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만필
 

 어린 시절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큰 소원이라면 혼자 조용히 마음 놓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자그마한 글방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지금의 애들이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아주 작은 소원이지만 그때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공상이었다.여섯 식구가 허줄한 초가 한 간 반을 남북 두 개 구들을 놓고 살고 있었는데(초가삼간을 두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는데 정주간은 두 집 사이에 막지 않고 툭 틔어 있다.)그나마 북쪽 구들은 임시 임시로 친척들이나 가깝게 지내는 마을사람들이 들어서 살기에 온 집 식구가 남쪽 구들 하나를 놓고 비좁게 지낼 때가 많았다.
하기에 집에서 책을 본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낮에는 어른들이 다 일하러 가고 난 뒤라 책보기가 괜찮았지만 저녁은 그렇지 못했다.전기가 없을 때는 등잔불을 켜게 되는데 내가 책을 본다고 등잔을 혼자 차지 할 수 없는 것이요 설사 혼자 등잔을 차지했더라도 아홉 시 전에는 무조건 등잔불을 꺼야 했다.
전기불이 있어도 마찬가지었다 기실 그때 마을에서 켜는 전기는 화력전기라 불빛이 뻬데데한 게 등잔불보다 조금 더 밝을 뿐이었다. 어떤 저녁에는 책을 좀 더 볼 욕심으로 방안의 불을 끈 후 정주간에 나와 불을 켜 놓고 책을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두 집 한데 쓰는 정주간이기에 내가 정주간에서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이웃집의 수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낮은 초가집에다 식구가 많은지라 한여름에는 낮이고 저녁이고 집 안이 얼마나 더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여름날 낮엔 아예 헛간에 들어가 책을 보기도 하였다. 어떤 날은 벼짚거적을 펴 놓고 거기에 누워 책을 보기도 하였다.특히 아버지가 중병으로 앓아 누운 후 나는 그 신음소리와 역정을 듣기 싫어 아예 집과 좀 멀리 떨어진 조용한 나무그늘 같은 데를 찾아 책을 읽기도 했다 .그때 나는 내가 홀로 조용히 책을 읽을 방 한 칸이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책을 좋아하여 책 사는 일은 젊어서부터 하나의 습관이었다.그래서 주머니에 돈이 많건 적건 틈만 나면 헌책방이나 시장거리에 있는 노천 책 매대를 뒤집고 다녔다. 어느 날은 과월호 잡지 한 권을 사 들고 흐뭇해 하기도 했고, 어느 날은 신문합정본(合订本) 한 권을 사 들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저 책 한 권이라도 사 들고 들어오면 기분이 좋았다고 할까? 사온 책을 전부 독파하건 목차만 훑어보고 말건 책이 한 권 두 권 쌓여지면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책이 좋아 책을 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쌓여가고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에 나만의 서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처음엔 방 하나에 책을 몽땅 쌓아 놓고, 그것들 속에 묻혀 살고 싶다는 것을 나만의 서재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듯 하다.그때 내가 생각하는 서재는 책을 보관하고,책을 읽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의미만 부여하는 정도였다.
서재라면 수선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하나는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얼마만한 책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다시 말하면 내가 수시로 뽑아볼 수 있을 만큼 책이 차곡차곡 꽂혀진 책장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나에게는 십 년 전까지도 이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다.하나는 나에게 오랫동안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없었다.오래동안 학교 울 안에 있는 공가(公家)의 비좁은 단층집에서 살다 보니 수선 나의 서재라는 공간이 없었다.그 보다는 나에게 많은 양의 책이 꽂혀진 책장이 없었다.얼마 안 되는 노임에 매달려 늘 여유 없는 살림을 살다 보니 마음에 드는 책들을 넉넉히 마련할 경제적 조건이 안 되였다.드문드문 조금씩 사서 모아둔 책들도 이 친구 저 친구들이 빌려 가서는 돌려주지 않다 보니 시종 책이 모아지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선 그때 이웃집이나 친구의 집을 방문할 때면 은근히 기대를 한다. 그 집엔 어떤 책들이 있을까?책장은 얼마나 크며 서재는 얼마나 넓을까?거실이든 서재이든 한 켠에 책장을 마련해두고 그 곳에 빼곡하게 들어찬 책들을 보면 막 부러워 났다.그 버릇이 지금까지도 남아 지금도 낯선 집에 가면 그 집의 책장에 꽂힌 책들과 살짝 열린 서재에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문다.
