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주 (시인·문학평론가)

 1.

그리움의 시작은 헤어짐이 아닌 만남에 있다. 대상과 나 사이를 연관 짓는 깊은 만남이 그리움의 시초가 된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들을 흔히들 만남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모든 만남의 대상이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단편적인 스침이나 얕은 만남에서는 그리움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날 우연히 길가에 핀 들꽃을 보며 삶의 희망을 얻고, 그 꽃의 고독한 생명력에 공감한 적이 있다면 이를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대상의 일치감,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되었던 진정한 ‘만남’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김상봉 시인 
김상봉 시인 

김상봉 시인의 근작 시편들의 저변에는 바로 이러한 ‘만남’을 통해 빚어진 그리움의 조각들이 깔려있다. 그 그리움의 조각들은 다양한 만남의 대상들을 향해 시적 언어로 환원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부재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현존하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또는 아름다운 자연이거나 옛 고향, 잃어버린 전통, 외로움을 달래주던 고향의 소쩍새 울음소리,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던 이름다운 목란꽃 한 송이, 더 나아가서는 풍진 세월을 견뎌내며 이겨온 시인 자기 생이 되기도 하고, 이 깊고 간절한 그리움의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세상이기도 하다.
이제 그의 시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자.

먼저 간 네 길 앞에
옷깃을 여미며
풍진 세월 속
무릎 맞대던 밤을 떠올린다

은방울꽃 향기에
송화강 물결 소리 듣는다
태산 앞에
마음이 따스해 난다

-「먼저 간 길 앞에서-한춘 詩碑 앞에서」, 부분

부재한 대상을 향한 그리움에는 언제나 가슴 미어지는 슬픔이나 회한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유치환의 그리움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고”, 이용악의 그리움은 “잉크병 얼어드는 추운 밤에도 잠을 깨고말고”, 김소월의 그리움은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된다. 그리운 대상의 실체가 지금 내 손에 잡히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대상을 향한 그리움이 실체의 언어로 환원된다.
「한춘 詩碑 앞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시에서 시인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먼저 떠난 시우(詩友) ‘한춘’을 호명한다. “풍진 세월 속/ 무릎 맞대던 밤”을 헤아릴 수 없이 정을 나누던 후배 시인을 먼저 떠나보낸 시인의 슬픔은 풍진 세월만큼이나 깊고 쓰라리겠지만 시인은 결코 회한의 목소리로 한춘을 호명하지 않는다. ‘호젓한 숲 그늘’, ‘새싹들 눈길’, ‘소탈한 웃음’, ‘아침 향기’, ‘은방울꽃’, ‘태산’ 등과 같은 친숙하고 다정다감한 언어로 호명한다. 그 언어들은 따뜻함과 희망으로 다시 환원되어 여전히 교정에 실체로 존재하는 한춘을 불러낸다. 
그리하여 시인은 모교인 상지조선족중학교의 교정에 시의 심지를 박고 후학들에게 시 정신을 널리 가르치는 듯한 한춘의 시비를 바라보며 “교정 숲 그늘 아래/ 새싹들 눈길에 다듬어진/ 한춘아! 그 풍도 여전하구나”라고 읊고, 비록 한춘은 갔어도 ‘세월의 머문 자리’에 그의 ‘소탈한 웃음’소리와 향기가 남아 여전히 새들의 노래와 어울려져 “이 아침을 향기롭게” 만들어주고 있다고 찬탄한다. 그리고 시인 자신도 그 애잔한 그리움을 통해 다시 마음 따뜻해지는 위안을 얻는다. 먼저 떠난 시우가 남긴 은방울꽃과 아름다운 향기와 태산과도 같은 든든함이 여전히 시인의 가슴에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흑토의 아들, 북방의 거목으로 불리는 한춘 시인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얼어붙은 흑토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민족의 백년사를 함께 엮어오면서 지금도 여전히 민족과 인간의 애환을 시로 노래하는 북방 시인들의 가슴에, 그리고 이를 시어로 환원시킨 김상봉 시인의 가슴에 여전히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북방의 대표 시인 강효삼을 향한 그리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그마한 키에 안개 다리 누빈
북방 문단의 거목
찍어온 발자국마다
진달래가 핏빛으로 타는데
산이 아프다
세월 이기는 장수가 없느냐
병마가 거목을 좀먹고 있다
珠玉 같은 詩句를 쏟아야 할
손이 허공에 떨고 있다
- 「산이 아프다 –효문 강효삼께 드림」, 부분

