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사랑

어두운 내 밤하늘에 혜성이 나타난 순간
그 눈부심에 
나는 그만 눈이 멀어 버렸네


2. 태초에 

 

아마도 이런 것 같다
태초에 나는 우주의 한 점 먼지였다가
먼지끼리 뭉치고 뭉쳐 단단해져
단단한 운석이 되어 
지구의 어느 곳에 떨어지면서
타고 부서지고
몇 천만 년쯤 잠자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안개가  되었다가
한송이 연꽃으로 피었다가
한마리 벌레였다가 
인간이 되어
이제까지의 나와 교류장애를 겪다가
다시 또 흙먼지로도 되고
비안개로도 되어 
이전의 나와 완전한 화해를 하기를 
무한 반복하였다

유기체에서 무기체로
자유스럽게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오갔다
그러니 생명을 가졌다가 놓았다가
그게 뭐가 대수겠는가
영원히 돌고 돌 것을


3. 사막

 

이곳에 와서
흥분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이곳에 와서
한없이 작아져 한알의 작은 모래로 스며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시간도 계절도 방향도 생명도 의미를 잃고
오로지 한가지 색깔과 방식으로 퇴락하는 곳

선택은 오직 두 가지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 것과
더 깊숙히 깊숙히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

두 길은 모두 원점에 닿아 있다

4. 쭈그러진 사과

 

여기 쭈그러진 사과 한알이 놓여있습니다
시간이 세월이 햇볕이 바람이
사과를 쭈그러지게 했나 봅니다
한때는 날이 날마다 더 크고 싱싱하고 푸르고 붉게 만들어주던
사과를 사과답게 탐스럽게 키워주던
그들, 시간이 세월이 햇볕이 바람이 

쭈그러든 사과는 볼품없이 작아졌지만
당도는 더 농밀해졌다고 합니다
몸속에 든 씨앗을 싹 틔워
사과나무를 만들 준비의 과정이라고도 하고
자기완성이라고도 합니다

여기 쭈그러진 사과 한알이 놓여있습니다
내가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5.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뱀을 들어 자신을 물게 하였다. 
아니, 클레오파트라를 문 것은 뱀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뱀이었고, 그는 자신을 물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이에는 독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내뿜은 독에 중독되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클레오파트라이다. 
우리는 저마다 품속에 뱀을 키운다. 
클레오파트라처럼 용감하지 못한 우리는 
언제 물리는지도 모르게 비겁하게 물린다. 
우리는 자신을 물기 위해 태어났다. 
인간은 자기 몸을 뜯어먹고 산다. 
만물은 결국 내 몸과 하나이다. 
우리는 뭐든 물어뜯는다. 

 

6. 봄꽃

 

지난 가을 그대가 
낙엽에 써보낸 편지들을 읽고
겨우내 고민하던 끝에
답장을 써보낸다

여러 색 중에서도 
제일 예쁜 
노랑 빨강 하얀 분홍 색종이에 
맘속 말을 고이 담아
가지마다 걸어놓았다

그대가 제때에 받아가지 않아
밤새 또 한가득 
새 편지를 걸어놓는다
그대가 받아갈 때까지 
 
편지를 받으면 예쁜 열매 하나씩 달아줘  
그러면 그대가 내 마음을 받은 줄 아니까

 

7. 시 쓰기
 

나는 요즘 다산이다
덜컥덜컥 잉태도 잘하고
큰 산고도 없이 생산도 잘하고

친구의 말 한마디에도
책 속의 글 한 줄에도
누군가의 눈빛에도 감응한다

눈으로도 잉태하고 
귀로도 잉태하고
머리로도 잉태한다
순결한 내가 자꾸만 잉태한다

내가 요즘 가만히 사랑을 많이 했는 갑다
무엇을 사랑하는지도 딱히 모른 채 
머리로 마음으로 뜨겁고 은밀하게

사실 요즘 사는 게 좀 귀찮았는데
세상밖 어딘가로 잠적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다 사랑이였나보다 
평소보다는 다른 무늬의 좀 더 격한 그런 사랑

