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정순 

9월 4일 아침 5시30분에 집 근처 공원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러 가신 아버지가 두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셨다. 평시 같으면 8시쯤 되면 아침밥 드시러 집에 오시는데 8시 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드린 종이는 바지를 바꿔 입는 바람에 안 넣고 나갔기에 나는 걱정이 되여서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갈만한 곳을 다 돌아다녀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나는 9시 30분에 경찰서에 신고하고 집에 돌아가서 110에 전화했다. 경찰 한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상세한 조사를 하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돌아갔다.

나는 집에만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가 갈만한 곳을  다시 한번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래도 아버지를 찾지 못한 나는 애타는 마음에 14시쯤 또 경찰서에 찾아갔다. 울면서 감시카메라라도 보여달라 했는데 수속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보여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국타향에서 느끼는 어쩔 수 없는 무력함에 절망하다가 친구를 통해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에 도움을 요청했다.

사연을 들은 협회회원분들은 나에게  선뜻이 방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서류를 작성하고 龍组TDCS공중호에 올리고 70여명의 현장조사그룹을 만든 후 우리 집 부근에 와서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씨에도 모두들 자기집 일처럼 여기면서 새벽이 다 되도록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루크(강아지이름)- … ” 목이 쉬도록 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침 5시 30분에 나간 아버지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일본이란 이 낯선 외국 땅에서 집을 찾을 수도 없으니 얼마나 애가 타실가.

아버지 신변에 무슨 변고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무서운 생각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싶어서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또 경찰서에 들러 “우리 아버지를 빨리 찾아주세요. 아직도 집에 안 왔어요” 하고 울면서 부탁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지금 새벽이니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 출근시간에 다시 오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집에 돌아가는데  집 부근에서는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에서 도와주러 온 분들은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그때까지 계속 우리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어떤 분은 반찬과 영양죽을 써가지고 와서 수고하는 여러분들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고마움에 목이 메었다. 

나는 사람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서  아침6시부터 집 부근에 돌렸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33시간이 지났는데 경찰서에선  여전히 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오후 2시쯤 또 경찰서에 찾아갔다. 경찰은 전 지역에 통지를 내렸으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답답함에 다시 감시카메라를 보여달라고 청을 들었고 그래서 담당 경찰관과 감시카메라를 확인하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 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9월 5일 날씨는 무척  더웠다. 이 더위에 아버지가 어딘가에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에 마음이 탔다

내가  집에서 만든 전단지 천 여장을 협회분들에게  나눠드렸더니 역전에서 전단지를 손에 쥐고 행인들에게 보여주거나 나눠주는 사람, 전주(電柱)에 전단지를 붙이고 상점에 허락 받아 상점에 붙이는 사람들로 재빨리 전단지가 배포되었다. 그 외에도 거리를 누비며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자가용차로 아버지 찾으러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또 가능성이 있는 곳을 추측하면서 대책을 연구하는 협회회원분들도 있었는데 모두가 더위와  피로도  무릅쓰고  아버지를 찾는 일에 열정을 쏟고있었다. 협회회원분들께 너무너무 고마웠다.

가능성이 있는 곳을 추측하면서 대책을 연구하는 협회회원분들
가능성이 있는 곳을 추측하면서 대책을 연구하는 협회회원분들

9월 6일 새벽 한시쯤, 피곤에 절어 잠시 깜빡 잠이 들어버렸는데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받다 보니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 곁에 있던 분들이 아버지를 찾았다고 소리치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나는 협회회원분들과 함께 기쁨을 못 이겨 서로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다른 지역의 경찰서에서 아버지를 찾았다는 전화가 온 것이었다. 협회회원분들은 경찰서에도 함께 가줬는데 아버지는 여위어 양 볼이 홀쪽해져 있었고 피곤한 눈빛에는 아직도 공포가 남아있었다. 강아지도 야위고 힘들어서인지 달려는 안 오고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담당 경찰관의 말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큰길 옆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보고 신고해서 4명의 경찰이 경찰차로 모셔왔다고 한다.

경찰청에 온 아버지는 일본말도 못하고 몸에는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집에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강아지의 몸속에 있는 칩(주소와전화번호)으로 나한테 연락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는 의사 선생님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는 의사 선생님

경찰서에 같이 간 분들 중 한명이 의사라서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주었다. 아버지는 협회 여러분들의 그 따뜻한 관심에 눈시울을 적셨다.

농촌에서 살아오신 아버지는 마음이 강하시어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여태까지 한번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눈물 흘리시는 것을 보니 그동안 길을 잃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타향에서 혼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상상이 갔다.

경찰청앞에서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 회원들과 함께
경찰청앞에서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 회원들과 함께

우리는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분들하고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고 그분들의 차로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더니 너무 기뻐서 “아이 ㅡ 이게 누김두? 어디가서 헤매다가 이재 왔슴두?… 아무래나 집을 찻아왔으면 됐쓰꾸마…”하면서 돌아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었다.

이때는 9월  6일 새벽 3시반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옹근 46시간만에 끝내 무사히 돌아오신 것이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아버지
무사히 집에 돌아온 아버지

물론  경찰이 아버지를 찾아준 것도 고마웠지만 더욱더 고마운 것은 더위도 피곤도 아랑곳없이 자기 일처럼 선뜻이 나서서 열심히 도와준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분들이었다. 

협회 회원분들은 나 뿐만이 아니라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그 누가  절실히 도움을 청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전심전력으로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분들 덕분에 이국 타향이라고 해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리고 이번에 재일중국대사관의 도움도 받게 되었는데 위대한 조국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깊이 느끼게 되었다.

이 기회를 빌어 ‘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华人援助协会)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우리가족은 이번 시련을 겪으면서 사람은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치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예전보다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하며 지금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것을 다졌다.

사랑과 도움을 아끼지 않은‘용’재일화인원조협회(龍在日華人援助協會) 회원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사진 제공 김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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