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아 쇼핑”무역회사는 다년간 히스패닉계(西班牙裔)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 매니저 미스타 박은 매일 봉고차 두 대에 히스패낵 노무자를 실어왔다. 많을 때는 20여명, 적을 때는 10여명이었다. 남미 출신의 불법체류 노무자는 주로 10대에서 20대의 젊은이였다.

이들은 스페인어(西班牙语)만 구사했고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시초에는 “파트타임”(时间制)으로 고용되었고 시간당 3.5달러의 싸구려 보수를 받았다.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하루 11시간 근무했다. 주로 “오다 상품”(订货商品)을 적사했다. 작업량은 흡사 부두에서 산더미 같은 짊을 운반하는 고역이나 다름없었다.

봉고차가 회사에 도착하면 매니저 미스타 박은 어김없이 에르난을 호출했다. 에르난은 온두라스 출신의 불법체류자였는데 물류창고에서 지게차 운전 작업을 하였다. 그는 매니저 미스타 박의 지령에 따라 히스패닉 노무자들에게 하루 동안의 작업량과 주의사항 및 시간당 보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작업 전 히스패닉 노무자들은 지령에 따라 한 줄로 도열을 지었다. 에르난이 이들에게 번호판이 찍힌 주홍색 조끼를 분배했다. 흡사 죄수복을 배급하는 전경을 방불케 했다. 이들에게 주홍색 조끼를 발급하면 함부로 물류창고에 들어가 상품을 훔치는 것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오전 10시와 오후 2시면 이들에게 2달러짜리 빅 사이즈(大号) 햄버거와 역시 빅 사이즈(大号) 콜라음료가 제공되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에르난이 일급(日工资)을 발급했고 미스타 박이 감독했다. 하루 식사 비용을 삭감하고 매인당 35달러씩 지급받았다.

불법체류자 에르난은 26세의 젊은이였다. “코레아 쇼핑”에서 이미 1년 2개월을 근무했다.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유일하게 물류창고에서 지게차를 운전하는 “기술직”에 종사했다. 그는 간단한 한국말도 구사했다.
시초에 나는 에르난이 멕시코 출신인 줄로 알았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는 멕시코 출신의 불법체류자가 각별히 많았다. 이들은 흔히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이른바 “3D업종”에 종사했다.


에르난은 비좁은 물류창고에서 하루 12시간씩 근무했다. 한증막같은 지게차의 뜨거운 열기에 땀줄기가 비오듯 쏟아졌다. 가슴을 컥컥 메우는 매캐한 디젤류 매연에 코밑과 입귀는 항시 검댕이 칠을 했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에르난의 얼굴은 흡사 막장에서 나온 광부를 방불케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게차의 긴장한 운전에 신경을 칼날같이 도사렸다.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지게차 전복사고 때문에 항시 가슴을 조였다. 시초에 에르난도 매일 11시간 고달픈 적사 작업에 종사했다. 하도 열심히 일해 매니저 미스타 박의 인정을 받았다. 3개월 후 그는 지게차 운전기술을 배웠다. 그 후 “지게차 라이센스”가 없이 비법으로 지게차 운전직에 종사했다.

이날도 여느 때와 같이 오후 2시 “푸드 타임”이 돌아왔다. 20여명의 히스패닉 노무자들은 삼삼오오 대문 근처의 그늘진 곳에 모였다. 일행은 햄버거와 콜라를 받아들고 겯불내가 확확 풍기는 입안을 추기며 허리쉼을 하였다.

그때 매니저 미스타 박이 부랴부랴 물류창고로 뛰어갔다. 조금 후 에르난이 대문 근처로 줄달음쳐 나왔다. 그는 모여 앉은 일행을 다급하게 독촉했다. 스페인 노무자들이 순식간에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뭔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10여 분이 지났다. 갑자기 경보기가 달린 차량 두 대가 대문 밖에 나타났다. 검은색 제복의 남자 7~8명이 차에서 내렸다. 미스타 박이 일행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얼마 후 일행은 10여 개의 물류창고를 깐깐히 체크했다. 지게차를 운전하던 에르난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검은색 제복의 일행은 연방 이민국 직원이었다. “코레아 쇼핑”에서 고용한 스페인 노무자들 중에 절도죄로 추적을 당한 협의차가 끼였다는 신고를 접하고 곧바로 현장을 덮쳤다. 한식경이 지난 후 이민국 직원은 매니저 미스타 박을 불러 작성된 서류에 사인을 받고 돌아갔다. 그때까지 “코레아 쇼핑”무역회사의 심사장님은 얼굴 한번 내밀지 않았다.

