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강효삼 시인
故강효삼 시인

7월 13일 오전 10시 쯤, 송화강위챗을 열었더니 강효삼선생이 12일 타계했다는 부고가 떠있어 깜짝 놀랐다.
아니, 며칠 전에도 그와 통화를 했는데, 나는 급히 선생의 개인위챗을 열었다.
7월 1일 오후 3시 6분, 통화시간 2분 33초라고 찍혀 있었다.
그때 선생은 몸이 좀 불편했지만 아직 10년은 문제없다고 믿었기에 나는 그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였다.

이튿날, 선생의 장남 강선남씨의 전화를 받았기에 선생의 최후를 알게 되였다.
선생은 7월 3일, 갑자기 발작한 병으로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어 줄곧 구급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돌아서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선생과의 첫 만남은 지난세기 80년대초, 연변에서 가진 문학행사 때였다.
초면이지만 시인의 활달한 성격에 아주 유모아적이기에 우리는 인차 친숙해졌다. 관광길의 차 안에서 그는 사람을 웃기는 육담을 털어놓아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후, 길림, 통화 등 문학행사에서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되어 반가웠고 생명의 흙냄새, 신선한 풀냄새, 구수한 밥냄새가 나는 그의 시를 접촉하면서 재치있는 향토시인을 존경하게 되었다.
2008년 봄이었다. 그는 상지현병원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입원치료 중인데 병이 위중하다고 하였다. 나는 즉시 알아차렸다. 병원비가 부족한 급한 일이기에 나를 믿고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문학친구로서 급한 일이 있을 때, 나를 믿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나는 급히 병원으로 그에게 전보송금을 하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선생은 요독증으로 위험했는데 일본에 있는 딸과 사위가 병원비용을 전부 부담했기에 완치되어 건강을 되찾았다고 하였다.
선생이 타계한 다음, 《장백산》의 편집 리혜가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2008년 6기 《장백산》에 나간 선생의 시특집의 문학담 <나에게 문학은>이란 글을 올렸는데 내가 처음 보는 선생의 글이었다.
그때는 내가 본의 아니게 《길림신문》의 직무를 겸했기에 신문사의 일에 시간이 너무나 쪼들려 《장백산》의 원고는 리여천주필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나는 관여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선생의 이 글이 발표된 것조차 줄곧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 글을 읽으니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있었다.
선생은 그때 내가 그를 도와준  일을 놓고 “나는 이 일을 죽을 때까지 잊을 것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나는 15년동안 이 글에 대하여 그와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그가 어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겠는가? 심성이 어진 선생은 끝내 이 일을 나와 소통하지 않고 떠났으니 어찌 내 마음에 걸리지 않겠는가!
2014년 12월, 《민족문학》년도상 시상식이 있을 때었다. 시상식 전날 저녁, 내가 북경의 지정호텔에 도착하니 강효삼, 김성우, 전춘매 등 수상자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강효삼선생더러 무슨 교통편으로 왔는가고 물으니 그는 기차편으로 왔다고 하였다. 회의통지서에 항공편을 이용하라고 부탁했겠는데 왜서 고생스럽게 기차를 타고 왔는가고 물으니 선생의 대답은 상을 받는 것도 고마운데 그 비싼 항공편까지 이용한다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렇게 순수하고 어진 시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민족문학》관계자에게 선생이 돌아갈 때는 항공편을 이용하도록 부탁을 하였다.
후에 선생은 전화로 나에게 알렸다. 북경에서 돌아올 때는 편안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하였다.
 선생은 자기 앞에 차례진 밥도 제대로 챙겨 먹을 줄 모르는 유명시인이라 했기에 우리는 같이 웃었다.
2020년 11월 15일, 선생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그의 시집 《촛불에는 재가 없다》를 싸인하여 나에게 보내왔었다.
시집의 제목이 명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지정된 기한내에 내가 하던 일을 마쳐야 하기에 선생의 시집을 여유있게 읽지 못하고 그냥 훌훌 넘기면서 읽었지만 예전 선생의 향토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다음 여유있을 때, 다시 읽기로 하였다.
작년에 선생은 이 시집을 소개하는 서류를 이메일로 나에게 보내왔다. 흑룡강작가협회에서 몇년에 한번씩 진행하는 우수작품평선에 조선족작가협회에서 이 시집을 추천했기에 평심위원회에 올릴 서류를 요구 대로 작성하였는데 날더러 한어번역을 부탁하였다.
좋은 일이었다. 선생의 시집수상은 우리 문단 시가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고 또 이 수상은 어쩌면 선생의 마지막 수상이기도 하기에 며칠 품을 들여 편역을 하였다.
그런데 후에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선족에 차례진 시집수상명액은 딱 하나인데 한 젊은 시인의 시집도 올라왔기에 자기가 양보를 했다고 하였다.
후배시인을 배려하는 선생의 품덕은 고상하지만 어쩐지 나는 좀 섭섭한 심정이었다.
선생이 타계한 다음 《송화강》잡지는 선생의 추모특집을 낸다고 리호원주필이 나에게 원고청탁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선생의 시집을 감상하려던 참이었다.
지난번에 그냥 훌쩍 넘어갔던 ‘머릿말’, 이번에는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한 몇글자가 있었다.
선생은 시집의 시를 “신토불이식의 산품”이라고 자칭하였다.
신토불이식의 산품이란, 신토불이예술의 시를 말한다.
지난번에 총망히 선생의 시집을 훑으면서 무엇이 좀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척 궁금하였다.
이번에 선생의 시를 감상하면서 나는 거듭 감탄을 하였다.
선생의 시는 신토불이예술의 시가 옳았고 또 훌륭한 시들이었다.
선생의 신토불이시는 어떤 시인가?
선생은 신토불이시 준칙을 <시줄>이란 시로 형상적으로 해석하였다.
 
