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삼 시인과 허창렬 시인은 흑룡강 출신입니다. 허창렬 시인은 재한동포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내셨고 강효삼 시인도 본지와 깊은 인연을 쌓아온 분입니다. 곧 허창렬 시인 타계 3주년이 가까워 옵니다. 두 분 시인님이 이 세상에 남긴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이 평론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1. 서론
2. 아나키즘이냐 다다이즘이냐
3. 청나라 역사
4. 도산농장
5.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 
6. 노스탈지어의 노래
7. 生命의 书는 도대체 무엇인가?
8. 연수땅에 심어놓은 문학의 씨앗
9. 결론

 

고 강효삼 시인 
고 강효삼 시인 

1.  서론:
청마 유치환(1908~1967)ㅡ 그는 대체 누구이며 왜 오늘까지도 우리들은  60여성상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까지 일일히 신경을 쓰고 있으며 지난 30년대 말엽, 그의 5년간의 만주행보(满洲行步)에 이처럼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으며 숱한 의문점들을 낱낱히 파헤쳐 보려 하고 있는가? 그는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을사조약(한일합방) 이후 숨 막히고 지루했던 36년간의 일제통치라는가장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시대를 살아 보지도 못한 우리들로써는 결코 누구 하나 섣뿔리 나서서 쉽게 결론조차 내릴수 없는 현황임에도 불구하고 왜 일부 우리의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두고 애국자이니 친일파이니 왈가불가 아웅다웅 해대고 있는걸가? 
솔직히 좌파이니 우파이니ㅡ지극히 정치적인 경향이나 그런 취향이 없는 진정한 문인이라면 일부러 남의 치부를 들춰 놓고 고개를 기웃거려 가며 낄낄대다가 마치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이나 한것처럼 실리보다 말 공부에 더 열중해대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들은 더 이상 신경을 써야 할 아무런 리유도, 필요조차 없다고 과감히 말하고 싶다. 모든것을 죄다 제쳐 놓고 단 한가지 "망국노"의 설음, 즉ㅡ 디아스포라적인 그의 5년간의 만주생활은 그야말로 그 이후 그의 창작모태와 수많은 창작 산실로 되고 있었으며 또한 수많은 창작속의 모종 동기로도 되였고 새로운 창작기법. 새로운 시적 체계를 완성시키고 있다는데서 우리는 오히려 다행이였다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여 본다. 
동방의 종교학자 마이거스 뮤러(麦格斯 穆勒)는 " 한가지에만 너무 집착하지 마라. 하나만 안다는것은 결코 전부을 모르는것과도 같다"고 설파한적이 있다. 한 사물을 판단할 때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고 안일한 쪽으로 좋다와 나쁘다로 쉽게 단정해 버리는데 물 젖어 있는듯 하다.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하자면 단순히 두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우리 인간들은 모든것을 판별하고 단정해버리는데 이미 습관이 되여 있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꼭 흑암으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어 시비가 너무나도 또렷하고 명백한것처럼 ㅡ 헌데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게 어디 정말로 그러한가? 
누구나 사노라고 사는 삶이 어쩌구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것이 대부분임을 우리는 솔직히 승인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힘 없고 빽 없고 나약한 문인들인 우리들이 만약 그 가혹한 일제통치 시대를 실향민으로, 망국노로 살았다면 과연 친일파였을가 아니면 독립 운동가였을가ㅡ 필자는 그게 오히려 더욱 궁금하기도 하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나 와신상담(卧薪尝胆)은 누구나의 신조 ㅡ 험악한 그 시대를 살아 오면서 아무런 저항이나 반항도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ㅡ또한 현시대를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아오면서 남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판별해 버려는데 습관이 된 사람이라면 애국적인 시는 애국적인 시로ㅡ 친일적인 글들은 친일적인 글들로 ㅡ이제는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 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조용히 권고해보고도 싶다.
한수의 시,  한편의 글을 가지고 친일파이니 애국자이니 목에 핏대를 세워 무작정 떠들어 댄다는건 아무래도 너무나도 큰  무리인것 같다. 솔직히 청마 유치환의 만주기행 이후 그의 삶의 궤적을 아무리 꼼꼼히 들여 보아도 우리는 그가 친일파라는 아무런 흔적을 찾아 낼수 조차 없질 않은가?
반면에 광복 이후 그의 많은 시편속에서는 애국주의 색채가 대부분임이 그래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솔직히 오늘날 고국의 방방곡곡에서 교포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삶과도 너무나도 흡사한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방식을 청마는 그 당시에 벌써 망국이라는 크나큰 슬픔을 안고 피눈물이 나도록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영혼으로 홍진을 겪어 왔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여서는 안될 대목이라고 다시한번 말해두고 싶다.
현재 중국의 흑룡강성 연수현 가신촌에 5년간 정착하면서 완성시킨 청마의 生命的 书ㅡ그것은 분명 아나키즘. 다다이즘. 싫어니즘. 휴머니즘. 등등 디아소포라의 한(恨)과 지성인의 숨막힌 저주와 분노, 희망과 憧憬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오늘 날 우리는 양심적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래야 않을수조차 없다. 이처럼 시야비야 불온한 쟁론임에도 불과하고 구경 무엇이 청마를 우리들의 마음속에ㅡ 저기 저 광활한 만주 벌판ㅡ 狂野에 하나의 바위로 우뚝 내 세워놓고 한폭의 선명한 깃발로 우리들 문학의 하늘에서 펄럭이게 하고 있는가? 그것이 곧바로 청마의 뛰여난 문학 재주이고 재능임을 누구라도 승인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胡ㅅ나라 胡同에서 보는 해는
어둡고 슬픈 무리(暈)를 쓰고 
때 묻은 얼굴을 하고
옆대기에서 甛瓜를 박수어 먹는 니―야여
나는 한궈人이요
할버지의 할버지 쩍 물러 받은 
道袍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
벗으려도 벗을수 없는 슬픔이요
――나는 한궈인요
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요
 (「道袍」,『生命의 書』,1947.6.)

  "도포"전문이다.
  하이데거는 " 우리는 언어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언어를 거쳐서 말한다...우리는 언어가 말하는것을 매일 듣고 느끼고 있을뿐이다..."고 말한적이 있다. 난해한 파편화는 많은 현대 문학의 해체적인 경향과 유사한 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인 경향의 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예를 들어 모더니스트의 단시들은 단어 사용력, 리듬, 이미저리와 문맥에 있어 눈에 띄우는 다양함을 지닌 구절들을 갑작스럽게 병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콜라주 수법을 연상시키는 불연속적인 표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외견상의 파편화(fragmentation)는 어떤 함축된 은유적인 또는 설화적인 구조(엘리어트의 경우 성배 전설과 풍요의식, 파운드의 경우 네쿠이아
(nekuia)의 개념 및 (신곡), 오딧세이와 오비드의 (변용들과의 유사점들)에 근거하고 있는데 ㅡ 이러한 구조는 지엽적인 세부사항들이 지니고 있는 원심적인 경향들을 하나의 정돈된 형태로 조정하고 있는듯 하다.
호(胡)나라는 말그대로 산 설고 물 설은 이방 땅을 가르키는 말이며 비좁게 자리 잡고 앉아 올망 졸망했던 골목길을 상징하는 "호동"(胡同)에서는 서럽게 마주 선 태양마저 먼지를 보얗게 뒤집어 쓴것으로 시인은 묘사하고 있다. /때 묻은 얼굴을 하고/옆대기에서 甛瓜를 박수어 먹는 니―야여/에서 호나라 호인들의 형상은 하도 절묘하여 감탄이 절로 나게도 한다. 다음/나는 한궈人이요/에서 " 한국인"은 일제 통치시대에 나약한 한 선비가 험악한 그 세상에 유일하게 까 밝힐수 있었던 투철한 민족주의적인 의식으로 밖에 볼수가 없으며 /할버지의 할버지 쩍 물러 받은/道袍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벗으려도 벗을수 없는 슬픔이요/는 물보다 진하디 진한 혈육의 정. 즉 ㅡ 끊을래야 끊을수가 없는 자신의 숙명적인 운명을 여과없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 드리고 홀로 묵새겨야 하는 슬픔이며 비애 그 자체를 아낌없이 표현기도 하며 제일 마지막 구절에서/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요/에서 꼬리빵즈(高丽棒子)는 천대와 멸시의 대명사(代名词)로써 망국인의 설음과 비분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고스란히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는것이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이 한수의 시에서 우리는 벌써 청마의 만주생활이 결코 여의 주도하게 선택된것이 아니라 이방땅에까지 와서 악착스레 살아 남아 야만 했던 실향민들의 그 절실한 생명의식과 피에 절고 땀에 젖은 희노애락을 두눈으로 훤히 들여다 볼수 있도록 생동하게 묘사하였음을 우리는 쉽게 알아 볼수가 있기도 한것 같다. 중국말에 백문불여일견(百问不如一见)이라는 한 구절이 있다. 그럼 여기서부터 우리 다 함께 대부분 작품을 만주땅에서 완성하였을 청마 유치환(柳致焕)의 생명의 서(生命의 书)를 한수 또 한수씩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고 허창렬 시인 
고 허창렬 시인 

2. 아나키즘이냐 다다이즘이냐 

1. 다다이즘의 定义
 다다이즘은 모더니즘 사상중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예술관으로써ㅡ흔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과거의 예술과 철저히 단절을 실행함으로써ㅡ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것 같다. 특히 다다이즘은 '파괴'에 가장 큰 비중과 중점을 두었던 사상으로써,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 교육적인 표준을 완강히 거부하고 공격하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던것이다. 특히 극렬한 일부 추종자들과 지지자들은 아예 인류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의 형식과 제도자체에 새롭게 도전하기도 하였던것이다.
한마디로 다다이즘을 가장 특색 있게 특징 지을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곧바로 허무적인 이상주의. 그리고 반항 정신 ㅡ이 두 가지를 실례로 들수가 있는데 이러한 주장과 견해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예술적인 '관례'에 대한 강력한 반대이기도 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일부 다다이스트들은 예전에는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었던 예술 형태를 새롭게 보급적으로 도입하기도 하였으며 양보다는 질을, 질보다는 내포 ㅡ 즉 씨앗이 되고 종자가 되는 핵을 더 선호하기도 하였었다. 그리하여 다다이즘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예술과 삶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고, 관중들은 예술 활동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게도 되였던것이다.
그 당시 동시대의 모든 예술인들은 예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할수 있게도 되었다.

 2. 아나키즘의 整理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어떠한가? 아나키즘은 자연의 질서를 통해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따라서 아나키즘 문학은 자연을 추구 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극히 자연스런 태도로 보고 있다. 한국 아나키즘 문학 역시 이와 같은 자연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작품속에 수용하여 왔던것 같다.알기 쉽게 단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보아도 아무런 무리가 아닐것 같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자연물이 보편적 자연의 의미가 아닌 . 아나카즘적 자연 인식으로 이해 하려면 시인의 아나카즘적인 인식이 명확히 전제 되어야 한다는것이 일반적인 속설이다. 지금까지 유치환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아나키즘적 의미부여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던 원인이 곧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때문이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아나키즘에 대해여 앞에서 이미 여러 평론가 선생님들이 상세히 소개하였길래 여기서는 곰곰히 다시 소개하질 않으려 한다. 다만 다다이즘적 ㅡ 아나키즘적인 삶을 문학적인 삶의 방식으로 지향해 왔고 살아온 青马가 시대 반항적, 자신의 입장에 서서 때론 애국. 간혹 친일이 의문스러운 시 한 두수 썼다는데에 많은 독자들이 다문 얼마만이라도 더욱 많이 이해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글자 더 적어볼뿐이다.

3. 귀차니즘
귀차니즘이란, 만사가 귀찮아서 게으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를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이다. 이것은 '귀찮-'이라는 어간에 '행위, 상태, 특징, ~주의'의 뜻을 가진 추상 명사로 만들어 주는 영어 접미사인 -ism을 붙여 만든 누리꾼들의 신조어이기도 하다.귀찮은 일을 몹시 싫어하고 혼자 노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것이다. 귀차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귀차니스트라고 부른다.
귀차니즘이라는 단어가 이전에도 쓰였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대중화시킨 곳이 곧 웹 만화 블로그인 스노우캣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초에 개설된 DAUM카페 중 하나인 w 모카페의 귀차니즘 게시판을 통해 확산되었다.귀차니즘이라는 단어는 당시 카페 개설자였던 중학생 J모양이 만든 것이다. J양은 미술시간에 배운 다다이즘에서 이즘이 사상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귀찮-을 붙여서 '당당하게 귀찮아하자' 라는 뜻의 적극적인 귀찮음에 대한 사상을 만들었다. 카페는 본래 버디버디 얼짱 카페였지만 카페 게시판의 활성화와 귀차니즘의 대중화를 위해서 카페 개설자는 귀차니즘이라는 새로운 게시판을 따로 만들었고 -나는 오늘 그냥 방에 누워있었다. 왜냐면 귀찮아서 와 같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에 귀찮아서를 넣어 올리 도록 유도하였다. 당시 귀차니즘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초기에는 카페 개설자와 4명의 운영자들만이 예시문장을 올려 귀차니즘에 대해 적극 알렸었다. 카페의 회원들은 약 500여명의  전국 각 지역의 10대들이었는데 이들은 다섯명의 카페 운영자와의 직접적인 채팅을 통해서 카페 가입을 권유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귀차니즘이라는 새로운 단어 수용에도 긍정적이 었으며 사용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귀차니즘 게시판은 활성화 되었고 귀차니즘은 카페 밖으로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던것이다.
유치환의 많은 시들은  대부분 " 생명의지", " 허무" 등의 세계로 많이 파악되여 왔었다. 더불어 " 아나키즘"에 련결하려는 일부 평론가와  학자들의 로고에 필자 역시 다함없는갈채를 보내 드리고도 싶다. 헌데 왜서 " 허무"와 "생명의지"보다  더욱 근접한 그의 디아스포라적인 상처와 향수 ,현실에 대한 지리멸렬한 반항정서를 "다다이즘"으로 연결시켜 연구하려는 학자들은 아직 없는지 필자로서는 괜히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솔직히 청마 유치환의 시를 아나키즘이니 다다이즘이니 휴머니즘이니 귀차니즘이니 등등 많고 많은 니즘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그 당시 우리 민족 삶의 가장 근본적인 삶의 질환의식 ㅡ 즉 망국노와 실향민의 서러움과 애달픔. 그리고 디아스포라적인 회한(悔恨)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을 불안감과 둥둥 떠가는 저 하늘의 흰 구름과도 같은 부표현상(浮标现象 ). 어디에 가보더라도 믿을만한 것은 오직 살아 남아 야겠다는 끈질긴 생명의식이였음을 우선 먼저 이해하여야만 그의 칼처럼 번뜩이는 본능적인 반항정서 ㅡ 즉 무정부주의자의 소심한 행각보다 생명에 대한 열애가 결국은 잃어버린 나라 사랑이였고 민족에 대한 병(病)적인 애착이였음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깨달아 갈수가 있을것 같다 . 

생명의 서(書)
유치환(1908~1967)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존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전문)

 "청마는 사랑의 시인보다는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에 더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의 서(书)”는 그의 시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생명이 부대끼는 병든 상태에서 무생명의 공간,바로 저 “머나먼 아라비야 의 사막”을 찾아간다는것 자체가 역설이다.사멸,영겁,허적 등 관념적 시어이자 사막의 무생명성을 강조한다. 또한 열사의 끝 그 “영겁의 허적”속에 “호올로”맺는 고독은 열렬하다는것,생명 그 “원시의 본연한 사태”를 “회한이 없는 백골”이 될때까지 배우겠다는것에서도 생명에의 역설은 두드러진다. 모든 생명의 본연은 무다.생명의 시작은 죽음의 끝과 이어져있다.그러기에 사멸의 땅 사막에서 근원적생명을 배우려는것이다.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히 새겨진 사막의 적막,그 열렬한 고독의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단독자가 있다.물한줄기찾을수없는 사멸의 사막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 지고 간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있다.그러기에 그의 생명의 서는 생명이 충만한 삶의  삶의 서(序)와 서(誓) 뿐만이 아니라 경전의 이미지 까지도 담고 있다.이렇듯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도 인간의 의지 혹은 정신적인 높이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그를 생명의 시인이라 부르는까닭이고  사막하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것이 때문이다."청마의 시 " 생명의 서"에 대한 정끝별시인의 간단명료한 짧은 해설이다.
별로 거창하지도 않을만큼 소박한 해설이라서 필자가 나름대로 무척 좋아 보이기도 하다. 헌데 역시 디아스포라적인 아픔과 회의(悔意) 노스탈지어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어 읽고나면 뭔가 한 구석이 텅 비여 있듯이 허전하다. 필자가 보건대 망국노의 설음과 실향민의 애환을 모르고서는 아마 청마의 生命의 书를 별도로 해석한다는건 필자가 아무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가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한다.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제일 마지막 연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귀차니즘적인 역설임이 분명하다. 죽은 후에 무엇이 되여 무엇을어찌하리라는 말은 말 그대로 허구인데도 이 구절이 모래 사막과 더불어 시의 내포 ㅡ 즉 핵이 되고 있음은 무엇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것은 이미 선택권이 없는 자의 憧憬이며 현실을 정면 주시하여 난관을 타파하려는것이 아니라 지극히 관망적인 타협의 자세로써 존재감을 내 세울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고 보루였음이 아닐가 짐작된다. 풀꽃은 풀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야 이쁘게 핀다. 그것은 굳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서 라기보다는 악착스레 살아 남아야만 내년에도 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지금까지 다다이스트들은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것을 찬미하였다. 본격주화입마트리스탄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수있는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1920년까지 취리히에서 잡지 "다다"를 발간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 등을 발표했다. 다다미술은 서구미술의 형식을 부정하는 새로운 퍼포먼스, 시낭송 등을 혼합한 연극적인 예술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 반대하는 반언어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여 때로는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와 이미지를 제시하였던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상한 의상을 입고 전혀 플룻이 없는 연극을 한다던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여서 조각작품을 만든다던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판을 벌리고 다 때려부순다든지 했다는거다. 
그렇다면 청마 유치환이 북만주에서 5년간 생활하면서 완성한 " 생명의 서"의 경우는 도대체 어떠할가 ? 다 함께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3.청나라 역사

1.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 궐기
명나라때 만주땅의 제일 큰 지방 할거 세력은 곧바로 철령위(铁岭卫 . 현재의 선양군구에 해당함) 총독을 지낸 고려인 이성량(李成梁1526-1615,자 여계 ,호 인성 ,조선인 '이영'의 후대)이다.  만주 역사는 하도 광범위 하여 여기서 필자는 역사에 밝혀지지 않은 동북왕 이성량과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 努尔哈赤.1592-1643,성씨. 애신각라 ,후금의 제2대 대칸이며 대청국의 건립자,1626년10월20부터 1643년9월21일까지 재위,)의 특수한 관계에 대하여서만 잠간 이야기 하려 한다. 
명조 말엽. 이성량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하면 말그대로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 뜨릴 지경. 일화로 그가 지방 할거세력을 소멸하기 위하여 의무려산( 医巫闾山)을 포격한 설화가 아직도 금주 북진 지방현지( 锦州北镇地方县志)에 그대로 남아 있다.<span style="color: rgb(0, 0, 0); font-family: "Times New Roman"; font-size: 18px; text-indent: 30px;">하루는 빈주(滨州)땅으로 시찰을 갔다가 한산한 길거리에서 웬 거지아이 하나를 주었는데 그 아이가 하도 영리하고 똑똑하여 양자로 받아 드렸다고 기록된다 . 그가 곧바로 누르하치ㅡ후에는 친위병으로까지 키우게 되였고 북경 자금성(紫禁城)으로 황제 알헌하러 갈때도 어김없이 누르하치를 데리고 다녔었다고 하였으니 누르하치에 대한 이성량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우리는 가히 알수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이성량에게는 아들이 무려 여덟이나 되었는데 장자가 곧바로 이여송(李如松) . 차자가 이여백(李如柏), 이 두 인물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지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격 ㅡ김응서장군이 소서비의 목을 친후 평양성을 함략시켰던 그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현지에 따르면 어느 날. 이성량과 누르하치가 한가하게 대담을 너누던중 이성량이 자랑 삼아 " 나의 발 바닥에는 동전만한 기미가 두개나 있다" 고 하자 누르하치는  " 나의 장딴지 부근에는 검은 기미가 일곱개나 된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황제가 될 "칠성별"임을 알아 차린 이성량의 눈빛이 문득 살기로 번뜩이는것을 눈치 챈 누르하치가 그 길로 야밤도주. 추병들을 따돌리려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마지막에 현재 요녕성 신빈만족자치형 백기향 부근에서개의 도움을 받아 구사회생ㅡ그후 누르하치는 후손들에게까지 절대로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법령(法令)까지 내세웠다는 후설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려 하는것은 명나라 말년에 료동반도에는 조선인이 아주 많았다는 그 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우선먼저 일제시기 말대황제 부의가 세웠던 만주국(满洲国)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자
2.인구 밀도와 주요 도시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만주국의 인구는 3,088만명, 1가구당 평균 인원은 6.1명, 남녀 성비는 122:100로 추정되었다. 남성 인구가 많은 이민 국가의 측면이 강했다. 일본 식민지의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고, 대만인도 5,000명이 이주했다.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만주국(헤이룽장·러허·지린·룽장·안둥)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이었다. 인구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계의 만주인 가운데에는 68만명의 조선족도 포함한다. 또한 도시 지역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민족인구 수비율 만주인(한족·만주족·조선족)30,190,000명97.8%일본인590,760명1.9%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98,431명0.3%1940년 주요 도시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통계의 주체에 따라서 수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 인구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도시 인구수 잉커우(营口)119,000명 또는 180,871명
1940년펑톈(奉天)339,000명 또는 1,135,801명
1940년 신징(长春)126,000명 또는 544,202명
1940년 하얼빈(哈尔滨)405,000명 또는 661,948명
1940년 다롄(大连)400,000명 또는 555,562명
1939년 안둥(安东지금의 단동)92,000명 또는 315,242명1940년 지린(吉林)119,000명 또는 173,624명
1940년 치치하얼(齐齐哈尔)75,000명

3.민족구성
만주국 시대의 공식이념인 "민족협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역사적인 만주의 이질성, 즉 만주족·한족·조선인·러시아인·몽고인뿐 아니라, 어룬춘족, 골디(Golie), 나나이족 등 십여 민족집단의 혼재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1]:6 하얼빈에는 50개 이상의 민족집단, 45개의 언어가 혼재하기도 하였다. [1]:6 만어(滿語)라고 불리던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가 사실상의 공용어로서 사용된다. 군·관공청에서는 일본어가 제1 공용어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일본어가 교수 언어로 여겨졌다. 몽골어·러시아어 등을 모국어로 하는 주민도 존재했다.