얼마 후 에르난이 다시 물류창고에서 지게차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삽시간에 종적을 감춘 히스패닉 노무자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매니저 미스타 박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한국인 직원들에게 적사 작업을 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는 한석준 씨와 한 팀을 묶고 옹근 두 시간 땀벌창이 되도록 돌아쳤다.

적사 작업은 오다의 분량에 따라 매번 10~15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불가마에 뛰어든 개미처럼 숨돌릴 겨늘 조차 없었다. 작업이 끝나면 마라톤경주를 뛴 것처럼 전신이 물벼락을 맞았다. 잠깐 허리쉼을 하려고 시큼시큼 쑤셔대는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한숨을 돌리면 또다시 새로운 적사 작업이 시작되였다.

이런 현상은 그 후에도 자주 생겼다. 그러나 미스타 박은 여전히 아침마다 봉고차에 히스패닉 노무자를 실어왔다. “코레아 쇼핑”은 당연히 불법으로 이들을 고용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는 차츰차츰 이것저것 의문이 많아졌다.

어느 날 퇴근 후 한국인 직원들은 외식하러 갔다. 나와 에르난도 매니저 미스타 박의 지령에 따라 동행했다. 이날 메뉴는 인당 15달러의 해물 뷔페(海鲜自助餐)였다. 일본요리 생선회(生鱼片) 와 스시(寿司)가 곁들였다.

에르난은 고추냉이의 매운맛에 콧구멍을 싸쥐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렸다. 한국인 직원들은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렸다. 에르난은 나에게 의문스러운 눈길을 돌렸다. “왜 이렇게 고약한 매운맛을 알려주지 않았는가?”라는 원망이 석연히 드러났다.

나와 에르난은 언어장벽 때문에 별로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했다. 에르난은 한국말을 류창하게 구사하는 나를 내처 한국인으로 간주했다. 어느 날 한석준 씨가 미스타 조는 중국에서 왔다고 알려주었다. 에르난은 대뜸 두 눈을 커다랗게 치켜뜨며 “무초 워로, 무초 워로”를 연신 곱씹었다. 나는 “무초 워로”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일시 난감했다.

“조형, 무초 워로 뭔 뜻인지 모르시죠? 스페인어로 무초는 많다는 뜻이고요. 워로는 영어니까 물을 뜻해요.”
한석준 씨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게 도대체 뭔데? 물이 많다?”
“이 애들이 원체 무식해요. 무초 워로는 바드를 뜻해요. 바-다-”
"뭐라고? 바다? 물이 많다가 바다라고?"

에르난의 말뜻은 중국과 미국은 큰 바다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왔는지 궁금했다. 당시 남미 출신의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들은 대부분 캘리포니아주 남단의 샌디에이고를 통해 미국으로 밀입국을 강행했다. 이곳은 멕시코와 미국 간에 육지로 인접되여 오래전부터 “불법 밀입국 루트”(非法移民通道)로 사용되었다.

이날 외식이 끝난 후 일행은 던킨도넛 가게(甜甜圈)에 들려 미디엄 커피((中号)를 하나씩 오다 했다. 나는 아르헨디나 출신의 한국인 직원 미스타 태의 통역을 빌어 에르난과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에르난의 고향은 온두라스 서북부에 위치한 하곡(河谷) 지대였다. 17세에 결혼했고 이미 자식 셋이 있었다. 장기간 미국인이 경영하는 바나나 농장에서 하루 13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일당 수금은 고작 1달러였다. 다섯 식솔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피 말리는 굶주림과 바닥이 뚫린 빈곤은 드디어 에르난에게 죽음을 각오하는 미국행을 강요했다.

온두라스는 북으로 과테말라와 인접했다. 과테말라는 다시 북으로 멕시코와 인접했다. 1997년 9월 에르난은 맨주먹으로 집문을 나섰다. 5일간에 300여 리 길을 주행해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동행자 3명을 만났다. 그 후 매일 한 끼 식만 먹으며 10여 일 후에 마침내 멕시코에 당도했다.

