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7월 4일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이날은 중국의 국경절과 맞먹는 국정 휴식 일이다. 그러나 코레안과 차이니스 소매상을 대상하는 “코레아 쇼핑”은 이날도 여전히 오픈했다.

오전 “푸드 타임”이 돌아오자 매니저 미스타 박이 나를 사무실로 호출했다. “코레아 쇼핑”의 오피스텔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은 500여 평의 샘플전시청(货展厅)이였다. 안쪽에 미스타 박의 사무실이 있었다. 2층은 여비서 루안다의 사무실과 심사장님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리고 널찍한 접대실도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미스타 박이 프린트한 서류를 테불 위에 올려놓았다.
“미스타 조, 이건 중국에서 발송한 팩슨데요. 중문(中文)으로 작성돼 전혀 알아볼 수 없네요. 한국어로 작성할 수 없을가요?”

팩스 서류는 중국 광동성 불산 시에서 보내왔다. 1000여자가 넘었는데 정자(整体)와 간자(简体)가 뒤섞였다. 문맥도 잘 통하지 않아 중학생의 서툰 작문 같았다. 대충 이런 내용을 적었다.

광동성 불산 시는 무림고수(武林高手) 예문(叶问)의 고향이다. 지금도 불산에는 영춘권(咏春拳)을 전수하는 무관이 많다. 우리 회사는 이미 15년간 무림고수들이 착용하는 제복을 생산했다. 현재는 코리안 무림고수들이 착용하는 태권도 제복도 생산한다.

태권도 제복은 3세 어린이부터 6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착용할 수 있다. 원자재의 품질이 좋고 디자인이 선진적이며 가격도 저렴하다. “코레아 쇼핑”무역회사에서 수입할 의향이 있으면 답변을 주기 바란다. 서류의 끝머리에 불산 시 창성 의류 제조공장(佛山市昌盛制衣厂)이란 사인이 적혔다.

“조형, 혹시 한글 통하세요?”
“네, 한글은 어려서부터 터득했어요."
“아- 그래요. 그러면 이 서류를 한글로 작성해 주세요.”
한식경이 지나 나는 중문 서류를 한글로 작성했다. 미스타 박은 의아쩍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형은 중국 태생인데 어떻게 한글을 아세요? 문장도 눈에 잘 들어오네요. 아무튼 수고 많았어요. 근데 불산이란 곳이 중국 어디에 있지요?”
“광동성 불산 시는 한국 전라남도 목포처럼 중국의 최남단에 있어요.”

“조형, 무림고수 예문이 누군지 아세요? 중국의 무림고수는 이소룡(李小龙)과 주윤발(周润发)로 알고 있는데요.”
“이소룡은 무림고수 맞아요. 근데 주윤발은 무림고수가 아니에요. 예문은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전수한 사부(师傅)예요. 그러니 예문은 이소룡보다 한세대 앞선 무림고수예요.”

“알고 보니 예문이 이소룡의 사부였네요. 조형, 저하구 2층으로 갑시다.”
나는 미스타 박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코레아 쇼핑”에 출근한 후 처음으로 이곳에 와보았다.

미스타 박은 나를 이끌고 루안다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중국 평수로 10평에 불과한 사무실이었다. 테불 위에 각종 서류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컴퓨터, 전화기, 팩스, 복사기 등 사무용 기자재들이 빼곡히 놓였다.

루안다는 멕시코계 미국인이었다. 30대 후반의 루안다는 묵직한 젖무덤과 엉덩이 선이 반쯤 드러난 패션 차림이었다. 미스타 박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용건을 전했다. 그녀는 인츰 심사장님의 사무실로 전화를 연계했다.

심사장님의 사무실은 중국 평수로 300평도 훨씬 넘었다. 중앙에 고급스러운 사무용 테불이 놓였다. 테불 앞쪽에 커피색 진피 소파가 기역 자로 놓였다. 바닥은 신발이 푹신푹신 빠지는 깃털이 돋은 불색 카펫을 깔았다.