4.만주국속의 조선인
만주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친일파들은 많은 수가 한국 독립 이후 정부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다음과 같다.
1.백선엽.2. 박정희.3.박창암.4.박승환.5.이선근.6정일권.8.최규하.9김석범

5. 일본인 이민자 수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만주에는 59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중 10만명은 농민이었다. 잉커우의 인구의 25%가 일본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500만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다. 이같은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일본군이 동해와 황해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자 중지된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하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본에 귀환한다

6. 闯关东
한족들이 동북땅에 조금씩 들어와 살수 있었던 시기는 아마도 300여년전 건륭황제때인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청나라 말엽까지 불과 7~8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관내의 한족들이 가뭄에. 자연재해에 살길을 찾아 관동(关东)쪽으로 들어오다 산해관 역참에서 청군에 잡히기 하면 목을 잘랐다는 기록들이 아직도 여러 곳에 명확하게 적혀져 있기도 하다. 

7. 기타
1931년 일본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한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溥仪ㅡ푸이)를 황제로 내세운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된다.원인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19일 ,선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를 체포한 뒤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화민국이 이 지역들을 넘겨 받았기 때문이였다.
만주국의 영역은 한반도 및 중화민국, 소련, 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의 괴뢰정권)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강덕제(푸이)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그런 국민국가였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실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32년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하여 일본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으로 인한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명. 청조 두세대에 걸친 만주의 진정한 역사기도 하다. 보시다 싶이 오족협화에는 버젓이 조선인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 만주국 국내에는 100여만명의 조선인들도 선통제의 국민으로 살고 있었던것으로 집계된다. 그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1500천만도 채 안되는 정도였다면 거의 10분의 1의 조선인들이 만주국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격 ㅡ거의 몇백년간 우리 민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과연 우연이였을가 필연이였을가? 지금도 중국 55개 소수민족중에는 200여만의 조선족 동포들도 살고 있는데 이 땅이 낯설고 생소하면서고 더없이 익숙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가?

4.도산 농장
(1) 연수현 조선족 100년史 
동경 128도. 북위 43~45도에 위치한 흑룡강성 연수현은 백년전까지만 하여도 교통이 불편하고 인적이 드문 척박한 땅이였다. 조선이주민들이 빈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수전농사 일궈서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대량 이주 정착하게 된 곳 ㅡ 2005년, 흑룡강성 연수현에서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된 조선족 역사서적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를 출간한적이 있다. 대략 6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은 중앙민족대학 중국민족이론 민족정책 연구원 원장 김병호교수가 중심이 되어 씌여 진것이다. 
머리말에서 김병호교수는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문자로 출판되는 한 현의 조선족 력사서적”이라고 언급하고 나서 “몇십명으로 구성된 편찬위원들은 5년이란 기나 긴 시간을 걸쳐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고 취재를 하여 만들어진 책”이라고 집필과정을 간단히 밝히기도 하였다. 
더불어 김병호 교수는 “중국 조선족은 중국혁명투쟁과 동북지역 개척 및 건설에 무수한 피와 땀을 흘렸으며 막대한 희생을 내였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의 사회, 력사적 지위에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말하면서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 편찬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근거이자 증거라는 점에서 매우 보귀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흑룡강성의 동남부 로야령산맥 서쪽 송화강 남쪽에 자리잡은 연수현은 지금도 철로가 없다. 1903년 당시 연수현 중화진에 <김고려> 한 세대가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고, 가신진에 <박고려>, 륙단 릉하에 <곽고려>가 살면서 한인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땅이 척박하고 교통도 불편한 연수현에 조선인이 대량 이주해오게 된 배경은 일제 조선강점과 식민지정책의 영향이 아주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의 소개에 따르면, 토지가 많고 인적이 드물며 일제가 아직 발 붙이지 못한 흑룡강성의 연수땅에 선참으로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대개 조선에서 독립운동이나 의병투쟁에 종사하던 민족의사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2)연수현 조선이주민들의 이주와 황무지 개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말미암아 많은 조선 농민들은 거의 생명의 원천인 토지를 잃게 되었다. 거기에 청정부가 장기간 실시했던 봉금령(封禁令)을 철소하고 황무지 개간을 격려하자 조선의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낯설은 이국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던것이다. 
1930년 당시 조선 이주민 355세대로 1,821명이 거주하고 있던 연수현은 벌은 넓었지만 이들에게 속하는 토지는 거의 없었다. 당시 길림성(吉林省) 정부에서는 조선 이주민들과의 토지매매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부득불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한족지주들의 토지를 소작으로 부치지 않으면 안되였던 실정이였이다. 
<연수현 조선족100년사>는 이 당시의 조선 이주민 이주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놓고 있다. 
1934년 설립된 고려민회의 활동으로 <가신흥농회> 김영창 회장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연수현에서 손 꼽히는 곡창ㅡ 가신농장을 일구어낸 이야기, 1931년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8.15>광복전까지 일제의 강제 이민과 자유분산 이민정책으로 조선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연수현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 과정 등도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소개에 따르면 연수현으로 조선인들이 대량 이주 정착한 시기는 1933년부터 1942년까지의 짧은 기간이라고 적혀 있다. 1934년 연수현에는 조선이주민들의 사무를 자체로 처리하는 조직인 <고려민회>는 연수현으로 찾아오는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주었다. 연수현의 조선이주민 인구를 살펴 보면 1930년에는 355세대 1,821명 이었지만, 1942년에는 2,180세대로 12,060명 ㅡ현재 도합 16개 자연마을(촌)이 있는데 그 구성을 살펴보면, 평안도 출신이 많이 살고 있는 반룡촌(성광), 경상도와 평안도출신이 많이 살고 있는 동명촌(창유광),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조양촌, 석가촌(문화), 우지미, 장흥촌, 화로촌, 함경도 출신이 많은 리가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이민 마을 도산구촌, 태평촌, 경상도 마을 유민촌, 리민촌, 동덕, 태화, 호가촌,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장유촌, 팔달촌, 평안도 경상도 출신이 많이 사는 흥륭진, 양가리, 최가자리 보홍촌, 전라도촌이나 다름 없는 중화진 량지툰 등등 이다.

2. 연수현 신립구 도산농장의 역사
1940년 2월 연수현 조선 이주민 권력가인 신완,신춘 형제는 조선총독부와“만선척식회사”를  끼고 조선으로 들어 가 사람들을 모집하여 연수현 신립구 도산에 집단 이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적극 활동했었다.그들이 신립구를 선택한것은 그곳에 수전을 개간할 잠재력이 많았던것이였다.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두 형제는 조선총독부 관원과 결탁하여 함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에서 “중국 상해 기술이민”을 모집한다는 거짓 광고를 내 붙이면서 가는 곳마다 기만술책을 썼던것이다.
예를 들면ㅡ 중국은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 되기때문에 먹을것이 걱정 없다ㅡ 자기 기술 능력에 따라 몇해만 일하면 돈을 모을수있다ㅡ가는 로자와 첫해 식량을 대여해주니 생활에 걱정이 없다ㅡ등등 이러한 선전은 기아에서 허덕이던 파산 농민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가장 큰 희망이자 크나 큰 유혹이 아닐수가 없었다. 하여 너도 나도 앞 다투어 지원에 나서게 되였다.말 그대로 기술 이민을 모집한다기에 목공, 철공, 건축공, 교원, 의사 등 여러가지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 기술일군들과 많은 농민들이 대량 신청하였다. 결국 신완. 신춘 형제의 속심대로 되였는데 몇달 사이에 벌써 농민 300세대가 거의 모집되였던것이다.그해 3월 한집에 한 사람씩 먼저 선발하여 이주 준비를 실행한다는 명의로 그들 형제는 근 200여명의 조선인들을 끌고 북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근 일주일이 걸려서야 주하,(珠河)즉  오늘의  상지역에도착한 그들의 몰골은 피난민이나 다름없는 몰골들이였다. 완행렬차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한주일동안 배을 곯으며 시달리보니 모두 심신이 지치고 행색이 더없이 초라하였던것이다. 북만주의 3월은 제대로 잔설이 녹질 않아 겨울의 맴짠 추위는 조금 사라졌으나 아침 저녁으로 불어치는 시베리아 찬 바람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홑옷 한벌만으로는 가혹한 봄추위를 견디여야만 하였었다.게다가 여로의 시달림으로 인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큰병을 앓고난 사람들처럼 신체가 모두 너무 허약하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된 고무바퀴 마차에 제각기 허름한 보따리를 주어 싣고 이튿날 밤중에야 목적지인 신립구 도산툰에 도착할수가 있었다.
신립구 도산툰은 연수 현성에서 동북으로 9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경128도 북위 43,45에 위치한 해발 400메터의 높은 산간지대이다.여름이 짧고 가을에 서리가 일찍 내리는 곳에 논을 개간하려고 신완. 신춘형제는 조선이주민을 여기까지 끌어 들였던것이다.
일군들은 몇집이 한곳에 모여 밥을 끓여 먹기도 하고 힘든 일을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가옥을 짓는데 남녀노소가 전부 총동원되였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로동이 힘든데다 매일 뜬 좁쌀과 통강낭이에 소금과 된장만 먹다보니 영양실조로 하여 앓아누워 며칠씩 일을 못하기도 하였다,허나 고향에 두고온 처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이를 악물고 견디여만 하였다.
실농군들은 앞장 서 논을 풀고 볍씨를 제철에 연수벌에 뿌렸다.한편으로는 밭을 개간하여 콩 , 강냉이와 남새를 심을 차비를 하면서 될수 있으면 땅을 많이 부치려고 모두들 갖은 애를 썼었다. 제집이 있으며 땔 나무가 있고 땅이 많으니 많이 심으면 팔자 고칠줄로만 알고 부지런히 일하였던것이다.여름이 되니 산골짜기에 모기가 어떻게나 많았던지 쑥을 얻어 불을 달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모기 성화에 시달리면서도 논김과 밭김을 매며 한알의 곡식이라도 더 거두려고 이주민들은 모진 애를 다 썼었다. 
어느덧 9월이 되였다 그들은 신완 형제를 따라 가족을 데려 오려고 조선으로 떠났다. 이미 이민을 결정했고 또 먼저 가서 집도 장만했고 농사도 지어 놓았으니 가족을 데려 오지 않고는 “만석척식회사”의 빚을 도저히 갚을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하여 신완형제를 따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1,500명이 또 북행 완행렬차에 싣게 되였다,북만의 9월은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산골에 서리가 내리는 날씨다 . 단벌옷을 입은 이민들은 보짐을 풀어 헤치고 이불까지 꺼내 덮어 썼었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얼마나 달려 왔던지 컴컴한 밤중에야 목적지에 겨우 도착할수가 있었다. 보짐을 찾아 들고 제집이라고  찾아 들어 콩기름 등잔에 불을 밝히고 아궁이에다 장작불을 때서야 집안에는 온기가 돌았다.기나 긴 여로의 피로에 다들 인차 잠에 곯아 떨어졌었다.한 밤중에 잠을 깨여 들어보니 승냥이 울부 짖는 소리가 사처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집앞에 심어놓은 콩. 옥수수. 남새들은 제법 풍년였다.먼저 와서 준비한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땅이 흔한 곳이였다.이국 타향에 와서 지은 농사에 드디여 첫 낫을 대게 되였다, 그러나 기름진 땅에서 자란 밭곡식들은 만족스럽게 잘  되였지만 논 농사는 미숙이 가서 청초판이 되고 말았다.논 농사가 이 모양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가야 할지 모두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또다시 시뿌옇게 뜬 좁쌀에 통 강냉이를 대여해 먹지 않을수가 없었다.그때로부터 남자들은 산에 올라가 숯을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제는 조선이주민들이 동녕현 수양진일대 국경선에서 사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일제는 그곳에 사는 조선 이주민 25세대를 도산농장에 강제 이주시켰다.이처럼 도산 농장에 인구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많아지자 중문에다 6년제 공립 국민우급학교를 세우고 학생 200여명을 받아 들여 일제식 세뇌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에서는 일본 성씨로 창씨 개명한 구레야마 교장과 가야마 등 선생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신완형제와 농장에서는 툰에 구장을 두어 마을 행정을 관리하게 하였고 농장엔 다시 관리원,지도원을 두어 농장 사무를 관할케 하였다.그때 형인 유치진을 따라 북민주에 온 청마는  도산농장 관리원 직을 맡았던것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신완형제는 이민 마을에서 농사일을 감독할뿐 아니라 농장원들이 타지방으로 이사 못가게 막았으며 산에서 활동하는 항일부대와 련계가 있을가봐 늘 이주민들의 사상동태와 신원을 감시하는 한편 농장처녀들을 외지총각과 결혼하지 못하게 제도를 세우고 함부로 외출을 못하도록 금기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농장서쪽으로 몇리 떨어진 곳에 전부 무장한 위만 경비병들을 주둔시키고 마을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이주민들을 감시 하였던것이다.
 1944년 까닭 모를 질병이 농장에 돌았는데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었다고 한다 후에야 장질부사란 전염병이였음이 밝혀졌지만 청마도 그때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잃게 된다. 위만 경찰들은 마을과 마을간에 통행금지 시켜놓고 래왕을 아예 못하게 하였다.죽은 사람이 늘어가고 장례도 못 지내지 못하고 그냥 묻을수밖에 없었다.그 몹쓸병에 걸려 원한 품고 쓰러진 원혼들의 무덤이 지금도 가신촌 뒷산에는 총총하다고 한다.그들은 이렇게 빚더미에 눌리워 한평생을 운명에 맡기고 실망속에 살다 원혼이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투항한후 이들도 해방 받았다. 하지만 해방 받은 기쁨도 잠시ㅡ 오래 가질 못했었다.사처에서 토비무리가 우글거려 민심이 황황하였던것이다.농장에서는 인심을 안심시키려고  자체로 마을을 지키자며 보초를 두었다.그러나 토비들은 두번이나 쳐들어와 마을의 물건을 몽땅 털어갔었다.반항하던 몇사람은 놈들 손에 죽기까지 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였다.농장관리원은 이민단 전원을 동원하여 리가점이란 곳으로 떠나갔다.해방과 더불어 신완형제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농장관리원이 이주민들을 끌고 이가점으로 온후 관리원은 그길로  조선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아마 우리가 중국에서 살펴 볼수 있는 청마의 제일 마지막 행보인듯 하다.
 (연수현조선족백년사 제 1편 제 2장 “연수현에로의 조선이주민들의 대량이주와 정착” 의 1 부분 “연수현 신립구 도산농장 이민사”)
만주에 있는 동안에 청마는 북만주의 여러 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거주지 연수를 중심으로 만주벌판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낀 바를 시로 표현했다. 「합이빈 도리공원(哈爾濱 道裡公園)」,「우크라인나 寺院」,「극락사 소견(極樂寺 所見)」,「사만둔 부근(沙曼屯 附近)」,「곽이라사후기행(郭爾羅斯後旗行)」,「빈수선(濱綏線) 개도(開道)에서」, 「오상보성외(五常堡城外)」 등 작품들이 그것이다. 
지명을 시의 제목으로 삼는 것은 청마 만주 기행시의 특징인데 시 제목에 나온 지명을 통해서 청마가 다녔던 곳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즉 청마가 만주에 있는 동안에 연수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하얼빈을, 남쪽으로는 오상(五常)을, 서쪽으로는 곽이라사(郭爾羅斯)를, 동쪽으로는 개도(開道)를 여행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합이빈 도리공원」,「우크라이나 사원」,「극락사 소견」,「사만둔 부근」은 하얼빈과 관련된 작품들이고, 「오상보성외」는 랍빈선(拉濱線)의 중간점에 있는 오상시(五常市)와 관련된 작품이고, 「곽이라사후기행」 시 3수는 당시 빈강성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선에 위치하는 몽골족(蒙古族) 부락에서 본 풍경을 노래하는 작품이며, 「빈수선 개도에서」는 빈강성과 목단강성(牡丹江省)의 경계선에 위치한 조선인 마을과 관련된 작품이다. 61) 유치환,『청마 유치환전집ㆍ3』,

5. 애국자인가 친일파인가?
(1)청마 유치환 시인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하얼빈 연수 땅에서
 청마 기념사업회(회장 김운항)과 회원님들이  청마 유치환의 발자취를 따라 머나 먼 북방 땅 연수를 찾아 오면서부터 필자는 처음으로 청마 가족분들과 만날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청마기념사업회 전임 회장이신 이금숙 회장님의 소개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3년전에도 이미 연수에 다녀갔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필자는 이분들이 오신줄을 전혀 알지를 못하였다.아마도 필자가 심양이란 먼곳으로 이주해갔다가 다시 상지로 돌아 온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였던것 같다.한국문단의 거목이고 생명파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청마 유치환님의 존함은 필자에게도 결코 낯선것이 아니다.그것은 90년대 초엽 그분의 시집 “파도야 어찌라느냐?”를 읽으면서부터 그분의 존함을 익히 알게 된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분께서 1940년 4월부터 1945년 6월까지 필자가 태여나서 자란 연수땅에서 생활한적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여서부터 “연수현 조선족백년사”의 문학인 코너 제일 앞부분에 그 분의 존함을 새로이 별도로 모셨고 2010년, 여러 시인님들과 함께 “중국 코리아 명시정선”을 펴낼 때에도 광복전 만주땅에 거주하였었던 재만(在满) 조선인 시인 명단에 그분의 성함과 시 작품을 따로 편집해 넣기도 하였었다.
허나 그 당시 사료의 부족,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분 가족들과의 상봉이 없었던 등등 여러가지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비하여 그분에 대한 소개가 너무 미홉하였던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대표작은 물론 사진 한장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기에 지금도 아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연수땅에서 그분의 거주지마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여 그분께서 줄곧 도산농장에 계셨던줄로 잘못 알고있었느니 고의적인 외곡은 아닐지라도 명인에 대한 무지였음에 자신을 질타하지 않을수조차 없게 된다. 선인들의 과거를 책임지고 정리한 주요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써 크나 큰 실책이 아닐수가 없었음을 시인하지 않을수가 없다. 청마기념 사업회 회원님들과  함께 청마의 옛 거주지 가신으로 동행하는 뻐스안에서도 여러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그 모든것을 미봉하기엔 남겨진 공백이 이미 너무 큰것만 같았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40년에서부터 1942년까지는 청마 일가족은 연수현 관공서 소재지인 연수가에서 살았었고 1942년부터 1945년 6월까지 3년의 세월을 가신땅에 사시였다고 한다. 만주에서의 5년의 삶(기실은 연수에서의 5년이다.)에 대하여 유치환시인님께서 쓰신 회억록 같은것을 전혀 접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당시 그분의 삶을 추측하여 보노라면 청마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농장을 관리하고 정미소를 경영한 외에 오직 독서와 창작을 위주로 하며 조용히 일제통치시대라는 험악한 세월을 지내신것 같다. 가신 조선인들의 역사를 손금 들여다 보듯이 잘 알고 있다는 몇몇 년로한 로인들마저도 청마 유치환의 이름에 너무 생소해 하기에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수밖에 없질 않은가?
사랑하는 외동아들 일향이를 잃은것이 그를 더욱 과묵한 사람으로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마가 형인 유치진의 위탁을 받고 도산농장 관리원으로 있었을 때에도 마찬가지 삶을 살았던것 같다. 1942년 도산농장 삶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던 곳이다. 무지와 가난과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때마다 청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였으며 무엇을 고민하였을가? 모르긴 하겠지만 청마도 여러 실향민들과 마찬가지로 망국노의 설음과 크나 큰 울분을 디아스포라적인 향수로 달랬을것이고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하지만 농장 관리원이란 그 특수한 신분때문에 그 진실을 제대로 말할수 없었던것이 우리 편집인원들이 도산농장의 이민사를 집필할 때의 가장 어려운 여건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히여도 모든것을 이데오르기식으로 판단하고 판명하는 흑백 론리가 완전히 사람들의 두뇌를 지배하던 시기여서 바른것을 바르게 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다행이  오늘날은 시대가 바뀌여 그 분의 진실을 이제는 마음놓고 천명할수도 있게 되였으니 이 얼마나 크나 큰 진보인가? 비록 가신의  역사에 그분의 이름을 제일 앞자리에 넣지 못했어도 가신땅은 분명 청마의 발자국이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 ㅡ 한 지방의 명망은 흔히 그곳에 살거나 살았던 명인들에 의하며 빛을 발산하게 됨으로ㅡ 이제 연수땅은(가신을 포함하여)분명 한국문단의 거목 유치환시인께서 한시기 거쳐했었다는 단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족히 사람들에게 널리 기억되고 떠 받들려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가신땅은 세인이 다 아는 연수현의 곡창이고 연수현에서 조선족이 제일 먼저 와서 정착하였고 또 조선족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다.연수 현성에서도 백여리길 상거,  그것도 자동차도 통하지 않고 마차들만 다녔던 그 세월에 수많은 이주민들이 남부녀대 죽기내기로 가신농장을 찾았던 제일 큰 원인은 대체 무엇이였을가?힌마디로 개괄하자면 그곳에 농사 지을수 있는 땅이 있었기 때문이였다.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만주땅에 와서 우리 민족이 남들보다 일찍 정착할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발빠른 움직임이였으며 둘째. 떠돌이 이주민들을 안착시킬수 있는 삶의 토대를 마련해준 선구자, 개척자들의 공로가 컸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유치환시인님의 가형되시는 유치진님께서 많은 농지를 사놓고 (처가의 소유)유치환시인님께 관리를 맡기셨는데 이렇게 농사 지을 터전이 있었기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루의 희망을 걸고 너도 나도 먼길을 찾아 왔던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보면  유치환시인의 가족 역시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땅에 와서 정착할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여 주는데 한몫을 크게 한 한  선구자들이라고 감히 말할수가 있을것 같다.그날 청마의 가족들과 함께 일찍 청마가 경영했음직한 정미소 자리에서 이제는 력사같은건 안중에 없다는듯이 오만하게 우뚝 솟은 높은 굴뚝너머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새삼스레 청마가 만약 1945년 6월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과는 어떠하였을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그분께서 떠나신후 불과 두달도 채 안되여 일제의 패망과 함께 그처럼 고대하던 8.15 광복의 날이 왔었고 그리하여 조국을 그리던 수많은 백의동포들이 줄레줄레 귀국길에 오르기도 하였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중도에 다시 되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무정부 상태에서 무법천지가 되여버려 도처에서 비적들이 귀국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재물을 약탈하였기때문이였다.
한때 가신농장의 개척자로 학교를 세우고 광복이 되여 제 멋대로 날뛰는 토비들로부터 적수공권인 동포들을 지키려면 무기가 있어야겠다 생각하고 철퇴하는 일본군 부대에 무기 얻으러 갔다가 왜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아까운 생명을  잃은 김영창의 운명을 례외가 아닐수도 있잖겠는가?
비록 몇십년이 지났지만 어쩜 유치환시인님께서 친형의 위탁을 받아 농장을 관리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실제 주인이나 다름없었고 정미소까지 경영을 하였으니 그도 지주가 되여 투쟁 대상이 되였을것은 불 보듯이 뻔한 사실이기도 하다.는것은 면치 못했을것이다.그렇게 되였더라면 그분은 물론 그분의 가족 또한 얼마나 긴 세월 고통을 감내해야 하였을가? 필자가 볼바에 유치환님께서 고국을 떠나 멀리 만주에 온 목적은 부자가 되여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성씨마저 개변시키려는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하는 적의(敌意)에서였던것 같다.비록 조국과 고향을 멀리 떠나와 있었지만 청마는 늘쌍 조국을 그리워 했고 고향을 그리워 하였다. 연수땅에서 쓴 시 “생명의 서”가운데 있는 “향수”와 “비연과 더불어”라는 이 두수만 읽어보아도 그 당시 청마의 심정을 우리는 얼마던지 이해할수 있게끔 된다.