서재, 아마 독서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꿈의 공간일 것이다.책 좋아하고 글 쓰기 좋아하는 사람 치고 자신의 서재 갖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탈한 서재 한 칸 마련해서 묵향 속에 잠겨 책 읽으며 세상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한가로운 산들바람 맞는 그 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토마스 아 켐피스는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 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독서 예찬을 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영국의 한 유명한 학자는 “책 없는 왕궁보다 책 있는 두옥을 택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가인 몽테뉴는 법원에 근무하다가 사직한 후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수상록>>을 집필했는데 그는 세상의 누구보다 자신의 서재와 독서실을 갖기 원했던 사람이다. 산문가 양실추는 <<아사소품>>에서 “서재,얼마나 우아한 명사인가!사람들은 쉽게 학자 집안을 연상할 것이다.사대부 집안이라야 서재가 있다.고생스러운 학업 조건에서 고학하는 학자는 대개 서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가난한 독서인에게 서재는 그림의 떡이며 호화스러운 신선 세계다.” 라고 고견을 발표했다.
내가 진정으로 서재다운 서가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몇 해 전부터다. 지금은 중국에 있는 아파트에 넓은 공간의 서재가 있을 뿐이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집에도 내 서재가 따로 한 칸 있다. 아들은 내가 독서를 즐기고 글쓰기를 즐기는 것을 고려해 월셋집을 잡을 때마다 꼭 방 세 칸 짜리를 선택하여 나의 서재를 따로 한 칸 마련해주었다.까짓 다달이 돈 10만원만 더 들이면 서재 한 칸은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 새로 사서 든 빌라에도 서재 한 칸이  마련되어 있다.큰 책장에 수백 권의 책이 꽂혀 있고 100여만원어치 하는 새 컴퓨터와 프린트기도 있는 깨나 널찍한 공간이다. 이밖에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막론하고 책을 좀 넉넉히 살 여유가 있게 되었기에 책을 부지런히 사들였다.이 몇 해 나는 거의 주일마다 책을 한 두 권씩 사들였는데 이렇게 산 책이 한국과 중국에서 통 털어 거의 1000권이 된다.
서재는 누군가의 눈엔 쓸데없는 곳이다. 요즘 같이 인터넷이 발달되고 전자 문헌들이 가득한 세상엔 서재라는 개념이 점점 약해진다. 스마트폰 하나도,노트북 하나도 책을 읽고 글을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나는 종이로 된 책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직 나는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치며 읽고 낙서하듯이 메모하며 읽어야 하고 글이 읽힌다. 그리고 책이란 것이 그저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은 곁에 두고두고 읽고 베끼면서 아끼는 친구나 애인과도 같은 존재이다. 하기에 나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속 서재보다는 현실 서재가 필요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어디에도 쓸데 없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곳, 서재는 바로 그런 곳,    서재는 나에게 있어서 한가하게 소일하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생활공간이다.여가의 시간 한 시라도 멈출 수 없는 독서 공간이며, 스스로를 묻는 사색의 공간이며,영혼의 휴식처다.나에게 있어서 서재는 서적을 소장하고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며 산보하고 휴식을 취하는 종합 공간이다.그래서 지칠 땐 서재에 들어와 소파에 몸을 맡기고 육신의 노곤함과 정신의 피로함을 달랜다.나에게 서재는 멋지고 화려한 물리적인 의미의 서재가 아니라 감성을 다스리고 자신만의 사상을 구축하는 공간이다.