미스타 박이 한글로 작성된 서류를 드렸다. 심사장님은 서류를 까근하게 확인했다. 그는 루안다에게 태권도 제복 샘플을 갖고 오라고 지령했다. 조금 후 루안다가 불산 시 창성 의류 제조공장이란 중문이 적힌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미스타 조, 혹시 불산 시에 가본 적이 있어요?”
심사장은 태권도 제복을 체크하며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전 아직 가본 적이 없어요.”
“미스타 조, 그럼 혹시 심천(深圳)에는 가보셨어요?”
“90년대 초에 한번 가본 적이 있어요.”

“미스타 조, 광동성에서 의류 제조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 어딘지 아세요?”
“저는 광동성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어요. 더구나 의류 제조업은 아예 까막눈이구요."
“네, 알겠어요. 미스타 조, 수고 많았어요. 앞으로 중문 팩스 많이 받을 건데요. 미스타 조한테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뜻밖에 미스타 박이 앞질러 대답했다. 나는 심사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1층 샘플 전시청에 들어서니 50대의 풍채 좋은 아시아 남자가 진열대 앞에 서있었다. 한 손에는 두툼한 신문지를 쥐고 있었다. “세계일보”란 중문 번체 넉 자가 불현듯 눈길을 끌었다. 나는 중문판 “세계일보”에 무척 호기심이 동했다.

“당신은 중국인입니까?”
나는 중국어로 질문했다.
“예스.”
중년 남자는 분명히 영어로 대답했다.
“세계일보 잠깐 빌려볼 수 없을가요?”
나는 신문을 가리키며 역시 중국어로 문의했다.
“당신은 중국 사람입니까?”
중년 남자는 분명히 중국어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저는 대륙에서 왔습니다.”

“당신은 한국 사람 아닙니까?”
중년 남자는 의뭉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아닙니다. 저의 고향은 중국 동삼성입니다.”
중년 남자는 동삼성을 알아듣고 대뜸 환한 웃음을 지었다.

중년 남자의 이름은 당시문(唐诗文)이였다. 그는 대만 출신으로 19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현재 그는 로스앤젤레스 동부지역에 위치한 콤프턴(康普顿) 카운에서 “차이나 마켓”을 운영했다. 당시문은 나의 성씨를 물었다. 나는 조 씨(曹氏)라고 대답했다. 그는 대뜸 “曹兄”이라고 친근하게 호칭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문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일시 난감했다. 당시문은 나보다 10년도 훨씬 먼저 태어났다. 중국식으로 “老唐”이라고 호칭할까? 아니면 미국식으로 “미스타 당”이라고 호칭할까? 어쩐지 이래저래 주저심이 들었다.

“당신을 어떻게 호칭하면 좋을가요?”
나는 아예 직설적으로 문의했다.
“대륙에서는 어떻게 호칭합니까?”
당시문은 재미나는 구경거리라도 생긴듯 싱글벙글 웃었다.
“사업체를 갖고 있는 사람을 대륙에서는 흔히 <老板>으로 호칭합니다.”
“好好,就叫唐老板。"
당시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날 당시문은 나에게 5일분의 “세계일보”를 넘겨주었다. 다음번 물건 구입을 올 때는 한달분의 “세계일보”를 갖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중문판 “세계일보”는 차이나 커뮤니티(华人社区)에서 발행량이 가장 많았다. 발행인과 편집, 기자는 모두 대만 출신이었다. 나는 “세계일보”를 통해 차이나 커뮤니티에 관한 생생한 기사를 접했다. “대륙 자본가 뉴욕에서 호화주택 구입”(大陆资本家纽约购买豪宅) 1999년 5월 12일 “세계일보” 제2면의 기사였다. 

2003년 5월 나는 이런 기사를 읽었다. “대륙 여탐관 양수주 일가 미국으로 도주”(大陆女贪官杨秀珠一家潜逃美国) 당시 이 기사는 양수주의 사진을 신문에 올렸다. 양수주는 저장성 건설청의 부청장이었다. 그는 2억 5천만 원이란 거액의 공금을 탐오한 후 일가족을 동반해 해외로 도주했다.