하긴, 어쩐지 요즘 
세상이 자꾸 나에게 련애를 걸어오는 것 같더라
봄바람에 꽃향기를 날리면서
의뭉스럽게 눈을 씀뻑거리면서

 

8. 백석과 자야

 

가만, 가만

억만금을 시주한 자야는 
흰 당나귀를 타고
여우목도리를 두르고
흰 눈이 푹푹 나리는 밤
아름다운 나따샤가 되어
그 넓은 만주벌판 백석이 사는 곳으로 갔을 것이야

백석은 흰 당나귀 고삐를 잡아쥐고
흰 당나귀는 자야를 태우고
하얀 입김 푹푹 뿜어 올리며 
여우들이 출몰하는 깊은 산골에 갔을테지

커다란 사슴뿔이 걸린 궁전
페치카에선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사위는 고즈넉하고
둘이는 오래오래 사랑을 나눴어

밖에선 흰 당나귀가 좋아서 응앙응앙 울고
흰 눈은 천지간을 가득 메우고
계절은 거기서 한 천년쯤 한 만년쯤 멈췄을 것이야


9. 퇴폐미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려드는 이 세월과 권태를 어떻게 하면 더 신나게 죽여줄까 더 맛갈스레 요리를 해볼까 껍질은 까지 말고 오히려 색채를 덧입힐까 
햇빛은 가리고 전등은 촉을 썩 낮추고 
촛불이 그림자를 끌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면 더 좋을듯,
보일듯 말듯 신비스럽게 어둡고
향긋한 냄새를 풍겨가며 썩어가는 중
아니, 구리구릿하게 농익어가는 중
사향, 박하, 은밀한 밀실의 한 구석, 육체의 향연, 요염함
어쩐지 그곳에는 사탕발린 무엇이 있을 듯
하나님도 무심히 주무시고, 
논문을 쓰려고 앉은 내 머리에 쥐가 올라, 힘센 청년 쥐들이 여러마리 뛰어 올라 마구 뛰노네
쥐를 잡아야지 쥐를 잡아야지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를 내 머리 속에 집어 넣어야지
데드라인이 다가오는데, 쥐도 죽고 나도 죽고, 바이러스는 죽기 전에 머리에 화관을 쓴 채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나 지조도 없이 도처에 옮겨다니려나
쥐야 쥐야 머리가 아프단다 얼른 내 컴퓨터 속에 뛰어들어가 예쁜 니 발로 논문을 잽싸게 써다오, 니도 살고 나도 살게
나는 퇴폐미를 지향해, 청국장 같은 퇴폐미,
그러니 논문은 네가 써, 나는 뭔가 즐거운 곳으로 흘러갈거야, 그게 시라도 좋아, 오감이 범벅이 된 색감이 두텁게 겹친 유화 같은 퇴폐시라도 좋아, 파란색 덴탈 마스크를 귀에 걸고, 숨은 그래도 쉬어야 해, 적당히 가쁜 숨은 기분이 좋아져


10. 동년

 

우리의 동년은 야생화처럼 군데군데 무더기로 피어있었다

꽃향기는 뜨거운 햇볕 아래 녹아 흘렀고 때론 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우리는 강변의 조약돌처럼 수수했지만 눈동자는 별처럼 빛을 뿌렸다
몸 곳곳에는 센서가 달려있어 조금만 터치해도
지심 깊숙한 곳에서 행복이 우리의 두발을 타고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가난은 들풀처럼 무성했고 그 튼튼한 뿌리로 생활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행복은 가난보다 더 넉넉했고 때론 강물처럼 범람했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들판에 떼를 지어 날아예는 잠자리, 무시로 튀어오르는 메뚜기, 햇빛에 형형색색으로 발각거리는 사탕종이, 울바자를 타고 피어있는 나팔꽃, 나만 보면 무섭게 쫓아오는 수탉놈, 빨갛게 상기된 또래들의 얼굴과 땀냄새와 웃음소리, 그 많던 이모와 고모와 숙모들...

우리의 동년은 정오의 태양처럼 뜨겁고 열렬했다  


11. 답사

 

계절의 여왕 5월에 답사를 가다. 

