비아텔례비죤방송사의
유명한 앵커였다. 그는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2시간의 특강을 준비했다.

1990년대 중국의 텔례비죤방송사업은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미국 콜롬비아 방송 협회는 중국 문화부를 통해 뉴욕에서 개최되는 “국제텔례비죤다큐프로평의회”에 특별히 중국 대표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 대표단은 근근이 평의회를 견학하는 자격만 가졌다. 사실상 당시만 하여도 중국에서 제작된 텔례비죤다큐프로는 프로젝트의 설정, 후기 촬영과 편집에서 기술적인 기량이나 예술적인 품위가 선진국에 비해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찰스 케네디로 호칭되는 미국인 앵커는 미국인 특유의 제스처를취했다. 테이불위에 엉덩이를 비스듬히 붙이고 연설을 했다. 질근질근 내처 껌을 씹어댔다. 마빈이 미국인 앵커의 연설을 중국어로 열심히 통역했다. 나는 미국인 앵커의 거만한 자태에 괜스레 모멸감을 느꼈다. 국내에서는 정중한 모습으로 특강을 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였다. 청중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특강을 청취하는 것이 례의였다.

그러나 미국인 앵커는 우리 일행에 대한 그 어떤 무시나 기시가다분히 비쳤다. 특강을 청취하는 동안 내내 심기가 불쾌했다.

이날 우리 일행은 일본 NHK 방송사에서 제작한 다큐 프로를 
시청했다. 1970년대 일본의 어느 벽촌에 빈한한 벙어리 부부가 있었다. 그들 부부는 청각장애가 없는 자식을 낳아 열심히 키워 대학에 진학시켰다. 방송사는 전후 13년간 벙어리 부부 일가를 끈질기게 추적하며 생생한 생활상을 비디오로 기록했다.

이날 밤 우리 일행은 대회 주최 측에서 조직한 “디너파티”(晚宴)에 참석했다. 천여 명도 넘는 행사장에는 고급스러운 그린카펫(绿色地毯)가 깔렸다. 원형 테이블에는 각종 케이크와 싱싱한 과일 야채가 정교하게 담겨있었다. 입구에 놓인 장방형 테이블에는 수십 종의 양주와 맥주가 정갈하게 진열되였다.

중국의 연회석은 항시 원탁형 테이블에 각종 료리가 산더미처럼쌓였다. 그리고 래빈들은 축사가 끝난 후 시식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날 “디너파티”는 원탁형 테이블이 없었다. 축사와 같은 공식적인 행사도 없었다.

서양인들은 행사장에 마련된 의자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저마다 와인이 담긴 길쭉한 술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왕경군 단장의 지시에 따라 각종 케이크, 과일, 양주, 맥주를 장방형 테이불에 모아 놓고 나란히 마주 앉았다. 나는 마음 같아서는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행사장의 이색적인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다. 꿔온 보릿자루처럼 내처 굿이나 보았다.

5월 26일 오후. 우리 일행은 미국 서부관광을 끝마치고 로스앤젤레스의 힐튼호텔에 투숙했다. 이날 저녁 나는 류기종목사님댁에 전화를 걸었다. 한시간이 훨씬 지나서 류 목사님과 심 사모님이 호텔로 찾아왔다. 이날 엘에이 한인타운의 함흥냉면 가게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류기종목사님은 한국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신학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 미국 두루 대학원(Drew University)에서 “조직신학” 및 종교철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한국과 미국에서 이미 20여 년간 목회를 하였다. 현재 미주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로서 조직신학, 영성신학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예담 교회”(예수를 닮은 교회)의 단임 목사였다.

류 목사님에게는 86세 고령의 로모 홍 씨가 계셨다. 로모  홍 씨는 사실 나의 장모님의 큰언니였다. 나의 장모님은 8남매의 막둥이였고 로모 홍 씨는 둘째였다. 장모님은 광복 전에 중국 하얼빈으로 시집을 왔다. 광복 후 교통이 차단되여 장장 50여 년간 친정에 소식 한번 전하지 못하고 혹독한 마음고생을 치
렀다.

1995년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친척 방문차로 한국으로 갔다. 때마침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류 목사님 일가와 상봉하였다. 장모님과 로모 홍 씨는 손꼽아 반세기 만에 드디여 고향땅에서 뒤늦게 절절한 해포를 풀었다.

그 후 나는 류 목사님과 서신거래를 가졌다. 류 목사님은 나에게 미국행을 권장했다. 나 역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각별한 호기심 때문에 미국행을 꿈꿨다. 그러나 당시만 하여도 근근이 단기간의 미국행을 선망했을 뿐이었다

“미스타 조. 이렇게 만자 반갑네요. 미국 체류기한을 3개월간 더연기할 수 있다지요. 힘들게 얻은 미국행인데 앞으로 몇 달간 더 연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 가요?”
류 목사님은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장했다.

“미스타 조. 목사님의 권유대로 일단 연기하는 쪽으로 스케줄을 잡으세요. 어머님(로모 홍 씨)도 만나 뵙고 인사드려야지요. 미스타 조 미국으로 온다고 어머님이 한 달 전부터 내내 애타게 기다렸어요.”
후리후리한 키꼴의 심 사모님은 가을바람같이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권장했다.