한춘과 강효삼은 동갑내기로서 이삼월 시인과 함께 북방 문단의 3대 거목으로 불렸다. 키는 작아도 시로 거목으로 불렸던 그들이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못 이겨 하나씩 둘씩 쓰러지고 이제 홀로 남은 강효삼 시인마저 힘겹게 병마와 싸우고 있다. 이를 지켜보며 그들의 선배로서 또는 같은 북방의 시인으로서 김상봉은 “산이 아프다/ 세월 이기는 장수가 없느냐”라며 “병마가 거목을 좀 먹고” 있음에 한탄하고 있다. 물론 이때의 그리운 대상은 “찍어온 발자국마다/ 진달래 핏빛”으로 물들이며 “珠玉 같은 詩句를 쏟아”내던 건강한 시절의 강효삼이다. 시인은 왕성하게 시작 활동하던 강효삼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기적을 빈다/ 화타 편작이 강림하길 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를 거역할 수 없듯이, 앞 시대 시인들이 그들의 시 정신과 향기만 남기고 떠났듯이, 시단의 원로들도 하나씩 둘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강효삼을 ‘산’으로 환원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북방의 산들이 울창한 숲으로 존재하려면 남아있는 또 다른 산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시인은 강효삼을 산으로 환원시킴과 동시에 시인 자신도 자신한테 주어진 산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말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흔들리지 않는 절개
꽃 진자리
노르스름한 씨방
내일을 읽고 있다
꽃 진자리 고웁다
꽃이 졌어도 
내일을 그릴 수 있는 너
목란은 목란으로 푸르다
꿈 가진 이 푸름이여
- 「목란꽃을 보내고나서」, 부분

그리움을 사명감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시적 욕망은 「목란꽃을 보내고나서」에서도 드러난다. “궂은 비속에/ 목란을 보내고나서” 사람들은 그 목란을 다시 그리워한다. 뒤늦게 흰 꽃말이 그립고 너울 쓴 순수함이 그립고 “흰색을 키우려/ 오동지 설한풍 속에/ 옷섶을 겹겹이 싸안은 그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꽃이 진 자리에 남는 것이 꼭 뒤늦은 후회와 슬픔만이 아니라고 한다. 꽃은 비록 졌어도, 그 꽃의 ‘흔들리지 않는 절개’는 여전히 시인의 가슴에 남아있고 그 꽃진 자리는 여전히 ‘고웁다.’ 시인이 시로 세상을 품고 있는 한, 시인이 시적 몽상을 멈추지 않는 한, 시인의 가슴에서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 것이다. 비록 육신이 세월의 흐름을 못 이겨 언젠가는 꽃이 지듯이 속절없이 져버리더라도 시인의 정신이, 시인의 몽상이 여전히 그가 남긴 시편들 속에 맑은 향기로 남아있다면 꽃이 졌어도 목란은 여전히 목란으로 푸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 구절 “꿈 가진 이 푸름이여”가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상봉 시인의 그리움은 관념적이지 않다.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은 않다. 그 속에는 아름답고 따뜻한 기운이, 그리고 삶에 대한 희망과 기도 및 남겨진 자로서의, 시인으로서의 의지와 사명이 담겨있다. 그리하여 그의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은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인간의 원초적인 그리움은 언제나 고향을 욕망한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는 인간이 보호받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공간을 고향(집)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향 밖은 언제 덮칠지 모르는 위험과 도발이 무성한 무서운 곳이다. 반대로 고향은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는 친숙함과 편안함,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안전함, 안온하고 즐거운 소리와 달콤한 냄새 등과 같은 오랜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동의 안식처이다. 
그리하여 김소월은 “생시에는 생각도 아니 하던 것/ 잠들면 어느덧 고향입니다.”라고 노래하고 정지용은 고향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읊는다. 신석정도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이 고향을 노래한 것은 고향이 우리들의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없는 것이 없다. 소리가 있고 향기가 있고 심지어 먼지와 매연도 있다. 매미가 울어대던 무더운 여름밤, 짜릿한 첫눈 그리고 첫사랑, 겨울 강이 쨍쨍 얼어붙는 소리가 들려오던 추운 겨울밤, 어쩌면 겨울밤보다 더 추웠던 누군가와의 이별, 한낮의 우울한 잿빛 하늘, 그 잿빛을 뚫고 울려 퍼지는 밝은 종소리 …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또는 슬프거나 행복한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이 바로 고향이다.
김상봉 시인의 그리움 속의 고향도 마찬가지이다. 