내가 쓴 시줄은 내가 선택한 밧줄
나는 나의 이 밧줄로 자주 내 몸을 칭칭 감는다
속박은 불편하다 하지만
밧줄에 단단히 묶이울수록 탄력있는 나의 영혼은 오히려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뛴다
 
묶이우면 묶이울수록 더 자유롭고
원활해지는 상상의 힘이어
나래 돋친 새마냥 종회무진 우주를 날며
요술 같은 이 밧줄로
해와 달, 별, 구름들을 감아와
나는 그것들을
나의 해, 달, 별, 구름이 되게 한다
그러나 평생 한 밧줄에만 만족할 수 없어
나는 한 밧줄 묶고 나면
다음 밧줄을 준비하여
다시 나를 꽁꽁 묶어
나 스스로 나를 감옥에 처넣는다
 
한편의 시를 완성하기 전에
결코 놓여나올 수 없는
그렇게 나는 시라는 이 밧줄에
평생을 묶이우고 풀면서
나를 완성한다
 
선생이 선택한 이 밧줄은 신기하게도 묶이울수록 더 크고 넓은 세상을 뛰게 되고 묶이울수록 더 자유롭고 원활한 상상의 힘을 얻어 나래 돋친 새가 된다.
선생은 이 밧줄로 자신의 자연세계를 만들어 스스로 그 감옥에 들어간다. 한 밧줄로 묶고 나면 다음 밧줄을 준비한다.
신기한 밧줄, 요술의 밧줄, 다름아닌 토템불이예술준칙이다. 이 준칙의 신비로움은 손오공의 그 금빛곤봉을 연상하게 한다.
신토불이예술준칙의 요술을 펴는 시인, 자신의 자화상을 어떻게 그렸는가?
시인은 <모래>를 선택하였다.
 
이제 더 이상은 부스러질 수가 없습니다
오래 다스려졌습니다
작아질 수 없을 때까지
차라리 당신이 칼처럼 내 몸을 갉아냈더라면
나도 칼이 되어 맞섰으련만
부드러운 손이 되어 나를 보듬어주었기에
나는 그만 당신에게 나를 통 채로 맡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소멸만은 허용하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모지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강한 내가 되지 못하는
그 허명의 껍질들을 벗어버리고
내 안의 알맹이만을 남겨
나는 나의 이름마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나의 이름은
모래흙에서 왔지만 홁보다 강한
작아도 딴딴한 모래알입니다
부드러워도 강한 물이어
당신이 나를 작아도 강하게 변형시켜주었군요
나는 지면서도 이긴 존재가 되었어요
홍수에 밀릴지언정 구겨지지 않고
가라앉을지언정 소멸되지 않는
 
만약 우리가 고난했던 시인의 경력을 알고 있다면 이 자화상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지난세기 여러 정치운동의 피해로 시인의 길은 고되고도 험난하였다.
젊은 나이에 소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바른 말을 한 죄로 학교에서 쫓겨났기에 신혼 11개월만에 아내에게 이혼을 당했다.
그후 그는 또 어렵게 소학교 교원이 되었지만, 또 바른 말을 하는 그 습성 때문에 또 학교에서 쫓겨나 노동개조를 하였다.
비오는 날, 미끄러운 논둑에서 힘에 겨운 못짐을 지고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사람들의 갖은 조소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위로해주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은 세월이란 ‘당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아도 딴딴한 모래알이 되었고 부드러워도 강한 물이 되었고 지면서도 이긴 존재가 되었다.
참으로 감동을 주는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의 사랑을 받아 딴딴한 모래알이 된 그는 자연의 사랑계시를 생동하게 싯줄에 옮긴다.
대표적인 자연계시의 신토불이시 두 수를 골랐다.
한 수는 <고드름1>이다
 
“뜻은 높은 하늘에 두고
낮은 곳의 새상에 눈을 돌리어
남들 아득바득 우로 오를 때
당신은 아래로 눈길 돌려
물구나무로 섰다.
 