일행은 밀입국을 알선해 주는 브로커에게 인당 미화 500달러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에르난은 500달러 미화를 챙기려고 6개월간 식당을 전전하며 손 부리가 터지도록 그릇 닦는 고역을 치렀다. 1998년 4월 에르난은 과테말라 동행자 3명과 함께 멕시코 북부의 대사막 장정에 나섰다. 한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웃도는 작열하는 사막에서 요행 목숨을 건졌다. 어느 날 밤 일행은 비밀 루트를 통해 끝내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에르난은 동행자 2명과 함께 샌디에이고의 한국인 식당에서 그릇 닦는 일을 했다. 다른 한 동행자는 오렌지 재배 농장의 “막벌이 노동자”로 떠나갔다. 풍문에 오렌지 농장은 하루 세끼 배불리 먹여주고 편안한 잠자리도 챙겨주며 달러벌이도 짭짤하다고 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이해 11월에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했고 그 후 “코레아 쇼핑”에서 적사공으로 일했다.

나는 오렌지 농장의 “막벌이 노동자”로 떠났다는 동행자의 소식을 문의했다. 에르난은 대뜸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식경이 족히 지나서 “그 친구는 이미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과테말라 출신의 동행자는 오렌지 농장에서 하루 16시간씩 고된 노동에 부대겼다. 백인 업주들은 이들을 불법고용하기 위해 브로커에게 인당 600달러를 지급했다. 가혹한 작업환경에 불만을 품고 도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낮으로 총을 꼬나들고 엄밀하게 감시했다.

어느 날 과떼말라 동행자는 백인 감독의 눈에 띄어 혹독한 물매를 맞고 쓰러졌다. 며칠 후 그는 야간도주를 하다가 총에 맞아 당장에서 숨졌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에르난은 숨을 죽이고 기회만 엿보았다. 어느 날 그는 마침내 단신으로 샌디에이고를 탈출했다. 히스패낵계 불법체류자들이 대거 집거한 로스앤젤레스로 향발했다.

에르난이 “무초 워로”를 곱씹은 것은 또 다른 뜻을 내포했다. 자기네들은 목숨을 내걸고 육로를 따라 미국으로의 밀입국을 강행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망망한 바다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밀입국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미처 풀지 못했다.

나는 비행기에 탑승해 바다를 날아 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항에서 여권 심사를 거쳐 합법적으로 입국했다고 알려주었다. 에르난은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비행기를 탑승했으면 돈이 무척 많겠는데 왜 미국에서 고생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무초 마네, 무초 마네”를 연신 곱씹었다.

“마네”는 영어로 돈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엄청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에르난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엄지를 내밀려 “무초 마네”를 곱씹었다.

온두라스(洪都拉斯)는 스페인어(西班牙语)로 “심수 지역”(深水之地)이란 뜻이다. 1502년 대항해가 콜롬버스가 온두라스 지역에서 돛배가 침몰될 위기에 직면했다. 콜롬버스는 이곳을 "온두라스"라고 명명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깊은 바다”라는 뜻이었다.

16세기 직전까지 온두라스는 인디언 부족들이 집거한 미개척지로서 고대 마야문명(玛雅文明)의 중요한 발생지였다. 1821년 온두라스는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하였고 1825년에 중남미 주의 5개 연방에 가입했다. 그 후 1858년 연방이 해체되자 온두라스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연합과일 제품 회사(联合果品公司)와 표준과일 제품 회사(标准果品公司)는 온두라스에서 대규모의 바나나 재배 농장을 경영했다. 1913년 온두라스는 바나나 수출량이 세계 1위를 차지해 “바나나 왕국”으로 되였다. 1929년 미국을 강타한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자 대외무역의 90%를 미국에 의존하던 온두라스도 심중한 타격을 받았다.

당시 련합과일 제품 회사와 표준과일 제품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 수는 무려 7만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악렬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극히 적은 인금을 인상할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국 회사는 온두라스 독재 정권과 결탁하고 잔혹한 탄압을 감행해 2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했다. 지금도 미국은 의연히 온두라스의 철도, 항공운수, 전력, 바나나 수출 등 업종을 독점했다.

온두라스는 미국의 엄밀한 통제하에 “경제식민지”현상이 날로 가심화되었다. 현재 온두라스는 여전히 제2물결의 산업 경제시대를 실현하지 못한 “후진국”에 속했다.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이며 극빈층 인구가 무려 54%에 달했다.

장기간의 기아와 빈곤은 에르난과 같은 극빈층에게 미국행을 강요했다. 단 하루라도 “배불리 먹고 향락을 누리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는 대장정에 나섰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연변에서도 “직장에서 물러난” 수많은 조선족들이 “일확천금의 노다지를 캘 수 있다"는 한국행에 남가일몽을 꿈꾸었다. 당시 정당한 한국행 루트는 중한 양국 정부가 승인하는 “노무 송출"이었다. 그러자 “노무 송출”회사가 우후죽순같이 급격하게 증폭했다. 