(2.)유치환 시의 '匪贼'이 항일 독립군?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호북(湖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유치환의 시 <수(首)>의 일부분이다. 
 이 한수의 시가 몰고 온 여파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일파만파인것 같다. 네어버 블로그에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찾아보니 아주 다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몇개를 골라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 <실록 친일파>를 쓴 고 임종국 선생은 글의 서문에서 “유치환의 '수(首)’(<국민문학>, 1942. 3) 역시도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시가 '친일' 시라고 밝혔다. 
임종국 선생은 “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 세력의 총칭이었다”고 했다. 
이에 통영문인협회 정해룡 회장은 ‘청마의 시 수(首) 새롭게 들여다보기-친일은 가라’(<한산신문>, 2004년 7월 9일자)에서 “비적이 독립군이란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일본 정부 문서 보관 창고’에 가서 당시 북만주에서 독립군을 비적이라 했는지, 그때 효수된 머리 두 개는 누구 누구의 머리인지 기록돼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어 그 주장을 입증해야 객관적인 타당성이 확보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비적이 독립군이다’고 애매모호하게 흘리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 글은 ‘비적’이 항일 독립운동가인지 아니면 정해룡씨 주장대로 “글자 그대로 떼 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인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 이를 통해 일제가 북만주에서 단순한 도적 무리를 비적으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비적을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보는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1939년 만주국 만철사원회(滿鐵社員會)에서 발행한 <만주사전>은 '비적(匪賊)'을 시기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비적'은 만주사변 이전인 옛 동삼성(東三省)시대 마적(주로 몽고족)으로 “호자(胡子)·호비(胡匪)·홍발자(紅髮子)”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마적을 ‘비적’이라고 했다. 
한인(漢人)이 만주에 들어와 마적 또는 비적이 되는 연혁을 이 사전은 4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1기는 한인이 몽고족(몽비) 등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의 자위 기관으로서 기마대가 발생한 시기다. 2기에는 마을 주민의 자위기관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을에서 독립된 용병단 형태를 띠는데 마을 방위 임무는 그대로 인수된다. 
1기와 2기의 방위단은 마대(馬隊)를 조직해 만주의 산야에서 활동했는데 부랑성이 강한 청년들이 많이 참가했다. 

▲ 1939년 발행된 <만주사전>에 나온 '비적' 규정 
 3기에 들어서면 1·2기와 달리 식민지 특색이 없고 마적화 돼 소위 토비(土匪)로 바뀌었다. 당시 마적은 모리배 호자(산적), 대가 호자(大街胡子, 도시마적)로 나뉜다. 모리배 호자는 산림을 채벌하면서 주로 여행자를 강탈하는 강도 수준이었다. 대가 호자는 사람을 납치하는 전문 마적들이었다. 
 마지막 4기에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발생한 항일세력들이 ‘비적’의 범주에 들어갔다. 당시 일제와 만주국은 9·18사변(만주사변) 이후 봉기한 옛 동북군계의 항일군(抗日軍)을 병비(兵匪) 또는 정치비(政治匪)로, 토착 종교 세력의 항일군을 종교비(宗敎匪) 또는 회비(會匪)로, 한인(韓人) 민족주의계 독립군을 선비(鮮匪)로, 마적계(馬賊系) 항일(抗日)부대를 토비(土匪)로, 그리고 중국 공산당계 유격대를 공비(共匪) 또는 사상비(思想匪)로 구분했다. 
이는 유치환이 하얼빈 주변에 거주하면서 시 '수'를 지어 비적을 비난한 때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4기에 해당되는 '비적' 규정에는 산적이라든지 도시 마적은 없었다. 
이는 1933년 1월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중공(中共) 만주성위(滿洲省委) 각급 당부(各級黨部)에 보낸 서한 (소위 일월서간(一月書簡))에서도 확인된다.
중국 공산당은 이 서한을 통해 여러 항일부대와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강조했는데, 그 성격을 4가지로 구분했다. 
1. 순수 구 길림군계(吉林軍系) : 장학량(張學良) 휘하 장령(將領; 마점산, 이두, 정초, 소병문, 주제청 등)이 지도. 
2. 왕덕림(王德林) 부대 등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 : 대부분 농민·노동자·소자산 계급으로 구성. 
3. 농민유격대(대도회·홍창회·자위단) : 소자산 계급·지식 분자도 참가하지만 대부분 농민. 
4. 적색(赤色) 유격대 : 공산당 지도 하의 노동자·농민·혁명 병사 등으로 구성
1과 2는 일제 규정에 따르면 병비 또는 정치비이며 3은 종교비 또는 회비가 된다. 4의 경우 공산당 영향력이 강하면 공산비 또는 사상비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토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 독립군을 비적이라 일컬은 자료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30년대 이청천·이범석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도 선비(鮮匪)와 병비(兵匪)로 꼽고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동북 항일연군 제1군 제6사 김일성 부대를 비적(共匪)이라 했으며 32년부터 40년까지 항일 유격대장을 지낸 안상길(安尙吉, 1907~1947) 부대도 비적으로 지목됐다(만주국정황관계잡찬, <비적 동정과 토벌 상황 관계 1(匪賊動靜竝討伐狀況關係 1)>
그러므로 정해룡씨 지적처럼 "비적이 독립군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 아니다. 일제와 만주국이 지칭한 비적은 항일 반만주국 저항단체였다. 

만주국의 적은 '비적’ 
▲ 1942년 발행된 <건국 10년간의 제반업적>에 나온 '비적' 규정 ⓒ
일제의 '비적' 관련 문서 868건 정도가 일본 국립 공문서관(公文書館)에 있다. 그 대부분은 유치환 시인이 살았던 길림성과 하얼빈 지역 자료다. 
<건국 10년간의 제반 업적(建國 十年間の 諸般業績)>(일본외교협회, 1942.5)을 보면, 주일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 산이무부(山梨武夫)는 '비적'에 대해 “공비(共匪), 토비(土匪)로 나뉜다”고 했다. 
또 “작년 4월 국군(일본군과 만주군)을 정비해 토벌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며 “만주국 발전은 병대를 정비하고 비적을 토벌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만주국 최대 현안으로 치안을 꼽은 것이며 이 가운데 최우선은 '비적 토벌'이었다. 41년 4월 일본군의 '비적 토벌' 자료에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공비군(共匪軍)’을 토벌하는 지도까지 들어 있다. 
▲ 1943년 3월 하얼빈 중심으로 항일세력을 토벌했다는 작전도. ⓒ
이 토벌은 해방까지 이어진다(<4월에 있어 공산비군 태세 요도의 건(4月に於ける共産匪軍態勢要圖の件)>(쇼와 16년, <육만밀대일기(陸滿密大日記)> 제 8호, 1941. 4). 이 책에는 41년 3월 30일, 4월 27일, 5월 26일 일본 관동군이 하얼빈 인근 항일단체를 토벌했다고 돼 있다. 
또 42년 1~3월 2만명의 항일 세력(共匪)을 토벌했으며, 43년 4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하얼빈 주변 토벌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만주국 정황 관계 잡찬(滿州國政況關係雜纂), <치안 정황 관계(治安情況關係)>, 1943). 또 43년 2월 하얼빈시는 공비 세력 소탕을 위해 경무청 경제보안과를 설치하고 토벌 작전을 벌였다. 
유치환 시인이 40년 6월부터 해방 직전까지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할 당시에도 주변에서 '비적 토벌'이 이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일제는 “39년부터 연수현 등 북부 7개 현과 동남부 4개 현을 '특별 중점 지구'로 지정하고 공비를 토벌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했다(일본정치문제조사소, <만주행정경제연보>, 1941). 
이처럼 일제 문헌에서 '비적'은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닌 항일 운동가를 지칭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구에 나오는 '비적의 머리 두 개'도 항일운동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어이 없이 갖다 붙이기 식이라고 밖에 더는 다른 해석조차 필요 없을듯 하다. 실향민 ㅡ 망국노ㅡ무정부 주의 자ㅡ 끈질긴 생명의식과 허무주의를 지향한 청마가 그 당시 불순분자들의 속칭 ㅡ "비적"을 그대로 비적이라고 썼을 뿐인데 뭐가 문제가 된다는것인지 필자로서는 도무지 알수조차 없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평론에서 청마의 (수)에서 성밖에 매달린 수급은 항일투사 홍××의 머리라고 암시하였고 또 다른 일설에는 중국의 항일영웅 조상지의 인두라 해석하고 있다. 어찌 됐던간에 그 문제는 몇십년이 훌쩍 지난 후의 후설일뿐 . 
그 당시 상세한 내막을 알수 없었던 보통인들에게는 비적이 틀림없었다. 긍정적으로 해석할수 있는 한가지는 청마가 항일투사들을 비적으로 지적하여 시를 만들진 않았다는것이다.  " 수" 에서 청마가 친일파라는 증거들은 아무래도 너무 억지성을 띠는듯 하다. 명목(瞑目)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다"(瞑目:闭目凝神)로 해석되여 있었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계구같은 망국노의 서러운 생명ㅡ즉 (나도 언젠가면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수급이 성밖에 내걸릴 수도 있다) 불안함과 위협을 느꼈을때의 정서적인 발로가 분명하며  /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원시"인데ㅡ힘으로써 힘을 제하는 일제의 야만성에 대한 폭로임이 틀림이 없고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다시금 생명의 험열함과 그 결의(决意)를 깨닫노니/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어는 험열과 "결의" 인데 여기서 "결의"는 소위 비적이라고 문제거리가 된 "비적"들의 정의로운 죽음에 대한 경이로움이 틀림없어 보안다. 제일 마지막 연에서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스릴수 없다" 와 "명목하라" 인데 다스릴수 없는ㅡ에서는 일제마저 다스릴 수 없었던 의지를 나타냄이 분명하고 조금 문제가 될듯한 문구가  " 무뢰한 넋"일수도 뒷이어 "명목"하라ㅡ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 사자(死者)에 대한 찬양이며 축복이 틀림없어 보인다. 또한 명목은 말그대로 사인(死人)에 대한 가장 큰 경이로써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로 높게 표현되기도 한다. 결구에서 /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지고/에서는 하늘에게 은혜를 베풀어 흰옷처럼 결백한 흰눈이라도 내려달라고 간청을 한다. 소위 학자들이라는 분들이 설마 명리에 눈이 어두워 "수"의 참뜻을 정말로 보아내지 못하였던것은 아닐련지? 
"친일이여 가라"와  "보병과 더불어" 등등 많은 애족. 애국 시들을 완성시킨 청마는 광복후 무정부. 허무주의자로부터 진정한 애국자가 되였던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6. 노스탈지어의 노래
노스탈지어ㅡ"노스탤지어"(Nostalgia)와 향수(鄕愁)는 동의어로써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또는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향수병(鄕愁病, )은 향수를 병에 견주어 일컫는 말, 시인의 경우 노스탤지어는 대부분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 한다.일찍 보들레르는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로 도달함이며 또 달리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것을 마침내 볼수가 있고 또한 들을수 없는것을 들음" 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1859년 그는 다시금 "상상력은 전체 피조물을 피조물로 분해(decompose)한다. 深远한 영혼의 내부에서 생겨난 그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상상력은 분해의 결과로서 생겨난 그러한 부분들을 수집하고 다시금 분류해서 그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가는 것이다.)고
설파한적이 있다.공허한 세계관 초월. 비규범성적인 추구. 불협화음의 새로운 음악성. 애절한 자기성찰. 그리고 환멸의 불꽃으로 더욱 강렬하게 타 오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식. 그리고 저조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의 그 처절한 극복이  아마도 청마 유치환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자기성찰은 편렵이 아닌 지성적인 사색을 거쳐 마침내 우리들 앞에 깃발로 펄럭이게 된다.
…   …   …   …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다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선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같은 색씨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거 있나니…(시 ”향수”에서)
이 시에서 " 조을고"ㅡ와 조약돌같이 반질반질 잘 다스른 " 색시의 마음" ㅡ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한폭 또 한폭의 완정한 그림이 채 완성되질 않았으리라 보여진다. 역시 청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일류 시인임이 틀림없다. 지성인의 아픔이 베이스로 제일 밑바탕에 깔리고 음악을 듣듯이 시를 읊노라면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청마의 고향마을이 두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금실 은실이 천파 만파로 부서지는 잔잔한 바닷가. 그리고 세파에 휩쓸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다가 반질반질 잘 다슬어 앙증맞게 고운 자갈돌을 꼭 빼 닮은듯한 여인의 섬세한 모습이 떠올라 디아스포라의 한(恨)이 우리들을 더욱 슬픈 비애로 이끌어 가고 있는듯 하다.
… …  …
압록강을 넘어
추풍령을 넘어
우리 고장은 경상도 남쪽 끝 작은 항구!
그 하이얀 십자길 모퉁집이
우리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로 계시는 곳이란다
오늘도 광야의 기나긴 해를
먼 고국 생각에 가까스로 보냈나니
제비야 멱머기야 새끼 제비야
오히려 그리움의 적막한 한에
날알 날아 마구 날어라 먼
벌이 저물어 안배도록 날아라
오늘도 머나먼 고국생각에
하루해 보내기 얼마나 힘들더냐
“비연(飞燕)과 더불어” 일부분
시 " 비연과 더불어" 에서는 실락원(失乐园)을 지켜가는 실향민들의 생살을 저며 내듯한 조각된 아픔을 임의로 조제(造制)한것이 아니라 작자 나름대로 사실주의로  박제하였길래 조각조각 부서진 거울조각들이 심방(心房)을 뚫고 여리디 여린 조각된 가슴을 아프도록 찌르게 하여 읽는 내내 청각. 시각. 후각이 아닌 신조의 바위돌에 뽀족한 정을 들이 댄듯 하여 타향살이로 하루해마저 보내기가 힘이 들었을 청마의 울적한 심사를 제일 잘 반영한 한수의 명시라고 보여진다.얼마나 고향이 그리웠고 철새가 부려워 /제비야 멱머기야 새끼 제비야/
오히려 그리움의 적막한 한에/
날알 날아 마구 날어라 먼/벌이 저물어 안배도록 날아라/오늘도 머나먼 고국생각에/
하루해 보내기 얼마나 힘들더냐/로 표현하였을가? 이 시는 어느 헤나른한 정오. 큼직한 바위돌 아래 홀로 앉아 남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며서 고향을 그리워 했을 청마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듯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내내 더욱 더 가슴 아프게도 한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여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전문이다 .
보시다싶이 "애련에 물들지 않고"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여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시인은 삶을 노래하고 있다.바람 세차고 달빛도 별빛도 심장도 없는 바위가 되여 광야에 우뚝 서있는 화자인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壮观이고 현실에 대한 沉默이며 反抗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수가 있다. 허무적인 이상주의와 너무 잘 어울리는 디아스포라적인 침착하고 로련한 자세임을 우리는 그 무슨 니즘을 죄다 떠나서 살갗이 아닌 영혼으로 실감하게 된다. 망국노의 인생은 풀뿌리 같은것이여서 항상 그 밑바닥에는 상처나 아픔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밭 십리 이랑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
석양에 두렁길을 호올로 가량이면
애꿎이도 눈부신 제 옷자락에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
"北方秋色"의 경우 디아스포라적인 그 정서는 아프다 못해 마침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쓰리고 아리도록 오래동안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번 곰곰히 사색케도 한다./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밭 십리 이랑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은 지금도 두눈에 훤히 보이는듯이 북만주 광야속의 시골마을을 보는듯이 그림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이기도 하며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는 나라 잃고 어디론가 다 접고 훨훨 떠나가려 해도 갈곳이 없는 자의 힘없는 막무가내로써 그 당시의 현실점에 립각하여 작자가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면 더욱 적당할듯 하다. 필자는 종래로 청마 유치환을 애국주의자  혹은 친일파와 련결하여 생각해본적이 없다. 다만 디아스포라적인 그의 짧은 북만주 행로에서 너무나도 동일한 실향민의 아픔을 공유하고 실감하고 있을뿐이다.

7. 生命의 书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된 후, 세계 각처에 퍼진 이산 유태인을 가리켰던 말이다. 그 의미가 확대되어 오늘날 離散을 경험한 민족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곧 디아스포라는 이산의 과정뿐만 아니라 이산 민족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민족의 離散은 시대마다 가난,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지속되어 왔었다. 그리고 한민족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 20세기 말부터는 세계적으로 이산의 수가 매년 몇배씩 더욱 증가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는 전 지구적 자본화로 인해 디아스포라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세계의 정세와 맞 물려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근대 이후 보편적 삶의 문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살아가야 하는 삶을 강요하고 이러한 현상은 보편화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떠나온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일제 강점시기 조선인 시 문학에서부터 이어져 온 시문학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도 중국조선족 시문학에서는 여전히 고향을 주제로 한 작품이 그 주류를 이룬다.여기에는 고향을 떠나온 존재라는 離散의 역사적인 자각, 그리고 고향 상실이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된 현대 의식, 그런 경향속에서 자신의 존재적 뿌리로써의 고향에 대해 생각하며 아련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청마의 시 "생명의 서"의 영향을 받은것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가고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을것 같다.

생명의 서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붓기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요점 정리
성격 : 상징적, 의지적, 남성적, 관념적, 독백적
표현 상의 특징 : 이 시는 단호하고 웅변조의 말투로 씌여졌으며 이 시적인 자아를 주관적이고 의지적인 관념을 독백적인 형식의 목소리러 표출하고 있다. 

구성 : 1련  - 생명과 인생에 대한 문제 제기 :                         삶의 출발
         2련  - 자아의 내면적 갈등의 상황 설정 : 삶의 수련
         3련 - 자아의 의지와 가능성의 표명 : 삶의 시련
주제 : 원시의 본연한 자아 추구 의지 또는 생명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

 어휘와 구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나의 지식으로도 삶의 본질이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생명과 인생에 대한 짙은 회의를 해명하지 못하고
삶의 애증 : 삶에 대한 애착과 증오
병든 나무 : 고민하고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현실적 자아의 모습
아라비아 사막 : 극한적인 시련과 고난의 장소이며, 삶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장소(역설적 공간) 일상적인 삶의 무력함과 허위에서 벗어나 자아의 생생한 실존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인간의 기성 관념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 상태 그대로의 장, 극한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치열한 생명 탐구의 대결의지를 드러냄 .
백일 : 태양. '근원적인 생명력'과 '일체의 멸망'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지님.
영겁 : 영원한 세월
허적 : 허무와 적막
알라의 신 : 고민하고 방황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신'은 전지 전능한 절대의 존재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적 자아와 마찬가지로 실존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열사의 끝 : 뜨거운 모래 사막, 시련과 고난의 극한 상태
열렬한 고독 가운데 /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 일체가 사멸한 공간 속에 적라라한 자아의 실존적 존재를 드러내면. 삶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상에서 홀연히 벗어나 본연의 생명을 마주하려는 열망
'나' : 원시의 본연한 자태 = 나의 생명 =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아
        현실적 자아가 추구하는 대상(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으로서의 자아)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뉘우침과 후회없이 죽음을 택하리라. 생명 탐구에 대한 결의 고조(의지적 대결 정신), 기어이 깨우치고 말겠다. 백골 = 죽음

이해와 감상
고민, 좌절, 절망의 끝에서 허무 의식을 떨치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를 노래한 시. 시인은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번민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대결의 공간으로 사막을 설정하고,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렬한 고독'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의 세계에 자신을 바치겠노라는 비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의 참된 `나'란 세속에 물든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 를 넘어서서 성취하고자 하는 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으로서의 자아'라 할수 있을것이다.
유치환의 시는 관념적인 문제를 엄숙하고 웅장한 남성적 독백조로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작품 또한 그런 계열의 대표적인 시이다.  김흥규님의 이 시에 대한 전반 해설이다.헌데 읽고 나면 웬지 허전하고 어딘가 석연찮은 그런 구석이 너무 많다. 왜 그럴가? 필자가 보건대 김흥규님은 망국민의 설음과 디아포라적인 悔意. 즉 그 진한 아픔을 알지 못하였기에 접근이가능한 가장 편한 방법론적으로 문법, 문체에 접근하여 쉽게 해석하려 한것 같다. 모두 알수 있다싶이 이 시는 청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인 화자는 생명에 대한 회의와 애증. 갈등 등을 절대의 고독 상태로 돌아가서 '나'(나와 '나'와 직접 대면시킴으로써 생명의 본질에 더 한층 가까이 다가서려는 열망과 비장한 의지를 그려 내고 있는것이다.
그라스도 동방교회에서 사막의 교부라 불리우는 이들은 하느님(神)을 찾아서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관계들을 끊고 스스로 고독을 찾아 사막의 동굴이나 바위틈 같은 곳에 거처할 곳을 정하고 거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스스로 황량한 사막을 고독을 선택하는것일가? 그 무시무시한 사막의 거대한 침묵속에서 그들은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고 신을 만나기 위하여서 였던 것이다. 이런 수행자들의 수행이 오늘날 서방의 모나키즘( 수도원의 제도)으로 정착되였고 많은 이들이 불가(佛家)에서처럼 출가하여 묵상과 기도에 열중하였던 그러한 까닭은 오직 영적인 신앙생활과 비밀의 봉인(封印)을 남겨 두고자 하였던 침묵과 겸손의 자세였던것이다. 
하우스 헬 교부는 ( 우리는 구원과 완덕을 너무 분리시켜 생각한다. 믿음을 가진 선조들은 구원의 개념안에 완성의 개념을 포함시켰으며 그것의 총체성, 완전한 건강, 결점 혹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소테리아( soteria) 말 그 자체에 의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주는 하나의 궁창(穹苍)이라는 말이 있다. 
궁창이란 하나의 거대한 구멍을 뜻한다. 그래서 우주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며 생명을 품는 곳이기도 하다. 태초의 어둠에 쌓여 신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눈 긴 터널과도 같은 그 구멍은 무(无)에서 유(有)로 , 유에서 무로 통하는 긴 탯줄이기도 하다. 
... ... ... ...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종교 신앙 내지 해탈을 위한 그러한 이상적인 용기를현실에 대한 불만에 빗대고 심층 미화한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청마의 시에 빈번히 여러번 등장하는 '원수'는 대체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얼핏 보기에는 제도적 부조리. 또는 일제와 독재 정권과 그에 빌붙어 아유구용(阿諛苟容)하는 세력들인것으로만 잘못 오인할수도 있지만 기실은 선악이원(善恶二元)의 심각한 절규로써 진선미(真善美)ㅡ 즉 자아 본성, 인성을 파 헤치려는것으로 보는것이 더욱 타당할것 같다. 그러한 지성적인 사색은 자신을 흔들어 남도 깨우쳐 주려고 한 "생명의 서" 제2장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것 같다.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地벽) 알타이의 기맥(氣脈)이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 닿았음과 같이
오늘 나의 핏대 속에 맥맥히 줄기 흐른
저 미개적 종족의 울창한 성격을 깨닫노니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의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
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었도다
내 오늘 인지(人智)의 축적한 문명의 어지러운 강구(康衢)에 서건대
오히려 미개인의 몽매(夢寐)와도 같은 발발한 생명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러르면 광명에 표묘(漂渺)한 수목 위엔 한점 백
운내 절로 삶의 희열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만만한 투지를 준비하여 섰나니
하여 어느때 회한 없는 나의 정한(精悍)한 피가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를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

생명의 서 제2장 전문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地벽) 알타이의 기맥(氣脈)이/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닿았음과 같이/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알타이계라는 그 깊은 뿌리 찾기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민족은 스스로 둘러놓은 울타리ㅡ 즉 울바자를 서슴없이 허물어 버리면 결코 약소민족이 아님을 떳떳이 드러내고 있는것 같다. 그 아래 구절에 등장하는 미개 종족,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은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라고 일목료연하게 동이민족(东夷민족)의 역사를 마치 두눈에 보이는듯이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의 아래 구절에서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를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는 굴할줄 모르는 민족의 기개ㅡ 즉 저항 정신임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미하는 "원수"는 오직 두가지일뿐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면 부패 무능한 정권에 대한 분노ㅡ오직 이 두가지로 밖에 다른 해석들은 모두 빛 바래여 가는듯 하다.

