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 “코레아 쇼핑”무역회사는 워싱턴 DC의 “East Beeling Road” 28번지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했다. 새로 개장한 “코레아 쇼핑”은 건평이 2000여 평에 달했다. 반절은 상품 매장이었고 반절은 물류창고였다. 물류창고의 귀퉁이에 간이 막이로 된 사무실이 설치되었다.

워싱턴 DC의 매장은 60대 중반의 안사장님이 책임졌다. 안사장님은 한국도로공단에서 정년퇴직하고 2000년 1월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당시 나는 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시초에 한국인 직원 3명과 몽골공화국 출신 직원 2명을 채용했다.

나는 중국 거래처와의 모든 업무를 책임졌다. 당시 미국으로 수출되는 복장류 제품의 공급처는 대부분 광동성 지역이었다. 비닐 제품과 종이 제품의 공급처는 대부분 저장성 지역이었다. 그리고 철기 제품의 공급처는 대부분 푸젠성 지역이었다.

나는 안사장님의 알선으로 “애난데일”코레아 타운에서 렌트방을 구했다. 주인아저씨는 공 씨(孔氏)였다. 그는 한국 부산 출신으로 다년간 “조선일보”부산지국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했고 퇴직 후 미국으로 이민했다.

“애난데일”에서 워싱턴 DC로 출근하려면 승용차로 족히 40여 분을 달려야 했다. 나는 중고차 시장에서 일본산 도우다 표 승용차를 구입했다. 그 후 매일 395번 고속도로를 타고 포토맥 대교를 통과해 회사로 출근했다.

워싱턴 DC와 북경은 정확히 12시간의 시차를 가졌다. 내가 아침 8시에 회사에 도착하면 북경 시간은 밤 20시였다. 나의 첫 과업은 중국 거래처와의 국제통화였다. 상대에게 수요되는 제품의 품목과 가격을 확인했다. 제품을 선적하는 부두의 위치와 미국에 도착하는 날짜 등 일련의 사항을 하나하나 빈틈없이 체크했다. 확인된 내용은 중국어와 한국어로 서류를 작성했다. 중문 서류는 중국 거래처로 발송하였고 한글 서류는 여비서 루안다의 사무실로 발송했다.

나는 오전 11시까지 대개 사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했다. 그 후 물류창고에서 재고품을 정리하고 매장으로 상품을 운반했다. 때로는 몽골인 직원과 함께 오다한 상품을 배달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카운터(收银台)의 장나연이 불쑥 사무실에 나타났다. 뜻밖에 백인 남자와 백인 여성이 동행했다. 훤칠한 키꼴의 백인 남자는 구레나룻이 볼타구니를 따라 아래턱까지 가렸다. 왜소한 몸매의 백인 여성은 그늘진 표정을 애써 감췄다.

장나연의 소개에 따르면 백인 남성의 이름은 라파(LAFA)였고 백인 여성은 그의 와이프였다. 그들 부부는 근처에 있는 흑인 공립중학교의 교원이었다. 라파는 체육 선생님이었고 와이프는 수학을 가르쳤다. 이들 부부는 요즈음 퇴근 후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다.

나는 장나연의 장광설에 불쾌감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스 장, 도대체 무슨 용무를 말하려는거야?”
"네, 실장님, 라파 부부가 우리 회사의 상품을 판매하고 싶대요. 뉴타운의 쇼핑몰에 이미 매대를 렌트했대요.”

근래에 흑인 공립학교의 교원들은 노임이 적어 부득불 생계수단으로 새로운 직업을 구했다. 흑인 공립학교의 교원은 백인 공립학교의 교원보다 노임이 대개 50% 적었다. 이는 흑인 커뮤니티의 납세 금액이 백인 커뮤니티에 비해 50% 적기 때문이었다.

라파의 한 달 노임은 4천 달러였고 와이프의 노임은 3천 달러였다. 이들 부부는 라파의 노임으로 의료보험, 퇴직금, 주택융자, 승용차 보험 등 각종 비용을 지불했다. 그리고 와이프의 노임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이들 부부는 생후 4개월의 딸애를 부양했기에 극심한 생활난에 봉착했다.