나는 서재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감을 느낀다. 하루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공간, 가장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탁상을 마주하고 의자에 깊숙이 묻힌 채 유유하게, 차분하게, 때로는 홀린 듯이 책을 읽는 이것이 나의 독서자세이다. “잔은 채워야 맛이고 님은 품어야 맛”이라는 말이 있다. 여유만만하다가 더러 푹하니 빠져드는 경지! 흙의 숨소리마저 들려올 듯한 깊은 밤이나 새벽, 정적의 그 깊은 공간과 시간 속에 자신을 던져 두고 독서에 빠져들 수 있는 행복감! 손 끝으로 책장을 넘기는 묘미를 느끼며 때론 붉은색, 때론 분홍색, 때론 파란색, 때론 노란색으로 중요한 대목에 줄을 긋는다. 때론 여기저기 책 여백에 느낌을 기록하고 때론 메모지에 베껴 옮기기도 한다. 때론 낮은 소리로 웅얼거리기도 하고 때론 졸음을 못 이겨 탁상우에 얼굴을 박은 채 침으로 책을 적시며 잠도 든다.
지금도 회사에 다니는 나는 잔업과 특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피곤해서도 아니고 시간적으로 지루해서도 아니다. 한시 바삐 서재로 오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서재를 마련했다고 해도 책을 읽지 않으면 그림 속의 떡이요, 거울 속의 미인일 뿐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책 읽기와 활용을 위한 ‘한가한 시간’을 가질 것을 권했다.나에게 있어 한가한 것과 같이 즐거운 일은 없다.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한가하면 능히 책을 읽을 수가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으니 천하의 즐거움이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의 정치가이며 저술가이기도 한 처칠은 독서 예찬이 아닌 “책의 예찬”을 쓴 적이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설령 당신이 갖고 있는 책의 전부를 읽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가의 책을 한 권 빼어 들고 쓰다듬거나 아무데나 닥치는 대로 펴서 눈에 띈 최초의 문장부터 읽어보라. 그리고 설사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책이 서가 어디에 꽂혀 있는가를 기억해두라. 그러면 책은 당신의 친구가 될 것이다”라고.
나는 가끔 책장 속에 끼인 책들을 보며 전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수많은 책들이 없어진데 대하여 애석함을 금치 못한다. 친구, 친척,동료들이 꼭 돌려주마 하고 빌려 가서는 돌려오지 않은 책.이렇게 잃어진 그 많은 책들을 생각하면 그때 왜 마음을 모질게 먹고 거절하지 못했는가 하고 후회한다.그래서 앞으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책만은 더는 빌려주지 않으려 한다.남이 뭐라고 욕해도 상관치 않으련다.두 눈을 지그시 감고 두 귀를 꼭 닫고 못들은 척 하면 된다. 프랑스에는 일찍 “여자와 책과 말은 빌리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동양에서도 “책을 빌리는 자도, 빌려주지 않는 자도,빌린 책을 돌려주는 자도 바보다”고 하여 ‘삼치(三痴)’라는 말이 전한다.
옛날 중국에 책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한 한 애서가가 있었다.이 사람은 자기 집 연못 한가운데에 다락집을 짓고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여 애지중지 여겼다.연못에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놓고 혼자만 출입했는데 밤이면 다리를 거두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이 애서가는 그것 만으로도 마음이 안 놓였던지 연못에 이르는 누문(楼门)에다 “楼不延客,书不借人(다락집에는 객이 머물 수 없소,책은 빌려주지 않습니다)”란 글을 큼직하게 써 붙였다.
근대 한국에도 책을 빌려주지 않기로 소문난 이가 있었는데 그의 변명은 “애지중지한 책은 사랑하는 연인과도 같다.자기가 사랑하는 연인을 어떤 친구나 후배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이였다. 참으로 현명하고 묘한 변명이 아닐까 한다.
서재를 마련한 후부터 가끔 서재이름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짓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독서인의 특징가운데의 하나이다.예로부터 허다한 문인들이 서재를 지으면 심혈을 기울여 서재 이름을 짓고 친지나 지인에게 글을 받았다.고금 명인의 서재를 종람해보면 흔히 우아하고 고상한 정취를 가지고 있다.