하늘의 높이와는 승부를 겨루지 않았던 당신
어쩌면 그것이 자칫 바른 세상
거꾸로 볼 수도 있는데
고집스레 촉각을 아래로 뻗치는
당신은 추운 봄 지성의 탑”
 
각자의 시각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추운 봄날, 지성의 탑이 되어야 한다는 계시는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다른 한 수는 <잔디에게 우선권을 준다>이다
 
“봄을 리드할 후보자를 물색할 때
나는 두말없이 잔디의 이름에 선거표를 찍었다
제가 봄을 리드한 선구자들이라
붉은 띠 두르고 호소하는 것들 많지만
 
잔디는 그 혹독한 겨울에도
의연히 지금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입술이 까칠했을 뿐
그 혹한 속에서도 납작 엎드려
봄의 의미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온 공신인 거다
우람지고 거창하다고 뽐내던 나무들
몸을 옹송거리면
두터운 외투 속에 목을 구겨박고 움츠릴 때
겨울부터 준비해온 봄을 온몸에 두르고
계절의 혈관 부풀리며
힘들게 봄을 끌고 온 잔디
봄은 잔디의 푸른 색갈에서부터 시작된다”
 
봄을 리드하는 잔디, 신비하고 감동적이다. 잔디의 형상은 의인화를 넘어선 신의 형상이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기에 한 자연사물을 왕왕 다각도, 다시각으로 터득하기에 동제다작시(同题多作诗)가 적지 않아 이채롭다.
예하면 <산>, <가을>, <고드름> 각 2수, <진눈까비>, <눈>, <분수> 각 3수, <민들레>, <단풍> 각 4수, <진달래> 6수, <수평선> 7수다.
동제 7수인 <수평선>을 감상해보자.
편폭을 고려하여 부분중점만 골라 옮긴다.
 
수평선1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가
끝나는 곳이 아니다
하늘은 하늘 대로
바다는 바다 대로
제각기 제갈길을 가다가
멈춘 듯 한자리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를 꼭 껴안고
짝을 이뤄 살을 섞어
한평생 이별 없이 사는 짝이다
 
수평선2
 
기실 보이면서도 없는 것이 수평선인데
내 스스로 나를 묶어놓은
내 마음이 수평선이었다
 
수평선3
 
다가서면 손에 잡힐 듯 싶다가도
다가서면 또 어느 새 그만큼 멀어지면서
눈 앞에 그어진 새 수평선을 향해 가는 재미에
나는 끝없이 먼 바다를 질주한다
 
수평선4
 
나는 저 일매진 수평선을
한줄의 명시로 안다
세상엔 깊고 오묘한 이미지를 담은
짧은 시구가 많고 많지만 수평선처럼
저렇게 단 한줄의 시행으로
이 세상 가장 크고 넓고 깊고
복잡하고 오묘하며 심각한
한줄의 명시를 본 적이 없어
 
수평선5
 
끝없이 늘어나는 욕망들이
다투어 우주를 겨냥하고 있는데
바다만은 자신을 극복할 묘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자신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이다
 
수평선6
 
이제 그만 더는 나를 유혹하지 말아
나 여기서 그만 머물련다
너무 많은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집착
나에겐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너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수평선7
 
삶은 내처 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가다가다 때론 멎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멈춤으로 더 넓은 수평선
나도 이제 머물고 싶다
저 수평선에
지친 내 몸과 마음 다 내려놓고
더 넓은 세상 관망하기 위해
 
시인은 각기 부동한 일곱쌍의 날개, 일곱개의 상상으로 신토불이의 드넓은 세상을 생동하게 우리들에게 펼쳐놓았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시인이 그린 신토불이 인물속사 세편을 감상해보자.
 