어느 날 나는 “세계일보”에서 이런 기사를 접했다. 대만 중산대학 역사학과의 지은국지(陈国志) 교수가 1980년대에 “미국 화교 변천사”(美国华人变迁史)란 저서를 출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후 나는 당시문에게 우황청심환 두각을 선물했다. 그리고 지은국지 교수의 “미국 화교 변천사”를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
“大陆药,太贵太贵。曹兄,谢谢!”
당시문운 거듭거듭 감사의 뜻을 표달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당시문이 대문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는 함께 식사하러 가자고 청들었다. 국내와는 달리 미국 식당은 대개 메뉴가 단출했다. 청하는 사람이나 대접받는 사람이나 별로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문에게 청구하는 바가 있어 “오늘은 당연히 내가 접대해야지.”라고 속궁리를 하였다.

우리 일행은 캘리포니아주립대학근처의 미국인 레스토랑으로 찾아갔다. 나는 35달러 스테이크(烤牛排) 료리 2인분을 주문했다. 스카치라는 양주 한 잔과 사라드(야채무침)가 동반되여 나왔다. 이날 당시문은 내가 기자 출신인 것을 확인했다. 그는 식사 도중에 줄곧 대륙의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문의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당시문은 지은국지(陈国志) 교수의 “美国华人变迁史”를 넘겨주었다.
“조형은 혹시 회사에서 매니저 직을 책임졌습니까?”
그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근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나는 의아쩍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문은 이렇게 설멸했다. 여태껏 전시청의 샘플은 매니저 미스타 박이 책임지고 정리하지 않았는가? 근데 요즈음 “曹兄”이 이 일을 도맡고 있지 않는가?

사실 근래에 나는 광동성의 동관(东莞), 강문(江门). 혜주(惠州) 등지에서 발송된 중문 팩스를 육속 한국어로 번역했다. 때로는 심사장님의 지령에 따라 루안다의 사무실에서 장시간의 중국어 통화도 하였다. 어느 날 매니저 미스타 박이 나를 찾았다. 내일부터 전시청의 샘플 정리 작업을 책임지라고 지령했다.

나는 일시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매일 2시간씩 전시청에서 샘플 정리 작업을 했다. 당시문은 그제야 다소 의문이 풀린 듯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曹兄, 好兆头, 来日方长。”
그 후 나는 지은국지(陈国志) 교수의 “美国华人变迁史”를 통해 차이나 커뮤니티에 대해 차츰차츰 흥취를 갖게 되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한 후 광동성 일대는 전란이 극심했다. 1848년 제임스 마셀이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을 발견하자 삽시간에 “골드러시 붐”(采金热)이 덮쳤다. 1851년 청조함풍원년(清朝咸丰元年)에 홍수전(洪秀全)이 청나라에 반기를 든 “태평천국”운동이 발발했다. “태평천국”운동은 장강 이남의 절반 강산을 휩쓸었다.

당시 광동성 일대의 수많은 난민들이 전란과 기아를 피하고 “골드러시”의 황금 몽을 꿈꾸며 아메리카로 진출했다. 지은국지 교수의 “미국 화교 변천사”는 이렇게 기술했다.

“1851년 캘리포니아주에는 이미 2만 5천여 명의 중국 노동자(华工)가 있었다. 1870년에 이르러 그 수치는 6만 3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의 고향은 대부분 광동성의 대산(台山) 이었다. 그러므로 <美国华人皆台山>이라고 하였다.”

당시 광동성 일대의 “중국 노동자”는 십중팔구 돼지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다. 지금도 이들 이민 제1세대는 “卖猪仔”(돼지를 팔았던 세대)로 불렸다. 시초에 이들은 철도공사 인부, 사탕수수 농장 인부로 극심한 고역에 시달렸다. 백인 업주들은 이들을 “Coolie”(苦力)라고 비하하며 경시하고 멸시했다.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는 중국인 “苦力”를 이렇게 설명했다.
“1862년에 설립된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 회사는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철도 부설공사가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수많은 백인 로동자들이 분분히 공사장을 떠났다. 회사 측은 급급히 중국에서 7천여 명의 철도 인부를 모집했다.
이들은 일색으로 정수리까지 대머리를 했다. 등 뒤에는 기다란 머리채를 징그럽게 드리웠다. 남루한 옷차림에 더러운 땟자국이 지저분했다. 그러므로 가축처럼 취급되었다."