남송 시인 육유(陆游)의 노년 시절 서재를 ‘노학암(老学庵)’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사마광이 늙어서도 배우는 것은 마치 밤길에 촛불을 켠 것과 같다(师广老而学,犹秉蠋也行)”는 의미에서 따왔다 비록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배움은 그만 둘 수 없다는 의미다.
노신(鲁迅)의 젊은 시절 서재의 이름은 ‘삼미서옥(三味书屋)’인데. “경서를 읽는 것은 벼, 수수와 같은 좋은 양식을 맛보는 것과 같고, 역사를 읽는 것은 비교적 풍성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으며 ,제자 백가를 읽는 것은 젓갈과 식초를 맛보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갖는다.
정판교(郑板桥)의 서재에는 “방이 고상하면 되지 클 필요가 있겠는가? 꽃향기가 많다고 좋은 건 아니다(室雅何须大,花香不在多)”라고 쓴 주련이 있다.
호적당(胡積堂)의 서재 명칭은 ‘서향인가(书香人家)’인데 서재의 주련은 깊이 음미할 만하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은 적선만 하는데 ,가장 좋은 일은 독서 뿐이다.(几百年人家无非积善,第一等好事只是读书)”
송나라 때 유식(劉式)은 ‘먹 글씨로 이뤄진 집’이란 뜻으로 묵장(墨莊)이란 당호를 사용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가 읽던 책 천 여 권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아들들을 불러 아버지의 뜻을 전했다. 그후 청나라 이정원과 호승공이란 사람은 유식의 뜻을 기려 자신의 호를 묵장이라 했다.
한학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을 일찍 체득한 현대의 누군가 서재 이름을 수경실(修綆室)로 지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수경이란 뜻은 ‘우물이 깊으면 두레박줄이 길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길어 올리다만 한학이란 깊은 우물에 긴 줄이 달린 두레박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우물물을 퍼 올리겠다는 의지를 뜻한 것이다.
서재에 이름을 붙이고 한결같이 그렇게 소원했던 그들의 소망처럼, 나도 작디 작은 내 서재에 내 삶과 마음을 담은 이름 하나를 달아주고 싶다. 멋진 이름이 아니더라도 내 삶이라고 다른 이들이 인정하고 끄덕여 줄 수 있는 그런 이름으로 말이다.
이 밤, 탁상 위의 커피는 향기롭게 식어가고 나는 깊은 의자에 파묻혀 그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전 한 권을 천천히 읽어간다.

 

밥 한 그릇의 서정

 

어려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엄마가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을 때 나는 소리였다.또깍또깍 도마에 칼 부딪치는 소리, 뽀글뽀글 된장찌개 끓는 소리, 칙칙칙 밥솥이 가쁜 숨을 토해내는 소리. 그 소리가 밖으로 울려 퍼지면 애들과 정신없이 뛰놀다가 금세 부엌까지 들어와서 침을 꼴깍 삼키었다. 쌀이 끓어오르고 부푸는 동안, 밥 냄새가 솔솔 퍼지기 시작하면 허기가 배를 가득 부풀게 하였고 그런 저녁이 어린 나를 살찌우게 했다.