그러나 당시 연변의 “노무 송출”은 한국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일부분 조선족들은 부득불 친척 방문차로 한국행을 달성했다. 그리고 일단 체류기한을 넘기면 내처 한국에 눌러 앉아 “불법체류자”로 전락되였다. 당시 조선족 녀성들은 이른바 “국제결혼”에 눈독을 들였다. 일단 중국에서 법적 승인을 거친 “미혼증”을 마련했다. 미혼녀의 신분으로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행을 실현했다.

그 후 조선족들은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눈길을 돌리고 외국행을 강요했다. 1999년 연변의 조선족들은 인민폐로 무려 15만 원을 웃도는 거금을 지불하고 미국행을 단행했다. 당시 미국행을 실현한 조선족이 이미 2만 명을 넘겼다.

중국 조선족친구와 함께
중국 조선족친구와 함께

중국과는 달리 온두라스는 미국행을 알선해 주는 “노무 송출”회사가 없었다. 미국 연방정부도 온두라스의 불법 이민자들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미국행을 꿈꾸는 히스패닉계 노무자들은 부득불 폭력과 사기가 란무하는 “갱단 조직”(黑社会)에 의탁했다. 이들에게 비법적인 밀입국 루트는 죽음을 각오하는 모험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정부는 히스패닉계 노무자들에게 가차 없이 “불법체류자” 딱지를 부착했다. 일단 “불법체류자” 딱지가 붙으면 그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미국 땅에서 언제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1999년 미국 연방정부의 법적인 시간당 최저임금은 6.5달러였다. 물론 이는 합법적인 체류자, 영주권자, 시민권자만이 향수하는 특권이었다. 에르난은 샌디에이고 한인 식당에서 하루 12시간씩 그릇 닦는 고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시간당 고작 3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그나마 식당 주인이 심사가 꼬여 연방 이민국에 신고하면 강제출국을 당하는 억울한 운명에 처했다.

나는 유효기간이 10년인 “미국 I D”를 소지했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통한다는 리유인지는 몰라도 출근 첫날부터 시간당 7달러 보수를 받았다. 2개월 후에는 시간당 8달러로 인상되었다. 그러나 당시 에르난은 여전히 시간당 6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그는 이미 1년 2개월간 “코레아 쇼핑”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지게차를 운전하는 “기술직”에 종사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딱지 때문에 한 마디의 불평도 토설하지 못했다.

사실상 합법적인 이민자일 경우 에르난과 같이 기술직에 종사하면 고용주는 노동법에 따라 시간당 최저 12달러의 인금을 지불해야 하였다. 그러나 한인업주들은 인건비를 삭감하기 위해 히스패닉계 노무자들을 비법적으로 고용했다. 당시 한인업주들이 경영하는 식당, 마켓, 세탁소, 청소업, 건설업, 페인트업에는 대량의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들이 고용되었다.

섣달도 다가는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매니저 미스타 박은 여느 때와 같이 20여 명의 히스패닉계 노무자를 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 에르난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스타 박의 지령에 따라 물류창고를 한식경이나 뒤졌다. 그러나 에르난의 그림자도 찾지못했다.
미스타 박이 발끈 성깔을 부렸다.
“이 자식이 미쳤나? 왜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때려치웠어? 이달 인컴(工资)은 어쩌고?"

“코레아 쇼핑”에는 에르난과 같이 3개월 이상 장기 고용된 히스패닉계 노무자가 10여 명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인컴을 지급 받은 다음날 갑자기 아무런 연고도 없이 가뭇없이 종적을 감추는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그러므로 회사 측은 일단 1개월의 고용 기간을 넘기면 주급제를 월급제로 변경시켰다. 달말에 인컴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통제했다.

에르난은 월급제로 고용된 지 이미 9개월을 넘겼다. 그간 감쪽같이 사라지는 현상이 한 번도 없었다. 매니저 미스타 박은 여태껏 에르난만은 한시름을 놓았다. 그런데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에르난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미스타 박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히스패닉계 노무자들에게 애매한 화풀이를 하였다.
이날 미스타 박은 하루 종일 물류창고에서 지게차를 운전했다.
“망할 놈의 자식, 어디 가서 콱 뒤져버려. 네놈 때문에 또 이런 곤욕을 당했어. 이민국에 확 신고해 버려? 괘씸한 놈.”
미스타 박은 앙칼진 욕설을 퍼부었다.