고인돌 유적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고인돌 밑에 고대 부녀의 시체로 누워있는 나를 보았다 
나는 가벼운 비명을 질렀다, 
몇 천년의 고독이 나를 휩쌌다. 
그 옆에 나란히 누워 
다시 여러 천년을 세월과 함께 삭고 싶었다. 

서해안 채석강 켜켜이 쌓인 절벽아래 
거대한 바위에 붙어 있던 석화의 빈껍데기로 있는 나를 보았다. 
짧짤한 바닷물에 잠겼던 행복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고창 읍성에서 나는 내가 쌓아올린 돌이 아직 거기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떨어뜨린 땀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땀방울이 마르는 데는 여러 백년이 더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어느 집 담장너머로 뻗쳐오르는 찔레꽃 이파리에서 
옛이야기의 어느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서있는 촌 아낙의 얼굴에서 
불전 주위에 떠도는 신비스런 기운에서 

이제 나는 안다 
내가 가보지 않은 많은 곳에서 나를 만날 것을. 
내 몸속에서 무수한 내가 나를 보고 있음을 
이제 그 무엇도 나와 둘이 아님을 
내가 나의 육신을 먹고 살고 있음을 
나와 그대가 모두 스쳐가는 바람인 것을 
그 바람조차도 바람인 것을. 

그래도 아아, 또 한번, 나는 누구인가? 

 

12.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 창구

 

형이상학은 머리 위의 것이다. 
끝없이 하늘로 비상하는 것들. 
새처럼 가볍게 나는것, 구름처럼, 성전의 종소리처럼 신비로운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 

형이하학은 인간의 몸뚱어리다. 
땅위를 기어다니는 것, 먹고 배설하는 것, 구체적인 것, 
어쩐지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은 것 

서울출입국사무소 중국창구 앞에는 
수많은 형이하학이 줄지어 앉아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들은 날지 못한다. 그들은 배고프기에 

자칭 형이상학인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도 형이하학인 것 같다 
나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우리는 모두 형이하학으로 앉아 형이상학을 꿈꾼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꿈과 현실의 차이다. 
우리들이 형이상학을 꿈꾸어도 
사람들은 우리를 형이하학이라 부른다. 

 

13. 행복한 인형들의 세상

 

많은 인형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인형인줄도 모르는 작은 인형들이 
사랑도 하고 애기도 낳고 일도 하느라 아주 많이는 바쁩니다. 
나도 어느 날 그런 인형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작은 인형이. 
나는 내가 그런 인형인줄은 조금도 몰랐던게지요. 
그래도 다들 행복하다니까 됐네요 
나도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그대들이 인형인줄은 전혀 몰랐지요? 
그래도 행복하지요? 

 

14. 파도

 

파도가 바위를 처절썩 처절썩 때리는 이유를 알겠다

너무나 큰 악의를 만났을 때
이길 수도 없고
에돌아갈 수도 없고
집채같은 원망과 슬픔은 삭아지지 않고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는 더더구나 없을 때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퍼렇게 피멍이 들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절썩 처절썩 하염없이 때리고 무너지는 것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힘을 모아 온 몸을 날리는 것 
커다란 바위가 가는 모래로 갈릴 때까지
부드럽지만 힘있게 쳐부수는 것 

하얗게 무너진 포말은 금세 푸른 물결로 일어서지만
백사장의 모래는 다시 바위로 뭉치지 못하는 법

이것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힘과 끈기와 신념에 관한 이야기이다.

 

허련화(許蓮花) 프로필 
중국 서남민족대학교 한국어학과 부교수, 연변작가협회 회원.
1970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서 출생. 
중국 연변대학 문학학사, 문학석사,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저서 <김동리 소설 연구>(민족출판사), 
역저 <장난감 도시>(절강대학교출판사), <중국 창족 신화와 전설>(역락).
국가사회과학기금 중화학술외역 프로젝트 <인류학의 글로벌 의식과 학술적 자각> 수행. 
시, 수필, 평론 수십 편 발표. <천지> 신인문학상, 제6회 재외동포문학 가작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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