나는 류 목사님 부부와 함께 왕경군 단장을 찾아갔다. 우리 일행은 비록 공무 비자로 입국했지만 미국 체류기한은 6개월로 되였다. 왕경군 단장은 나보고 미국 체류기한이 3개월을 넘지 않으면 별문제가 없다고 허락했다.

이날 밤 나는 류 목사님 부부를 따라 토런스 카운으로 향했다. 널찍한 객실에서 로모 홍 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로모는 가벼운 분단장을 하였다. 그러나 주름 잡인 얼굴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난 세월의 흔적을 싶게 찾아볼 수 있었다.

로 모 일가는 “6.25”전쟁이 결속된 후 원인도 모르게 “남로당, 북로당”을 색출하는 정치 풍파에 연루되여 이곳저곳으로 쫓겨 다녔다. 결국 1970년대 초 생계를 위해 부득불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했다.

“조 서방이라 했지. 아무튼 미국에 잘 왔어. 이렇게 보니 사진보다 훨씬 미남이여. 미국 생활 무척 힘든데 멀쑥한 조 서방이 잘 견디려나 걱정이여.”
로모 홍 씨는 첫마디부터 조 서방이라고 친근하게 감싸주었다. 나는 큰절을 올렸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마련해준 선물도 드렸다.

다음날 나는 “예담 교회”로 나갔다.
“조 서방. 미국 왔으면 교회에 꼭 나가야 해. 그래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성사되는 거여. 내말 명심하고 내일부터 당장 교회로 나와.”
로모 홍 씨는 나를 붙잡고 무작정 교회로 이끌었다.

교회당은 푸른 잔디가 가쯘하게 다듬어진 산언덕에 자리 잡았다.주변에 울긋불긋 피여난 장미꽃 화원이 무척 눈길을 끌었다. 교회당 앞의 널찍한 공터에는 테니스장과 롱구장이 있었다. 100여 대의 차량을 용납할 수 있는 주차장도 있었다.

이날 목회가 끝난 후 신도들은 함께 모여 식사를 하였다. 류 목사님은 나보고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몇 달간 신학공부를 할 것을 권장했다. 사실 나는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미국행을 꿈꾼 후 신학공부에 무척 흥취를 가졌다. 나는 인간의 신앙심에 대한신학의 심오한 철학적 해석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툭-툭- 떨어봐도 호주머니에는 겨우 300달러 미화밖에 없었다. 그러니 배포유하게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간 미국을 두루 견학하며 이런 직감을 느꼈다. 이곳은 피타는 노력이 없이는 근근히 미화 1달러도 스스로 호주머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의 실상이었다.

나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자면 직장부터 구해야 하였다. 직장이 있어야 생활비가 마련되었다. 생활비가 마련되여야 비로소 나름대로의 계획을 작성할 수가 있었다.

“미스타 조. 내일 기독교방송사에 가보시지요. 방송사의 박사님은 경남 출신으로 나와 고향 친군데요. 방송사에서 몇 년 근무하면 영락 없이 영주권을 해결할 수 있어요.”
윤 아브라함 장로가 나의 의향을 문의했다. 50대 후반의 윤 아브라함 장로는 신장이 180미터를 넘겼다. 얼핏 보아도 남남북녀를 상기시키는 한국인 기질의 미남형이었다.

“미스타 조. 기독교방송사 취직은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 예요. 다시 다시 심사숙고해요. 일단 들어가면 몇 년간 꼼짝도 못 하고 발목이 묶여요.”
돌아오는 길에 류 목사님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실 나는 당시 기독교방송사 취직이나 신학공부를 두고 별로 깊은 고민을 할 여유도 없었다. 주어진 기일은 근근이 3개월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시초에 꿈꾸었던 미국행의 염원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앞을 내다보고 뒤를 돌아 보아도 3개월간의 단기 체류 기간은 너무너무 짧았다. 그만큼 너무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다.

미국의 현실은 냉혹하였다. 내가 꿈꿨던 “장미꽃 미래”는 허황한물거품으로 되었다. 미국은 어제를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일을 살아가는 나라도 아니었다. 미국은 단지 오늘을 살아가는 나라였다. 어제 성취하였던 "아메리칸드림"은 새날이 밝아오면 어김없이 역사 스토리로 자취를 감추었다. 내일에 성취할 "아메리칸드림"은 그림 속의 빵과 같이 굶주린 자의 헛된 환상만 불러올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성취한 "아메리칸드림"은 굶주린 자에게는 빵을 안겨주었다. 가난한 자에게는 달러를 안겨주었다. 유능한 자에게는 재부를 안겨주었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권력을 안겨주었다. 탁월한 자에게는 정치를 안겨주었다.

며칠 뒤 나는 심 사모님의 소개로 “코레아 쇼핑 무역회사”의 심사장님과 대면했다. “코리아쇼핑 무역회사”는 태평양 연안의 “이스트 롱비치”(东海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심사장님은 한국 서울 출신이었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고1987년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1994년부터 중국 제품을 직수입해 도매하는 “코레아 쇼핑 무역회사”를 경영했다. 1999년 “코리아쇼핑 무역회사”는 하루 평균 2개 컨테이너 물량을 소화하는엄청난 규모의 도매회사로 확장되었다.

