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휴가 때 낙동강을 다녀왔다. 내가 이곳을 간 까닭은 결코 지명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다. 최근 들어 갑자기, 내가 왜 34년 전에 <낙동강>의 시문을 붓으로 썼던지 무척 궁금났기 때문이다.  

당시 서예 지도교수께서 오늘도 생전이라면 직접 찾아 뵙고 물어 볼 수 있을 텐데 그 교수님이 타계한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혹여 낙동강에 가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천리 길 낙동강 어디에 가서 물어본단 말인가. 궁리 끝에 먼저 <낙동강>의 저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바로 조명희 작가. 충북 진천군에 계셨다. 

조명희 동상, 필자는 지난 7월 23일에 조명희 문학관을 방문했다. 

휴가 첫날 나는 첫 번째 여행지를 진천으로 정하고 네비게이션에 '진천군', '조명희'를 입력하니 바로 '조명희 문학관' 주소를 안내해주었다. 

130키로메터, 예상시간은 1시간 반 정도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간중간 몇몇 휴게소가 있었지만 설레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쉬지 않고 질주했다. 도착하니 11시도 채 되지 않았다. 다행히 점심까지 1시간 동안 충분히 관람가능 했다. 

문학관 1층에 아카이브가 마련되어 있었고 입구에 실물보다 더 큰 조명희 선생님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첫 인상이 강했다. 

조명희 선생님은 1894년에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고 2세 되던 해(1914년)에 북경사관학교 입학하려고 가던 중 평양에서 둘째 형에게 붙잡혀 중국행이 좌절되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 투옥되었다. 몇 달 후 출옥하고 같은 해에 일본 동경 동양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유학 중 1921년 <金英一의 死김영일의 사> 희곡을 발표하였다. 2년 후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발표하였다. <봄 잔듸밧 위에> 시집, <땅 속으로> 소설 등. 
1927년 7월에 조선지광 69호에 <洛東江낙동강>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소련으로 망명했었다.

모처럼 선생님을 찾아 진천으로 왔는데 아쉽게도 선생님은 계시지 않았다.

  

左는 조명희 문화관에서 받은 , 右는 1983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잠깐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학관의 담당 선생이 전시관으로 들어왔다. 성함은 강찬모, 문학관의 학예사이다. 내가 문학관을 찾아온 이유를 간단히 말씀드렸더니 조명희 선생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의 사진에 있는 <포석 조명희 전집>이다. 

나는 기쁨 마음으로 책 두 권을 안고 문학관을 나섰다. 책 속에 내가 찾고자 하는 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바로 다음 행선지인 낙동강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경새재에서 들려 1박 하면서 강찬모 선생이 준 책을 꺼내들었다. 전집은 600여 페이지로 된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다. 그중 450 여 페이지는 포석 조명희 작가가 쓴 극, 시, 소설, 수필 그리고 평론이다. 물론 내가 찾는 소설 <낙동강>도 전집 중간에 수록되어 있었다. <낙동강>의 첫 페이지에 내가 붓으로 썼던 詩도 또렷이 적혀 있었다. 

문민書 35*130 / 2023.8.2 

나는 포석 조명희 문학관에 다녀와서 '낙동강'을 다시 썼다. 붓을 들기에 앞서 어떻게 쓸 것인가를 궁리했다. 예전과 똑같은 글씨체로 똑같은 장법으로 쓸 것인지를 고민하다 좀 수정하기로 했다. '낙동강'에는 낙동강이 네 번 언급되는데 되도록 서로 다르게 표현하였다. 34년 전 썼던 그대로 락동강, 한국의 두음법칙에 따라 사용한 낙동강 그리고 원작 표제 그대로 한문 洛東江으로 표현했다. 글체는 예서隸書로 썼다. 예서의 독특한 특징인 파세 波勢를 활용하여 낙동강 물결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시문(詩文)에는 구 포(龜浦)라는 지명이 나온다. 마침 그 지명의 한 글자가 광개토대왕비에도 언급되어 있었는데, 최근에 광개토대왕비체를 연습하고 있는 중이어서 비록 획이 많고 쓰기 어려웠지만 <낙동강>에도 그 漢字를 썼다.  

책의 뒤부분에는 조명희 선생에 대한 평전이 여러 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을 선물한 강찬모 선생의 글도 있었다. 평전 제목은 <다시 부르는 광야의 노래, 포석의 길>이다. 