8. 연수벌에 심어 놓은 문학의 뿌리
일제 패망 두달전 청마 유치환이 귀국한후 연수현 조선족 역사는 아느덧 장장 백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이 흘러 왔다. 민족이 있는 한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문학과 전통, 세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조선족문학의 기원에 대하여는 대체로 우리 민족의 이주초기부터 보는견해, 1910년대로 보는 견해, 1930년대 문학동인단체 «북향회»의 설립으로부터 보는 견해, 해방후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성립으로부터 보는 견해 등으로 다양하다. 
조선족문학의 기원을 이주로부터 보는 견해는 구비문학을 념두에 둔것이고 1910년대 전후로 보는 견해는 서사문학을 념두에 둔것이고 1930년대«북향회»의 설립으로부터 보는 견해는 문단과 문학의 성격이란 내적시각에서 본것이고 해방후로 보는 견해는 속인주의와 국가주의 시각에서 보는 견해라고 할수 있다. 
조선족문학에 대한 史적인 연구도 연구자의 시각과 장르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질수 있다. 구비문학과 서사문학을 다 포함하여 연구할수도 있고구비문학만 다루거나 서사문학만 연구할수 있고 서사문학중에서도 소설과시만 다루거나 소설, 시, 산문을 함께 다루거나 소설, 시, 산문, 극문학을 다룰수도 있고 거기에 아동문학, 비평문학까지 포함시킬수도 있다. 
구비문학은 우리 민족의 이주사와 함께 시작된 문학으로 보아야 할것이고 서사문학의 경우에는 1910년대 전후로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따라서 조선족문학에서 구비문학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과 위치를 차지하며 진정한의미에서의 조선족문학은 구비문학과 서사문학을 다 망라한 문학이다. 때문에 조선족문학을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 기원은 응당 이주초기로 보아야 할것이며 본 문학사는 조선족문학의 기원을 이주초기로 확정하였다.
 청마 유치환의 시중에서 필자는 "깃발" . "생명의 서"외에 북만주 땅 연수에서 써내였을 "思乡"을 제일 좋아하고 있다 .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여와 
나 대신 내 자리에 살짝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양  밀어놓고 
가만히 일어나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같은 등불 두엇! 

쓸쓸하고 안타까우리만치 한적한 마을의 풍경. 실향민의 忧愁와 고통을 가장 잘 반영한 한폭의 그림이라고 밖에 달리 더 뭐라고 표현할수 없을만치 간결하고 넘 생동한 만주국 조건족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또한 나약한 지성인의 디아스포라적인 향수ㅡ 즉 노스탈지어의 노래이며 상처이고 恨임이 아직도 우리들의 두손에 살갗으로 뚝뚝 묻어나는듯 하다. 청마가 살았던 연수현은 18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인적이 아예 없는 황무지였다. 이 지역은 황제의 수렵장(狩 場)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법에 따라 한인(漢人)의 진입을 금지했었다. 함풍(咸豊)11년(1861년)에야 비로소 금령이 해제되고 관내의 유이민(流移民)들이 이 곳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광서(光緖)26년(1903년)에 청나라 정부가 지금 흑룡강성의 연수현와 상지시(尙志市) 전역, 방정현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에 장수현(長壽縣)을 설치했다. 민국(民國)3년(1914년)에 사천(四川)성의 장수현과 이름을 중복했기 때문에 동빈현(同賓縣)으로 개명했다. 민국(民國)18년 (1929년)에 동빈현 경내에 위치하는 마연하(螞蜒河)와 장수산(長壽山)이라는 산과 하천의 이름의 두 번째 글자를 뽑아서 연수(延壽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수현의 행정구획이 몇 번 바뀌였지만 연수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해하여왔던것 같다.가신촌은 마연하와 양주하(亮珠河)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원래 “협심(夾心,중간에 끼인것)”이라고 불렸던 곳이었는데 그 이름이 나중에 협신(夾信), 가신(嘉信), 가신(加信)으로 변하게 되였던것이다. 가신은 수리(水利)가 편리한 평원지역이라서 1940년대부터 이미 벼농사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원래 만주의 벼농사는 조선 이민에 의해서 개시된 것임을 현재 중국정부도 부인하지 않는 상횡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1910년 이전에 연수에는 조선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파고려(巴高麗)라고 불린 이 사람이 바로 가신에서 살았다. 
1920년대부터 조선 이민들이 가신 등지에 많이 유입해 와서 지세가 낮은 곳에서 땅을 개척하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던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얘기한적이 있다. 그후 조선인들이 계속해서 연수에 와서 미작농업(米作農業)에 종사하였기에 1922년 3월까지 연수현(당시의 동빈현)경내에는 조선인이 모두 423명만 있었으나 1931년에는 1,936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이민정책에 따라 만주국 시기에 더 많은 조선사람이 연수로 이주해왔었다. 1940년까지는 연수현의 조선인인구가 이미 10,585명이나 증가되었다.
만선척식공사(滿鮮拓植公社)에 의해서 연수로 이주한 사람들중에는 경남지역에서 온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연수현의 조선인 가구는 모두 724호였는데 그 중에 300호가 만척이 부산의 구포와 김해 일대에서 모집한 가난한 농민이었다. 유치환의 주변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제일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이 중국국적에 가입한것은 건국후이지만 조선족의 역사는 130여년이다. 이미 19세기중엽부터 우리 민족 이주민들은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살아왔고 중국에서항일과 국내혁명전쟁, 그리고 토지개혁과 지방정권 수립에 참여하면서 오늘의‘ 조선족’ 으로 된것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행정과정에서 이룩한 문학은 당연히 조선족문학에 속하게 된다. 
더우기 «북향» 제3호 편집후기에 거론된 «간도문단(間島文壇)»이라는 말속에는 경성문단과 대립 개념으로 향토문단을 지칭하는 의미가 있으며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등 서문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을 국민문학(만주국)의 한 범주로 간주하였다. 이 시기 문학은 이미만주조선인문학=조선문학이라는 등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방전 중국에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문학을 다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속인주의 원칙에서 해방전 문학을 조선(한국)문학에 귀속시키는 경우, 속지주의 원칙에서 이 시기 중국에서이루어진 모든 우리 문학을 다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귀속시키는 경우, 현지주의 원칙에서 현지에서 창작하고 현지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한정하는경우, 정체성의 시각에서 고국의 문학과 갈라볼수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의특징을 반영한 문학으로 한정하자는 견해 등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것이 김택영이나 신정, 신채호의 문학을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해방“ 만주조선인문학이 조선문학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 이민문학의 성격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웅은 “ 30년대초 <북향회>의성립으로부터 <재만조선인시집>과 재만조선인소설집 <싹트는 대지>의 출판에 이르는 약 10년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척민문학>〜중국조선족문학의 형성기라고 본다.” 고 주장하여 그 이전의 망명문학을 조선족문학에서
배제하고 있다.
장춘식은 “ 중국에 살면서도 조선족 문화공공체에 합류되지 않았던” 김택영이나 신정, 신채호의 문학이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보고있다. 
말그대로 망명문학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에 망명한 작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이다. 대표적인 망명작가로 김택영, 류린석, 신정, 신채호 등을 꼽을수 있다. 그들이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고 중국에서 장기간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그들의 문학이 주로 국권회복, 민족독립이란 민족적인 큰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되지만 또한 망명지 중국에 대한 생각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이미 본토문학과 갈라지고있다고 볼수 있다. 이주민 문화공동체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이들 문학에는 나름대로 망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의식을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 조선족문학의 시점에서 볼 때 망명문학은 재중 조선인 문학의시작이면서 전반 민족문학의 시각에서 보면 망명문학은 또한 조선반도문학에서 분리되기 시작한것” 이라고 볼수 있다. 

蒙旗에 와서
가도 가도
희멀건 하늘이요 끝없는 曠野이기에
어디로 사람이 오고 가는지 알 바 없고
멀 수록 알뜰한 너 생각 依支하고
이 외딴 세상의 외딴 하늘 우러러
나는 家畜과 더불어 살 수 있으리

 (「郭爾羅斯後旗行」본문,《竹筍》제4집, 1947.5)「곽이라사후기행(郭爾羅斯後旗行)」은 시집 『生命의 書』가 발행되기 한 달전에 동인지 《죽순》제4집(1947.5)에 처음 발표된 것이다. 
《죽순》에 발표된 이 텍스트는『生命의 書』에 수록된 텍스트와 본문 부분에 몇 곳의 사소한 차이가 있거니와 본문 앞에 짧지 않은 서문이 있는 것이 가장 현저한 차이라고도 한다. 서문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직도 蒙古旗의 勞力이 남아있는 카클라스後旗는 하루빈서 西北으로 約二00키로 ㅡ 곳곳이 알카리地帶를 잠긴 荒漠한 曠野이나 一九四四年 내가 이곳을 찾은때는 四月이었으나 暗澹한 陰雪에 가치어 曠野속의 命脈같은 한台 뻐스가 이를 헤치고 다닫는 聚落마다 까마귀떼같이 물려드는 남누한 黑衣一色의 사람들은 참으로 原始的 絶望과 悲慘를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旗公署 所在地인 肇源서 六O滿里에 있다는 라마廟를 찾아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아깝게 생각한다
서문에 나온 “카클라스後旗”는 곧 곽이라사후기(郭爾羅斯後旗)이다. 곽이라사(郭爾羅斯)는 고대 몽골부락 “활라랄사(豁羅剌斯)”의 중국어표기이다. 몽골어에서 활라랄사(豁羅剌斯)는 강하(江河)라는 뜻이다. 기(旗)는 몽골부락의 이름뒤에  붙이는 낱말인데 한기는 하나의 몽골부락이다. 청나라초기부터 곽이라사부락은 송화강(松花江)을 경계선으로 곽이라사전기(郭爾羅斯前旗)와 곽이라사후기(郭爾羅斯後旗)로 갈려졌다. 전기는 강남에 있고 후기는 강북에 있는 식이다. 따라서 곽이라사후기는 송화강(松花江) 북쪽에 위치한 몽골부락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청마는 만주땅을 주름 잡으며 숱한 시편을 남겼지만 여기서는 일일히 죄다 짚고 넘어가려 하질 않으련다
청마의 만주기행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전문가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인것 같다. 허나 그가 뿌린 문학의 씨앗은 분명히 북만주 연수땅에서 민들레로. 풀뿌리로 무럭무럭 자라 왔다. 특히 연수현태생으로서 북방문단의 대표적인 시인들로는 필자는 北方文学의 삼두 마차중 한 가람인 고 한춘시인과 강효삼시인을 첫손에 꼽는다. 이 두분은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청마의 뒤를 이어 북방문학을 선두에서 꽃 피워 온 선구자이고 개척자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연수현 태생들인 고 한춘시인의 혜성과 강효삼시인의 시 "고드름"을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혜성
한춘

굴레를 벗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방향이 없다
혹은 어디나 다 방향이다
밤이슬 오른 풀잎들이
입을 다물고있다
어둠이 쪼개지는 시각
또다시 끝없는 적막속으로
짧은 옷자락을 태운다
우주 사계절을 쌓아 놓은
페허에서 시간을 략탈한다
무언의 대사(臺辞)를 입은 가사가
지친 조각돌의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 한장을 올려놓다

  지긋이 무게를 눌러주는 이 시는 역시 인생, 인생의 자세, 다각적인 인생에서의 옳바른 길을 제시하여주는 그런 시이다. 헤성은 궤도를 따라 돌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나 밤하늘을 쭉- 가르며 어디론가 자기만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곹추 그 길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방향이 없다. 하지만 갈곳이 또한 너무 많다. 어디 가나 다 미개척지이고 어디나 다 뚫고 들어갈수있는 방향이기때문이다 그래서 길이 더구나 많다.  사상이 있어야 주제가 있고 주제가 있어야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이 이루어잔다고 보여진다. 이 시에서는 바로 혜성의 과감하고 대담한 개척정신을 노래했고 “굴레를 벗어버리는” “남의 말을 듣지않는” 비록 앞에 그 어떤 곤난이 닥쳐도 떳떳이 어두운 밤하늘을 헤가르고 나아가는 그 고귀한 정신을 노래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마지막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한장을 올려놓는다”는 즉 개척하자면 상처를 지니여햐 하는 로고. 위기감이며 사명감을 말하는듯 하다. 말 그대로 청마 유치환의 허무주의 . 이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긋이 무게를 눌러주는 이 시는 역시 인생, 인생의 자세, 다각적인 인생에서의 옳바른 길을 제시하여주는 그런 시이다. 헤성은 궤도를 따라 돌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나 밤하늘을 쭉- 가르며 어디론가 자기만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곹추 그 길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방향이 없다. 하지만 갈곳이 또한 너무 많다. 어디 가나 다 미개척지이고 어디나 다 뚫고 들어갈수있는 방향이기때문이다 그래서 길이 더구나 많다.  사상이 있어야 주제가 있고 주제가 있어야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이 이루어잔다고 보여진다. 이 시에서는 바로 혜성의 과감하고 대담한 개척정신을 노래했고 “굴레를 벗어버리는” “남의 말을 듣지않는” 비록 앞에 그 어떤 곤난이 닥쳐도 떳떳이 어두운 밤하늘을 헤가르고 나아가는 그 고귀한 정신을 노래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마지막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한장을 올려놓는다”는 즉 개척하자면 상처를 지니여햐 하는 로고. 위기감이며 사명감을 말하는듯 하다. 말 그대로 청마 유치환의 허무주의 . 이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인듯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
발디딜 곳 없는 저 허공에서
아무 손잡을 곳도 없는 저 벼랑에서
어떻게 그 한방울 한방울을 모아
크고 실한 고드름방망이를 만들었을가
하나 또 하나 기대와 의지들을 모아세워
마침내 하나의 굵직한 선언을 기발처럼 추켜
들기까지 떨어져 분신쇄골 될 각오를 하고
모지름쓴것들이여
떠나는 겨울보다
도래하는 봄을 알리기 위해 
너는 떳떳이 서있기에
너에게서 겨울의 추위보다는 봄의 따뜻함을
가슴으로 느낀다.

강효삼시인의 " 고드름" 전문이다. 이 시에서 쉽게 찾아 볼수가 있는것은 풀뿌리 인생을 살아온 시인의 디아스포라적인 정서와 그러한 아픔이 청마의 끝이 없었을 방황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김장선, 『僞滿洲國時期 조선인문학과 중국인문학의 비교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4.
金漢 외, 『中國當代文學發展史』, 상해문예출판사, 2002년.
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997년.
 이광일, 『해방 후 조선족 소설문학 연구』, 경인문화사, 2003년. 
오상순, 『개혁개방과 중국조선족 소설문학』, 한국 월인출판사, 2001년.
오양호,『한국문학과 간도』, 문예출판사, 1988년.
조선호,『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년. 
전성호 외(2007), 『중국조선족문학비평사』, 연변인민출판사.
陳思和 외, 『中國當代文學史敎程』,복단대학출판사, 1999년.
조규익, 『해방전 만주지역의 우리 시인들과 시문학』, 국학자료원, 1996년. 
조성일 외 ,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조성일, 『중국조선족문학개관』, 연변교육출판사, 2003년.
장춘식, 『日帝强占期 在中朝鮮人小說硏究』, 
장춘식, 『일제강점기 조선족 이민문학』, 민족출판사, 2005년.
채훈, 『일제강점기 재

9. 결론
역사는 정확히 기록되어야 하며 암울했던 그 시대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순일’을 했던 사람들마저도 ‘친일’로 몰고 가는것 역시 비극이라고 생각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가 친일, 혹은 순일 일수도 있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팔아 먹고 작위나 은사금을 받아 먹은 매국노들에게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재 하여도 마땅하 겠지만 자식을 키우기 위해,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순일행적이 조금 있는 일부 사람들의 상황은 획일적인 잣대에서 거론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특히 시대적 상황과 각 인물들, 거제 출신이며 친일을 했다고 이미 판명이 난 동랑 유치진과 같은 인물들도 전체적인 삶을 살펴봤을 때 일부는 친일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그것마저 함부로 친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를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고 또한 새로운 주장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친일을 위한 글을 강요했고,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연극을 하는 사람에게는 연극으로 친일을 강요하고 농민에겐 곡식을, 돈 많은 부자들과 기업가들에겐 헌금을 강요했었던 것이다. 오늘날 안일한 물질생활에 물 젖어온 우리들이 마치 내가 그 시대를 살았으면 친일도 순일도 아닌 독립투사나 될것처럼 너무 쉽게 타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솔직히 암울했던 그시대에 독립운동가가 과연 몇이나 되였던가? 또한 독립운동가들도 그 시대 통칭이 비적이였으며 오늘까지도 제대로 대접 받지도 못하고 있는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1940년에서 45년 사이는 국민이 가장 핍박 받던 일제 강점기 시대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가 새로운 역사인식을 정확히 하기 위하여 어떻게 ‘친일’과 ‘반친일’을 나눌수가 있으며, 아주 똑 부러지게 낟알과 쭉정이를 분류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명석한  두뇌로는 이해가 가지만 변화무쌍한 마음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인것도 같다.
 아직도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많은 작고 문인들과 생존 문인들이 친일시비에서 미처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더러는 몇 줄의 글로 인해 친일의 오명을 쓰고 그들의 문학과 삶이 제대로 조명되지도 못한 채 세월의 질곡 앞에 엎드려 꼼짝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인줄로 알고 있다.
흔히들 유치환'의 詩世界'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필자가 보건대 모나르키아니즘이던지 아나크로니즘이던지 아니면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퓨리터니즘, 다위니즘, 메커니즘,  다다이즘 ㅡ등등 그런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적인 디아스포라적인 경향이 더욱 짙은것으로 판단이 된다.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잘 나타난 현상이 곧바로  '생명의지'의 발양'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의 '생명의지'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한마디'로 이악스레 살아 남으려 하는 '의지'이며 '생명'에 대한 애착'인것만은 틀림어 없어 보인다.
청마에게 문제가 있다면 만주 체류시에 썼을 "首" 등으로 친일파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데 특히 1942년 2월 6일 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 산문이 2007년 10월19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면서 기존의 애국 시인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너무나고 쉽게 그 시대의 문인들을 애국이니 친일파이니 아주 섣불리 판단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 들이고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가? 질책보다는 관용이 더욱 성숙한 자세가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우주만물에 음양 5행설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에게나 장단점, 그리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 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은 너.
이 호호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 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 오리 풀잎마다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천인합일의 사랑을 생명주의로 노래한 청마가 마치 후세에서 자신에 대한 어지러운 평판을 알기나 한듯이 적어놓은 " 바람에게" 를 읽고나면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저도몰래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필자가 알건대 2014년. 제4회 청마북만주기행을 조직하여 십여명이 연수땅을 다녀 오신줄로 안다. 이러한 탐구는 계속되여 새로운 발견이 있으시기를 두손모아 기원해 본다.

2017년6월26일 수개
서울에서

狂野에 바위로 우뚝 세운 生命의 书
평론: 강효삼 허창렬

1. 서론
2. 아나키즘이냐 다다이즘이냐
3. 청나라 역사
4. 도산농장
5.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 
6. 노스탈지어의 노래
7. 生命의 书는 도대체 무엇인가?
8. 연수땅에 심어놓은 문학의 씨앗
9. 결론

1.  서론:
청마 유치환(1908~1967)ㅡ 그는 대체 누구이며 왜 오늘까지도 우리들은  60여성상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까지 일일히 신경을 쓰고 있으며 지난 30년대 말엽, 그의 5년간의 만주행보(满洲行步)에 이처럼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으며 숱한 의문점들을 낱낱히 파헤쳐 보려 하고 있는가? 그는 친일파인가 애국자인가?을사조약(한일합방) 이후 숨 막히고 지루했던 36년간의 일제통치라는가장 암울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시대를 살아 보지도 못한 우리들로써는 결코 누구 하나 섣뿔리 나서서 쉽게 결론조차 내릴수 없는 현황임에도 불구하고 왜 일부 우리의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그를 두고 애국자이니 친일파이니 왈가불가 아웅다웅 해대고 있는걸가? 
솔직히 좌파이니 우파이니ㅡ지극히 정치적인 경향이나 그런 취향이 없는 진정한 문인이라면 일부러 남의 치부를 들춰 놓고 고개를 기웃거려 가며 낄낄대다가 마치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이나 한것처럼 실리보다 말 공부에 더 열중해대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우리들은 더 이상 신경을 써야 할 아무런 리유도, 필요조차 없다고 과감히 말하고 싶다. 모든것을 죄다 제쳐 놓고 단 한가지 "망국노"의 설음, 즉ㅡ 디아스포라적인 그의 5년간의 만주생활은 그야말로 그 이후 그의 창작모태와 수많은 창작 산실로 되고 있었으며 또한 수많은 창작속의 모종 동기로도 되였고 새로운 창작기법. 새로운 시적 체계를 완성시키고 있다는데서 우리는 오히려 다행이였다고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여 본다. 
동방의 종교학자 마이거스 뮤러(麦格斯 穆勒)는 " 한가지에만 너무 집착하지 마라. 하나만 안다는것은 결코 전부을 모르는것과도 같다"고 설파한적이 있다. 한 사물을 판단할 때 우리들은 너무나도 쉽고 안일한 쪽으로 좋다와 나쁘다로 쉽게 단정해 버리는데 물 젖어 있는듯 하다.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하자면 단순히 두눈에 보이는것만으로 우리 인간들은 모든것을 판별하고 단정해버리는데 이미 습관이 되여 있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꼭 흑암으로 분명하게 갈라져 있어 시비가 너무나도 또렷하고 명백한것처럼 ㅡ 헌데 세상을 살다 보면 그게 어디 정말로 그러한가? 
누구나 사노라고 사는 삶이 어쩌구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것이 대부분임을 우리는 솔직히 승인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힘 없고 빽 없고 나약한 문인들인 우리들이 만약 그 가혹한 일제통치 시대를 실향민으로, 망국노로 살았다면 과연 친일파였을가 아니면 독립 운동가였을가ㅡ 필자는 그게 오히려 더욱 궁금하기도 하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이나 와신상담(卧薪尝胆)은 누구나의 신조 ㅡ 험악한 그 시대를 살아 오면서 아무런 저항이나 반항도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ㅡ또한 현시대를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일하게 살아오면서 남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판별해 버려는데 습관이 된 사람이라면 애국적인 시는 애국적인 시로ㅡ 친일적인 글들은 친일적인 글들로 ㅡ이제는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 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조용히 권고해보고도 싶다.
한수의 시,  한편의 글을 가지고 친일파이니 애국자이니 목에 핏대를 세워 무작정 떠들어 댄다는건 아무래도 너무나도 큰  무리인것 같다. 솔직히 청마 유치환의 만주기행 이후 그의 삶의 궤적을 아무리 꼼꼼히 들여 보아도 우리는 그가 친일파라는 아무런 흔적을 찾아 낼수 조차 없질 않은가?
반면에 광복 이후 그의 많은 시편속에서는 애국주의 색채가 대부분임이 그래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솔직히 오늘날 고국의 방방곡곡에서 교포로 살아가는 조선족의 삶과도 너무나도 흡사한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방식을 청마는 그 당시에 벌써 망국이라는 크나큰 슬픔을 안고 피눈물이 나도록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영혼으로 홍진을 겪어 왔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여서는 안될 대목이라고 다시한번 말해두고 싶다.
현재 중국의 흑룡강성 연수현 가신촌에 5년간 정착하면서 완성시킨 청마의 生命的 书ㅡ그것은 분명 아나키즘. 다다이즘. 싫어니즘. 휴머니즘. 등등 디아소포라의 한(恨)과 지성인의 숨막힌 저주와 분노, 희망과 憧憬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오늘 날 우리는 양심적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래야 않을수조차 없다. 이처럼 시야비야 불온한 쟁론임에도 불과하고 구경 무엇이 청마를 우리들의 마음속에ㅡ 저기 저 광활한 만주 벌판ㅡ 狂野에 하나의 바위로 우뚝 내 세워놓고 한폭의 선명한 깃발로 우리들 문학의 하늘에서 펄럭이게 하고 있는가? 그것이 곧바로 청마의 뛰여난 문학 재주이고 재능임을 누구라도 승인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胡ㅅ나라 胡同에서 보는 해는
어둡고 슬픈 무리(暈)를 쓰고 
때 묻은 얼굴을 하고
옆대기에서 甛瓜를 박수어 먹는 니―야여
나는 한궈人이요
할버지의 할버지 쩍 물러 받은 
道袍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
벗으려도 벗을수 없는 슬픔이요
――나는 한궈인요
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요
 (「道袍」,『生命의 書』,1947.6.)