“미스타 조. 저의 회사로 나오세요. 중국에서 기자로 근무하셨다지요. 그만큼 넉넉하게 챙겨드릴게요. 어때요? 미스타 조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출근이 가능한데요---”
40대 중반의 심사장님은 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사실 심사장님은 남다른 계산이 있었다. 중국 출신인 나는 한국어에 익달했다. 중국인과의 국제 장거리전화 통화도 편리했다. 또 중국 문자로 서류를 작성하는 작업도 가능했다. 이래저래 심사장님은 나에게 눈독을 들였다.

“미스타 조. 심사장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목사님과 저도 한시름 놓게 되고요. 더구나 어머님(로모 홍씨)이 미스타 조를 무척 걱정하고 있어요. 저 역시 미스타 조 많이 걱정돼서 그래요.”
사모님은 동정 어린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심 사장님과 심 사모님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코리아
쇼핑 무역회사”의 직장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길어야 3개월이면 끝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결국은 6년이란 길고 긴 직장 생활로 연장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3. 고달픈 역사 공부

 

로스앤젤레스의 올드타운(旧城)에는 올림픽대로가 동서로 길게는 결 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미국 속의 한국” 엘에이 한인타운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매달 35달러를 지불하고 올림픽대로 6가(六街) 부근에 싱크대와 화장실이 딸린 렌트방(出租房)을 구했다. 렌트방은 타운하우스 2층이었다. 1층은 30대 초반의 한석준 씨 부부가 어린 딸애 둘과 함께 생활하였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한석준 씨의 자가용에 탑승하여 “코리아쇼핑”으로 출퇴근을 하였다.

매일 아침 6시. 나는 한석준 씨와 함께 출근길에 올랐다. 30여 분을 족히 달려야 직장에 도착했다. 오전 7시에 하루 작업이 시작되었고 저녁 7시에 작업을 끝마쳤다. 오전 10시와 오후 3시경에 15분간 “푸드 타임”이 있었고 12시에 30분간 “런치 타임”이 있었다. 저녁 6시부터 7시까지는 "인벤토리 타임"(点库时间)이었다. 하루 동안 출고한 물품과 재고품의 물량을 확인하고 작성된 서류에 사인했다.

“코레아 쇼핑”에는 18명의 한국인 직원이 있었다. 매니저는 미스타 박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이었고 스페인어와 영어를 류창하게 구사했다. 그 밖의 한국인 직원들도 대부분 멕시코. 칠레 등 남미(南美) 출신으로 스페인어에 익달했다. 다만 한석준 씨는 한국 부산 출신이었다. 그는 1990대 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러나 영어 구사는 여전히 서툴렀다.

한국인 직원들은 소매상들이 오다 한(订货) 물품을 물류창고에서 선별하는 작업을 하였다. 나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아 출근 첫날부터 물류창고에서 재고품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시초에 심사장님은 기자 출신인 나를 넉넉하게 챙겨준다고 단언했다. 나 역시 출근하면 중국어 통역이나 중문(中文) 서류를 작성하는 등 사무직을 책임질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코레아 쇼핑”에 새롭게 취직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가차 없이 재고품을 정리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물류창고는 매일 팔레스에 싫여 들어오는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는 품목별로 상품을 분류하여 3층으로 된 물류창고의 선반 위에 똑바로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끝 모르는 작업량 때문에 곁눈 한번 팔새도 없었다. “푸드 타임”이 되여도 허리 한번 변변히 펴볼 겨늘이 없었다. 30분간 “런치 타임”이 돌아오면부랴부랴 식사를 끝마쳤다. 연후에 곁불 내가 확-확- 풍기는 메마른 입안을 아이스 워러(冰水)로 대충 축인 후 다시 작업에 달라붙었다.

하루 종일 7~8미터 높이의 선반 위를 긴장하게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등줄기로 땀 똥이 가 비 오듯 쏟아졌다. 종아리에 무리가 오며 후들후들 떨렸다.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작업복이 흠뻑 젖었다.

“조형. 그만하시고 내려오세요. 인제 퇴근하셔야지요. 첫날이라 많이 힘드시지요?”
갑자기 등 뒤에서 한석준 씨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측은한눈길로 나를 지켜보았다.

3. 안사장님, 사모님과 함께

출근 첫날 나는 장장 12시간 고역이나 다름없는 작업을 긴장하게 소화시켰다. 활 등같이 휘었던 허리를 펴려니 꾸드득꾸드득 뼈마디가 이상한 마찰음을 자아냈다.

“조형. 첫날이라 무척 피곤할 건데요. 며칠만 더 참고 고비를 넘기면 괜찮아요. 저도 시작할 땐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도 벌써 4년째 이 잠을 뛰었어요. 별수 없지요 뭐. 어차피 몸을 혹사해야 돈이 생겨요. 돈이 생겨야 딸애 둘을 먹여살려요.”