그래도 “쿠리”세대는 매달 30달러의 보수를 받았다. 생활비와 기타 비용을 삭감하고 연말이 돌아오면 고향에 80달러 또는 100달러를 송금했다. 당시 광동성 일대 농민들의 연간 수입은 고작 10달러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들이 송달한 금액은 토지를 구매하고 살림집을 마련하는 "거금"(巨款) 이었다.

확실한 문헌적 기록은 없지만 미국 땅에 처음으로 이민간 아시아계 인종은 중국인으로 인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1785년 아이랜드(爱尔兰) 선장 “John Donneli”이 인솔한 돛배가 미국 매닐랜드 주의 볼티모어항에 정박했다. 당시 중국인 선원 3명이 하선하여 볼티모어에 정착했다. 이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시초의 아시아 인종이였다.

1862년 미국은 “쿠리 교역 법안”을 제정하고 중국에서 밀려오는 “쿠리”이민자 수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20년이 지난 1882년미국은 “중국인 배척 법””(排华法案)(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특정 인종을 지목해 이민을 금지시킨 법안이었다. 미국은 무엇 때문에 유독 중국인만 배척하는 가혹한 법안을 제정하였는가?

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중국인을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공공질서를 준수하지 않는 중국인의 악습에 극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중국인은 백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조상숭배 신앙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차이니스 커뮤니티의 봉폐된 구역에서 본국 문화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미국의 주류사회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는 앞으로 중국인이 백인과의 주요한 경쟁자로 부상할 거라는 우려심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중국인을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고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중국인 배척 법”에 따르면 이민 제1세대는 일단 미국 땅을 벗어나면 재입국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중국인 남성은 외국인 특히 백인 여성과의 통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리고 중국에 두고 온 가족들의 미국 입국도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므로 차이나 커뮤니티의 인구는 6만여 명에서 3만여 명으로 급속하게 감소되었다. 지금도 미국에는 “Chinaman’s Chance”(成功的希望就像中国佬那样渺茫)이란 속어가 있다.

차이나 커뮤니티는 다년간 “여성이 금싸라기 같이 귀중한” 홀아비 사회였다. 미국의 갱단 조직은 홍콩과 광동성 일대에서 중국인 여성들을 기편해 미국으로 데려온 후 공개적인 인신매매를 실행했다. 당시 10~20대의 젊은 여성은 450달러에 교역되었고 30대 여성은 200~300달러에 교역되었다. 그러나 내란과 외란으로 국운이 기울어진 청정부는 중국인에 대한 이같은 멸시와 배척에 속수무책이었다.

시초에 “중국인 배척 법”은 10년에 한 번씩 연기되었다. 1904년 “중일 갑오전쟁”이후 이 법안은 영구적인 법안으로 통과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개시되자 미국과 중국은 동맹국으로 되였다. 그리고 1943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중국인 배척 법”을 폐지할 데 관한 “magnusen ACT”(麦诺森法案) 법안을 국회에 제기했다.

1948년 미국은 중국인과 백인의 통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폐기했다. 1965년 미국은 중국인에 대한 새로운 “자유이민 법안”을 시행했다. 그 후 대만, 홍콩,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유럽 등지에 산재한 중국인들이 미국으로의 새로운 이민 붐을 형성했다. 1990년 미국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중국인 이민자 수는 이미 160여만 명을 돌파했다.

“돼지를 팔았던” 이민 제1세대는 평생을 “쿠리”신분으로 갖은 멸시와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인 특유의 “낙지생근”(落地生根) 기질은 이민 제2세대부터 “쿠리”운명을 철저하게 개변시켰다. 이민 제3~4세대는 이미 미국의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1959년 하와이 주가 마침내 미국 연방정부에 가입했다. 당시 등우량(邓友良)이 하와이 주의 국회 참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민 제2세대 출신으로 미국 정치무대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첫 케이스였다. 그의 부친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새똥을 져나르는 “쿠리”였다. 그의 생모는 미국으로 팔려온 노비였다.