결백한 영혼의 진흙상
 
시방 내 앞에 진흙상들이 서있다
진흙상이다, 평생을 흙을 딛고 흙을 만지고
흙을 먹고 흙에서 자면서
그 따뜻함과 부드러운 흙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들
손이 흙이다, 발이 흙이다
몸이 흙이어서 생각하는 것조차 흙이다
 
흙은 어디까지나 흙이어서
한평생 지렁이처럼 낮은 곳에 살면서
수십성상을 마른 바람과 따가운 해볕
혹독한 추위가 번갈아 들이닥치는 들에서
젖고 마르고 얼고 녹다 못해
이젠 폭우에도 씻기지 않고
폭설에서 쫓기지 않는
단단한 진흙상으로 주조되었다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
결백한 영혼의 진흙상
 
대결
 
김치독 얼어터진다는 북방의 소대한 추위는
새파랗게 날 세운 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그 칼 끝이
조금만 닳아도 금시 살점이 베인 듯
얼얼하다
 
하여 지독한 칼 끝의 공격을 피하려고
털모자 깊숙이 두 귀를 묻고
두툼한 솜옷으로 온몸 감싸고
때론 입과 콧구멍마저
넓은 마스크로 덮어버리지만
눈만은 결코 감지도 숨기지도 않는다
 
앞을 볼 수 없기 때문만 아니다
크게 뜬 두 눈도 칼이다
겨울 추위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칼날과
부딪치는 아츠런 소리 없어도
굴함없이 당당히 맞서
눈의 칼날에 부서진 추위란 칼의 잔해가
하얀 성에로 눈썹에 대롱대롱 맺힌다
 
눈보라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길 떠나실 때
할아버진 밥 대신 술을 드셨습니다
우정 독한 60도짜리 배갈을 골라
안주 없이 한사발 쭉 들이키고 길을 나서
김치독도 얼어 터진다는
극한의 추위와 흔쾌히 몸을 섞었습니다
 
보얀 눈보라에 모든 것 멈추어선 듯
하늘땅마저 갇혀 보이지 않고
날던 새도 그만 나래를 접었는데
까짓 추위가 그 무슨 대수랴
대지를 삼키는 눈보라 휘—휘— 꿰지르고
장쾌한 삶의 나래를 펼쳐가는
구척장신 할아버지
날리는 그 흰 수염과
그에 맞춰 펄럭이는 흰 두루마기자락은
그대로 설원에 나부끼는 눈보라인 듯
백의민족 하나의 풍속화를
북국의 대지에 하얗게 세워놓았습니다

남영전 시인
저자 남영전 시인

멋지게 형상화한 북방인물속사, 시인의 뛰어난 재치의 표현이다.
이상 시인의 신토불이시의 준칙, 자화상, 자연의 계시, 동제다작, 북방인의 인물속사는 자연과 사람의 동일체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선보였다.
실상, 시인의 시집 《촛불에는 재가 없다》 전체가 자연과 사람 통일체예술이다.
시집은 5장 207수의 시가 수록되었다. 첫장 40수, 대자연은 다재다능한 예술가, 그 예술이 또 인간에 주는 계시를 예술화하였고 2장부터 5장까지의 167수의 시는 모두 자연과 사람의 동일체 예술을 표현한 뛰어난 재치의 시로 종종 감동을 주는 시들이다.
시집의 시들을 다 읽고나면 하나의 발견이 있다. 시인이 시적대상으로 하는 자연은 하늘의 해, 달, 별, 바람, 비, 눈, 구름 지상의 풀과 나무 등 모든 식물을 포함한 대자연이고 자연과 사람은 영적인 동일체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토불이의 범주를 훨씬 초월한 것이다.
사전에 따르면 신토불이(身土不二)는 [명사]: ‘몸과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으로 자기가 사는 땅에서 산출한 농산물이라야 체질에 잘 맞음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보다싶이 시인의 자연은 몸과 땅의 체질을 벗어난 광적인 개념이다.
알고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우리들에게 남긴 이 신토불이는 중국전통문화의 핵심인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과 같은 뜻이고 그리스 고대철학가들이 말하는 ‘생명일체화(生命一体化)’와도 같은 뜻이다.
신토불이, 천인합일, 생명일체화는 다 같은 뜻으로 자연과 사람의 관계철학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왔기에 자연의 족속으로 자연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선인들이 이러한 철학사상을 얻게 된 것은 만물유령 우주관인 선인들이 인류조상의 탄생믿음에서 온 것이다.
만물유령의 우주관은 세상만물을 다 영적인 존재, 즉 신으로 보는 관념이었다. 이런 관념으로 자신들의 조상은 그 어떤 자연물체의 작용으로 탄생하였기에 조상을 탄생시킨 그 자연물체를 조상신(토템)으로 모셔 숭배하고 신앙하였다.
인류사가 알려주는 사실: 각 민족의 문화는 바로 이 조상신 신앙(토템신앙), 토템제의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리주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이 조상신 숭배, 토템신앙은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지난세기 상반기 세계적인 토템연구붐은 토템신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근원적인 진실, 즉 사람은 자연과 혈연관계를 가져 사람은 자연에서 왔다는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토템신화의 이런 의미의 발견은 20세기 하나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1950년, 세계유네스코는 상고신화(토템신화)를 인류무형문화재로 등록하였다.
신토불이, 천인합일, 생명일체화, 세계 고대인들의 이런 철학사상은 자연을 경외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류의 생존법칙이다.
하지만 공업문명의 발달로 인류사회는 과학의 힘만 믿고 자연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자연에 대한 파괴가 점점 더 심각하여 지금은 인류의 생존위기에 처해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각종 자연재해, 시인은 심각한 현실로부터 시인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사고하게 된 것 같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2009년 봄, 선생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시를 담론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요지음 자기는 우리 민족 상고신화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예전의 시는 설익은 시라고 개탄하였다.
선생은 고심한 탐구로 그 어느 날 신토불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시인으로서의 자기를 칮은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탈바꿈을 가져왔다. 그때로부터 선생은 향토시인으로부터 신토불이시인으로 재탄생한 것 같다.
실로 놀라운 변화다. 아마 자신도 놀라왔을 것이다. 새로운 시추구는 그의 원동력이었고 매 한 수의 새로운 시로 하여 그는 행복하였을 것이다.
그는 예전에 써놓은 시를 하나하나 점검하여 재탄생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2003년에 <촛불의 선택>이란 시가 있었다. 11행으로 된 시의 전문:

노오란 불나비 한마리 하얀 기둥 우에 앉아있다
방금 날듯이 나래 펄럭이지만 날지는 않는다
자유에 대한 갈망보다
빛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서다
그러나 빛은 아무나 낼 수 있는 것 아니여
스스로 제 몸을 불길에 집어넣는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
그래서 촛불은 빛을 위하여
광명의 자유보다 복종의 어둠을 선택한다
금방 날아갈 듯 나래 펄럭이는 것으로
바람의 지꿎은 유혹 뿌리치며
 
이 <촛불의 선택>을 재탄생시킨 시가 바로 시집의 제목으로 된 시 《촛불에는 재가 없다》이다.
육신이 통 채로 타드는 아픔
견디다 못해 뚝—뚝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태우고 또 태우고
더 이상 태울 수 없을 때
흘린 그 방울방울의 눈물마저 태운
 
촛불에는 재가 없다
 
보다싶이 옛시가 이번에는 명시로 탈바꿈하였다. 그래서 자신도 놀라웠고 옛시를 재탄생시키는 일이 그의 흥취와 재미로 되었을 것이다.
2008년 그의 작품특집으로 《장백산》에 나간 시 <우리의 고향에 무엇이 있는가>는 139행으로 그 시기 그는 이 시를 제일 좋은 시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이 시는 보이지 않고 이 시의 여러 이미지들을 살려 재치있는 여러 편의 짧은 고향시로 재탄생하였다.
이렇게 탈바꿈한 그의 시는 참으로 멋진 시들이었다.
2014년 그의 시 <민들레>가 중국작협회의 기관지 《민족문학》년도상을 수상하였고 2018년 그의 시 <진눈까비>가 한국 호미상 본상으로 선정되었다.
2020년에 출판된 그의 시는 2009년 이후의 어느 때부터 2019년까지 시인의 탈바꿈한 시와 새로 창작된 207수의 신작이다. 그래서 그의 이 신작시는 작품완성 연도를 밝히지 않았다.
만약 연변인민출판사가 아니였다면 우리 문단은 가치있는 강효삼시인의 신토불이시를 영영 잃었을 것이다.
연변인민출판사의 공덕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강효삼시인의 시집 《촛불에는 재가 없다》가 나온 지 근 3년이 되어오지만 이 시집에 대한 반응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집이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선생을 기리어 시집에 대한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신토불이, 선조들이 남긴 우리의 생존철학이다. 이 철학은 우리의 민족문학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영혼경지이기 때문이다.
조건이 구비되어 연변인민출판사가 이 시집에 대한 연구집이 출판된다면 우리 문단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어쨌든 줄곧 향토시인이라고 불리우는 강효삼시인이 신토불이시인으로 탈바꿈하여 우리들에게 좋은 계시가 되는 신토불이시를 남겨두었기에 그 공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2023년 8월 16일 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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