퇴근길에 나는 내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집에 도착하자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했다. 하루 종일 먼지와 땀에 질농하게 찌든 몸은 퀘-퀘 한 악취가 풍겼다.

나는 대충 저녁밥을 챙겨 먹고 인츰 잠자리에 쓰러졌다. 씨들 씨들 지쳐버린 전신이 천길 나락으로 떨어졌다.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스르르 잠기가 몰려왔다.

“조형. 준비되셨어요? 교회 나가야지요.”
한석준 씨가 방문을 노크했다. 밤 21시부터 “예닮교회”의 4부예배가 있었다. 그는 나보고 함께 4부 예배에 나가자고 졸랐다.

나는 “예닮교회”에서 처음으로 한석준 씨와 안면을 익혔다. 그는한국어에 익달한 나를 자못 신기하게 여겼다.
“중국에는 김밥이 있어요?”
한석준 씨는 때때로 중국에 대한 이상한 질문을 하였다.

이날 4부 예배를 끝마치고 나는 미화 5달러를 교회에 기부했다.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 23시를 넘겼다. 부랴부랴 다음날 아침밥과 도시락 준비를 마무리했다. 벌써 자정이 다가왔다. 재차 알람시간을 확인했다. 내일도 새벽 5시에는 어김없이 기상해야 하였다. 

며칠 뒤 나는 류기종목사님을 찾았다. 퇴근 후 영어회화학원에 다니려는 의향을 말씀드렸다. 당시 미국정부는 국적을 마다하고무릇 영어가 필요한 이민자에게는 무료로 영어회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미스타 조. 좋은 생각을 하셨어요. 미국에서는 어차피 하루빨리 영어가 통해야 하지요. 그럼 내일부터 4부 예배 안 나와도 괜찮아요.”
목사님은 선뜻이 동의했다. 나는 매주 휴일에는 어김없이 교회로 나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다음날 퇴근 후 나는 저녁밥을 대충 챙겨 먹고 부랴부랴 집문을나섰다. 영어회화학원은 다운타운에(市中心)에 있었다. 버스를 이용하면 15분 거리였다. 영어회화 수업은 밤 21시부터 80분간 진행되었다. 내가 참가한 초급반은 학원이 50여 명이었다. 일색으로 한국인이었다.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두리두리한 몸매에 50대로 엿보이는 한국인 녀성이었다.

수업 시간에 영문 철자법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그녀는 흑판에 간단한 일상회화를 적어 놓고 미국식 영어 발음법만 열심히 가르쳤다.
“왓츠 유얼 내임?”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웨어 두유 고잉?” (너는 어디로 가느냐?”
“디스 이즈 마의 와이프” (이 사람은 저의 안해입니다.)

나는 영어회화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나 영문 철자법은 부득불 독학으로 해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영문 철자법에는 까막눈이다. 그러나 다년간의 미국 체류 생활을 통해 나만의 특유한 노하우(要领)를 갖게 되였다. 나는 자가용을 끌고 각종 도로 표시 게시판을 무난히 해독하며 이곳저곳 부담 없이 다녔다. 

매일 고된 작업이 주마등같이 되풀이되었다. 영어회화 수업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23시를 넘겼다. 잠자리에 쓰러지면 곧바로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갑자기 종아리와 허벅지가 비비 꼬이며 아찔한 경련을 발작했다. 숨 가쁜 통증에 벌떡 튕겨 일어났다. 눈앞에서 타닥-타닥- 불꽃이 튕겼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밤새도록 무서운 통증과 씨름했다. 어느 결에 동녘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세월은 하루하루 유수같이 흘러갔다. 육신의 고통은 차츰차츰 적응되었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은 도리여 매일매일 깊어갔다. 나는 8세부터 누님을 도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구정물을 버리고 부엌에 석탄을 챙겼다. 집 안 청소도 도맡아 하면서 잔뼈를 키웠다. 나는 직장의 고달픈 작업량에 인츰 적응되었다.

그러나 퇴근 후 영어회화학원을 다닌 것 외에 여태껏 신문 한 장도 변변히 읽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이 무작정 겹으로 쌓였다. 육신은 비록 미국에 있건만 마음은도리여 밀폐된 공간에 감금되었다. 알수 없는 공포심에 신경이 칼날같이 곤두섰다.

내가 소망했던 "아메리칸드림"이 이런 현실일 줄은 꿈에도 미처생각지 못했다. 내처 이렇게 지탱하려니 내 마음이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다.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무슨 책이라도 집어 들고 읽고 싶었다. 그래야 불안한 마음을 다소 안착할 것 같았다. 그래야 다소 마음의 안위를 받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교회 예배가 끝난 후 류 목사님에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목사님. 혹시 어디서 미국 역사를 기술한 서적을 구할 수 없을 가요? 저 미국 역사 공부를 하려고요."
“미스타 조. 올림픽대로 1가에 올드 북스(旧书店)가 있어요. 이곳 한인들을 상대로 오픈한 책가게예요. 비록 출간된지는 오래지만  전부 한글본 책들이에요. 한번 찾아가 보세요.”