새로 개장한 “코레아 쇼핑”은 여태껏 백인 소매상을 상대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어떻게 도매가격을 정해야 할지 섣불리 확정지을 수가 없었다. 심사장님과 토의하여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라파는 어깨를 으쓱하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인츰 여비서 루안다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심사장님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곳 사정은 미스타 조가 더 잘 알건데요. 아무튼 한인 소매상의 가격대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안사장님과 토의하여 결정하세요.”

나는 다시 안사장님을 찾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진작가 꿈을 키웠다. 퇴직 후 달마다 10여 일씩 야외촬영을 다녔다. 매장의 잡다한 일은 모두 사모님이 처리했다. 내가 심사장님의 뜻을 전하자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심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구먼. 난 별다른 생각이 없어. 그냥 조 실장이 알아서 처리해.”

며칠 후 장나연이 라파 부부와 함께 또다시 사무실로 찾아왔다. 나는 라파 부부에게 넘겨주는 도매가격을 한국인 소매상보다 5%를 높였다. 이들 부부가 혹시 이 가격대를 접수 못하면 다시 5% 낮추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뜻밖에 인츰 동의했다. 그 후 라파는 매주 두 번씩 물건 구입을 왔다. 장사가 무척 순탄하다며 나보고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했다.

어느 날 안사장님은 퇴근 후 직원들에게 외식을 안배했다. 나보고 오늘은 “차이나 푸드”(中国料理)를 맛보자고 하였다. 장나연은 뉴타운의 쇼핑몰에 맛있는 “차이나 푸드”가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졸랐다. 장나연이 알선한 “차이나 푸드”는 사천요리가 주메뉴였다.

나는 “鱼香肉丝盖饭”을 맛있게 먹었다. 안사장님은 한국인 직원들에게 큼직한 대접시에 수북하게 담긴 “辣炒龙虾”를 주문했다. 몽골공화국 출신의 아브라이뚜루함과 카리칭까는 “麻婆豆腐盖饭”을 신나게 먹었다. 몽골인 직원의 이름은 한국어로 호칭하기가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국식으로 “미스타 함” “미스타 카”로 속칭했다.

미스타 함은 30대 후반이었다. 그는 러시아 유학을 하였고 그 후 한국에 2년간 체류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했다. 미스타 카는 20대 후반이었다. 미스타 함과 한 고향 친구였고 한국에 체류한 적이 있었다. 한국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식사 도중에 장나연이 라파 부부의 매장이 쇼핑몰의 2층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적이 호기심이 동했다. 식사 후 장나연을 따라 라파 부부의 매장으로 향했다. 라파는 나를 “보스”라고 부르며 반갑게 대했다.
“일회용 라이터 잘 팔려요?”
라파는 엄지를 추켜세우며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라이터 하나 판매 가격이 얼마예요?”
라파는 “완 달러”(1달러)를 곱씹었다. 진열대에 놓인 정교한 전자 라이터를 가리키며 “파이 달러”(5달러)를 곱씹었다.
일회용 라이터는 한 갑에 50개씩 세트 했고 도매가격은 19.9달러였다. 전자 라이터는 한 갑에 10개씩 세트 했고 도매가격은 16.9달러였다. 주먹구구를 해도 이들 부부가 라이터 하나만도 수입이 짭짤했다.

라파는 요즈음 한 통에 19달러씩 하는 뉴질랜드 고급 분유를 딸애에게 사 먹인다며 자랑했다. 언제 클로즈(关门) 하는가고 묻자 매일 밤 23시까지 매대를 지킨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수면시간이 평균 4시간도 못된다고 하였다. 라파는 와이프를 안아본 지도 무척 오래다며 능청스레 익살을 부렸다.

2000년 여름 미국 제43대 대통령 선거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렸다. 텍사스주 출신의 조지 워커 부시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부대통령 앨 고어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나는 한글판 “한국일보”와 중문판 “세계일보”를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의 선거공약을 유심히 살폈다.

어느 날 나는 “한국일보”에서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저서 “부유한 노예”가 지난해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라이시 교수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되었다. 그는 매일 16시간씩 근무하여 “일벌레”란 칭호를 수여받았다.