소쩍새야 반갑다 
턱을 고이고
너와 밤을 새운다
설움 많던 이별에 울던 새
이 밤엔 상봉에 겨워
앞뒤창 옮아 앉으며
밤을 가르며
소쩍소쩍
외로웠던 정 달래어 준다
그래 고향은 따뜻한가 보다
- 「소쩍새」, 부분

시인은 그리운 대상인 고향을 공간 그 자체로 호명하지 않는다. 소쩍새라는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소쩍새 울음소리를 통해 청각적으로, 이어서 소쩍새에 깃든 서사를 통해 그리운 고향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 환원시킨다. 
타향의 밤은 언제나 춥고 쓸쓸하고 외롭다. 고향을 떠나 길 위에 선 ‘나그네’들의 밤은 늘 고독하다. 그들은 고향이 그리워도 그립다 말을 못 하고 대신 독한 술로 그리움을 달래며 취기로 꿈결같이 고향에 다녀오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향의 음식, 고향의 냄새, 고향의 소리 이러한 감각들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숨어있다가 순식간에 그리움과 함께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다주기도 한다. 시인은 고향에서 듣던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푹 빠진다. 이별에 울던 새’와 만나니 시인도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 이웃들, 심지어 고향의 냄새, 고향의 소리, 고향의 풀 한 포기마저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상봉 시인은 앞 시편들에서도 그랬듯이 그리움을 애잔함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소쩍소쩍/외로웠던 정 달래어 준다/그래 고향은 따뜻한가 보다”라고 그리운 고향을 따뜻함과 평온함, 행복감으로 떠올리는 그 순간에, 시인은 이미 그 따뜻한 고향에 도착한다. 그와 동시에 타향의 밤도 이내 따뜻함이 넘치는 푸근한 고향으로 환원된다. 이것이 바로 시의 힘이자 몽상의 힘이자 그리움의 힘이다. 

골목이 끓는다
함 사세요
예단함 사세요
버선발이 대문간 메운다
개다리소반 米酒에
목젖 방앗소리 높고
고두백배 대문턱 닳아라
종이봉착 뚫는 큰아기
수집움이 빨갛게 타네
- 「함진아비」, 부분

고향에 대한 시인의 그리움은 고향 땅이라는 물리적인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시절 고향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삶의 한 형태, 사람 사는 이야기, 우리의 옛것, 전통, 그 모든 것들이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시인은 지금은 거의 세월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서 자취를 감춰버린 ‘함진아비’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호명해낸다. “함 사세요/ 예단함 사세요”라는 소리로 골목이 끓고 온 동네의 버선발들이 대문간을 메우고, 맛 좋은 술에 기분이 좋아진 이웃들의 목젖 방앗소리가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들던 그 시절이, 시인은 여전히 그립기만 하다. 개혁개방 이후 시작된 이산의 물결에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고, 이제 고향에 남은 건 함진아비의 빈 그림자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세월도 ‘탈피’를 한다는 사실을.

탈피는
아픔이지만
행복하다
크는 순간
탈피가 시작된다
(중략)
땅속 깊이 그려온
마음 밭에
꿈이 파랗다
세월도 탈피하는가?
여름이 익어간다.
- 「탈피」, 부분

“탈피는 아픔이지만/ 행복하다”. 시인은 우리의 옛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분명 아픈 일이지만, 세월도 탈피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무수한 탈피의 과정을 거쳐 내가 나로서, 내가 시인으로서 거듭났듯이 생성과 소멸이 그 자체로 순환되면서, 봄이 가고, 다시 여름이 익어가고 이내 가을이 온다는 것을 시인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리운 것들을 한껏 그리워하면서도 또 다른 마음의 밭에는 항상 파란 꿈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으로 아름답고, 그리움은 그리움 그 자체로 소중하고, 탈피는 또 다른 그리운 것들을 맞이해주게 한다. 그러므로 이때 그의 그리움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김상봉 시인의 근작 시 저변에는 다양한 그리움의 조각들이 깔려있다. 그 그리움은 시우를 향하기도, 또는 누군가의 젊음, 고향, 잃어버린 전통과 같이 다양한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 때로는 애틋함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도 그의 그리움의 저변에는 언제나 그리움을 넘어서는 역동하는 생명력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리움은 갇혀있는 그리움이 아니라 삶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희망이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은주 (시인·문학평론가) 
연변대학 조문 학부, 같은 대학원 문학석사
연세대학교 문학박사
재한조선족작가협회 부회장
디아스포라 시치료연구회 대표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