나는 곧바로 “올드 북스”로 향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3부작 저서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미래쇼크”를 선정했다.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저서 “미국사”도 골라 잡았다. 이날부터부득불 취침시간을 한시 간식 줄였다. 고달프게 시작한 미국 역사 공부는 그 뒤 달포가 넘게 연장되였다.

중국의 풍운 인물 모택동은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호남아가 아니다.”(不登长城非好汉)라는 호방한 글귀를 남겼다. 만리장성은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석조건물이었다. 지난 5천 년간 만리장성은 “우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井水不犯河水)라는 중국의 치국 이념을 지켜왔다.

1949년 모택동은 천안문 성루에서 전 세계를 향해 장엄하게 선언하였다. “중국 인민은 드디어 일 떠 섰다.”(中国人民从此站起来了) 중국 정치의 1번지는 만리장성에서 천안문 광장으로 바뀌였다. 천안문 광장에는 사회주의 새 중국의 고고성을 울린 성스러운 천안문 성루가 있다. 빼앗겼던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은 모주석 기념당과 혁명 열사 기념비가 있다. 중국공산당의 특유한 치국 이념을 실천한 웅장한 인민 대회당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신대륙의 부유한 나라 미국에는 유구한 역사를자랑하는 만리장성이 없다. 세계 제일의 천안문 광장도 없다. 하지만 맨해튼의 숲을 이룬 마천루는 세계 제일의 재부를 자랑하였다. 뉴욕의 리버티섬에 우뚝 솟은 녹색의 자유 녀신상은 자유와 평등 민주를 위해 싸웠던 아메리카합중국의 치국 이념을 지켜왔다.

버지니아주 워싱턴 DC에는 세계 정치 일번지로 각광받는 백악관이 있다. 법치주의 정치 기틀을 잡아준 연방정부 국회의사당이 있다. 아메리카합중국을 독립시킨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석조 기념탑이 있다. 미국의 건국리념을 세상에 알린 “독립선언문”의 저자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기념관도 있다. 역사 이래 흑인 노예제를 철폐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기념관도 있다. “세계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휘두룬 국방부청사도 있다.

미국은 1776년에 영국 식민지 통치에 반기를 들고 “독립선언문”을 선포했다. 그 후 오늘날 세계 제일의 부유한 나라로 성장하기까지 불과 200여 년밖에 안 되였다. 그러나 200여 년의 역사속에는 피눈물로 얼룩진 식민지 이민 역사가 숨어있었다.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피비린 살육과 정복의 역사가 숨어있었다.
앙드레 모로아의 저서 “미국사”는 아메리카합중국의 이민 역사에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1587년 영국의 탐험가 월터 롤리 경이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아노크 섬에 150명의 유럽 이민자를 남겨놓았다. 그중에는 17명의 녀성도 포함되었다. 이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성큼 뛰어든 최초의 유럽 이민이었다.

그 후 4년이 지난 1591년 식량을 적재한 선박이 로아 노크 섬에 당도했다. 그러나 당시 이 외딴섬에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심지어 인간의 거주 흔적마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15년이 지났다. 1606년 143명의 영국 이민자들이 크리스마스 무렵에 런던항을 출발했다. 일행은 망망한 대서양에서 5개월이 넘도록 극심한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다 드디어 버지니아 남단의 체사 비크 만에 상륙했다.

일행은 제임스 강 주변의 늪가에 허름한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가난한 어촌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 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날로 가심해지는 기아는 “제임스타운”의 이민자들을 사정없이 죽음에로 내몰았다.

다시 4년 세월이 흘렀다. “제임스타운”은 1610년에 새봄을 맞이했다. 그러나 당시 “제임스타운”에는 해골같이 앙상하게 메마른 60여 명의 이민자만 남았다. 이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목숨을 잃은 이민자들의 무덤을 파다 남은 생존자들이었다. 이들은 다행히 델라웨어 총독이 식량과 약품을 송달하였기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후 “제임스타운”은 마침내 아메리카 신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문명의 역사를 개척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메리카 이민 희망자들을 위한 지식”이란 저서에서 1760년대 아메리카신대륙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이곳에는 유럽의 빈민처럼 가난한 사람이 없다. 유럽의 부자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행복하고 평범한 계급들이다. 대지주가 별로 없다. 그 대신 소작인도 거의 찾아볼수 없다. 이곳의 이민자들은 자기가 소지한 토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수공업 또는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럽처럼 회화나 조각. 건축. 예술품에 고액을 지불할 부자가 없다.

이곳의 관직과 직장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보다 낫은 관직을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지 않는다.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 이곳은 
일하는 나라이다. 프랑스인들이 선동하는 <보물 나라>가 아니다.” 

지난 150여 년간 아메리카 신대륙은 평범한 이민자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영국정부는 “태양이 지지 않는 영제국”의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여 날뛰었다. 당시 영제국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타깃으로 피비린 식민지 전쟁을 위해 막대한 재부를 갈취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에 극심한 불평등이 도래했다. 영국정부는 “인지세법” “타운 센트 법” “차세 법”을 제정해 신대륙의 이민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는 법이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이민자들은 가혹한 식민통치에 끝내 반기를 들었다. 1776년 7월 4일 아메리카 신대륙은 “독립선언문”을 선포했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상식”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하나님은 영국과 아메리카 사이에 대서양을 만들어 서로 멀리 떨어지게 했다. 이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통치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메리카 신 대륙이 잉글랜드 섬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토마스 제퍼슨이 집필한 “독립선언문”은 이렇게 기술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인간은 창조자로부터 부여된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이다. 식민지 대륙회의에 참석한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표들은 식민지 연합이 천부의 권리에 의해 독립된 자유국가임을 장엄하게 선언한다.”