젊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아내가 밥상 차리는 소리였다. 정해진 시간에 어김없이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릇과 그릇 부딪치는 소리, 밥상 차리는 소리. 그 소리가 해 뜨는 아침마당에 울려 퍼지면 금세 온몸에 힘이 솟구쳤고 그 소리가 어둑어둑 해지는 먼 동구 밖까지 퍼지면 일터에서 돌아오는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그 소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힘의 원천이며 지친 하루의 불안과 긴장을 풀어주는 해독제였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가지 반찬과 뜨거운 국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윤기가 흐르는 하얀 쌀밥을 대할 때면 기분이 무척 좋다. 나는 일부러 입으로 후~후~ 소리를 내면서 밥을 먹는다. 따뜻한 밥을 챙겨주는 아내의 수고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나에게 예나 제나 세상에서 가장 반갑고 정겨운 소리는 “빨리 와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다.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너무 가난했던 시절. 밥은 꿈이었다. 그 밥 냄새에 밥 먹어라 부르는 소리가 얹히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저녁의 힘이 솟아났다. 항상 일터에서 늦게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식아, 밥 안 먹었지? 식기 전에 얼른 이리 와서 밥 같이 먹자.”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위해 밥을 남기셨고 그렇게 내가 먹은 그 밥은 달았다
어린 시절,내가 가장 많이 건넨 인사말은  “밥 잡수셨어요?”이고 내가 가장 많이 들어온 인사말도 “밥 먹었어?”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지들이 내게 묻는 문안에도 가장 많은 말이 ”너들 밥은 제대로 먹고 지내냐?”였다. 한 사람에게 끼니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은 별일 없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낸다는 뜻으로 통한다. ‘밥 먹었어?’는 그야말로 기본적이고 총체적으로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말이다. 이 말만큼 친근하고 정겹고 따뜻하며 고마운 인사말이 또 있을까. 여기에 ‘밥’이 삶과 행복의 바탕을 이룬다는 생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는 일 가운데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던 시절에는 한 끼 밥 한 그릇 장만하는 고달픈 현실을 한 순간도 피할 수 없었으니 모든 관심과 결정은 결국 밥 한 그릇으로 귀착되기도 했다. 그 시절에 배부른 사람 어디 있으랴마는, 거듭되는 흉년으로 생산대는 빈 타작인 해가 많았고 겨울을 지나면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연히 이른 봄부터 나물이나 부지런히 뜯어 먹게 되었는데 그나마 힘들 때가 오뉴월이었다. 그때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 모아산이란 곳에서 살던 우리 집에서는 당장 입에 풀칠할 것이 없어서 멀리 50여 Km 떨어진 아성시내에 있는 사탕공장에 가서 사탕 무 찌꺼기를 사다가 쪄서 먹기도 했는데 그게 어디 사람이 먹을 음식이던가? 못 먹어서 생긴 부황(浮黃)으로 식구들은 얼굴이 붓고 누렇게 떴었다.그런 것을 먹고 겨우 서너 살 된 남동생은 볼록한 개구리 배처럼 소화불량으로 배가 통통 부어 오르기도 했다. 그 시절 잡곡밥이나마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은 평민들의 꿈 중의 꿈이었다. 하기에 그 시절엔 그릇에 넘치게 꾹꾹 눌러 담은 새하얀 쌀밥이 어쩌면 부의 상징이었고 행복이란 어쩌면 밥 한 그릇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랄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통이 좋고 꽤나 번화한 모아산이란 곳을 떠나 저 멀리 기차도 안 통하고 버스마저 하루에 두 번 밖에 안 다니는 연수현 중화진이란 시골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사를 갔다.결국 밥 한 그릇 때문이었다. 전해 여름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사는 큰 형님네 집에 놀러 갔던 나는 물고기에 흰 쌀밥을 원 없이 먹었다. 해마다 흉년이 드는 모아산과는 달리 해마다 풍년이 들고 물고기가 흔한 중화진은 그때 나의 인상에 그야말로 ‘어미지향(魚米之乡)’이었던 것이다.
밥 이야기가 나오니 밥을 충분히 먹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에도 유달리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 풋나물죽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부른데 늘 남아도는 밥이 있었다. “더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배 안 고프다” 라고 하시며 남기던 어머니의 밥이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식량에 그나마 일부는 아버지의 병 치료비며 큰형님의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장으로 이고 나가 팔아야 했으니 남은 식량으로 식구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여 하루에 한 끼나 두 끼는 죽을 먹었다. 그런데 식사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밥을 반 그릇씩 남겼다. " 아까 정지칸 (부엌간) 에서 군입질 했더니 배가 안 고프구나," 등 이유 없는 구실을 달면서 당신의 밥을 남겨 주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용캐도 어린 우리 형제들은 입맛만 다실 뿐 누구도 그 밥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꼭 어머니가 잡숴야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아~, 냉수로 절반 배를 채우고 힘든 봄날의 논밭 일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날마다 삼시 세 끼를 먹어야 하는 밥이지만 나에게 밥의 의미는 각별하다. 밥이 없으면 나는 하루 동안 힘없이 앉아 있어야만 한다.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한창 일할 때는 그것을 절감할 때도 있다. 한 끼 식사는 한나절 일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 밥은 일 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움직이고 생각하고 내일을 설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일상생활을 이어 나가게 하는 것도, 또 내일을 꿈꾸게 하는 것도 다 밥의 힘이다.