‘포석의 삶과 문학은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적 소용돌이속에 1988년 납북, 월북 문학인들의 작품이 해금되기 전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해방 후, 남북은 물론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옛 소련 교과서에 꾸준히 수록되었으나 그 이후 포석의 삶과 문학은 남북 어디에서도 향유되지 못한 채 역사의 뒤끝에 유폐된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발행한 교과서에 꾸준히 수록!! 맞어!! 나도 십대 시절 이 교과서로 공부했을 것이다. 서예 선생님께서는 내가 당연히 <낙동강>을 잘 배웠을 것이고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붓으로 가장 잘 표현할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십 대 시절, 나는 온통 귀찮니즘으로 살았던 게 아닌가? 국어 공부했던 기억도 없고 선생님께 왜 이 문구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입학한 사범학교에서 긴긴 4년 학창시절을 유야무야로 지냈다. 졸업 즈음에 서예콩클에서 상을 받았지만 큰 자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가 소학교에서 평범한 선생으로 지내려고 했지만 교장 선생님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경험 많은 선생님들도 기피하는 소학교 1학년 담임은 물론 학교의 긴 복도에 붙인 게시판이며 사무실 벽에 붙일 학교 현황 및 교사 업무 지침들을 붓으로 보기 좋게 쓰도록 했다. 요즈음 같으면 광고회사나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에 맡길 법한 일들을 나에게 스스럼없이 시켰다. 붓글씨를 좀 쓴다는 '죄'로 학교의 게시판 관리는 나의 전담이 되었다. 그쯤 나의 붓글 솜씨는 더 노련해져 갔지만 <낙동강>을 다시 더 멋있게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학교 온갖 게시판에 파묻혀 점점 잊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방학을 맞아 사무실 책상 위에 사직서 한통을 남기고 조용히 학교를 떠났다.

한국으로 오기 전 1994년, 길림에 갔다가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놀랍게도 기억속에 묻혀진 나의 풋풋한 서예작품<낙동강>을 아주 우연히 만났다. 순간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함께 갔던 일행이 있어 서둘러 사진 한 컷을 찍고 그곳을 나섰다. 4년 만에 만난 나의 서예 수상작품을 뒤로 한 채 돌아오는 길에 만감이 교차했다. 

나의 작품이 어찌 주인도 모르게 일개 레스토랑 벽에 걸려있었단 말인가? 
나의 작품을 내가 도로 가져 갈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후에 다시 레스토랑을 찾아 갔지만 식당 주인은 나를 만나 주지 않았으며 결국 내가 쓴 서예작품을 찾아오지 못했다. 나는 늘 자식을 잃은 엄마처럼 마음 한구석이 죄책감으로 눌려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온 후에는 중국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들을 깡그리 잊기로 했다. 한국 올 때 1호 지참품을 갖고 왔던 붓 몇 자루는 장롱 속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되었다. 이사할 때마다 붓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 한번도 먹에 적시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를 맞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장롱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붓을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쓰고 싶은 글이 <낙동강>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아무런 뜻도 모른 채 글자의 멋에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한국의 메인 포털 사이트에서 '낙동강' 세 글자를 입력하니 어마어마한 자료가 검색되었다. '낙동강'은 한국에서 가장 긴 강이다. 강의 길이만큼 검색된 자료도 끝이 없었다. 주로 낙동강의 지리, 자연환경에 대한 소개가 많았다. 좀 유심히 보면 지식백과의 한국문학 코너에 <낙동강>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소설이었다. 원문을 찾아보니 첫 페이지에 내가 썼던 <낙동강>의 시구가 있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붓으로 쓴 글의 원작이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 썼을까? <낙동강>을 쓴 작가가 궁금했다. 조명희는 어떤 사람인가. 다시 조명희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를 기념한 문학관도 있었다. 그 곳으로 가면 조명희 작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여름방학을 맞아 나는 조명희 문학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문민 프로필 

서울대학교 교육학 석사 졸, 이주동포정책연구원 (2010~2013), 법무부 사회통합프로그램 강사 (2011~현재), 어울림주말학교 교장(2014~2017), 서울국제학원 원장 (2014~현재). 한중포커스신문 편집위원.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저서 : 귀화시험 한권으로 합격하기, KBS '거리의 만찬-대림동 블루스' 출연(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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