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나무

 


백 년 고목이 해해연년 꽃을 피우는 건
인생에 처음 꽃을 피운 그 날부터 
꽃이 아름다움을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울어도 한생, 웃어도 한생임을 알기에
누가 쳐다보지 않아도
밝은 얼굴로 의연하다
맑은 심성이 돋보인다

곱게 피겠다고
바르게 살겠다고
굳이 이를 악문 적이 없다
단단한 이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희로애락이 내려앉을 자리조차 없다
욕심의 무게가 무거워서
가녀린 꽃잎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단단해지는 건 
꽃처럼 여린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나무가 겨울을 이길 수 있는 건
꽃으로 가는 길을 운명처럼 알기 때문이다

 

쭈그러진 술주전자
 
 
먼저는 
생업에 뛰여들기도 전에
이유 없이
주인의 망치에 
흠씬 뚜들겨 맞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홀에 호출되었다가
여기저기 술상 모서리에 맞히고
멋도 모르고
사정없이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상처를 훈장처럼 
주렁주렁 가슴에 단
쭈그러진 술주전자
 
밤새도록
낯선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술잔을 오가며
귀때로 열 물을 토했다
 
온갖 짓거리에
머리가 욱신거리고
몸마저 노곤하다가
짓궂은 나그네의 음담에
잠시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자정이 되어서야
시렁 구석에 납작 엎드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빈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다
 
마침내 
새벽이 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쭈그러진 술주전자끼리
부둥켜안고 
울다가 울다가
스며드는 한점의 
찬바람에 휘파람을 분다
 
쭈그러진 술주전자는
누구나 가슴에
쓰고 농렬한 소주쯤은 
품고 사는 거라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몸으로, 몸으로 말한다

 

돌의 언어
 
 
불의 세례를 겪고 태어난 돌이
오랜 세월 인내하고 생성된 돌이
어찌하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랴
 
언어로 팽팽해진 돌
부서져도 흩어지지 않는 언어의 파편들
 
언어가 언어를 감싸고
언어가 언어의 옷깃을 잡아채는 집요한 돌
언어의 날개와 가벼움을 말끔히 거세해버리고
언어를 삼켜서 더 단단해진 돌
언어를 품고 있어 더 묵직해진 돌

돌의 언어에 귀 기울이면
무언으로 사랑을 전하는 천사가 된다

 

바위와 물의 대화 


―물님, 빈몸으로 어디로 그리 급히 가시오?      
―바위님, 바깥세상이 하도 보고 싶어서
밤새 풀숲 헤치며 단숨에 달려왔다오.
 
―물님, 하루해도 긴데 잠시 쉬였다 감이 어떠하오?
―바위님, 안될 말씀이오.
고개 너머 함께 갈 친구들이 날 기다린다오.
 
―물님, 난 당신이 참 부럽구려.
나도 매일 떠날 생각에 오금이 저리다만
여태껏 단 한치도 드텨보지 못했다오.
 
―바위님, 난 되려 당신이 부러울 뿐이요.
한번 떠나면 영영 돌아 못 올 걸음 아니겠소.
바다에 닿으면 내 몸은 짠 눈물로 채워질 거요.
 


석탑 쌓기
 
 
오르며 소원 담아 한 개 얹었다
내리며 심사 담아 한 개 올렸다
드디어 내 키보다 높은 석탑이 일어섰다
 
석탑 이루 쓸며 느끼는 인생살이
무슨 소원이 이리도 많았던가
무슨 심사가 이리도 촘촘했던가
 
여태 그 무거운 석탑 몸에 얹고 살았지
여태 그 견고한 석탑에 갇혀 살았지
석탑 내려놓으니 인생이 홀가분해진다

 

산은
 
 
산을 
키를 솟구지 않는다
키를 비기려는 안개와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
 
산은
어깨를 낮추지 않는다
버거운 자기의 무게에도
자기만큼의 무게를 더 얹고 산다
 
산은 
정에 헤프지 않다
굳이 허리를 굽혀
흐르는 물에 입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산은
돌아눕지 않는다
바람의 시달림과 안개의 음모에도
결코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다
 
산은
늘 한결같이 
앉은키가 선키고 
선키가 앉은키다

 