18세기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세계는 의연히 보수적인 왕정 통치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아메리카합중국은 유럽의 보수적인 왕정 통치를 철저하게 타파하고 국민국가의 새로운 역사시대를 개척했다.

1789년 1월 아메리카 신대륙은 역사 이래 유례없는 “국민투표”총선 제도를 실시했다. “독립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이 만장일치의 “국민투표”로 아메리카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3개의 독립된 주가 하나로 뭉쳐 아메리카합중국을 출범했다. 아메리카합중국은 랩법, 사법, 행정이 분리된 “3권 분립”의 정부를 구성했다. 아메리카합중국에 가담한 13개 주는 독립된  입법권과 재정권을 소지했다.

아메리카합중국의 출범은 당시 유럽의 정치인들과 지성인들에게 역사는 과거의 “왕정 통치”시대에서 새로운 “국민국가”시대에로 진입하였다는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1797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8년간의 대통령 직무를 결속 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아메리카합중국의 미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부여했다.
“새롭게 출발하는 연방은 반드시 유지되여야 한다. 기존의 헌법과 정부는 반드시 존중을 받고 복종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동족상잔의 잔혹한 “남북전쟁”은 아메리카합중국을 거침없이 파국의 위기로 몰아갔다. 1861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파국 일로에 직면한 아메리카합중국을 사경에서 구출했다. 역사 이래 실현 불가능한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제도”의 폐지로 인해 불행히 피살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역사 이래 “노예제도”를 폐지한 새로운 문명국가로의 도약을 실현하였다.

“남북 전생”이후 미국은 “철도의 황금시대”를 맞아 산업국가로 급성장하였다. 워싱턴 DC에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있다. 철도의 황금시대에 미대륙을 질주하였던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역사유물로 이곳에 전시되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아메리카 신대륙을 질주하였던 증기기관차로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 미국의 철도 거두 유니언 퍼시픽 회사와 센트럴 퍼시픽 회사가 설립되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67년 이 두 개의 “철도 거두”는 유타주의 프레몬트 키포인트에서 대륙횡단철도를 관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1900년에 이르러 미국은  이미 32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부설했다. 이는 당시 유럽 전체 철도망을 초과했다. 그리고 세계 철도망의 40%를 점하는 방대한 철도망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외곽지역에는 “헌팅턴 박물관”이 있다. 헌팅턴은철도의 황금시대에 갑부(甲富)로 되였다. 그는 거금을 탕진해 세계 각지에서 대량의 진귀한 문화유물들을 구입했다. “철도왕”헌팅턴의 막대한 재부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도 부득불 헌팅턴의 눈치를 엿보게 하였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을 선두로 하는 유럽의 열강들은 기술과 자본에서 의연히 미국을 앞섰다. 그러나 제한된 자원과 위축된 시장 비좁은 생존공간은 유럽 전역에 날로 가심한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유럽 세계는 마침내 총칼을 맞대는 대외 확장의 피비린전쟁을 불러왔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1939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선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유럽의 패권을 꿈꿨던 독일이 도발한 “대외 확장”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도리여 패전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국토가 동서 두 쪽으로 쪼개지는 비운을 당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전쟁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유럽 세계에 회멸적인 파괴를 초래했다. 그러나 미국은 도리여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유럽 세계를 등지고 어부지리의 횡재를 따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선진기술과 막대한 자본을 끌어들여 유례없는 대규모 생산, 대규모 판매, 대규모 소비를 실현하는 산업경제를 진흥시켰다.

앙드레 모로아는 “미국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1930년을 전후해 미국의 라디오 보급률은 이미 40%에 달했다.자동차는 가구당 1대씩 보급되었다. 80%의 주민들이 이미 전기를 사용하였다. 제조업에서 소비하는 전력은 연간 전력 생산량의 70%를 점했다. 미국은 이미 전 세계 전력 생산량보다 더 많은 전력을 생산하였다.”

1903년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텍사스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14년에 헨리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조립라인"(自动流水线) 신기술을 도입해 단 5분 만에 포드 자동차 한 대를 조립했다. 미국은 새로운 “자동차의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1929년 “대공황”직전까지 포드 회사가 생산한 자동차는 당시 전 세계 자동차 생산량의 “절반 강산”을 차지했다.

1941년 미국은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했다. 그 후 미국은 세인을 경악게 하는 속도로 20만 대의 전투기와 10만 대의 탱크를 생산했다. 1945년 8월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은 산업 경제시대 미국의 능률적인 대량생산과 대량파괴의 피상적인 징표 물이었다.