시골에 있을 때 10여 년 농사를 지었었다. 한여름 농사일은 입에서 단내가 난다. 땅에선 이글이글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온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한다. 배 속에선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난다. 점점 배가 등가죽에 붙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구부러진다. 이때 먼 곳 논두렁을 타고 점심밥을 들고 오는 아내가 보인다. 일손이 빨라진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들에서 막는 밥의 반찬은 소박하다. 콩나물무침이나 마늘쫑무침이 아니면 더덕이나 도라지무침에 깻잎, 된장찌개 등 말 그대로 ‘풀’뿐이다. 그래도 그것을 밥과 함께 넘기면 꿀맛이다.
회사에서 잔업이 없는 날은 6시에 퇴근한다. 한겨울 차가운 바람 불어 치는 퇴근길에 더디 오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좁고 어둡고 긴 골목길을 걸을 때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꾸루룩~꾸루룩~ 소리 나는 배를 부드럽게 채워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하얀 사기그릇에 하얀 김이 몰~몰~ 피어 오르는 하얀 쌀밥을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서 세상에 밥만큼 맛있는 것이 없다. 밥은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밥은 나의  인생이며 즐거움이다.
지금 나는 나즈막히 넘어가는 어둑 저녁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밥 한 그릇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 번 그려 본다. 


사랑의 손 편지

 

나는 오늘도 대문 옆에 걸어 둔 우체 함을 열어본다. 날마다 이렇게 우체 함을 열어보는 것이 이젠 습관으로 되었다. 편지라야 어느 친구나 혈육에게서 올 편지는 없고 다만 청구서나 거래 통지서 같은 내용이 든 인쇄된 봉투이다. 페이스북, 카카오톡, 문자메시지를 통해 새해인사, 명절인사, 축하인사를 보내오고 문안을 전하며 어느 어느 일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오는 요즘 시대에 누가 손으로 편지를 쓴단 말인가? 하지만 가장 그리운 것이 사람의 손으로 쓴 편지인 것은 왜서일까, 우리 이 시대에 손으로 쓴 편지가 사라진 지도 10년이 퍽 넘는다. 나로서는 마지막에 받아본 손 편지들이란 고등학교에서 담임교사로 있을 때 제자들이 갓 대학에 입학해서 써 보낸 것들이다. 후에도 대학에 간 제자들이 많지만 거의가 핸드폰으로 문안인사를 건네 오지 않으면 문자를 보내온 것뿐이다.
전에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보다 더 초조하고 더 지루한 것이 누군가가 써서 보내는 편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마음에 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로부터 보내지는 답신을 기다리는 일은 마음을 저리게 하고도 남는다. 정성스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편지를 써내려 갈 때 느끼는 애틋함과 설렘, 기다리던 편지를 받고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과 감동은 먼 추억이 된지 오래다. 이제는 잃어버리고 만 푸른 잉크의 편지. 그 푸른 잉크의 편지는 멀리 흘러가버린 문화이고 그리하여 이제는 추억이고 향수이며 차곡차곡 접어 저장해둔 기억들로만 존재한다…
전에 참으로 많은 편지를 썼다. 일가친척들에게 쓰는 편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전우들에게, 고향친구들에게, 동창생들에게 그리고 문우들에게 보내는 모든 편지, 예하면 축하인사. 문안인사 등등…
나는 어려서부터 편지를 썼다 .부모가 낫 놓고 ㄱ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인들이라 대학에 가 있는 큰 형님을 비롯해 일가친척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것은 다 내 몫이었다. 비록 부모들이 일러주는 대로 받아쓴다고는 하지만 결코 그렇지 헐치 않다. 일자무식인들이라 말을 두서도 없고 논리도 없게 그저 제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털어놓으면 그것을 정리하며 편지를 써야 했다. 그래서 연필로 쓰고 지우고, 지우고 쓰면서 수식어도 붙이고 미사여구도 곁들면서 몇 번씩 고친다. 이렇게 다 고친 후 부모들에게 읽어드린다. 그러면 부모들도 미소를 지으시며 만족해 한다. 그제야 나는 그것을 다시 깨끗한 편지지에 촉이 가느다란 펜을 골라서 베껴 쓴다.