등우량은 어린 시절에 신문배달도 하고 구두 닦기도 하며 힘겹게 공부했다. 1939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1977년까지 장장 17년간 하와이 주의 국회 참의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매년 중국인 이민자 수를 105명으로 통제하던 관례를 타파하고 2만여 명의 이민자를 수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7년 락가휘(骆家辉)가 47세의 젊은이로 워싱턴 주의 주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이민 제3세대였다. 본적지(租籍)는 광동성 대산(台山) 이었다. 1952년 그는 빈한한 이민 제2세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까지 수여받았다.

락가휘는 주장 선거에서 승리한 후 부친을 모시고 조상의 뿌리를 찾아 광동성의 대산을 방문했다. 당시 마을의 어느 노인장이 그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낙루했다.
“너의 할아버지는 13세 때 부보님이 돼지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해 주어 쌘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어린 나이에 돈 많이 벌어서 돌아 온다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국은 타국에 뼈를 묻고 말았구나.”

2001년 조소란(赵小兰)이 조지 부시 대통령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으로 부임되었다. 그의 본적지는 상해시 가정구(上海市嘉定区)였다. 1955년 그는 대만에서 출생하였고 1961년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했다. 부친 조석성(赵锡成)은 1940년대 상해교통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미국에서 다섯 자식의 생계를 위해 매일 16시간씩 근무했다.

조소란은 부친 세대의 “자원적인 희생”의 혜택으로 하버드대학의 경영학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 후 레이건 대통령 시기에 연방 해운 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조지 부시 대통령 시기에는 아시아계로 노동부 장관에 부임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문헌 기재에 따르면 1868년 미국은 청정부와 “Bulingame Txeaty”(浦安臣条约)을 조약을 체결했다. 그 후 상호 간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령사엄무를 처리했다. 당시 청정부는 “양무운동”의 명분으로 무려 105명의 중국 소년을 미국 유학생으로 파송했다. 이들은 대부분 장강 이남의 남중국 지역에서 선발되었다. 특히 광동성 일대에서 선발된 소년들이 가장 많았다.

미국으로 파송된 중국 소년은 여전히 등 뒤에 긴 머리채를 드리웠다. 그러나 정갈하고 반듯한 옷차림에 몸가짐도 단정하고 예절도 밝았다. 특히 총기가 좋아 학업에서 뛰어난 재능을 엿보였다. 여태껏 “쿠리”만 상대했던 백인들을 경악케 했다.

미국 주류사회는 분분히 중국 소년들의 귀국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학업이 끝나자 단지 2명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이들은 청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분야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1936년 24세의 아리따운 처녀 오건웅(吴健雄)이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대학의 유학생으로 되였다. 그는 버클리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원자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계획"에 참가한 과학자였다.

1940년대 말에 오건웅은 “베타 변수 실험”(贝他衰变实验)에 성공했다. 그는 마침내 큐리 부인 이후 세계 일류의 여성 과학가로 인정받았다. 1956년 그는 물리학 분야의 “우주 불변 정의”(宇宙守恒定律)을 과감하게 부정하여 “대칭성 혁명의 첫 사람”(对称性革命第一人)으로 추앙되었다.

1957년 저명한 물리학자 이정도(李政道)와 양진우(杨振宇)가 노벨 물리학 상을 수여받았다. 1983년 패율명(贝津铭)이 프리츠 상을 수여받았다. 1995년 양치원(杨致远)이 “야호”(雅虎)를 창설했다.

2012년 미국 의회는 드디어 “중국인 배척 법에 대한 사죄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이해를 기준으로 중국인 이민자 수는 30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국은 크고 작은 도시마다 차이나타운이 있다.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제일 오랜 차이나타운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이었다. 현재 차이나타운은 “업타운”(郊区)과 “다운타운”(市中心)으로 분리되었다. 도시 외곽지역의 “업타운”은 부유층이 집거했다. 이들은 이민 제3~4세대에 속하며 안정된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다운타운”은 이민 제1세대가 집거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매일 12~16시간씩 힘겹게 일했다.

