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여행 작가, 동북아신문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마카오는 중심지가 되는 반도부와 타이파섬과 콜로아느섬 사이를 매립해 연결한 섬으로 되어 있다. 반도부 동쪽에는 주 강(珠江, 주장)이 있고 서쪽에는 시 강(西江)이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본토의 주하이(珠海) 경제특구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강주아오(港珠澳大橋) 대교는 홍콩-마카오-주하이 55km를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상다리로 2018년 개통되었다. 대형 선박들이 다닐 수 있도록 일부 구간은 다리가 아닌 해저터널이 있다. 이 해저터널은 침매터널(육상에서 제작한 각 구조물을 가라앉혀 물속에서 연결시켜 나가는 최신 토목공법)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터널( 6.7km)이다. 과거 3시간 이상 걸리는 것이 30분으로 단축되었다.

港珠澳大橋(Hong Kong–Zhuhai–Macau Bridge).
港珠澳大橋(Hong Kong–Zhuhai–Macau Bridge).

마카오는 1557년 포르투갈인 해적토벌에 대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반도를 특별 거주 지역으로 하였다. 포르투갈은 1680년 총독 파견, 1849년 마카오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였다. 전(全)마카오 영토를 1887년 중국-포르투갈 우호통상조약(Protocol of Lisbon) 체결과 정식으로 마카오를 영구 할양(割讓)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1945년 동안 일본의 보호령화로 마카오는 점령되었다. 1999년 12월 20일 포르투갈은 마카오 주권을 중국(Macau, China)에 반환, 초대 행정수반 Edmund Ho(何厚鏵)가 취임했다. 현재는 모두 중국 영토이지만 긴 세월이 쌓이는 동안 형성된 이질적인 문화와 역사 때문에 현재 두 곳은 중국 정부에 의해 각각 ‘홍콩특별행정구’와 ‘마카오특별행정구’로 통치되고 있다. 

2023년 현재 마카오 인구는 70만4,149명이며,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이다. 주민의 95.0퍼센트가 중국인, 3.0퍼센트가 포르투갈인이고 미얀마인, 영국인, 인도인 등이 나머지 2.0퍼센트를 이루고 있다. 96.8퍼센트가 도시에 살고 있다. 평균 수명은 85.5세, 전체 중위 연령이 38.5세, 출산율은 6.5로 우리나라 0.7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공용어는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해 온 포르투갈어와 표준 중국어 두 언어로 각종 공지나 주의 표시, 도로 표시가 표기되어 있다. 주요 관광지 및 일반 간판 표기에는 거의 모두 병기되어 있으며, 영어와 표준 중국어도 사용할 수 있다. 중국 남방 방언인 광둥어를 주로 사용하며 포르투갈어는 포르투갈인을 제외하곤 사용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제 25개를 한 마카오. 이곳을 가기로 결정한 날부터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현대와 전통이 어우러져 있는 건물과 문화시설을 갖춘 마카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카지노 베네시안, 세계 최고의 기네스에 등록된 338미터 마카오 타워, 233미터로 상업용 세계 최고 번지 점프(세계 최고는 미국의 로얄협곡 다리 약 350미터), 1860년 중국 최초로 지어진 유럽풍 돔 페드로 5세 극장. 

필자는 휴가차 한국을 방문한 작은 딸과 홍콩과 마카오를 찾았다. 홍콩 셩완 선착장에서 패리를 1시간 정도 타고 마카오 선착장에서 내렸다. 여행 중 특이 사항 하나는 홍콩과 마카오 출입국시 여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필자와 딸은 세계적인 멋진 문화유산과 시설보다는 한국의 첫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를 찾는 것에 큰 관심을 가졌다. 

1836년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피에르 모방 신부는 신학생 3명,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을 유학생으로 선발했다. 1836년 12월 3일, 3명은 마카오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김대건은 18살 청년이었다. 12월 28일 의주 변문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중국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동행했다. 이들은 만주 봉천→ 산해관→북경→천진 제남→남경→항주→복주→하문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마카오 도착하였다. 이는 6개월 28일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이들은  파리외방전교회 르그레조아 신부로부터 신학공부를 배우게 되었다. 지금 필자와 같이 여행하는 작은 딸이 13살 때 혼자 미국으로 유학 갔던 생각이 전광석화 같이 뇌리를 스쳤다.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필자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필자

성 바오르 성당은 1602년 이탈리아 예수회 수도사 카를로 스피놀라가 설계하고 종교 박해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피난해 온 일본인과 현지 장인들의 도움으로 1637년에 완성됐다. 이 성당은 타이파와 나무로 만들어졌다. 안타깝게도 1835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건물 정면 벽과 계단, 일부 지하실만 남아 있었다. 건축은 유럽 문예부흥시대의 건축양식과 동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오랜 기간 중국과 외국의 건축, 문물, 예술가들도 중시해 왔다. 성당의 안쪽으로 들어서면 당시 성당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양쪽의 기둥이 서 있던 자리와 뒤편에는 당시 묘지로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묘지 터가 있다. 지하에는 작은 종교박물관과 납골당이 있는데, 이전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성물들과 일본과 베트남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많은 방문객으로 붐비는 성바오로 성당.
많은 방문객으로 붐비는 성바오로 성당.