  "도포"전문이다.
  하이데거는 " 우리는 언어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언어를 거쳐서 말한다...우리는 언어가 말하는것을 매일 듣고 느끼고 있을뿐이다..."고 말한적이 있다. 난해한 파편화는 많은 현대 문학의 해체적인 경향과 유사한 모더니스트의 글쓰기에 나타나는 창발적인 경향의 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 예를 들어 모더니스트의 단시들은 단어 사용력, 리듬, 이미저리와 문맥에 있어 눈에 띄우는 다양함을 지닌 구절들을 갑작스럽게 병치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콜라주 수법을 연상시키는 불연속적인 표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외견상의 파편화(fragmentation)는 어떤 함축된 은유적인 또는 설화적인 구조(엘리어트의 경우 성배 전설과 풍요의식, 파운드의 경우 네쿠이아
(nekuia)의 개념 및 (신곡), 오딧세이와 오비드의 (변용들과의 유사점들)에 근거하고 있는데 ㅡ 이러한 구조는 지엽적인 세부사항들이 지니고 있는 원심적인 경향들을 하나의 정돈된 형태로 조정하고 있는듯 하다.
호(胡)나라는 말그대로 산 설고 물 설은 이방 땅을 가르키는 말이며 비좁게 자리 잡고 앉아 올망 졸망했던 골목길을 상징하는 "호동"(胡同)에서는 서럽게 마주 선 태양마저 먼지를 보얗게 뒤집어 쓴것으로 시인은 묘사하고 있다. /때 묻은 얼굴을 하고/옆대기에서 甛瓜를 박수어 먹는 니―야여/에서 호나라 호인들의 형상은 하도 절묘하여 감탄이 절로 나게도 한다. 다음/나는 한궈人이요/에서 " 한국인"은 일제 통치시대에 나약한 한 선비가 험악한 그 세상에 유일하게 까 밝힐수 있었던 투철한 민족주의적인 의식으로 밖에 볼수가 없으며 /할버지의 할버지 쩍 물러 받은/道袍 같은 슬픔을 나는 입었소/벗으려도 벗을수 없는 슬픔이요/는 물보다 진하디 진한 혈육의 정. 즉 ㅡ 끊을래야 끊을수가 없는 자신의 숙명적인 운명을 여과없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고스란히 받아 드리고 홀로 묵새겨야 하는 슬픔이며 비애 그 자체를 아낌없이 표현기도 하며 제일 마지막 구절에서/가라면 어디라도 갈/ ――꺼우리팡스요/에서 꼬리빵즈(高丽棒子)는 천대와 멸시의 대명사(代名词)로써 망국인의 설음과 비분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고스란히 모두 드러내 보이고 있는것이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이 한수의 시에서 우리는 벌써 청마의 만주생활이 결코 여의 주도하게 선택된것이 아니라 이방땅에까지 와서 악착스레 살아 남아 야만 했던 실향민들의 그 절실한 생명의식과 피에 절고 땀에 젖은 희노애락을 두눈으로 훤히 들여다 볼수 있도록 생동하게 묘사하였음을 우리는 쉽게 알아 볼수가 있기도 한것 같다. 중국말에 백문불여일견(百问不如一见)이라는 한 구절이 있다. 그럼 여기서부터 우리 다 함께 대부분 작품을 만주땅에서 완성하였을 청마 유치환(柳致焕)의 생명의 서(生命의 书)를 한수 또 한수씩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2. 아나키즘이냐 다다이즘이냐 
1. 다다이즘의 定义
 다다이즘은 모더니즘 사상중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예술관으로써ㅡ흔히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과거의 예술과 철저히 단절을 실행함으로써ㅡ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것 같다. 특히 다다이즘은 '파괴'에 가장 큰 비중과 중점을 두었던 사상으로써, 그 당시의 일반적인 문화, 교육적인 표준을 완강히 거부하고 공격하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던것이다. 특히 극렬한 일부 추종자들과 지지자들은 아예 인류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의 형식과 제도자체에 새롭게 도전하기도 하였던것이다.
한마디로 다다이즘을 가장 특색 있게 특징 지을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곧바로 허무적인 이상주의. 그리고 반항 정신 ㅡ이 두 가지를 실례로 들수가 있는데 이러한 주장과 견해들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예술적인 '관례'에 대한 강력한 반대이기도 하였던것이다. 그래서 일부 다다이스트들은 예전에는 아예 시도하지도 않았었던 예술 형태를 새롭게 보급적으로 도입하기도 하였으며 양보다는 질을, 질보다는 내포 ㅡ 즉 씨앗이 되고 종자가 되는 핵을 더 선호하기도 하였었다. 그리하여 다다이즘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예술과 삶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졌고, 관중들은 예술 활동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게도 되였던것이다.
그 당시 동시대의 모든 예술인들은 예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할수 있게도 되었다.

 2. 아나키즘의 整理
 그렇다면 아나키즘은 어떠한가? 아나키즘은 자연의 질서를 통해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따라서 아나키즘 문학은 자연을 추구 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극히 자연스런 태도로 보고 있다. 한국 아나키즘 문학 역시 이와 같은 자연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작품속에 수용하여 왔던것 같다.알기 쉽게 단 한마디로 일축하자면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로 보아도 아무런 무리가 아닐것 같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자연물이 보편적 자연의 의미가 아닌 . 아나카즘적 자연 인식으로 이해 하려면 시인의 아나카즘적인 인식이 명확히 전제 되어야 한다는것이 일반적인 속설이다. 지금까지 유치환의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아나키즘적 의미부여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던 원인이 곧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때문이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아나키즘에 대해여 앞에서 이미 여러 평론가 선생님들이 상세히 소개하였길래 여기서는 곰곰히 다시 소개하질 않으려 한다. 다만 다다이즘적 ㅡ 아나키즘적인 삶을 문학적인 삶의 방식으로 지향해 왔고 살아온 青马가 시대 반항적, 자신의 입장에 서서 때론 애국. 간혹 친일이 의문스러운 시 한 두수 썼다는데에 많은 독자들이 다문 얼마만이라도 더욱 많이 이해했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글자 더 적어볼뿐이다.
3. 귀차니즘
귀차니즘이란, 만사가 귀찮아서 게으름 피우는 현상이 고착화된 상태를 말하는 인터넷 신조어이다. 이것은 '귀찮-'이라는 어간에 '행위, 상태, 특징, ~주의'의 뜻을 가진 추상 명사로 만들어 주는 영어 접미사인 -ism을 붙여 만든 누리꾼들의 신조어이기도 하다.귀찮은 일을 몹시 싫어하고 혼자 노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것이다. 귀차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귀차니스트라고 부른다.
귀차니즘이라는 단어가 이전에도 쓰였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대중화시킨 곳이 곧 웹 만화 블로그인 스노우캣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초에 개설된 DAUM카페 중 하나인 w 모카페의 귀차니즘 게시판을 통해 확산되었다.귀차니즘이라는 단어는 당시 카페 개설자였던 중학생 J모양이 만든 것이다. J양은 미술시간에 배운 다다이즘에서 이즘이 사상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것을 알고 귀찮-을 붙여서 '당당하게 귀찮아하자' 라는 뜻의 적극적인 귀찮음에 대한 사상을 만들었다. 카페는 본래 버디버디 얼짱 카페였지만 카페 게시판의 활성화와 귀차니즘의 대중화를 위해서 카페 개설자는 귀차니즘이라는 새로운 게시판을 따로 만들었고 -나는 오늘 그냥 방에 누워있었다. 왜냐면 귀찮아서 와 같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에 귀찮아서를 넣어 올리 도록 유도하였다. 당시 귀차니즘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초기에는 카페 개설자와 4명의 운영자들만이 예시문장을 올려 귀차니즘에 대해 적극 알렸었다. 카페의 회원들은 약 500여명의  전국 각 지역의 10대들이었는데 이들은 다섯명의 카페 운영자와의 직접적인 채팅을 통해서 카페 가입을 권유 받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귀차니즘이라는 새로운 단어 수용에도 긍정적이 었으며 사용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귀차니즘 게시판은 활성화 되었고 귀차니즘은 카페 밖으로 더욱  빠르게 퍼져나갔던것이다.
유치환의 많은 시들은  대부분 " 생명의지", " 허무" 등의 세계로 많이 파악되여 왔었다. 더불어 " 아나키즘"에 련결하려는 일부 평론가와  학자들의 로고에 필자 역시 다함없는갈채를 보내 드리고도 싶다. 헌데 왜서 " 허무"와 "생명의지"보다  더욱 근접한 그의 디아스포라적인 상처와 향수 ,현실에 대한 지리멸렬한 반항정서를 "다다이즘"으로 연결시켜 연구하려는 학자들은 아직 없는지 필자로서는 괜히 커다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솔직히 청마 유치환의 시를 아나키즘이니 다다이즘이니 휴머니즘이니 귀차니즘이니 등등 많고 많은 니즘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그 당시 우리 민족 삶의 가장 근본적인 삶의 질환의식 ㅡ 즉 망국노와 실향민의 서러움과 애달픔. 그리고 디아스포라적인 회한(悔恨)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을 불안감과 둥둥 떠가는 저 하늘의 흰 구름과도 같은 부표현상(浮标现象 ). 어디에 가보더라도 믿을만한 것은 오직 살아 남아 야겠다는 끈질긴 생명의식이였음을 우선 먼저 이해하여야만 그의 칼처럼 번뜩이는 본능적인 반항정서 ㅡ 즉 무정부주의자의 소심한 행각보다 생명에 대한 열애가 결국은 잃어버린 나라 사랑이였고 민족에 대한 병(病)적인 애착이였음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깨달아 갈수가 있을것 같다 . 

생명의 서(書)
유치환(1908~1967)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존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전문)
 "청마는 사랑의 시인보다는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에 더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의 서(书)”는 그의 시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생명이 부대끼는 병든 상태에서 무생명의 공간,바로 저 “머나먼 아라비야 의 사막”을 찾아간다는것 자체가 역설이다.사멸,영겁,허적 등 관념적 시어이자 사막의 무생명성을 강조한다. 또한 열사의 끝 그 “영겁의 허적”속에 “호올로”맺는 고독은 열렬하다는것,생명 그 “원시의 본연한 사태”를 “회한이 없는 백골”이 될때까지 배우겠다는것에서도 생명에의 역설은 두드러진다. 모든 생명의 본연은 무다.생명의 시작은 죽음의 끝과 이어져있다.그러기에 사멸의 땅 사막에서 근원적생명을 배우려는것이다.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히 새겨진 사막의 적막,그 열렬한 고독의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단독자가 있다.물한줄기찾을수없는 사멸의 사막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 지고 간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있다.그러기에 그의 생명의 서는 생명이 충만한 삶의  삶의 서(序)와 서(誓) 뿐만이 아니라 경전의 이미지 까지도 담고 있다.이렇듯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도 인간의 의지 혹은 정신적인 높이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그를 생명의 시인이라 부르는까닭이고  사막하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것이 때문이다."청마의 시 " 생명의 서"에 대한 정끝별시인의 간단명료한 짧은 해설이다.
별로 거창하지도 않을만큼 소박한 해설이라서 필자가 나름대로 무척 좋아 보이기도 하다. 헌데 역시 디아스포라적인 아픔과 회의(悔意) 노스탈지어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어 읽고나면 뭔가 한 구석이 텅 비여 있듯이 허전하다. 필자가 보건대 망국노의 설음과 실향민의 애환을 모르고서는 아마 청마의 生命의 书를 별도로 해석한다는건 필자가 아무래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가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한다.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제일 마지막 연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귀차니즘적인 역설임이 분명하다. 죽은 후에 무엇이 되여 무엇을어찌하리라는 말은 말 그대로 허구인데도 이 구절이 모래 사막과 더불어 시의 내포 ㅡ 즉 핵이 되고 있음은 무엇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것은 이미 선택권이 없는 자의 憧憬이며 현실을 정면 주시하여 난관을 타파하려는것이 아니라 지극히 관망적인 타협의 자세로써 존재감을 내 세울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고 보루였음이 아닐가 짐작된다. 풀꽃은 풀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얽히고 설켜야 이쁘게 핀다. 그것은 굳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서 라기보다는 악착스레 살아 남아야만 내년에도 증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지금까지 다다이스트들은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것을 찬미하였다. 본격주화입마트리스탄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수있는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1920년까지 취리히에서 잡지 "다다"를 발간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 등을 발표했다. 다다미술은 서구미술의 형식을 부정하는 새로운 퍼포먼스, 시낭송 등을 혼합한 연극적인 예술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 반대하는 반언어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여 때로는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와 이미지를 제시하였던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상한 의상을 입고 전혀 플룻이 없는 연극을 한다던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여서 조각작품을 만든다던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판을 벌리고 다 때려부순다든지 했다는거다. 
그렇다면 청마 유치환이 북만주에서 5년간 생활하면서 완성한 " 생명의 서"의 경우는 도대체 어떠할가 ? 다 함께 조심스레 살펴보며 가도록 하자


3.청나라 역사
1.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 궐기
명나라때 만주땅의 제일 큰 지방 할거 세력은 곧바로 철령위(铁岭卫 . 현재의 선양군구에 해당함) 총독을 지낸 고려인 이성량(李成梁1526-1615,자 여계 ,호 인성 ,조선인 '이영'의 후대)이다.  만주 역사는 하도 광범위 하여 여기서 필자는 역사에 밝혀지지 않은 동북왕 이성량과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 努尔哈赤.1592-1643,성씨. 애신각라 ,후금의 제2대 대칸이며 대청국의 건립자,1626년10월20부터 1643년9월21일까지 재위,)의 특수한 관계에 대하여서만 잠간 이야기 하려 한다. 
명조 말엽. 이성량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하면 말그대로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 뜨릴 지경. 일화로 그가 지방 할거세력을 소멸하기 위하여 의무려산( 医巫闾山)을 포격한 설화가 아직도 금주 북진 지방현지( 锦州北镇地方县志)에 그대로 남아 있다.<span style="color: rgb(0, 0, 0); font-family: "Times New Roman"; font-size: 18px; text-indent: 30px;">하루는 빈주(滨州)땅으로 시찰을 갔다가 한산한 길거리에서 웬 거지아이 하나를 주었는데 그 아이가 하도 영리하고 똑똑하여 양자로 받아 드렸다고 기록된다 . 그가 곧바로 누르하치ㅡ후에는 친위병으로까지 키우게 되였고 북경 자금성(紫禁城)으로 황제 알헌하러 갈때도 어김없이 누르하치를 데리고 다녔었다고 하였으니 누르하치에 대한 이성량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우리는 가히 알수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당시 이성량에게는 아들이 무려 여덟이나 되었는데 장자가 곧바로 이여송(李如松) . 차자가 이여백(李如柏), 이 두 인물은 임진왜란때 명나라 지원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격 ㅡ김응서장군이 소서비의 목을 친후 평양성을 함략시켰던 그 장본인들이기도 하다. 
현지에 따르면 어느 날. 이성량과 누르하치가 한가하게 대담을 너누던중 이성량이 자랑 삼아 " 나의 발 바닥에는 동전만한 기미가 두개나 있다" 고 하자 누르하치는  " 나의 장딴지 부근에는 검은 기미가 일곱개나 된다" 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황제가 될 "칠성별"임을 알아 차린 이성량의 눈빛이 문득 살기로 번뜩이는것을 눈치 챈 누르하치가 그 길로 야밤도주. 추병들을 따돌리려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마지막에 현재 요녕성 신빈만족자치형 백기향 부근에서개의 도움을 받아 구사회생ㅡ그후 누르하치는 후손들에게까지 절대로 개고기를 먹지 못하게 법령(法令)까지 내세웠다는 후설은 아직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려 하는것은 명나라 말년에 료동반도에는 조선인이 아주 많았다는 그 점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우선먼저 일제시기 말대황제 부의가 세웠던 만주국(满洲国)에 대하여 다시 한번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자
2.인구 밀도와 주요 도시
1908년 만주의 인구는 1,583만명이었지만, 만주국 건국 이전인 1931년 4,300만명이 되어 있었다. 1941년 인구는 5,000만명으로 증가했다. 1934년 만주국의 인구는 3,088만명, 1가구당 평균 인원은 6.1명, 남녀 성비는 122:100로 추정되었다. 남성 인구가 많은 이민 국가의 측면이 강했다. 일본 식민지의 조선인이 많이 이주하였고, 대만인도 5,000명이 이주했다.
일본 측의 자료에 따르면, 1940년 만주국(헤이룽장·러허·지린·룽장·안둥)의 전체 인구는 43,233,954명이었다. 인구 구성은 아래와 같다. 통계의 만주인 가운데에는 68만명의 조선족도 포함한다. 또한 도시 지역의 주민은 전체 인구의 20% 정도였다.
민족인구 수비율 만주인(한족·만주족·조선족)30,190,000명97.8%일본인590,760명1.9%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98,431명0.3%1940년 주요 도시의 인구는 아래와 같다. 통계의 주체에 따라서 수치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만주국의 행정권이 미치지 않았던 주요 도시의 만철 부속지 인구를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는가 따라서 통계가 다르기 때문이다.도시 인구수 잉커우(营口)119,000명 또는 180,871명
1940년펑톈(奉天)339,000명 또는 1,135,801명
1940년 신징(长春)126,000명 또는 544,202명
1940년 하얼빈(哈尔滨)405,000명 또는 661,948명
1940년 다롄(大连)400,000명 또는 555,562명
1939년 안둥(安东지금의 단동)92,000명 또는 315,242명1940년 지린(吉林)119,000명 또는 173,624명
1940년 치치하얼(齐齐哈尔)75,000명

3.민족구성
만주국 시대의 공식이념인 "민족협화",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역사적인 만주의 이질성, 즉 만주족·한족·조선인·러시아인·몽고인뿐 아니라, 어룬춘족, 골디(Golie), 나나이족 등 십여 민족집단의 혼재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1]:6 하얼빈에는 50개 이상의 민족집단, 45개의 언어가 혼재하기도 하였다. [1]:6 만어(滿語)라고 불리던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가 사실상의 공용어로서 사용된다. 군·관공청에서는 일본어가 제1 공용어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교육기관에서 일본어가 교수 언어로 여겨졌다. 몽골어·러시아어 등을 모국어로 하는 주민도 존재했다.

4.만주국속의 조선인
만주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으며, 이들 친일파들은 많은 수가 한국 독립 이후 정부와 학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다음과 같다.
1.백선엽.2. 박정희.3.박창암.4.박승환.5.이선근.6정일권.8.최규하.9김석범

5. 일본인 이민자 수자
1931년부터 1932년까지 만주에는 59만명의 일본인이 있었으며 그중 10만명은 농민이었다. 잉커우의 인구의 25%가 일본인이었다. 일본 정부는 1936년부터 1956년 사이에 500만명의 일본인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1938년부터 1942년 사이에 20만명의 청년 농민을, 1936년에는 2만명의 가족 이민자를 각각 보냈다. 이같은 이주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 일본군이 동해와 황해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자 중지된다. 종전 후 소련이 만주를 침공했을 때, 85만명의 일본인 이주자가 포로가 되었다. 공무원과 군인을 제외하고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일본에 귀환한다

6. 闯关东
한족들이 동북땅에 조금씩 들어와 살수 있었던 시기는 아마도 300여년전 건륭황제때인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청나라 말엽까지 불과 7~8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관내의 한족들이 가뭄에. 자연재해에 살길을 찾아 관동(关东)쪽으로 들어오다 산해관 역참에서 청군에 잡히기 하면 목을 잘랐다는 기록들이 아직도 여러 곳에 명확하게 적혀져 있기도 하다. 