편지를 쓰면서 제일 처음으로 흥분했던 것은 아마 중학교 다닐 때의 첫 연애편지인 것 같다. 한 학급에 내가 은근히 사모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남몰래 가진 사모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어느 날 나는 큰마음을 먹고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평소에 편지를 괜찮게 쓴다고 자부하던 나지만 막상 마음먹고 쓰자니 신통한 어구나 마땅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거저 흥분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반나절을 끙끙거려서야 겨우 그만하면 내 감정을 다 표현했다 싶은 편지를 써냈다. 나는 이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며칠이나 그녀에게 건네주려고 망설이다가 끝내 포기하고 말없다. 그녀와 우리 집의 가정형편은 차이가 너무나 컸다. 게다가 모든 면에서 다 그녀가 나보다 나아 보였다. 그리고 그녀도 언제 나에게 호감을 표시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단지 짝사랑에 불과 할 것인바 괜히 편지를 건네줬다가 돌아오는 건 실망과 수치일 까봐 두려워서였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 말라는 속담의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편지를 참 많이도 주고받았다. 차마 말로 건네지 못할 말이 있으면 편지로 대신했다. 밤새 쓴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어 보면 그렇게 유치할 수가 없었다. 고치고 또 고쳐 가까스로 완성된 편지, 그 편지를 가슴에 품고 우체국으로 달려간다. 답장을 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 우표를 한 장 봉투에 넣어 보낸다.
기실 내가 편지를 가장 진지하고 정성 들여 쓴 것은 군에 있을 때다. 그때 나는 한 처녀와 연인관계를 맺은 지 겨우 한 달 만에 군에 가게 되었다, 두 사람 죽자 살자 열애하다가 이렇게 천리이역에 서로 갈라지니 정말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열흘이 멀다 하게 편지를 한 통씩 보냈는데 편지 한 통 한 통에 그렇게 정성을 들였다. 편지지를 고르는 데로부터 봉투를 고르고 거기에 붙일 우표를 골랐다. 편지지에 편지를 쓸 때도 이 볼펜 저 볼펜을 고르고 골라서 필체가 가장 좋게 보이는 것을 택해서 썼다. 그 내용들은 허세가 아닌 나의 애모가 서린 진심의 토로였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고는 그녀의 회답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하루, 이틀, 사흘, 닷새, 지금쯤이면 편지가 도착했을 텐데…… . 내 편지를 받은 그의 얼굴 표정은 어떻게 바뀔까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떨려온다. 그때는 지금 같지 않고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받기까지 빨라야 열흘, 늦으면 반달 이상이었다. ‘일각여삼추 (一刻如三秋)’란 말의 뜻을 그때 심심히 느꼈다.