퇴근 무렵 미스타 박은 나와 한석준 준씨를 불렀다. 에르난이 거처하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가 보라고 부탁했다.
에르난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올드타운 근처의 “천사들의 여왕 마을”에 위치했다. 이곳은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의 집거구였다. 당시 중남미 출신의 불법체류자들은 이곳을 피상적인 은식처로 간주했다. 미국 통계청에 따르면 1999년 12월을 기준으로 히스패닉계 이민자 수는 4000만 명에 달했다. 그중 10%에 달하는 40여만 명이 불법체류자였다.

에르난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3층짜리 올드 하우스(旧房)였다. 거실 하나에 침실 3개였다. 나는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눈앞의 전경에 흠칫 놀랐다. “혹시 이상한 곳에 잘못 찾아온 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앞섰다.

구질구질한 옷 견지들이 이곳저곳에 닥치는 대로 무득무득 쌓였다. 싱크대에는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와 그릇들이 지저분하게 널렸다. 10대 후반의 여자애 셋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갓난 애에게 젖을 먹였다. 한옆에는 팬티 하나만 걸친 20대의 남자 5명이 한가하게 팔을 베고 누웠다. 출입문이 열린 침실에는 상체를 드러낸 여자 둘이 남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지런히 누웠다.

한석준 씨가 에르난을 찾는다고 말하자 팬티만 걸친 남자가 출입문이 닫힌 북쪽 침실을 가리켰다. 방 안에서 “카우보이”를 연상케 하는 건들건들한 멕시코 풍위 향촌 음악이 흘렀다. 한석준 씨가 방문을 노크했다. 한식경이 지났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 자식이 방 안에서 뒤졌나? 왜 대답이 없어?”
한석준 씨는 와락 방문을 잡아당겼다. 나는 첫눈에 에르난을 알아보았다. 그는 방구석에 옹크리고 누워있었다. 얼굴은 퉁퉁 부었고 눈귀와 입귀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팔과 다리에도 군데군데 멍이 들었다. 분명히 한바탕 두들겨 맞은 몰골이였다.
“에르난, 너- 너 누구 하구 싸웠어?”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제야 에르난은 눈길을 돌렸다. 피멍이 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전날 저녁 에르난은 과테말라 출신의 룸메이트 친구와 함께 브로커를 찾아갔다. 베르난도라고 하는 이자는 멕시코 깡패 출신이였다. 에르난과 과테말라 친구는 “미국 I D”를 마련하기 위해 2000달러의 선불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현장에 도착한 후 대뜸 이상한 낌새를 감촉했다. 함께 간 친구에게 선불금을 지불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그러자 베르난도는 깡패를 동원해 에르난과 과테말라 친구를 한바탕 두들겨팼다. 소지했던 현찰도 전부 강탈했다. 베르난도는 “만약 경찰에 신고하면 네놈들의 목을 잘라버리겠다.”라고 협박했다.

며칠 후 에르난이 다시 물류창고에 나타났다. 전과 달리 종일토록 무표정한 얼굴로 수걱수걱 지게차만 운전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선반 위의 팰릿이 떨어지며 지게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에르난은 별로 크게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팰릿에 쌓았던 박스 더미가 무너지며 와장창 유리컵이 박산 났다. 에르난은 2000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악운을 당했다.

에르난이 지게차 전복사고를 당한 후 나는 한동안 영문도 모르게 마음이 울적해졌다. 에르난의 악운에 일시 동정심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에르난에게 “미국 I D”, 영주권, 시민권은 손오공의 머리에 쒸운 저주로운 금테 사슬 같은 존재였다. 만약 에르난이 영원히 금테 사슬에 얽매우면 햇빛 찬란한 미래가 있을까?  “인간의 존엄”이란 것이 있을까? 나는 한동안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1980년대 새로운 교육 진흥 국책의 혜택을 받아 대학생으로 되였다. 졸업 후 줄곧 기자직에 종사했다. 그러므로 “농민공” 또는 “정리 실업자”(下岗工人)에 비해 여태껏 남다른 존경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앞날이 태산같이 걱정되었다. 에르나의 액운이 결코 타산지석이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물안개 때문에 동터오는 태양을 볼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고 울적하고 당황스러웠다. 불안한 마음을 도무지 다잡지 못했다.