1945년 미국은 마침내 유럽 열강을 물리치고 경제대국과 군사대국이란 어부리지를 챙겼다. 그러나 세계는 새로운 “냉전시대”가 도래했다. 미국은 베개를 높이 고이고 어부지리의 단꿈에만 심취할 수 없었다. 구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은 미국의 안보를 송두리째 위협했다. 미국은 부득불 “미사일 방어”라는 새로운 “우주전쟁””(星球大战) 시대에 돌입했다. “미사일 방어”는 우주정보통신망을 수요했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군비를 투입해 지구촌 전체를 포섭하는 첨단 테크놀로지 군사정보기술을 개발했다. 이는 산업 경제시대에서 새로운 지식경제시대로의 도약을 시도했다. 결국 미국은 지식경제의 대표적인 징표였던 하이텍 산업(高新技术产业)이 급속하게성장했다.

1950년대 미국은 “3분 된 세계”를 주장했다. 경제발전의 부동한 수준에 따라 “선진국”, “발전도상국”, “후진국”으로 획분했다. 지식경제 시대에 “후진국”은 기본적인 생산 자료를 제공한다.“발전도상국”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다. “선진국”은 지식을 창조적으로 이용해 새로운 재부를 획득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저서 “제3의 물결”은 “3분 된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해답했다.
“이른바 후진국이란 제1물결의 농업경제 국가이다. 발전도상국이란 제2물결의 산업 경제 국가이다. 선진국이란 제3물결의 지식경제 국가이다. 제2물결의 산업 경제는 토지, 노동, 자원 등이 생산요소로 되였다. 그러나 제3물결의 지식경제는 데이터(数据), 정보, 이미지, 심벌(符号), 문화, 이데올로기, 가치관 등 모든 지식이 생산요소로 되였다.

제2물결의 산업 경제는 육체노동을 수요한다. 육체노동은 본질적으로 대체 가능한 노동이다. 그러나 제3물결의 지식경제는 전문지식을 구비한 인테리 노동을 수요한다. 인테리 노동은 본질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노동이다.”

당시 미국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산업 경제시대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 굴뚝이었다. 그러나 지식경제시대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공장 굴뚝이 살아진 무공해 녹색 공장지대였다.”

미국의 지식경제는 1950~60년대의 “유아기”를 거쳐 1970년대에 “성숙기”에 들어섰다. 빌 게이츠는 미국의 “하이텍 산업의 아버지”(IT 产业之父)로 불렸다. 1970년대 초 그는 허름한 렌트방에서 6명의 직원을 고용해 “마이크로소프트”회사(微软公司)를 설립했다. 30년 후 “마이크로소프트”회사는 이미 전 세계 하이텍 산업의 거두로 되였다.

지난 30년간 빌 게이츠가 창안한 “윈도스 테크놀로지”는 줄곧 전 세계 하이텍 산업의 선두를 달렸다. 선진적인 지식경제는빌 게이츠에게 막대한 재부를 창조해 주었다. 그는 이미 세계 제일의 갑부로 되였다.

빌 게이츠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중앙일보의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였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였는가?”
빌 게이츠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만약 내가 대학 졸업을 위해 4년간 학교 도서실에 있었다면 누군가 이미 나의 발명품을 앗아갔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컴퓨터를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였다.”
빌 게이츠는 지식경제시대에 창조적인 두뇌가 한 장의 대학 졸업장보다 얼마나 값진가를 역설적으로 설명했다.

빌 게이츠는 “생각의 속도”(思维的速度)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일본의 도요타 회사는 무릇 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도요타 차가 달려야 한다는 경영 이념을 갖고 있었다.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회사가 개발한 윈도스 테크놀로지가 영원히 전 세계 테크놀로지의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경영 이념을 주장했다.

이것은 지식경제시대에 <생각의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산업 경제시대 미국에서는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러나 지식경제시대에는 <너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였다.”

1992년 “가난한 천재” 빌 클린턴이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빌 클린턴은 역사 이래 가장 유능한 정치가로 주목받았다. 그는 미국의 하이텍 산업과 뉴욕 월가의 금융 대출을 주도하는 지식경제의 황금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빌 클린턴은 "역사와 희망”(希望与历史之间)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미국은 이미 지식이 개개인이 성공의 기회를 획득하는 관건적인 요인으로 되였다. 현재 미국의 노동자들은 단 1년간 교육받은 직업훈련의 지식 냥이 이미 중학교 수준을 초과했다. 교육받은 노동자의 수입은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의 수입보다 이미 6%내지 12% 증가되었다."

“최근 10년간(1990년~2000년) 미국 GDP 증가의 70%는 하이텍 산업의 새로운 개발에 의탁했다. 그리고 최근 10년간 세계경제 증가의 64%는 미국 경제의 부흥에 의지했다.”

그러나 지식경제의 눈부신 성장이면에는 “경제식민지 시대”라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3분 된 세계”와 예측 불가능한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토플러 현상”(经济危机蝴蝶现象)이 “경제식민지 시대”의 검은 그림자였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지식경제는 선진국 경제를 혹독한 세계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동시에 개발도상국이 부득불 전통적인 경제전략을 페기하도록 가혹하게 압박한다.”