7월도 막가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뜻밖에 당시문의 요청을 받았다. 그의 주택은 “콤프턴”카운에서 북으로 20여 분을 달리는 교외에 위치했다. 30여 채의 타운하우스가 호숫가에 반달형 라인으로 둘러 앉은 아담한 마을이었다.

당시문은 1946년에 상해에서 출생했고 1949년 초에 부모님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은 진군(滇军) 출신의 군인이었다. 1978년 12월 고웅시(高雄市)에서 발생한 민주 항쟁 당시 불온 분자로 지목되여 투옥되었고 결국은 옥사하였다.

당시문은 자식 둘을 두었다. 아들은 조지아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주재 싱가포르 대사관에 취직했다. 싱가폴 여성과 결혼하고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했다. 21세의 딸애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고대 미술사를 전공했다. 딸애는 카시모도라는 독일계 남자친구를 사귀였다. 카시모도는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당시문의 원명은 당정문(唐正文)이였다. 중학시절에 그는 이백과 두보의 당시(唐诗)에 쉼취했다. 그 후 당시문(唐诗文)으로 새롭게 이름 지었다. 그는 대만 중산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다년간 “화하 춘추”(华夏春秋) 잡지사에서 편집으로 근무했다. 그는 당국의 시달림을 피해 1980년대 일가족을 인솔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그는 안해와 함께 몇 년간 "차이니스 패스트푸드”(中国快餐)를 경영했다.

“조형도 문학을 전공하였지요. 그럼 이백과 두보 중에서 누구의 시풍(诗风)을 더 애착합니까?”
당시문이 문뜩 이렇게 물었다.

“이백은 호방하고 낭만적인 시풍이 매력이지요. 그러나 두보는 매서운 현실 비평의 시풍이 매력이지요. 옛적부터 중국의 문인들은 득세하면 이백의 시풍을 즐겼어요. 그러나 비운을 당하면 도리여 두보의 시풍을 즐겼어요. 이는 마치도 국세가 흥할 때면 유교를 받들고 국세가 기울 때면 도교를 지향한 것과 똑같은 리치였지요.”

당시문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중학시절에 나는 이백의 시풍을 더욱 애착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인륜(人伦)에 대한 체험이 깊을수록 두보의 시풍을 더 애착하게 되였다. 이백은 천자도 꾸짖는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두보는 풍운 세상을 꿰뚫는 지혜를 소지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결국은 용기보다 지혜가 더 필요하다.”

이날 나와 당시문은 호숫가를 산책하며 장시간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많은 대만 상인들이 대륙에서 공장을 경영하고 있어요. 혹시 대륙으로 진출할 의향은 없는가요?”
당시문은 요즈음 확실히 뭔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계획 중이라도 대답했다.

그는 문뜩 이렇게 물었다.
“코레아 쇼핑에서 도매하는 태권도 제복은 대륙의 어느 곳에서 생산하였습니까?”
“광동성 불산 시의 창성 의류 제조 공장입니다.”
“혹시 창성 의류 공장의 팩스 넘버(传真号码)를 아십니까?”
“그건 잘 모릅니다. 저는 사무직에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당시문은 다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8월 중순의 어느 날 여비서 루안다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당장 심사장님의 사무실로 오라고 독촉했다. 나는 부랴부랴 사무실로 향했다. 심사장님은 창성 의류 제조 공장에 국제 장거리 전화를 연계하라고 부탁했다. 나는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일전에 “코레아 쇼핑”은 창성 의류 제조 공장에서 생산한 30톤 물량의 태권도 제복을 수입했다. 당시 미국의 중소학교에서는 한창 태권도가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태권도 제복의 매출량이 천정부지로 급증했다. 그런데 8월 초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태권도 제복이 차일피일 중순까지 미루었다.

국제 장거리전화가 마침내 련계되였다. 상대는 이렇게 해석했다. "요즈음 주문한 제품의 물량이 갑절로 증가해 재봉기를 24시간 가동했다. 직원들도 곱대 거리로 작업하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미스타 조, 중국 말의 떵떵 바이(等等吧)가 대체 얼마를 더 기다리란 건가요?”
심사장님은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나는 상대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럼 대체 얼마 동안 더 기다려야 하는가?”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
상대는 “马上马上”을 곱씹다가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나는 심사장님의 지령에 따라 중문으로 팩스 서류를 작성했다. 만약 8월 31일 전으로 태권도 제복이 도착하지 않으면 모든 후과는 상대측이 책임진다고 밝혔다. 8월 말에 태권도 제복이 마침내 당도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고가 생겼다.