7. 기타
1931년 일본제국 관동군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을 점령한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선통제(溥仪ㅡ푸이)를 황제로 내세운다(강덕제). 일본 제국에 철저히 종속된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은 1945년 8월 18일 붕괴된다.원인은 소련군이 1945년 8월 19일 ,선양공항에서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를 체포한 뒤 만주 전역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화민국이 이 지역들을 넘겨 받았기 때문이였다.
만주국의 영역은 한반도 및 중화민국, 소련, 몽골인민공화국,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의 괴뢰정권)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강덕제(푸이)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그런 국민국가였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1931년의 만주사변에 의해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이 실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1932년 국제 연맹의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며, 만주 지역은 중화민국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지지하여 일본정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은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직후, 소비에트 연방의 공격으로 인한 일본의 패전과 함께 만주국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명. 청조 두세대에 걸친 만주의 진정한 역사기도 하다. 보시다 싶이 오족협화에는 버젓이 조선인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 당시 만주국 국내에는 100여만명의 조선인들도 선통제의 국민으로 살고 있었던것으로 집계된다. 그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가 1500천만도 채 안되는 정도였다면 거의 10분의 1의 조선인들이 만주국에서 생계를 유지해온 격 ㅡ거의 몇백년간 우리 민족의 만주로의 이주는 과연 우연이였을가 필연이였을가? 지금도 중국 55개 소수민족중에는 200여만의 조선족 동포들도 살고 있는데 이 땅이 낯설고 생소하면서고 더없이 익숙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가?

4.도산 농장
(1) 연수현 조선족 100년史 
동경 128도. 북위 43~45도에 위치한 흑룡강성 연수현은 백년전까지만 하여도 교통이 불편하고 인적이 드문 척박한 땅이였다. 조선이주민들이 빈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수전농사 일궈서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이 곳으로 대량 이주 정착하게 된 곳 ㅡ 2005년, 흑룡강성 연수현에서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한글로 된 조선족 역사서적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를 출간한적이 있다. 대략 6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두툼한 책은 중앙민족대학 중국민족이론 민족정책 연구원 원장 김병호교수가 중심이 되어 씌여 진것이다. 
머리말에서 김병호교수는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문자로 출판되는 한 현의 조선족 력사서적”이라고 언급하고 나서 “몇십명으로 구성된 편찬위원들은 5년이란 기나 긴 시간을 걸쳐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고 취재를 하여 만들어진 책”이라고 집필과정을 간단히 밝히기도 하였다. 
더불어 김병호 교수는 “중국 조선족은 중국혁명투쟁과 동북지역 개척 및 건설에 무수한 피와 땀을 흘렸으며 막대한 희생을 내였다... 그리하여 조선족들의 사회, 력사적 지위에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말하면서 “연수현 조선족 100년사 편찬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근거이자 증거라는 점에서 매우 보귀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흑룡강성의 동남부 로야령산맥 서쪽 송화강 남쪽에 자리잡은 연수현은 지금도 철로가 없다. 1903년 당시 연수현 중화진에 <김고려> 한 세대가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고, 가신진에 <박고려>, 륙단 릉하에 <곽고려>가 살면서 한인들이 하나둘씩 이곳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땅이 척박하고 교통도 불편한 연수현에 조선인이 대량 이주해오게 된 배경은 일제 조선강점과 식민지정책의 영향이 아주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의 소개에 따르면, 토지가 많고 인적이 드물며 일제가 아직 발 붙이지 못한 흑룡강성의 연수땅에 선참으로 정착하게 된 사람들은 대개 조선에서 독립운동이나 의병투쟁에 종사하던 민족의사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2)연수현 조선이주민들의 이주와 황무지 개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말미암아 많은 조선 농민들은 거의 생명의 원천인 토지를 잃게 되었다. 거기에 청정부가 장기간 실시했던 봉금령(封禁令)을 철소하고 황무지 개간을 격려하자 조선의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낯설은 이국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였던것이다. 
1930년 당시 조선 이주민 355세대로 1,821명이 거주하고 있던 연수현은 벌은 넓었지만 이들에게 속하는 토지는 거의 없었다. 당시 길림성(吉林省) 정부에서는 조선 이주민들과의 토지매매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부득불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한족지주들의 토지를 소작으로 부치지 않으면 안되였던 실정이였이다. 
<연수현 조선족100년사>는 이 당시의 조선 이주민 이주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놓고 있다. 
1934년 설립된 고려민회의 활동으로 <가신흥농회> 김영창 회장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연수현에서 손 꼽히는 곡창ㅡ 가신농장을 일구어낸 이야기, 1931년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8.15>광복전까지 일제의 강제 이민과 자유분산 이민정책으로 조선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연수현으로 대거 들어오게 된 과정 등도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소개에 따르면 연수현으로 조선인들이 대량 이주 정착한 시기는 1933년부터 1942년까지의 짧은 기간이라고 적혀 있다. 1934년 연수현에는 조선이주민들의 사무를 자체로 처리하는 조직인 <고려민회>는 연수현으로 찾아오는 조선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황무지를 개간해 주었다. 연수현의 조선이주민 인구를 살펴 보면 1930년에는 355세대 1,821명 이었지만, 1942년에는 2,180세대로 12,060명 ㅡ현재 도합 16개 자연마을(촌)이 있는데 그 구성을 살펴보면, 평안도 출신이 많이 살고 있는 반룡촌(성광), 경상도와 평안도출신이 많이 살고 있는 동명촌(창유광),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조양촌, 석가촌(문화), 우지미, 장흥촌, 화로촌, 함경도 출신이 많은 리가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이민 마을 도산구촌, 태평촌, 경상도 마을 유민촌, 리민촌, 동덕, 태화, 호가촌,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장유촌, 팔달촌, 평안도 경상도 출신이 많이 사는 흥륭진, 양가리, 최가자리 보홍촌, 전라도촌이나 다름 없는 중화진 량지툰 등등 이다.

2. 연수현 신립구 도산농장의 역사
1940년 2월 연수현 조선 이주민 권력가인 신완,신춘 형제는 조선총독부와“만선척식회사”를  끼고 조선으로 들어 가 사람들을 모집하여 연수현 신립구 도산에 집단 이민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적극 활동했었다.그들이 신립구를 선택한것은 그곳에 수전을 개간할 잠재력이 많았던것이였다.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두 형제는 조선총독부 관원과 결탁하여 함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지역에서 “중국 상해 기술이민”을 모집한다는 거짓 광고를 내 붙이면서 가는 곳마다 기만술책을 썼던것이다.
예를 들면ㅡ 중국은 땅이 흔하고 농사가 잘 되기때문에 먹을것이 걱정 없다ㅡ 자기 기술 능력에 따라 몇해만 일하면 돈을 모을수있다ㅡ가는 로자와 첫해 식량을 대여해주니 생활에 걱정이 없다ㅡ등등 이러한 선전은 기아에서 허덕이던 파산 농민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가장 큰 희망이자 크나 큰 유혹이 아닐수가 없었다. 하여 너도 나도 앞 다투어 지원에 나서게 되였다.말 그대로 기술 이민을 모집한다기에 목공, 철공, 건축공, 교원, 의사 등 여러가지 업종에 종사하는 전문 기술일군들과 많은 농민들이 대량 신청하였다. 결국 신완. 신춘 형제의 속심대로 되였는데 몇달 사이에 벌써 농민 300세대가 거의 모집되였던것이다.그해 3월 한집에 한 사람씩 먼저 선발하여 이주 준비를 실행한다는 명의로 그들 형제는 근 200여명의 조선인들을 끌고 북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근 일주일이 걸려서야 주하,(珠河)즉  오늘의  상지역에도착한 그들의 몰골은 피난민이나 다름없는 몰골들이였다. 완행렬차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한주일동안 배을 곯으며 시달리보니 모두 심신이 지치고 행색이 더없이 초라하였던것이다. 북만주의 3월은 제대로 잔설이 녹질 않아 겨울의 맴짠 추위는 조금 사라졌으나 아침 저녁으로 불어치는 시베리아 찬 바람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은 홑옷 한벌만으로는 가혹한 봄추위를 견디여야만 하였었다.게다가 여로의 시달림으로 인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큰병을 앓고난 사람들처럼 신체가 모두 너무 허약하였다. 그들은 미리 준비된 고무바퀴 마차에 제각기 허름한 보따리를 주어 싣고 이튿날 밤중에야 목적지인 신립구 도산툰에 도착할수가 있었다.
신립구 도산툰은 연수 현성에서 동북으로 9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경128도 북위 43,45에 위치한 해발 400메터의 높은 산간지대이다.여름이 짧고 가을에 서리가 일찍 내리는 곳에 논을 개간하려고 신완. 신춘형제는 조선이주민을 여기까지 끌어 들였던것이다.
일군들은 몇집이 한곳에 모여 밥을 끓여 먹기도 하고 힘든 일을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가옥을 짓는데 남녀노소가 전부 총동원되였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로동이 힘든데다 매일 뜬 좁쌀과 통강낭이에 소금과 된장만 먹다보니 영양실조로 하여 앓아누워 며칠씩 일을 못하기도 하였다,허나 고향에 두고온 처자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이를 악물고 견디여만 하였다.
실농군들은 앞장 서 논을 풀고 볍씨를 제철에 연수벌에 뿌렸다.한편으로는 밭을 개간하여 콩 , 강냉이와 남새를 심을 차비를 하면서 될수 있으면 땅을 많이 부치려고 모두들 갖은 애를 썼었다. 제집이 있으며 땔 나무가 있고 땅이 많으니 많이 심으면 팔자 고칠줄로만 알고 부지런히 일하였던것이다.여름이 되니 산골짜기에 모기가 어떻게나 많았던지 쑥을 얻어 불을 달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모기 성화에 시달리면서도 논김과 밭김을 매며 한알의 곡식이라도 더 거두려고 이주민들은 모진 애를 다 썼었다. 
어느덧 9월이 되였다 그들은 신완 형제를 따라 가족을 데려 오려고 조선으로 떠났다. 이미 이민을 결정했고 또 먼저 가서 집도 장만했고 농사도 지어 놓았으니 가족을 데려 오지 않고는 “만석척식회사”의 빚을 도저히 갚을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하여 신완형제를 따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1,500명이 또 북행 완행렬차에 싣게 되였다,북만의 9월은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산골에 서리가 내리는 날씨다 . 단벌옷을 입은 이민들은 보짐을 풀어 헤치고 이불까지 꺼내 덮어 썼었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얼마나 달려 왔던지 컴컴한 밤중에야 목적지에 겨우 도착할수가 있었다. 보짐을 찾아 들고 제집이라고  찾아 들어 콩기름 등잔에 불을 밝히고 아궁이에다 장작불을 때서야 집안에는 온기가 돌았다.기나 긴 여로의 피로에 다들 인차 잠에 곯아 떨어졌었다.한 밤중에 잠을 깨여 들어보니 승냥이 울부 짖는 소리가 사처에서 들려왔다고 한다. 집앞에 심어놓은 콩. 옥수수. 남새들은 제법 풍년였다.먼저 와서 준비한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땅이 흔한 곳이였다.이국 타향에 와서 지은 농사에 드디여 첫 낫을 대게 되였다, 그러나 기름진 땅에서 자란 밭곡식들은 만족스럽게 잘  되였지만 논 농사는 미숙이 가서 청초판이 되고 말았다.논 농사가 이 모양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 가야 할지 모두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또다시 시뿌옇게 뜬 좁쌀에 통 강냉이를 대여해 먹지 않을수가 없었다.그때로부터 남자들은 산에 올라가 숯을 구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1941년 일제는 조선이주민들이 동녕현 수양진일대 국경선에서 사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일제는 그곳에 사는 조선 이주민 25세대를 도산농장에 강제 이주시켰다.이처럼 도산 농장에 인구가 늘어나고 아이들이 많아지자 중문에다 6년제 공립 국민우급학교를 세우고 학생 200여명을 받아 들여 일제식 세뇌교육을 시작하였다. 학교에서는 일본 성씨로 창씨 개명한 구레야마 교장과 가야마 등 선생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신완형제와 농장에서는 툰에 구장을 두어 마을 행정을 관리하게 하였고 농장엔 다시 관리원,지도원을 두어 농장 사무를 관할케 하였다.그때 형인 유치진을 따라 북민주에 온 청마는  도산농장 관리원 직을 맡았던것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신완형제는 이민 마을에서 농사일을 감독할뿐 아니라 농장원들이 타지방으로 이사 못가게 막았으며 산에서 활동하는 항일부대와 련계가 있을가봐 늘 이주민들의 사상동태와 신원을 감시하는 한편 농장처녀들을 외지총각과 결혼하지 못하게 제도를 세우고 함부로 외출을 못하도록 금기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농장서쪽으로 몇리 떨어진 곳에 전부 무장한 위만 경비병들을 주둔시키고 마을을 보호한다는 명의로 이주민들을 감시 하였던것이다.
 1944년 까닭 모를 질병이 농장에 돌았는데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었다고 한다 후에야 장질부사란 전염병이였음이 밝혀졌지만 청마도 그때 하나뿐인 외동아들을 잃게 된다. 위만 경찰들은 마을과 마을간에 통행금지 시켜놓고 래왕을 아예 못하게 하였다.죽은 사람이 늘어가고 장례도 못 지내지 못하고 그냥 묻을수밖에 없었다.그 몹쓸병에 걸려 원한 품고 쓰러진 원혼들의 무덤이 지금도 가신촌 뒷산에는 총총하다고 한다.그들은 이렇게 빚더미에 눌리워 한평생을 운명에 맡기고 실망속에 살다 원혼이 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투항한후 이들도 해방 받았다. 하지만 해방 받은 기쁨도 잠시ㅡ 오래 가질 못했었다.사처에서 토비무리가 우글거려 민심이 황황하였던것이다.농장에서는 인심을 안심시키려고  자체로 마을을 지키자며 보초를 두었다.그러나 토비들은 두번이나 쳐들어와 마을의 물건을 몽땅 털어갔었다.반항하던 몇사람은 놈들 손에 죽기까지 하는 사고가 비일비재하였다.농장관리원은 이민단 전원을 동원하여 리가점이란 곳으로 떠나갔다.해방과 더불어 신완형제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농장관리원이 이주민들을 끌고 이가점으로 온후 관리원은 그길로  조선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아마 우리가 중국에서 살펴 볼수 있는 청마의 제일 마지막 행보인듯 하다.
 (연수현조선족백년사 제 1편 제 2장 “연수현에로의 조선이주민들의 대량이주와 정착” 의 1 부분 “연수현 신립구 도산농장 이민사”)
만주에 있는 동안에 청마는 북만주의 여러 곳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거주지 연수를 중심으로 만주벌판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느낀 바를 시로 표현했다. 「합이빈 도리공원(哈爾濱 道裡公園)」,「우크라인나 寺院」,「극락사 소견(極樂寺 所見)」,「사만둔 부근(沙曼屯 附近)」,「곽이라사후기행(郭爾羅斯後旗行)」,「빈수선(濱綏線) 개도(開道)에서」, 「오상보성외(五常堡城外)」 등 작품들이 그것이다. 
지명을 시의 제목으로 삼는 것은 청마 만주 기행시의 특징인데 시 제목에 나온 지명을 통해서 청마가 다녔던 곳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즉 청마가 만주에 있는 동안에 연수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하얼빈을, 남쪽으로는 오상(五常)을, 서쪽으로는 곽이라사(郭爾羅斯)를, 동쪽으로는 개도(開道)를 여행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합이빈 도리공원」,「우크라이나 사원」,「극락사 소견」,「사만둔 부근」은 하얼빈과 관련된 작품들이고, 「오상보성외」는 랍빈선(拉濱線)의 중간점에 있는 오상시(五常市)와 관련된 작품이고, 「곽이라사후기행」 시 3수는 당시 빈강성과 길림성(吉林省) 경계선에 위치하는 몽골족(蒙古族) 부락에서 본 풍경을 노래하는 작품이며, 「빈수선 개도에서」는 빈강성과 목단강성(牡丹江省)의 경계선에 위치한 조선인 마을과 관련된 작품이다. 61) 유치환,『청마 유치환전집ㆍ3』,

5. 애국자인가 친일파인가?
(1)청마 유치환 시인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하얼빈 연수 땅에서
 청마 기념사업회(회장 김운항)과 회원님들이  청마 유치환의 발자취를 따라 머나 먼 북방 땅 연수를 찾아 오면서부터 필자는 처음으로 청마 가족분들과 만날수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청마기념사업회 전임 회장이신 이금숙 회장님의 소개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약 3년전에도 이미 연수에 다녀갔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필자는 이분들이 오신줄을 전혀 알지를 못하였다.아마도 필자가 심양이란 먼곳으로 이주해갔다가 다시 상지로 돌아 온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였던것 같다.한국문단의 거목이고 생명파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청마 유치환님의 존함은 필자에게도 결코 낯선것이 아니다.그것은 90년대 초엽 그분의 시집 “파도야 어찌라느냐?”를 읽으면서부터 그분의 존함을 익히 알게 된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그분께서 1940년 4월부터 1945년 6월까지 필자가 태여나서 자란 연수땅에서 생활한적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여서부터 “연수현 조선족백년사”의 문학인 코너 제일 앞부분에 그 분의 존함을 새로이 별도로 모셨고 2010년, 여러 시인님들과 함께 “중국 코리아 명시정선”을 펴낼 때에도 광복전 만주땅에 거주하였었던 재만(在满) 조선인 시인 명단에 그분의 성함과 시 작품을 따로 편집해 넣기도 하였었다.
허나 그 당시 사료의 부족,그리고 그때까지도 그분 가족들과의 상봉이 없었던 등등 여러가지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비하여 그분에 대한 소개가 너무 미홉하였던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대표작은 물론 사진 한장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기에 지금도 아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연수땅에서 그분의 거주지마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여 그분께서 줄곧 도산농장에 계셨던줄로 잘못 알고있었느니 고의적인 외곡은 아닐지라도 명인에 대한 무지였음에 자신을 질타하지 않을수조차 없게 된다. 선인들의 과거를 책임지고 정리한 주요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써 크나 큰 실책이 아닐수가 없었음을 시인하지 않을수가 없다. 청마기념 사업회 회원님들과  함께 청마의 옛 거주지 가신으로 동행하는 뻐스안에서도 여러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그 모든것을 미봉하기엔 남겨진 공백이 이미 너무 큰것만 같았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1940년에서부터 1942년까지는 청마 일가족은 연수현 관공서 소재지인 연수가에서 살았었고 1942년부터 1945년 6월까지 3년의 세월을 가신땅에 사시였다고 한다. 만주에서의 5년의 삶(기실은 연수에서의 5년이다.)에 대하여 유치환시인님께서 쓰신 회억록 같은것을 전혀 접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당시 그분의 삶을 추측하여 보노라면 청마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농장을 관리하고 정미소를 경영한 외에 오직 독서와 창작을 위주로 하며 조용히 일제통치시대라는 험악한 세월을 지내신것 같다. 가신 조선인들의 역사를 손금 들여다 보듯이 잘 알고 있다는 몇몇 년로한 로인들마저도 청마 유치환의 이름에 너무 생소해 하기에 그렇게 미루어 짐작할수밖에 없질 않은가?
사랑하는 외동아들 일향이를 잃은것이 그를 더욱 과묵한 사람으로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마가 형인 유치진의 위탁을 받고 도산농장 관리원으로 있었을 때에도 마찬가지 삶을 살았던것 같다. 1942년 도산농장 삶의 환경은 아주 열악했던 곳이다. 무지와 가난과 질병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때마다 청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였으며 무엇을 고민하였을가? 모르긴 하겠지만 청마도 여러 실향민들과 마찬가지로 망국노의 설음과 크나 큰 울분을 디아스포라적인 향수로 달랬을것이고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하지만 농장 관리원이란 그 특수한 신분때문에 그 진실을 제대로 말할수 없었던것이 우리 편집인원들이 도산농장의 이민사를 집필할 때의 가장 어려운 여건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히여도 모든것을 이데오르기식으로 판단하고 판명하는 흑백 론리가 완전히 사람들의 두뇌를 지배하던 시기여서 바른것을 바르게 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다행이  오늘날은 시대가 바뀌여 그 분의 진실을 이제는 마음놓고 천명할수도 있게 되였으니 이 얼마나 크나 큰 진보인가? 비록 가신의  역사에 그분의 이름을 제일 앞자리에 넣지 못했어도 가신땅은 분명 청마의 발자국이 묻혀있는 유서 깊은 곳 ㅡ 한 지방의 명망은 흔히 그곳에 살거나 살았던 명인들에 의하며 빛을 발산하게 됨으로ㅡ 이제 연수땅은(가신을 포함하여)분명 한국문단의 거목 유치환시인께서 한시기 거쳐했었다는 단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족히 사람들에게 널리 기억되고 떠 받들려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가신땅은 세인이 다 아는 연수현의 곡창이고 연수현에서 조선족이 제일 먼저 와서 정착하였고 또 조선족이 가장 많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다.연수 현성에서도 백여리길 상거,  그것도 자동차도 통하지 않고 마차들만 다녔던 그 세월에 수많은 이주민들이 남부녀대 죽기내기로 가신농장을 찾았던 제일 큰 원인은 대체 무엇이였을가?힌마디로 개괄하자면 그곳에 농사 지을수 있는 땅이 있었기 때문이였다.산 설고 물 설은 낯선 만주땅에 와서 우리 민족이 남들보다 일찍 정착할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발빠른 움직임이였으며 둘째. 떠돌이 이주민들을 안착시킬수 있는 삶의 토대를 마련해준 선구자, 개척자들의 공로가 컸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유치환시인님의 가형되시는 유치진님께서 많은 농지를 사놓고 (처가의 소유)유치환시인님께 관리를 맡기셨는데 이렇게 농사 지을 터전이 있었기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일루의 희망을 걸고 너도 나도 먼길을 찾아 왔던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보면  유치환시인의 가족 역시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땅에 와서 정착할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여 주는데 한몫을 크게 한 한  선구자들이라고 감히 말할수가 있을것 같다.그날 청마의 가족들과 함께 일찍 청마가 경영했음직한 정미소 자리에서 이제는 력사같은건 안중에 없다는듯이 오만하게 우뚝 솟은 높은 굴뚝너머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필자는 새삼스레 청마가 만약 1945년 6월 귀국하지 않았더라면 그 후과는 어떠하였을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그분께서 떠나신후 불과 두달도 채 안되여 일제의 패망과 함께 그처럼 고대하던 8.15 광복의 날이 왔었고 그리하여 조국을 그리던 수많은 백의동포들이 줄레줄레 귀국길에 오르기도 하였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중도에 다시 되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무정부 상태에서 무법천지가 되여버려 도처에서 비적들이 귀국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재물을 약탈하였기때문이였다.
한때 가신농장의 개척자로 학교를 세우고 광복이 되여 제 멋대로 날뛰는 토비들로부터 적수공권인 동포들을 지키려면 무기가 있어야겠다 생각하고 철퇴하는 일본군 부대에 무기 얻으러 갔다가 왜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아까운 생명을  잃은 김영창의 운명을 례외가 아닐수도 있잖겠는가?
비록 몇십년이 지났지만 어쩜 유치환시인님께서 친형의 위탁을 받아 농장을 관리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실제 주인이나 다름없었고 정미소까지 경영을 하였으니 그도 지주가 되여 투쟁 대상이 되였을것은 불 보듯이 뻔한 사실이기도 하다.는것은 면치 못했을것이다.그렇게 되였더라면 그분은 물론 그분의 가족 또한 얼마나 긴 세월 고통을 감내해야 하였을가? 필자가 볼바에 유치환님께서 고국을 떠나 멀리 만주에 온 목적은 부자가 되여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성씨마저 개변시키려는 일제의 무단 통치에 항거하는 적의(敌意)에서였던것 같다.비록 조국과 고향을 멀리 떠나와 있었지만 청마는 늘쌍 조국을 그리워 했고 고향을 그리워 하였다. 연수땅에서 쓴 시 “생명의 서”가운데 있는 “향수”와 “비연과 더불어”라는 이 두수만 읽어보아도 그 당시 청마의 심정을 우리는 얼마던지 이해할수 있게끔 된다.