계단


고임돌 없는 누각이 없듯이
계단이 없는 누각도 없습니다
 
한평생 뼈가 부서지도록
가녀린 어깨를 내밀어
내 삶의 계단이 되어주신 어머니
 
높은 곳에 올라
멋진 풍광 두루 돌아보고서도
왜 눈물만 앞을 가리웁니까
 
이젠 그만 계단을 내리렵니다
조용히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
아픈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인생 경치


욕심이란 무거운 짐 걸머지고
기어이 인생의 강 건너지 마소
욕심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인생의 강은 넓어지고 물살이 세지는 법

아침에 떠났다가 저녁에 돌아올 것처럼
홀가운 몸으로 길을 가다가
갈 길도 돌아올 길도 잊은 사람처럼 
풍경 한 가닥에 마음을 갖다 대소

피가 나도록 풍경에 마음을 부비다가
내가 풍경이 되면
결코 깊지도 넓지도 않은 인생의 강을
노을처럼 바람처럼 가볍게 건너가소

 

귀뚜라미 울음소리


맘껏 울었네
온 여름 내 곁에서 
맴맴 요란스럽게 울다가
저만치 떨어져서 목이 메서 울었네

내 곁에서 실컷 울다가
조금씩 조금씩 물러서면서 울었네
날 들으란 듯 저 혼자 울었네
가슴 허비며 귀찮게 울었네

너의 울음소리 이젠 자장가 되였는데
가을이 채 가기 전에 
가냘픈 울음소리 모두 걷어가니
나는 온 겨울 속으로 우는 매미가 되였네

 

도시의 바람


시골의 바람은
겨울이면 북풍
봄이면 남풍이라
바람에 속는 일 있을까?

사시절 방향을 잃은 도시의 바람은
매끌매끌한 땅바닥 
살가운 듯 낱낱이 이루 쓸고
고소한 콩기름 냄새에 취했나

이리저리 휘청대면서 
먼저 나뭇잎의 후각 마비시키고
제멋대로 흔들리는 나뭇잎 포박하네

이리저리 쏘다니며 
닥치는 대로 주워 먹고 비대해진 도시의 바람은
한점 상처 없이도
나뭇잎보다 더 아픈 듯 서럽게 흐느끼네

 

새벽 두 시 광장


달려가는 사람도 없네
달려오는 사람도 없네
함께 가자는 사람도 없네
굳이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사람도 없네

미워할 사람도 없네
사랑할 사랑도 없네
어설프게 가르칠 사람도 없네
딱히 상처 줄 사람도 없네

바람도 고향이 있다 하고
구름도 고향이 있다 하네 
마음이 가벼우면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다 하네

가는 길이 바빠도 날 먼저 
고향에 데려다주겠노라 
앞다투어 가슴 내미네, 손을 내미네


새벽에 우는 새
 

새벽에만 삐울삐울 우는 새
잠을 못 이겨 볼 수 없는 새
나무 잎새에 조그만 몸 숨기고
울음을 울음으로만 울지 않는 새
 
꽁지에 나부끼는 바람에 옮겨앉으며
가라앉은 새벽공기를 저울질하는 새
기어이 꿈을 흩트려놓고
추억의 밭에 뾰족한 부리를 들이대는 새
 
나그네의 아픔을 쪼아먹으며
울컥울컥 토하는 피를 즐기는 새
낙엽 지는 가을이 가고 맨몸의 나무가 서면
어디론가 몸을 숨긴
아, 그래서 또다시 그리운 새

 

바람과 축복


나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의 사랑과 축복
바람에 고이 실어
너에게 보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바람이 전해주는
너의 사랑과 축복 
전해 받지 못했다

그래도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을 마주하고
미친 사람이 주절거리듯
너에게 사랑과 축복 실어보낸다    

김인덕 프로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선후하여 도문시문화관 문학보도원, 부관장,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일보사 문화부 주임,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근무, 현재 《연변문학》잡지사 상무부주필. 시, 수필, 실화문학, 가사 등 문학쟝르 320여편 발표,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길림신문》장백산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도라지》문학상,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 등 30여차 수상. 수필집 《산을 좋아하는 리유》 등 3부 저서 출판, 《당시 300수》, 《송사 300수》, 장편소설 《춘향》(김인순 저), 장편소설 《지압사》(비필우 저) 등 10여부 번역도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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