태권도 제복을 주문한 학교 측에서 물건값을 20% 삭감하라고 강요했다. 지금 타 지역의 학교에서는 모두 20% 삭감된 가격으로 구입한다고 떠들었다. 나는 불현듯 당시문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의심이었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뜨거웠다.

그 후 당시문은 종종 나를 찾아와 대륙과 대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당시문이 문뜩 나에게 3000달러의 목돈을 내밀었다.
“조형, 부탁합니다. 코레아 쇼핑의 대륙 공급처를 알려주세요. 이건 선불금입니다. 일이 성사되면 사례금은 5000달러입니다.”

5천 달러의 미화는 당연히 나에게 현혹스러운 목돈이었다. 그러나 당시문의 부탁에는 선뜻이 호응할 수가 없었다. 당시문은 나에게 이백의 용기보다 두보의 지혜가 더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나는 당시문이 언급하던 “인륜”(人伦)을 새롭게 터득했다.

“코레아 쇼핑”무역회사와 세 불럭(三条街) 떨어진 곳에 야채와 과일을 소매하는 재래시장이 있었다. 12월의 어느 날 이곳의 야채상과 과일상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며칠 뒤 이곳에 “차이나 쇼핑”이란 중문 현수판이 새롭게 나타났다.

2000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미스타 박의 호출을 받고 심사장님의 사무실로 향했다.
“미스타 조, 혹시 <워싱턴 DC>로 갈 의향이 없어요?”
나는 심사장님의 말뜻을 알 수 없어 일시 난감했다.
"<워싱턴 DC>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려고 해요. 미스타 조가 그곳에서 중국 거래처와의 일체 사무를 책임져줄 수 없을가요? 일단은 미스타 조가 오케이 하면 곧바로 파송하려고 해요.”

너무나도 갑작스레 닥친 일이라 나는 선뜻이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류 목사님과 심 사모님을 찾아 "워싱턴 DC"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심 사모님이 이렇게 권장했다.
“심사장님은 속이 깊은 분이세요. 그러니 미스타 조에게 섣불리 어려운 부탁을 한 것 같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상 싶어요.”
“심사장님은 믿을만한 분이에요. 그러니 미스타 조가 잘 의논해 보세요.”
목사님도 찬성하는 태도였다.

이해 4월 나는 미국 중동부에 위치한 버지니아주의 “애난데일”한인 커뮤니티로 이주했다. 그 후 나와 당시문은 종종 전화 통화로 연계를 유지했다.

당시문의 소개에 따르면 2003년부터 “차이나 쇼핑”으로 물건 구입을 오는 소매상들이 점점 많아졌다. “차이나 쇼핑”의 도매가격은 “코레아 쇼핑”의 도매가격보다 항시 5% 할인되었다. 그러나 당시문은 여전히 “코레아 쇼핑”으로 물건 구입을 다녔다.

“왜 물건값이 저렴한 <차이나 쇼핑>에서 물건 구입을 하지 않습니까?”
나의 질문에 당시문은 이렇게 설명했다.
“코레아 쇼핑의 상품은 언제나 품질을 보장합니다. 다년간 거래해 왔기에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나는 당시문의 해답이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문되기도 하였다. 비즈니스는 당연히 돈벌이가 목적이다. 똑같은 중국 상품을 5% 할인 받으면 호주머니에 그만큼 돈이 남을 것이 아닌가? 세살배기 동자도 계산이 똑바른 장사가 아닌가? 당시문이 이같은 이해 득실을 모를 리가 만무했다.

귀국 후 나는 가끔씩 태평양 너머의 당시문을 떠올렸다. 혹시 그때 당시문이 “차이나 쇼핑”무역회사를 경영하였더라면 지금쯤 재벌은 못되어도 상당한 부자가 되였을 것이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년~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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