(2.)유치환 시의 '匪贼'이 항일 독립군?
십이월의 북만(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寒天)에 모호히 저물은 호북(湖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律)의 처단(處斷)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四惡)이 아니라  질서(秩序)를 보전(保全)하려면 인명(人命)도 계구(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유치환의 시 <수(首)>의 일부분이다. 
 이 한수의 시가 몰고 온 여파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 일파만파인것 같다. 네어버 블로그에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찾아보니 아주 다양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몇개를 골라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 <실록 친일파>를 쓴 고 임종국 선생은 글의 서문에서 “유치환의 '수(首)’(<국민문학>, 1942. 3) 역시도 거짓말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시가 '친일' 시라고 밝혔다. 
임종국 선생은 “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목이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대륙 침략에 항거하던 항일 세력의 총칭이었다”고 했다. 
이에 통영문인협회 정해룡 회장은 ‘청마의 시 수(首) 새롭게 들여다보기-친일은 가라’(<한산신문>, 2004년 7월 9일자)에서 “비적이 독립군이란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일본 정부 문서 보관 창고’에 가서 당시 북만주에서 독립군을 비적이라 했는지, 그때 효수된 머리 두 개는 누구 누구의 머리인지 기록돼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어 그 주장을 입증해야 객관적인 타당성이 확보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비적이 독립군이다’고 애매모호하게 흘리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 글은 ‘비적’이 항일 독립운동가인지 아니면 정해룡씨 주장대로 “글자 그대로 떼 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인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또 이를 통해 일제가 북만주에서 단순한 도적 무리를 비적으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비적을 항일 독립운동단체로 보는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한다. 
1939년 만주국 만철사원회(滿鐵社員會)에서 발행한 <만주사전>은 '비적(匪賊)'을 시기별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비적'은 만주사변 이전인 옛 동삼성(東三省)시대 마적(주로 몽고족)으로 “호자(胡子)·호비(胡匪)·홍발자(紅髮子)”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마적을 ‘비적’이라고 했다. 
한인(漢人)이 만주에 들어와 마적 또는 비적이 되는 연혁을 이 사전은 4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1기는 한인이 몽고족(몽비) 등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의 자위 기관으로서 기마대가 발생한 시기다. 2기에는 마을 주민의 자위기관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마을에서 독립된 용병단 형태를 띠는데 마을 방위 임무는 그대로 인수된다. 
1기와 2기의 방위단은 마대(馬隊)를 조직해 만주의 산야에서 활동했는데 부랑성이 강한 청년들이 많이 참가했다. 

▲ 1939년 발행된 <만주사전>에 나온 '비적' 규정 
 3기에 들어서면 1·2기와 달리 식민지 특색이 없고 마적화 돼 소위 토비(土匪)로 바뀌었다. 당시 마적은 모리배 호자(산적), 대가 호자(大街胡子, 도시마적)로 나뉜다. 모리배 호자는 산림을 채벌하면서 주로 여행자를 강탈하는 강도 수준이었다. 대가 호자는 사람을 납치하는 전문 마적들이었다. 
 마지막 4기에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 발생한 항일세력들이 ‘비적’의 범주에 들어갔다. 당시 일제와 만주국은 9·18사변(만주사변) 이후 봉기한 옛 동북군계의 항일군(抗日軍)을 병비(兵匪) 또는 정치비(政治匪)로, 토착 종교 세력의 항일군을 종교비(宗敎匪) 또는 회비(會匪)로, 한인(韓人) 민족주의계 독립군을 선비(鮮匪)로, 마적계(馬賊系) 항일(抗日)부대를 토비(土匪)로, 그리고 중국 공산당계 유격대를 공비(共匪) 또는 사상비(思想匪)로 구분했다. 
이는 유치환이 하얼빈 주변에 거주하면서 시 '수'를 지어 비적을 비난한 때와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4기에 해당되는 '비적' 규정에는 산적이라든지 도시 마적은 없었다. 
이는 1933년 1월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중공(中共) 만주성위(滿洲省委) 각급 당부(各級黨部)에 보낸 서한 (소위 일월서간(一月書簡))에서도 확인된다.
중국 공산당은 이 서한을 통해 여러 항일부대와 통일전선(統一戰線)을 강조했는데, 그 성격을 4가지로 구분했다. 
1. 순수 구 길림군계(吉林軍系) : 장학량(張學良) 휘하 장령(將領; 마점산, 이두, 정초, 소병문, 주제청 등)이 지도. 
2. 왕덕림(王德林) 부대 등 반일의용군(反日義勇軍) : 대부분 농민·노동자·소자산 계급으로 구성. 
3. 농민유격대(대도회·홍창회·자위단) : 소자산 계급·지식 분자도 참가하지만 대부분 농민. 
4. 적색(赤色) 유격대 : 공산당 지도 하의 노동자·농민·혁명 병사 등으로 구성
1과 2는 일제 규정에 따르면 병비 또는 정치비이며 3은 종교비 또는 회비가 된다. 4의 경우 공산당 영향력이 강하면 공산비 또는 사상비로 분류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토비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일제가 한국 독립군을 비적이라 일컬은 자료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30년대 이청천·이범석의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도 선비(鮮匪)와 병비(兵匪)로 꼽고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37년 6월 4일 보천보 전투에 참가한 동북 항일연군 제1군 제6사 김일성 부대를 비적(共匪)이라 했으며 32년부터 40년까지 항일 유격대장을 지낸 안상길(安尙吉, 1907~1947) 부대도 비적으로 지목됐다(만주국정황관계잡찬, <비적 동정과 토벌 상황 관계 1(匪賊動靜竝討伐狀況關係 1)>
그러므로 정해룡씨 지적처럼 "비적이 독립군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주장"이 아니다. 일제와 만주국이 지칭한 비적은 항일 반만주국 저항단체였다. 

만주국의 적은 '비적’ 
▲ 1942년 발행된 <건국 10년간의 제반업적>에 나온 '비적' 규정 ⓒ
일제의 '비적' 관련 문서 868건 정도가 일본 국립 공문서관(公文書館)에 있다. 그 대부분은 유치환 시인이 살았던 길림성과 하얼빈 지역 자료다. 
<건국 10년간의 제반 업적(建國 十年間の 諸般業績)>(일본외교협회, 1942.5)을 보면, 주일 만주국 대사관 참사관 산이무부(山梨武夫)는 '비적'에 대해 “공비(共匪), 토비(土匪)로 나뉜다”고 했다. 
또 “작년 4월 국군(일본군과 만주군)을 정비해 토벌을 강력 추진하고 있다”며 “만주국 발전은 병대를 정비하고 비적을 토벌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는 만주국 최대 현안으로 치안을 꼽은 것이며 이 가운데 최우선은 '비적 토벌'이었다. 41년 4월 일본군의 '비적 토벌' 자료에는 하얼빈을 중심으로 ‘공비군(共匪軍)’을 토벌하는 지도까지 들어 있다. 
▲ 1943년 3월 하얼빈 중심으로 항일세력을 토벌했다는 작전도. ⓒ
이 토벌은 해방까지 이어진다(<4월에 있어 공산비군 태세 요도의 건(4月に於ける共産匪軍態勢要圖の件)>(쇼와 16년, <육만밀대일기(陸滿密大日記)> 제 8호, 1941. 4). 이 책에는 41년 3월 30일, 4월 27일, 5월 26일 일본 관동군이 하얼빈 인근 항일단체를 토벌했다고 돼 있다. 
또 42년 1~3월 2만명의 항일 세력(共匪)을 토벌했으며, 43년 4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하얼빈 주변 토벌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만주국 정황 관계 잡찬(滿州國政況關係雜纂), <치안 정황 관계(治安情況關係)>, 1943). 또 43년 2월 하얼빈시는 공비 세력 소탕을 위해 경무청 경제보안과를 설치하고 토벌 작전을 벌였다. 
유치환 시인이 40년 6월부터 해방 직전까지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할 당시에도 주변에서 '비적 토벌'이 이어졌음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일제는 “39년부터 연수현 등 북부 7개 현과 동남부 4개 현을 '특별 중점 지구'로 지정하고 공비를 토벌하고 침략을 막았다”고 했다(일본정치문제조사소, <만주행정경제연보>, 1941). 
이처럼 일제 문헌에서 '비적'은 단순한 '도적 무리'가 아닌 항일 운동가를 지칭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유치환의 시구에 나오는 '비적의 머리 두 개'도 항일운동가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어이 없이 갖다 붙이기 식이라고 밖에 더는 다른 해석조차 필요 없을듯 하다. 실향민 ㅡ 망국노ㅡ무정부 주의 자ㅡ 끈질긴 생명의식과 허무주의를 지향한 청마가 그 당시 불순분자들의 속칭 ㅡ "비적"을 그대로 비적이라고 썼을 뿐인데 뭐가 문제가 된다는것인지 필자로서는 도무지 알수조차 없다. 연변대학 김관웅교수는 평론에서 청마의 (수)에서 성밖에 매달린 수급은 항일투사 홍××의 머리라고 암시하였고 또 다른 일설에는 중국의 항일영웅 조상지의 인두라 해석하고 있다. 어찌 됐던간에 그 문제는 몇십년이 훌쩍 지난 후의 후설일뿐 . 
그 당시 상세한 내막을 알수 없었던 보통인들에게는 비적이 틀림없었다. 긍정적으로 해석할수 있는 한가지는 청마가 항일투사들을 비적으로 지적하여 시를 만들진 않았다는것이다.  " 수" 에서 청마가 친일파라는 증거들은 아무래도 너무 억지성을 띠는듯 하다. 명목(瞑目)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다"(瞑目:闭目凝神)로 해석되여 있었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계구같은 망국노의 서러운 생명ㅡ즉 (나도 언젠가면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수급이 성밖에 내걸릴 수도 있다) 불안함과 위협을 느꼈을때의 정서적인 발로가 분명하며  / 힘으로써 힘을 제함은 또한/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원시"인데ㅡ힘으로써 힘을 제하는 일제의 야만성에 대한 폭로임이 틀림이 없고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다시금 생명의 험열함과 그 결의(决意)를 깨닫노니/에서 특히 주목되는 시어는 험열과 "결의" 인데 여기서 "결의"는 소위 비적이라고 문제거리가 된 "비적"들의 정의로운 죽음에 대한 경이로움이 틀림없어 보안다. 제일 마지막 연에서 /끝내 다스릴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하라/ 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스릴수 없다" 와 "명목하라" 인데 다스릴수 없는ㅡ에서는 일제마저 다스릴 수 없었던 의지를 나타냄이 분명하고 조금 문제가 될듯한 문구가  " 무뢰한 넋"일수도 뒷이어 "명목"하라ㅡ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 사자(死者)에 대한 찬양이며 축복이 틀림없어 보인다. 또한 명목은 말그대로 사인(死人)에 대한 가장 큰 경이로써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빕니다) 로 높게 표현되기도 한다. 결구에서 /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지고/에서는 하늘에게 은혜를 베풀어 흰옷처럼 결백한 흰눈이라도 내려달라고 간청을 한다. 소위 학자들이라는 분들이 설마 명리에 눈이 어두워 "수"의 참뜻을 정말로 보아내지 못하였던것은 아닐련지? 
"친일이여 가라"와  "보병과 더불어" 등등 많은 애족. 애국 시들을 완성시킨 청마는 광복후 무정부. 허무주의자로부터 진정한 애국자가 되였던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6. 노스탈지어의 노래
노스탈지어ㅡ"노스탤지어"(Nostalgia)와 향수(鄕愁)는 동의어로써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  또는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향수병(鄕愁病, )은 향수를 병에 견주어 일컫는 말, 시인의 경우 노스탤지어는 대부분 창작의 원동력이 되기 한다.일찍 보들레르는 "시의 목표는 미지의 것에로 도달함이며 또 달리 표현하자면 불가시적인 것을 마침내 볼수가 있고 또한 들을수 없는것을 들음" 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1859년 그는 다시금 "상상력은 전체 피조물을 피조물로 분해(decompose)한다. 深远한 영혼의 내부에서 생겨난 그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상상력은 분해의 결과로서 생겨난 그러한 부분들을 수집하고 다시금 분류해서 그로부터 생겨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 가는 것이다.)고
설파한적이 있다.공허한 세계관 초월. 비규범성적인 추구. 불협화음의 새로운 음악성. 애절한 자기성찰. 그리고 환멸의 불꽃으로 더욱 강렬하게 타 오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식. 그리고 저조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허무주의의 그 처절한 극복이  아마도 청마 유치환 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자기성찰은 편렵이 아닌 지성적인 사색을 거쳐 마침내 우리들 앞에 깃발로 펄럭이게 된다.
…   …   …   …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다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선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같은 색씨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거 있나니…(시 ”향수”에서)
이 시에서 " 조을고"ㅡ와 조약돌같이 반질반질 잘 다스른 " 색시의 마음" ㅡ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한폭 또 한폭의 완정한 그림이 채 완성되질 않았으리라 보여진다. 역시 청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일류 시인임이 틀림없다. 지성인의 아픔이 베이스로 제일 밑바탕에 깔리고 음악을 듣듯이 시를 읊노라면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청마의 고향마을이 두눈에 선명하게 보이고 금실 은실이 천파 만파로 부서지는 잔잔한 바닷가. 그리고 세파에 휩쓸려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다가 반질반질 잘 다슬어 앙증맞게 고운 자갈돌을 꼭 빼 닮은듯한 여인의 섬세한 모습이 떠올라 디아스포라의 한(恨)이 우리들을 더욱 슬픈 비애로 이끌어 가고 있는듯 하다.
… …  …
압록강을 넘어
추풍령을 넘어
우리 고장은 경상도 남쪽 끝 작은 항구!
그 하이얀 십자길 모퉁집이
우리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로 계시는 곳이란다
오늘도 광야의 기나긴 해를
먼 고국 생각에 가까스로 보냈나니
제비야 멱머기야 새끼 제비야
오히려 그리움의 적막한 한에
날알 날아 마구 날어라 먼
벌이 저물어 안배도록 날아라
오늘도 머나먼 고국생각에
하루해 보내기 얼마나 힘들더냐
“비연(飞燕)과 더불어” 일부분
시 " 비연과 더불어" 에서는 실락원(失乐园)을 지켜가는 실향민들의 생살을 저며 내듯한 조각된 아픔을 임의로 조제(造制)한것이 아니라 작자 나름대로 사실주의로  박제하였길래 조각조각 부서진 거울조각들이 심방(心房)을 뚫고 여리디 여린 조각된 가슴을 아프도록 찌르게 하여 읽는 내내 청각. 시각. 후각이 아닌 신조의 바위돌에 뽀족한 정을 들이 댄듯 하여 타향살이로 하루해마저 보내기가 힘이 들었을 청마의 울적한 심사를 제일 잘 반영한 한수의 명시라고 보여진다.얼마나 고향이 그리웠고 철새가 부려워 /제비야 멱머기야 새끼 제비야/
오히려 그리움의 적막한 한에/
날알 날아 마구 날어라 먼/벌이 저물어 안배도록 날아라/오늘도 머나먼 고국생각에/
하루해 보내기 얼마나 힘들더냐/로 표현하였을가? 이 시는 어느 헤나른한 정오. 큼직한 바위돌 아래 홀로 앉아 남으로 날아가는 철새들을 바라보며서 고향을 그리워 했을 청마의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듯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읽는 내내 더욱 더 가슴 아프게도 한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여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전문이다 .
보시다싶이 "애련에 물들지 않고"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여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고 시인은 삶을 노래하고 있다.바람 세차고 달빛도 별빛도 심장도 없는 바위가 되여 광야에 우뚝 서있는 화자인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壮观이고 현실에 대한 沉默이며 反抗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수가 있다. 허무적인 이상주의와 너무 잘 어울리는 디아스포라적인 침착하고 로련한 자세임을 우리는 그 무슨 니즘을 죄다 떠나서 살갗이 아닌 영혼으로 실감하게 된다. 망국노의 인생은 풀뿌리 같은것이여서 항상 그 밑바닥에는 상처나 아픔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밭 십리 이랑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
석양에 두렁길을 호올로 가량이면
애꿎이도 눈부신 제 옷자락에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
"北方秋色"의 경우 디아스포라적인 그 정서는 아프다 못해 마침내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쓰리고 아리도록 오래동안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번 곰곰히 사색케도 한다./먼 북쪽 광야에 /크낙한 가을이 소리없이 내려서면/ 잎잎이 몸짓하는 고량밭 십리 이랑새로  /무량한 탄식같이 떠오르는 하늘/은 지금도 두눈에 훤히 보이는듯이 북만주 광야속의 시골마을을 보는듯이 그림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 보이기도 하며 /설흔여섯 나이가 보람없이 서글퍼/ 이대로 활개치고 만리라도 가고지고/는 나라 잃고 어디론가 다 접고 훨훨 떠나가려 해도 갈곳이 없는 자의 힘없는 막무가내로써 그 당시의 현실점에 립각하여 작자가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보면 더욱 적당할듯 하다. 필자는 종래로 청마 유치환을 애국주의자  혹은 친일파와 련결하여 생각해본적이 없다. 다만 디아스포라적인 그의 짧은 북만주 행로에서 너무나도 동일한 실향민의 아픔을 공유하고 실감하고 있을뿐이다.

7. 生命의 书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원래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 신전이 파괴된 후, 세계 각처에 퍼진 이산 유태인을 가리켰던 말이다. 그 의미가 확대되어 오늘날 離散을 경험한 민족의 모습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곧 디아스포라는 이산의 과정뿐만 아니라 이산 민족들,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하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한민족의 離散은 시대마다 가난,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지속되어 왔었다. 그리고 한민족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라고 하는 20세기 말부터는 세계적으로 이산의 수가 매년 몇배씩 더욱 증가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는 전 지구적 자본화로 인해 디아스포라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세계의 정세와 맞 물려 진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수가 있다.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근대 이후 보편적 삶의 문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살아가야 하는 삶을 강요하고 이러한 현상은 보편화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떠나온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일제 강점시기 조선인 시 문학에서부터 이어져 온 시문학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도 중국조선족 시문학에서는 여전히 고향을 주제로 한 작품이 그 주류를 이룬다.여기에는 고향을 떠나온 존재라는 離散의 역사적인 자각, 그리고 고향 상실이 보편적인 삶의 양상으로 된 현대 의식, 그런 경향속에서 자신의 존재적 뿌리로써의 고향에 대해 생각하며 아련한 그리움을 표출하는 청마의 시 "생명의 서"의 영향을 받은것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가고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을것 같다.

생명의 서 일장(一章)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붓기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요점 정리
성격 : 상징적, 의지적, 남성적, 관념적, 독백적
표현 상의 특징 : 이 시는 단호하고 웅변조의 말투로 씌여졌으며 이 시적인 자아를 주관적이고 의지적인 관념을 독백적인 형식의 목소리러 표출하고 있다. 

구성 : 1련  - 생명과 인생에 대한 문제 제기 :                         삶의 출발
         2련  - 자아의 내면적 갈등의 상황 설정 : 삶의 수련
         3련 - 자아의 의지와 가능성의 표명 : 삶의 시련
주제 : 원시의 본연한 자아 추구 의지 또는 생명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

 어휘와 구절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나의 지식으로도 삶의 본질이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생명과 인생에 대한 짙은 회의를 해명하지 못하고
삶의 애증 : 삶에 대한 애착과 증오
병든 나무 : 고민하고 시달리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현실적 자아의 모습
아라비아 사막 : 극한적인 시련과 고난의 장소이며, 삶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장소(역설적 공간) 일상적인 삶의 무력함과 허위에서 벗어나 자아의 생생한 실존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 인간의 기성 관념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 상태 그대로의 장, 극한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치열한 생명 탐구의 대결의지를 드러냄 .
백일 : 태양. '근원적인 생명력'과 '일체의 멸망'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지님.
영겁 : 영원한 세월
허적 : 허무와 적막
알라의 신 : 고민하고 방황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 '신'은 전지 전능한 절대의 존재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적 자아와 마찬가지로 실존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인격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열사의 끝 : 뜨거운 모래 사막, 시련과 고난의 극한 상태
열렬한 고독 가운데 /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 일체가 사멸한 공간 속에 적라라한 자아의 실존적 존재를 드러내면. 삶의 본질을 호도하는 일상에서 홀연히 벗어나 본연의 생명을 마주하려는 열망
'나' : 원시의 본연한 자태 = 나의 생명 =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아
        현실적 자아가 추구하는 대상(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으로서의 자아)
회한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뉘우침과 후회없이 죽음을 택하리라. 생명 탐구에 대한 결의 고조(의지적 대결 정신), 기어이 깨우치고 말겠다. 백골 = 죽음

이해와 감상
고민, 좌절, 절망의 끝에서 허무 의식을 떨치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를 노래한 시. 시인은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번민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대결의 공간으로 사막을 설정하고,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렬한 고독'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의 세계에 자신을 바치겠노라는 비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여기서의 참된 `나'란 세속에 물든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 를 넘어서서 성취하고자 하는 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으로서의 자아'라 할수 있을것이다.
유치환의 시는 관념적인 문제를 엄숙하고 웅장한 남성적 독백조로 표현한 것이 많은데 이 작품 또한 그런 계열의 대표적인 시이다.  김흥규님의 이 시에 대한 전반 해설이다.헌데 읽고 나면 웬지 허전하고 어딘가 석연찮은 그런 구석이 너무 많다. 왜 그럴가? 필자가 보건대 김흥규님은 망국민의 설음과 디아포라적인 悔意. 즉 그 진한 아픔을 알지 못하였기에 접근이가능한 가장 편한 방법론적으로 문법, 문체에 접근하여 쉽게 해석하려 한것 같다. 모두 알수 있다싶이 이 시는 청마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인 화자는 생명에 대한 회의와 애증. 갈등 등을 절대의 고독 상태로 돌아가서 '나'(나와 '나'와 직접 대면시킴으로써 생명의 본질에 더 한층 가까이 다가서려는 열망과 비장한 의지를 그려 내고 있는것이다.
그라스도 동방교회에서 사막의 교부라 불리우는 이들은 하느님(神)을 찾아서 이 세상의 부와 명예, 관계들을 끊고 스스로 고독을 찾아 사막의 동굴이나 바위틈 같은 곳에 거처할 곳을 정하고 거친 음식과 불편한 잠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스스로 황량한 사막을 고독을 선택하는것일가? 그 무시무시한 사막의 거대한 침묵속에서 그들은 내적 고요에 머물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고 신을 만나기 위하여서 였던 것이다. 이런 수행자들의 수행이 오늘날 서방의 모나키즘( 수도원의 제도)으로 정착되였고 많은 이들이 불가(佛家)에서처럼 출가하여 묵상과 기도에 열중하였던 그러한 까닭은 오직 영적인 신앙생활과 비밀의 봉인(封印)을 남겨 두고자 하였던 침묵과 겸손의 자세였던것이다. 
하우스 헬 교부는 ( 우리는 구원과 완덕을 너무 분리시켜 생각한다. 믿음을 가진 선조들은 구원의 개념안에 완성의 개념을 포함시켰으며 그것의 총체성, 완전한 건강, 결점 혹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뜻하는 소테리아( soteria) 말 그 자체에 의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우주는 하나의 궁창(穹苍)이라는 말이 있다. 
궁창이란 하나의 거대한 구멍을 뜻한다. 그래서 우주는 여성의 자궁을 의미하기도 하며 생명을 품는 곳이기도 하다. 태초의 어둠에 쌓여 신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눈 긴 터널과도 같은 그 구멍은 무(无)에서 유(有)로 , 유에서 무로 통하는 긴 탯줄이기도 하다. 
... ... ... ... ...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에서 찾아 볼수 있는것은 종교 신앙 내지 해탈을 위한 그러한 이상적인 용기를현실에 대한 불만에 빗대고 심층 미화한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청마의 시에 빈번히 여러번 등장하는 '원수'는 대체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얼핏 보기에는 제도적 부조리. 또는 일제와 독재 정권과 그에 빌붙어 아유구용(阿諛苟容)하는 세력들인것으로만 잘못 오인할수도 있지만 기실은 선악이원(善恶二元)의 심각한 절규로써 진선미(真善美)ㅡ 즉 자아 본성, 인성을 파 헤치려는것으로 보는것이 더욱 타당할것 같다. 그러한 지성적인 사색은 자신을 흔들어 남도 깨우쳐 주려고 한 "생명의 서" 제2장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것 같다.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地벽) 알타이의 기맥(氣脈)이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 닿았음과 같이
오늘 나의 핏대 속에 맥맥히 줄기 흐른
저 미개적 종족의 울창한 성격을 깨닫노니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의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
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었도다
내 오늘 인지(人智)의 축적한 문명의 어지러운 강구(康衢)에 서건대
오히려 미개인의 몽매(夢寐)와도 같은 발발한 생명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러르면 광명에 표묘(漂渺)한 수목 위엔 한점 백
운내 절로 삶의 희열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만만한 투지를 준비하여 섰나니
하여 어느때 회한 없는 나의 정한(精悍)한 피가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를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

생명의 서 제2장 전문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地벽) 알타이의 기맥(氣脈)이/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닿았음과 같이/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알타이계라는 그 깊은 뿌리 찾기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민족은 스스로 둘러놓은 울타리ㅡ 즉 울바자를 서슴없이 허물어 버리면 결코 약소민족이 아님을 떳떳이 드러내고 있는것 같다. 그 아래 구절에 등장하는 미개 종족,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은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라고 일목료연하게 동이민족(东夷민족)의 역사를 마치 두눈에 보이는듯이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의 아래 구절에서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를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는 굴할줄 모르는 민족의 기개ㅡ 즉 저항 정신임을 누구나 쉽게 알수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미하는 "원수"는 오직 두가지일뿐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 아니면 부패 무능한 정권에 대한 분노ㅡ오직 이 두가지로 밖에 다른 해석들은 모두 빛 바래여 가는듯 하다.