편지를 부치고 열흘째부터는 매일 련부 (連部)의 문서한테로 가서 혹여 내게로 오는 편지가 있나 해서 알아보곤 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부쳐온 편지를 보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제꺽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봉투를 뜯어 읽는다. ‘잘 지내시는지요?’ 첫사랑의 인사가 이렇게 설렐까? 편지를 읽는 동안 고요하고 아름다운 숲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몹시 보고 싶어요,’, ‘다시 상봉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요’, ‘하루가 천추 같아요.’… 세상의 모든 소음을 뚫고 내게만 들려오는 그 속삭임은 참으로 행복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도 내내 설레며 세상의 모든 행복이 다 내게 있는 듯싶었다. 그래서 편지를 몇 번씩 곱씹어 읽지만 아무리 읽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날마다 짬을 타서 한 번씩은 읽다시피 하였다.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읽을수록 그녀가 그리웠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진을 찍어서 보냈는데 그녀가 부쳐온 사진 때문에 전우들한테 애먹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봉투에 넣은 사진이 배달도중에 부주의로 구겨질 까봐 봉투 뒤 면에다. “안에 사진이 있으니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글귀를 적었다. 그날따라 내 먼저 문서실에 도착한 한 전우가 우리 패(排)의 편지를 들고 왔는데 그 글귀를 보고 모두들 확 달려들더니 내가 보는 데서 봉투를 뜯었다 전우들끼리 일반 편지는 절대 뜯어보는 법이 없지만 사진이 든 편지는 여럿이 주인이 보는 앞에서 뜯어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렇게 보내오는 사진이 기본상 연인이 아니면 아이의 사진이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적 내 연인의 사진을 본적이 없는 그들이라 이번 기회를 놓칠 리가 만무하다. 봉투를 뜯자 편지 속에 넣은 그녀의 사진이 나왔는데 이 사진은 온 소대의 전우들의 손 여행을 거쳐서야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녀의 사진을 보고 예쁘니 어쩌니 하면서 저들끼리 공론을 하는데 두말할 것 없이 나의 연인은 아주 예뻤다. 그래서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 먼저 그녀의 사진에 그들의 손때가 묻은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에 남아있는 그녀의 온기를 한 몸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녀와 후에 이런저런 원인으로 헤어졌지만 그녀와 이렇게 편지를 쓰고 받고 하는 것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다. 편지 쓰는 내내 행복했고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역시 행복했으니까. 내 인생에 수없이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때처럼 열렬하고 진지하게 정성 들여 편지를 쓴 적이 없으며 그때처럼 편지를 학수고대한 적도 없고 그때처럼 편지를 받고 행복했던 적도 없다. 물론 그녀는 나보다 학교도 적게 다녔고 문화수준도 나보다 낮아 편지라야 미사여구 한마디 골라볼 수 없고 글씨 또한 볼품이 없었지만 그 편지 속에는 정녕 그녀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 있었기에 나는 그처럼 그녀의 편지가 기다려지고 또 가슴에 품고 있었던가? 연인의 눈에는 편지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한 수의 서정시고 산문시였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또 보며 머리 속에 기억하고 가슴 속에 새기려 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그리고 진심은 그저 화려한 말솜씨에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손으로 삐뚤삐뚤 쓴 짧은 글에서 더 애틋하게 담긴다. 세상이 열 번 변해도 편지의 필체는 인간의 정이요, 필로 쓴 편지는 그 사람의 얼굴이 비껴 있고 그 사람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그때 그녀의 편지는 너무너무 읽어서 보풀이 일 지경이 되었고 그녀의 사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 보았다. 후에 어떻게 되였든 그 시절에 우리 사이에 오고 간 편지는 우리들의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그때 우리의 편지는 단순히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아니라 그리움을 토로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가 되었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고 전화도 마음껏 칠 수 없었던 시절, 혹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친밀하고도 은밀한 손 편지 한 통이 없었더라면 그 시절의 애틋한 사랑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휴대폰시대의 오늘이지만 의연히 손으로 쓴 편지가 가져다 주는 잔잔한 기다림의 여유와 추억이라는 울림을 다시 경험하고 싶다. 가슴 설레며 손 편지를 쓰고 떨어질세라 우표를 눌러 붙이고 답장을 기다리며 집 앞 우편함을 살피던 행복한 순간을 다시 감내하고 싶다.
이 시각. 푸른 잉크의 편지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잉크냄새와 종이냄새도 그리워진다. 

김춘식 프로필:

1955년 흑룡강성 연수현 가신진 출생. 대학 학력. 연수현조선족중학교 조선어교사. 공회주석, 공청단서기, 부교장 역임,. 2015년11월 정년퇴직.
연변작가협회, 흑룡강조선족작가협회, 재한동포문인협회 한국’문예감성’문인회 회원.
아동소설, 미니소설 단편소설, 수기, 수필, 칼럼 등 수백 편 발표.
연변인민출판사 동화 우수상, 중국소선족소년보 아동소설 공모전 대상, 송화강 수필 문학상 등 수상 20여 차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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