2000년 11월 나는 미국 중동부 지역 버지니아주에 귀속된 “애난데일” 한인커므니티로 이주했다. “코레아 쇼핑”무역회사는 워싱턴 DC에 새로운 매장을 개설했다. 당시 심사장님은 나를 이곳으로 파송했다. 그 후 나는 귀국전까지 에르난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2005년 4월 나는 귀국길에 “예닮교회”에서 한석준 씨를 만났다. 그를 통해 우연하게 에르난의 이야기를 접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를 떠나던 그해 조지 워커 부시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부시는 민주당 후보 앨 고어를 물리치고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1년 1월 21일 조지 워커 부시는 성대한 취임식을 갖고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으로 되었다.

당시 부시가 백악관에 들어서면 히스패닉계 불법처류자에 대한 대규모의 감면이 있을 거란 뒷소문이 돌았다. 부시 대통령은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에 대한 대감면을 적극적인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3000여만 명의 히스패닉계 선거민은 일심협력으로 조지 부시를 지지했다. 당시 에르난과 같은 불법체류자들은 조지 부시의 선거공약에 칠색 무지개와 같은 “희망”을 꽃피웠다. “우리는 조지 부시 후보를 성원한다”라는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뉴타운(新城区) 지역에서 성대한 집회를 소집했다.

어느 날 매니저 미스타 박이 에르난의 코앞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洛杉矶时报)를 내밀었다.
“이 자식, 너 땡잡았어. 이건 너한테 미국 I D를 준다는 기사여. 내 말 알아들었어?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자식, 눈치 하나는 있어갔고 미국 좋아하네. 에르난, 너 나한테 한턱 크게 쏴야해. 여태껏 내가 엄청 걱정해 준 거 맞잖아. 알아들었어?”
에르난은 꾸뻑꾸뻑 머리 숙여 절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창한 한국말로 연신 곱씹었다. 그러나 에르난은 한 가지 진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서방세계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정치가란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는 위대한 예언가이다. 아니면 세상에 재앙을 불러오는 위대한 사기꾼이다.”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세상에 복음을 전해주는 위대한 예언가가 아니었다. 세상에 재앙을 불러오는 위대한 사기꾼이였다.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에 대한 대감면은 결국 “정치 투기”였고 “정치사기”였다. 에르난의 칠색 무지개 꿈은 하루 아침에 허망한 백일몽으로 이슬같이 사라졌다.

2003년도의 어느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아메리카뱅크”(美国银行)에서 방탄차가 어둠을 뚫고 출발했다. 트렁크에는 묵직한 달러 상자를 적재했다. 이날 히스패닉 집거구를 지나다가 미화 20만 달러가 담긴 상자 하나를 분실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특대 뉴스로 실시간 보도를 전개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이 일순간 발칵 뒤집혔다.

교통이 삼엄하게 통제되었다. 도처에서 행인들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로스앤젤레스의 경찰국장이 텔레비에 출두했다. 무릇 신고하는 자는 2만 달러의 현상금이 주어졌다. 불법체류자의 경우에는 합법적인 영주권을 발급하는 혜택이 주어졌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에르난은 갑자기 “올드타운”에서 자취를 감췄다. 3일 후 그는 매니저 미스타 박의 배동하에 경찰서에 나타났다.

3일 전 에르난은 밤거리에서 우연히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 천으로 까바를 씌웠는데 제법 묵직해 보였다. 호기심이 부쩍 동해 상자를 끌고 부근의 나무숲속으로 들어갔다. 까바를 벗기니 은색 상자의 비빌 번호가 눈에 띄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상자 속에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은색 상자를 나무숲에 감춰놓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에르난은 텔레비죤을 통해 은색 상자에 20만 달러의 거금이 들어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불꽃이 작열했다.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꼬박 2일간 나무숲속에서 숨을 죽여가며 은색 상자를 지켰다. 3일째 되던 날 마침내 매니저 미스타 박을 찾아갔다.

에르난은 기적같이 불법체류자 딱지를 벗고 합법적인 영주권자로 되였다. 2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받았다. 그는 "온두라스클린"(洪都拉斯保洁公司) 청소회사를 개설했다. 오피스텔 청소직에 종사할 20여 명의 히시패닉계 불법체류자를 고용했다. 그 후 안해와 자식 셋을 모두 미국으로 이민시켰다. 에르난은 드디여 미국이민 제1세대로 되였다. 드디어 “인간의 존엄”을 찾았다.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경건하게 기도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에르난의 청소회사가 장차 번영 창성하도록 거룩한 복음을 내려주세요. 에르난에게 더는 악운이 없도록 오래오래 지켜주세요. 아멘-”
나는 두 손 모아 에르난의 행복을 기원했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년~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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