성 바오르 성당 견학을 마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을 찾았다. 이 성당은 1558년부터 1560년에 걸쳐 대나무와 나무로 지어진 성당으로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3대 성당 중 하나로 1847년 화재로 불타 없어져 1930년대에 재건했다고 하지만 잘 보존되고 있다. 이 성당은 예수회가 마카오에 처음으로 본부를 설치한 곳이기도 하다. 식민지 초기 유일한 성당으로 포르투갈인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모두 이 성당에서 치렀기 때문에 ‘꽃의 성당’(花王堂)이라고 불린다. 지금도 결혼식이 없지만 제단 주변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놓여있었다. 성당 안에는 한인 교포 신자가 봉헌한 김대건 신부의 목각상과 유해가 있다.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필자. 
성안토니오 성당에서 필자. 
젊은이와 중년의 만남, 밤과 낮의 홍콩, 필자와 작은딸.
젊은이와 중년의 만남, 밤과 낮의 홍콩, 필자와 작은딸.

성 바울 성당은 김대건을 비롯한 한국유학생들이 오기 2년 전인 1835년 대형 화재로 타 버려 김대건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멀지 않은 성 안토니오 성당 부설 임시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성 안토니오 성당(1847년 소실 후 1930년경 재건)에 가면 두루마기 모습의 김대건 신부의 입상을 만날 수 있다. 3명의 신학생 중 최방제 학생은 마카오 도착 5개월 후 애석하게도 풍토병으로 희생되고 김대건과 동갑내기 최양업은 마카오에서 공부하다가 아편 문제로 마카오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수업을 이어갔다.

성요셉 신학교 성당은 김대건·최양업 신부가 공부하던 학교의 성당이다. 이곳은 예수회에서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신학교 겸 성당으로 독특한 돔형 지붕과 꽈배기 모양의 기둥, 화려한 천장 그림 덕분에 다른 어느 성당보다 웅장했다. 1728년에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 된 성 요셉 신학교는 지난 3세기 동안 수많은 뛰어난 가톨릭 성직자를 양성했다. 마카오의 사회적 발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지역의 문화, 교육, 예술 및 자선 사업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성 요셉 신학교에는 많은 수의 책, 문서, 유화, 아이콘, 제례 예복 및 선박 등 종교적 유물이 있다. 마카오특별행정구 문화국은 이러한 역사적 소장품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마카오 신학교 및 가톨릭 교구와 협력하여 성 요셉 신학교의 신학 예술 박물관을 창설하였다.

마카오 여행 전후에 우리나라에 많이 회자되는 ‘홍콩 갔다 왔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은 ‘홍콩 보내줄게’라는 말을 성적인 농담으로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그 유래를 보면 1960년대 시작된 속어로 그 당시에는 좀처럼 해외여행을 하기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일반 서민들은 기껏해야 일본이나 대만을 여행할 정도였다. 홍콩은 멀고 어렵게 느껴지는 영국령인데다가 돈이 엄청난 황금의 땅 같은 환상 등에서 오는 부러움과 동경의 의미였을 것이다. 1960년 대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는 세계에서 최고 빈곤 국가였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던 시절, 누나들이 불렀던 ‘홍콩아가씨’ 노래가 뇌리를 스친다. 이 노래는 1954년 금사향이 부른 노래이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나는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그 꽃만 사가시면 그리운 영란꽃아 꽃잎같이 다정스런 그 사람이면그 가슴 품에 안겨 가고 싶어요이 꽃을 사가세요 홍콩의 밤거리그사람 기다리며 꽃파는 아가씨그 꽃만 사가시면 애달픈 영란꽃아 당신께서 사가시면 첫사랑이면오늘도 꿈을꾸는 홍콩아가씨”

지금 개발도상국 많은 국가 사람들은 ‘한국 보내줄게’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필자가 방문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가는 사람 축하를 위해 동네 마을 어귀에 ‘축! 한국 출국!’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몇 차례 보았다. 세상이 이렇게 크게 변했음을 실감한다. 이제 ‘홍콩 보내줄게’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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