8. 연수벌에 심어 놓은 문학의 뿌리
일제 패망 두달전 청마 유치환이 귀국한후 연수현 조선족 역사는 아느덧 장장 백년이라는 기나 긴 시간이 흘러 왔다. 민족이 있는 한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문학과 전통, 세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조선족문학의 기원에 대하여는 대체로 우리 민족의 이주초기부터 보는견해, 1910년대로 보는 견해, 1930년대 문학동인단체 «북향회»의 설립으로부터 보는 견해, 해방후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성립으로부터 보는 견해 등으로 다양하다. 
조선족문학의 기원을 이주로부터 보는 견해는 구비문학을 념두에 둔것이고 1910년대 전후로 보는 견해는 서사문학을 념두에 둔것이고 1930년대«북향회»의 설립으로부터 보는 견해는 문단과 문학의 성격이란 내적시각에서 본것이고 해방후로 보는 견해는 속인주의와 국가주의 시각에서 보는 견해라고 할수 있다. 
조선족문학에 대한 史적인 연구도 연구자의 시각과 장르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질수 있다. 구비문학과 서사문학을 다 포함하여 연구할수도 있고구비문학만 다루거나 서사문학만 연구할수 있고 서사문학중에서도 소설과시만 다루거나 소설, 시, 산문을 함께 다루거나 소설, 시, 산문, 극문학을 다룰수도 있고 거기에 아동문학, 비평문학까지 포함시킬수도 있다. 
구비문학은 우리 민족의 이주사와 함께 시작된 문학으로 보아야 할것이고 서사문학의 경우에는 1910년대 전후로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따라서 조선족문학에서 구비문학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과 위치를 차지하며 진정한의미에서의 조선족문학은 구비문학과 서사문학을 다 망라한 문학이다. 때문에 조선족문학을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그 기원은 응당 이주초기로 보아야 할것이며 본 문학사는 조선족문학의 기원을 이주초기로 확정하였다.
 청마 유치환의 시중에서 필자는 "깃발" . "생명의 서"외에 북만주 땅 연수에서 써내였을 "思乡"을 제일 좋아하고 있다 .
향수는 또한 
검정 망토를 쓴 병든 고양이런가. 
해만 지면  은밀히 기여와 
나 대신 내 자리에 살짝 앉나니. 
마음 내키지 않아 
저녁상도 받은양  밀어놓고 
가만히 일어나 창에 가 서면 
푸른 모색의 먼 거리에 
우리 아기의 얼굴같은 등불 두엇! 

쓸쓸하고 안타까우리만치 한적한 마을의 풍경. 실향민의 忧愁와 고통을 가장 잘 반영한 한폭의 그림이라고 밖에 달리 더 뭐라고 표현할수 없을만치 간결하고 넘 생동한 만주국 조건족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또한 나약한 지성인의 디아스포라적인 향수ㅡ 즉 노스탈지어의 노래이며 상처이고 恨임이 아직도 우리들의 두손에 살갗으로 뚝뚝 묻어나는듯 하다. 청마가 살았던 연수현은 1860년대까지만 하여도 인적이 아예 없는 황무지였다. 이 지역은 황제의 수렵장(狩 場)이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법에 따라 한인(漢人)의 진입을 금지했었다. 함풍(咸豊)11년(1861년)에야 비로소 금령이 해제되고 관내의 유이민(流移民)들이 이 곳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광서(光緖)26년(1903년)에 청나라 정부가 지금 흑룡강성의 연수현와 상지시(尙志市) 전역, 방정현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에 장수현(長壽縣)을 설치했다. 민국(民國)3년(1914년)에 사천(四川)성의 장수현과 이름을 중복했기 때문에 동빈현(同賓縣)으로 개명했다. 민국(民國)18년 (1929년)에 동빈현 경내에 위치하는 마연하(螞蜒河)와 장수산(長壽山)이라는 산과 하천의 이름의 두 번째 글자를 뽑아서 연수(延壽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수현의 행정구획이 몇 번 바뀌였지만 연수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해하여왔던것 같다.가신촌은 마연하와 양주하(亮珠河)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원래 “협심(夾心,중간에 끼인것)”이라고 불렸던 곳이었는데 그 이름이 나중에 협신(夾信), 가신(嘉信), 가신(加信)으로 변하게 되였던것이다. 가신은 수리(水利)가 편리한 평원지역이라서 1940년대부터 이미 벼농사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원래 만주의 벼농사는 조선 이민에 의해서 개시된 것임을 현재 중국정부도 부인하지 않는 상횡이기도 하다. 기록에 의하면 1910년 이전에 연수에는 조선 사람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파고려(巴高麗)라고 불린 이 사람이 바로 가신에서 살았다. 
1920년대부터 조선 이민들이 가신 등지에 많이 유입해 와서 지세가 낮은 곳에서 땅을 개척하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던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얘기한적이 있다. 그후 조선인들이 계속해서 연수에 와서 미작농업(米作農業)에 종사하였기에 1922년 3월까지 연수현(당시의 동빈현)경내에는 조선인이 모두 423명만 있었으나 1931년에는 1,936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이민정책에 따라 만주국 시기에 더 많은 조선사람이 연수로 이주해왔었다. 1940년까지는 연수현의 조선인인구가 이미 10,585명이나 증가되었다.
만선척식공사(滿鮮拓植公社)에 의해서 연수로 이주한 사람들중에는 경남지역에서 온 사람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연수현의 조선인 가구는 모두 724호였는데 그 중에 300호가 만척이 부산의 구포와 김해 일대에서 모집한 가난한 농민이었다. 유치환의 주변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이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제일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이 중국국적에 가입한것은 건국후이지만 조선족의 역사는 130여년이다. 이미 19세기중엽부터 우리 민족 이주민들은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제2의 고향을 건설하여 살아왔고 중국에서항일과 국내혁명전쟁, 그리고 토지개혁과 지방정권 수립에 참여하면서 오늘의‘ 조선족’ 으로 된것이다. 따라서 그 역사적 행정과정에서 이룩한 문학은 당연히 조선족문학에 속하게 된다. 
더우기 «북향» 제3호 편집후기에 거론된 «간도문단(間島文壇)»이라는 말속에는 경성문단과 대립 개념으로 향토문단을 지칭하는 의미가 있으며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등 서문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을 국민문학(만주국)의 한 범주로 간주하였다. 이 시기 문학은 이미만주조선인문학=조선문학이라는 등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방전 중국에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문학을 다 조선족문학에 귀속시킬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속인주의 원칙에서 해방전 문학을 조선(한국)문학에 귀속시키는 경우, 속지주의 원칙에서 이 시기 중국에서이루어진 모든 우리 문학을 다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귀속시키는 경우, 현지주의 원칙에서 현지에서 창작하고 현지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한정하는경우, 정체성의 시각에서 고국의 문학과 갈라볼수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의특징을 반영한 문학으로 한정하자는 견해 등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것이 김택영이나 신정, 신채호의 문학을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해방“ 만주조선인문학이 조선문학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이 이민문학의 성격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웅은 “ 30년대초 <북향회>의성립으로부터 <재만조선인시집>과 재만조선인소설집 <싹트는 대지>의 출판에 이르는 약 10년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척민문학>〜중국조선족문학의 형성기라고 본다.” 고 주장하여 그 이전의 망명문학을 조선족문학에서
배제하고 있다.
장춘식은 “ 중국에 살면서도 조선족 문화공공체에 합류되지 않았던” 김택영이나 신정, 신채호의 문학이 조선족문학의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보고있다. 
말그대로 망명문학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에 망명한 작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이다. 대표적인 망명작가로 김택영, 류린석, 신정, 신채호 등을 꼽을수 있다. 그들이 중국을 망명지로 선택하였고 중국에서 장기간 문학활동을 하였으며, 그들의 문학이 주로 국권회복, 민족독립이란 민족적인 큰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되지만 또한 망명지 중국에 대한 생각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이미 본토문학과 갈라지고있다고 볼수 있다. 이주민 문화공동체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이들 문학에는 나름대로 망명인으로서의 정체성의식을 보여주고있다. 
때문에 “ 조선족문학의 시점에서 볼 때 망명문학은 재중 조선인 문학의시작이면서 전반 민족문학의 시각에서 보면 망명문학은 또한 조선반도문학에서 분리되기 시작한것” 이라고 볼수 있다. 

蒙旗에 와서
가도 가도
희멀건 하늘이요 끝없는 曠野이기에
어디로 사람이 오고 가는지 알 바 없고
멀 수록 알뜰한 너 생각 依支하고
이 외딴 세상의 외딴 하늘 우러러
나는 家畜과 더불어 살 수 있으리

 (「郭爾羅斯後旗行」본문,《竹筍》제4집, 1947.5)「곽이라사후기행(郭爾羅斯後旗行)」은 시집 『生命의 書』가 발행되기 한 달전에 동인지 《죽순》제4집(1947.5)에 처음 발표된 것이다. 
《죽순》에 발표된 이 텍스트는『生命의 書』에 수록된 텍스트와 본문 부분에 몇 곳의 사소한 차이가 있거니와 본문 앞에 짧지 않은 서문이 있는 것이 가장 현저한 차이라고도 한다. 서문의 내용을 인용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아직도 蒙古旗의 勞力이 남아있는 카클라스後旗는 하루빈서 西北으로 約二00키로 ㅡ 곳곳이 알카리地帶를 잠긴 荒漠한 曠野이나 一九四四年 내가 이곳을 찾은때는 四月이었으나 暗澹한 陰雪에 가치어 曠野속의 命脈같은 한台 뻐스가 이를 헤치고 다닫는 聚落마다 까마귀떼같이 물려드는 남누한 黑衣一色의 사람들은 참으로 原始的 絶望과 悲慘를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旗公署 所在地인 肇源서 六O滿里에 있다는 라마廟를 찾아보지 못한 것을 지금은 아깝게 생각한다
서문에 나온 “카클라스後旗”는 곧 곽이라사후기(郭爾羅斯後旗)이다. 곽이라사(郭爾羅斯)는 고대 몽골부락 “활라랄사(豁羅剌斯)”의 중국어표기이다. 몽골어에서 활라랄사(豁羅剌斯)는 강하(江河)라는 뜻이다. 기(旗)는 몽골부락의 이름뒤에  붙이는 낱말인데 한기는 하나의 몽골부락이다. 청나라초기부터 곽이라사부락은 송화강(松花江)을 경계선으로 곽이라사전기(郭爾羅斯前旗)와 곽이라사후기(郭爾羅斯後旗)로 갈려졌다. 전기는 강남에 있고 후기는 강북에 있는 식이다. 따라서 곽이라사후기는 송화강(松花江) 북쪽에 위치한 몽골부락이라는 뜻이다. 이외에도 청마는 만주땅을 주름 잡으며 숱한 시편을 남겼지만 여기서는 일일히 죄다 짚고 넘어가려 하질 않으련다
청마의 만주기행은 아쉽게도 아직까지 전문가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인것 같다. 허나 그가 뿌린 문학의 씨앗은 분명히 북만주 연수땅에서 민들레로. 풀뿌리로 무럭무럭 자라 왔다. 특히 연수현태생으로서 북방문단의 대표적인 시인들로는 필자는 北方文学의 삼두 마차중 한 가람인 고 한춘시인과 강효삼시인을 첫손에 꼽는다. 이 두분은 그야말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청마의 뒤를 이어 북방문학을 선두에서 꽃 피워 온 선구자이고 개척자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럼 여기서 연수현 태생들인 고 한춘시인의 혜성과 강효삼시인의 시 "고드름"을 살펴보고 가도록 하자

 혜성
한춘
굴레를 벗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방향이 없다
혹은 어디나 다 방향이다
밤이슬 오른 풀잎들이
입을 다물고있다
어둠이 쪼개지는 시각
또다시 끝없는 적막속으로
짧은 옷자락을 태운다
우주 사계절을 쌓아 놓은
페허에서 시간을 략탈한다
무언의 대사(臺辞)를 입은 가사가
지친 조각돌의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 한장을 올려놓다

  지긋이 무게를 눌러주는 이 시는 역시 인생, 인생의 자세, 다각적인 인생에서의 옳바른 길을 제시하여주는 그런 시이다. 헤성은 궤도를 따라 돌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나 밤하늘을 쭉- 가르며 어디론가 자기만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곹추 그 길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방향이 없다. 하지만 갈곳이 또한 너무 많다. 어디 가나 다 미개척지이고 어디나 다 뚫고 들어갈수있는 방향이기때문이다 그래서 길이 더구나 많다.  사상이 있어야 주제가 있고 주제가 있어야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이 이루어잔다고 보여진다. 이 시에서는 바로 혜성의 과감하고 대담한 개척정신을 노래했고 “굴레를 벗어버리는” “남의 말을 듣지않는” 비록 앞에 그 어떤 곤난이 닥쳐도 떳떳이 어두운 밤하늘을 헤가르고 나아가는 그 고귀한 정신을 노래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마지막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한장을 올려놓는다”는 즉 개척하자면 상처를 지니여햐 하는 로고. 위기감이며 사명감을 말하는듯 하다. 말 그대로 청마 유치환의 허무주의 . 이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긋이 무게를 눌러주는 이 시는 역시 인생, 인생의 자세, 다각적인 인생에서의 옳바른 길을 제시하여주는 그런 시이다. 헤성은 궤도를 따라 돌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나 밤하늘을 쭉- 가르며 어디론가 자기만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곹추 그 길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방향이 없다. 하지만 갈곳이 또한 너무 많다. 어디 가나 다 미개척지이고 어디나 다 뚫고 들어갈수있는 방향이기때문이다 그래서 길이 더구나 많다.  사상이 있어야 주제가 있고 주제가 있어야 주제를 둘러싸고 창작이 이루어잔다고 보여진다. 이 시에서는 바로 혜성의 과감하고 대담한 개척정신을 노래했고 “굴레를 벗어버리는” “남의 말을 듣지않는” 비록 앞에 그 어떤 곤난이 닥쳐도 떳떳이 어두운 밤하늘을 헤가르고 나아가는 그 고귀한 정신을 노래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마지막 “아물지 못하는 상처우에 천서한장을 올려놓는다”는 즉 개척하자면 상처를 지니여햐 하는 로고. 위기감이며 사명감을 말하는듯 하다. 말 그대로 청마 유치환의 허무주의 . 이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인듯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
발디딜 곳 없는 저 허공에서
아무 손잡을 곳도 없는 저 벼랑에서
어떻게 그 한방울 한방울을 모아
크고 실한 고드름방망이를 만들었을가
하나 또 하나 기대와 의지들을 모아세워
마침내 하나의 굵직한 선언을 기발처럼 추켜
들기까지 떨어져 분신쇄골 될 각오를 하고
모지름쓴것들이여
떠나는 겨울보다
도래하는 봄을 알리기 위해 
너는 떳떳이 서있기에
너에게서 겨울의 추위보다는 봄의 따뜻함을
가슴으로 느낀다.

강효삼시인의 " 고드름" 전문이다. 이 시에서 쉽게 찾아 볼수가 있는것은 풀뿌리 인생을 살아온 시인의 디아스포라적인 정서와 그러한 아픔이 청마의 끝이 없었을 방황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김장선, 『僞滿洲國時期 조선인문학과 중국인문학의 비교연구』, 도서출판 역락, 2004.
金漢 외, 『中國當代文學發展史』, 상해문예출판사, 2002년.
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997년.
 이광일, 『해방 후 조선족 소설문학 연구』, 경인문화사, 2003년. 
오상순, 『개혁개방과 중국조선족 소설문학』, 한국 월인출판사, 2001년.
오양호,『한국문학과 간도』, 문예출판사, 1988년.
조선호,『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년. 
전성호 외(2007), 『중국조선족문학비평사』, 연변인민출판사.
陳思和 외, 『中國當代文學史敎程』,복단대학출판사, 1999년.
조규익, 『해방전 만주지역의 우리 시인들과 시문학』, 국학자료원, 1996년. 
조성일 외 ,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년.
조성일, 『중국조선족문학개관』, 연변교육출판사, 2003년.
장춘식, 『日帝强占期 在中朝鮮人小說硏究』, 
장춘식, 『일제강점기 조선족 이민문학』, 민족출판사, 2005년.
채훈, 『일제강점기 재

9. 결론
역사는 정확히 기록되어야 하며 암울했던 그 시대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순일’을 했던 사람들마저도 ‘친일’로 몰고 가는것 역시 비극이라고 생각 한다.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가 친일, 혹은 순일 일수도 있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를 팔아 먹고 작위나 은사금을 받아 먹은 매국노들에게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재 하여도 마땅하 겠지만 자식을 키우기 위해,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순일행적이 조금 있는 일부 사람들의 상황은 획일적인 잣대에서 거론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특히 시대적 상황과 각 인물들, 거제 출신이며 친일을 했다고 이미 판명이 난 동랑 유치진과 같은 인물들도 전체적인 삶을 살펴봤을 때 일부는 친일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그것마저 함부로 친일로 몰고 가는 것은 옳지를 않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고 또한 새로운 주장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친일을 위한 글을 강요했고,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연극을 하는 사람에게는 연극으로 친일을 강요하고 농민에겐 곡식을, 돈 많은 부자들과 기업가들에겐 헌금을 강요했었던 것이다. 오늘날 안일한 물질생활에 물 젖어온 우리들이 마치 내가 그 시대를 살았으면 친일도 순일도 아닌 독립투사나 될것처럼 너무 쉽게 타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솔직히 암울했던 그시대에 독립운동가가 과연 몇이나 되였던가? 또한 독립운동가들도 그 시대 통칭이 비적이였으며 오늘까지도 제대로 대접 받지도 못하고 있는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1940년에서 45년 사이는 국민이 가장 핍박 받던 일제 강점기 시대이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가 새로운 역사인식을 정확히 하기 위하여 어떻게 ‘친일’과 ‘반친일’을 나눌수가 있으며, 아주 똑 부러지게 낟알과 쭉정이를 분류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명석한  두뇌로는 이해가 가지만 변화무쌍한 마음으로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인것도 같다.
 아직도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많은 작고 문인들과 생존 문인들이 친일시비에서 미처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더러는 몇 줄의 글로 인해 친일의 오명을 쓰고 그들의 문학과 삶이 제대로 조명되지도 못한 채 세월의 질곡 앞에 엎드려 꼼짝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인줄로 알고 있다.
흔히들 유치환'의 詩世界'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이라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필자가 보건대 모나르키아니즘이던지 아나크로니즘이던지 아니면 코즈모폴리터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퓨리터니즘, 다위니즘, 메커니즘,  다다이즘 ㅡ등등 그런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적인 디아스포라적인 경향이 더욱 짙은것으로 판단이 된다.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잘 나타난 현상이 곧바로  '생명의지'의 발양'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의 '생명의지'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한마디'로 이악스레 살아 남으려 하는 '의지'이며 '생명'에 대한 애착'인것만은 틀림어 없어 보인다.
청마에게 문제가 있다면 만주 체류시에 썼을 "首" 등으로 친일파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데 특히 1942년 2월 6일 자 만선일보에 기고한 친일성 산문이 2007년 10월19일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태일 교수에 의해 발견되면서 기존의 애국 시인 이미지가 많이 퇴색된것 같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못한 우리들이 너무나고 쉽게 그 시대의 문인들을 애국이니 친일파이니 아주 섣불리 판단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담담히 받아 들이고 만약 내가 그 시대를 살았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가? 질책보다는 관용이 더욱 성숙한 자세가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우주만물에 음양 5행설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에게나 장단점, 그리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 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은 너.
이 호호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 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 오리 풀잎마다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천인합일의 사랑을 생명주의로 노래한 청마가 마치 후세에서 자신에 대한 어지러운 평판을 알기나 한듯이 적어놓은 " 바람에게" 를 읽고나면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저도몰래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필자가 알건대 2014년. 제4회 청마북만주기행을 조직하여 십여명이 연수땅을 다녀 오신줄로 안다. 이러한 탐구는 계속되여 새로운 발견이 있으시기를 두손모아 기원해 본다.

2017년6월26일 수개
서울에서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