나는 달포가 넘는 미국 역사 공부에 육신을 혹사했다. 나는 신장이 175센티였다. 출국 전 체중은 85킬로를 웃돌았다. 그러나달포가 지난 후 65킬로로 줄었다. 갖고 온 옷가지들이 후줄근한몸매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거라지 세일”(旧货市场)에서 작업복 몇 견지를 선택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심 사모님이 측은한 눈길로 나를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미스타 조. 미국 생활 많이 힘드시죠. 몸 조심하고 밥도 잘 챙겨드세요. 혹시 미스타 조한테 도움 될 것 같아 권장해요. 류 목사님 두루 대학원에서 박사 공부를 시작할 때 이미 38세를 넘겼어요. 학위를 받은 후 한때 <돈이냐? 아니면 명예냐?>를 두고오래도록 고민했어요. 결국은 목회를 선택하셨어요.

미스타 조도 늦지 않아요. 몇 년간 신학공부를 하시고 목회하시면 좋지 않을 가요? 신학공부를 시작하면 지금처럼 <풀타임>(全日制劳动)을 뛰지 않고 <파트타임>(时间制劳动)으로도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면 건강도 챙길 수 있고요. 어때요? 목사님과 한번 의논하시는 것이 좋을듯 싶은데요.”

나는 사모님의 애틋한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러나 “돈이냐 명예냐?”를 두고 고심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절박한 현실에 부닥쳤다. 3개월의 미국 체류기한이 코앞으로 닥쳐왔다. 나는 부득불 귀국 문제를 두고 냉정하게 심사숙고했다.

“돌아가면 당연히 <철밥통 직장>에 얽매우는 거지. 전처럼 소리없이 유순하게 지내야 하는 거지. 근데 내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이것인가? 내가 왜 현해탄을 넘어 미국으로 왔는가? 무엇을 소망했는가? 무엇을 기원했는가? 무엇을 염원했는가?

공자는 40불혹 50지천명(四十不惑五十知天命)이라 했다. 40불혹 50 지천명이란 구경 무엇인가? 나는 왜 40 불혹을 앞두고 우황 좌황 방황하는가? 나는 “완 웨이 티켓”(单程票)을 끊고 인생을 환골탈태하려 했는가? 아니면 “라운드 티켓”(往返票)을 끊고 인생을 유턴(返回) 하려 했는가?

“인생은 도박이다.” 참으로 무식한 말이다. 근데 이 말이 틀렸는가? 인생은 왜 “완 웨이 티켓”(单程票) 인가? 인생은 왜 “라운드 티켓”(往返票)이 아닌가?
“뜻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성취한다.”(有志者 事竟成) 참으로 유식한 말이다. 근데 이 말이 맞는가? 여태껏 나는 무슨 뜻을 지켰는가? 여태껏 무엇을 성취했는가?

구경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체제 내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체에 박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40불혹”을 앞둔 나에게 인생의 “유턴”(返回)이 가당한 것인가? 설사 가 당할지라도 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가?

“춘추전국”시대의 주자 백가(诸之百家)는 “사 계층”(士阶层)에 속했다. 이들은 위로는 종묘와 사직을 고수하는 천자, 제왕, 제후를 섬겼다. 아래로는 농업,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천민을 설득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 계층”은 당연히 자유분방한 사상을주장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참혹한 “분서갱유” (焚书坑儒)를 실시했다. 중국은 “주자 백가”를 상실했다. 중국의 “사 계층”은 사상의 자유를 상실했다. 누누 천년 “수신, 치가, 치국, 평천하”(修身齐家治国平天下)는 “사 계층”의 “부귀영달”의 좌우명으로 되였다.

1949년 모택동이 새 중국을 창설하자 “백가쟁명 백화만발”(百家争鸣百花睁开)의 시대가 도래했다. 노사(老舍)를 비롯한 문단 거두들은 “태평 성가”에 구속되지 않고 새로운 창작의 고봉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대 동란이 도래하자 이들은 “고린내 나는 아홉째"(臭老九)로 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졌다.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실시하자 중국의 “사 계층”은 또다시 “체제내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력을 띠였다. 내가 미국행을 꿈꾼 것도 사실상 당시 이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에게는 “수신, 치가, 치국, 평천하”의 기질과 지모(智谋)가 없었다. 그러나 “독파 만권 서, 하필 여유 신”(读破万卷书下笔如有神)을 내 인생의 지고한 목표로 지켜왔다. 나는 육신이 고달프고 마음이 무거울 때면 항시 도연명(陶渊明)의 “도화원기”(桃花源记)를 즐겨 읽었다. 그때마다 새로운 무릉도원을 꿈꿨다.

도연명은 자유분방한 마음속의 “백록원”(白鹿园)을 지향했다. 나는 불현 뜻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마음속의 “도화원기”를 찾고 싶었다. 마음속의 “백록원”를 찾고 싶었다. 엉뚱한 집념에 발목이묶였다.

미국 체류기한이 3개월에 접어들었다. 나는 브로커(中介人)를 통해 “미국 I D”(身份证)를 해결했다. 유통기한은 10년이었다. 얼마 후 “드라이브라이쎈스”(驾驶证)도 해결했다. 유통기한은역시 10년이었다.

조광연(曹光延)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례비죤방송국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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