라이시 교수는 어느 날 갑자기 장관직을 사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곱 살 어린 아들과의 우연한 대화가 라이시 교수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라이시 교수의 저서 “부유한 노예”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아버지는 왜 주일날에도 집에서 쉬지 않으세요?”
“아버지는 하도 할 일이 많아서 쉴 수가 없단다.”
"그러면 올해도 아버지랑 함께 크리스마스트리(圣诞树)를 만들 수 없겠지요?”
“미안하구나. 아버지는 어쩔 방도가 없단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싫어요. 다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다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겠다.”
일곱 살 배기 어린 아들의 이 말에 라이시 교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직리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돈 있는 부자는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더 많은 돈을 벌려면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반면에 단순직 로동자는 실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해야 한다. 소득격차를 감안하고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욱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무리 일해도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가족, 친구,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을 상실했다. 고독감, 소외감, 허탈감, 절망감이 날 따라 심각해졌다. 극단적으로 지금 미국에는 <DINS>족이 성행했다. 이 말을 풀이하면 “따불 인컴 노 섹스”(Double Incom No Sex)였다. 즉 맞벌이 부부는 수입이 두 배로 증가했지만 일에 지쳐 섹스조차 할 수 없는 신경제 부부가 바로 부유한 노예였다.

나는 불현듯 라파를 상기했다. 그는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와이프를 안아본 지가 오래다고 익살을 부렸다. 라파 부부가 “따불 인컴 노 섹스”족의 신경제 부부였다.

잘 사는 나라 미국은 왜 “부유한 노예”를 원하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같이 안갯속에서 꽃구경하듯 내일을 걱정하는가? 돈 많은 부유층도 내일이 근심된다. 배불리 먹는 중산층도 내일이 근심된다. 두 짬을 뛰는 평민층도 내일이 근심된다. 빵을 구걸하는 극빈층도 내일이 근심된다. 무엇이 이들을 오리무중의 곤경에 빠지게 했는가?

중국에서 나는 매일 8시간을 근무했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 13시간을 근무했다. 그래도 인제는 달갑게 받아들였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부추켰는가? 금의환향의 매혹이었는가? 이른바 금의환향이란 허황한 몽상이었다. 삯벌이 인부에게 부자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잘 사는 나라 미국에서 나는 왜 자꾸자꾸 불안해지는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가 있는가? 내일도 13시간을 근무해야 한다. 이것이 확실한 미래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점점 불안하고 허전하고 산란하고 두려웠다.

1970년대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미첼 파이겐바움은 “카오스”(CHAOS)라는 심오한 물리학 현상을 연구했다. “카오스 이론”은 뉴턴의 고전 물리학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후 새로운 이정비적인 물리학 이론이였다.

“카오스”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주기성이 없는 일종의 무질서를 뜻한다. 복잡한 기류와 해류, 동물의 심장과 대뇌의 진동운동은 모두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운동이다.

“카오스” 이론의 핵심은 “나비의 현상"이었다.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가볍게 날개를 움직였다. 이때 미세한 기류가 형성된다. 이 기류는 작은 섬에서 별로 감촉되지 않는다. 그러나 드넓은 태평양의 기류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은 태평양 서안의 캘리포니아주에 예기치 못한 태풍이 덮쳤다.

1997년 동남아를 강타했던 “IMF”(금융위기)는 "신경제 카오스"현상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피력했다.
“만약 뉴욕의 월가가 재채기를 하면 한국의 경제는 당장 고뿔에 걸린다.” 이것을 “경제 토플러 현상”이라고도 하였다.

1990년대 한국의 대우그룹은 세계적인 굴지 기업으로 부상했다. 김우중 회장은 일찍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IMF”이후의 세계는 혼돈과 무질서가 난무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카오스 세상”으로 변모했다. 김우중 회장은 넋을 잃고 먼 산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 휴식일에 나는 집주인 공 씨 아저씨와 탁주 잔을 나누었다. 평소에 공 씨 아저씨는 나를 조 기자로 호칭했다. 나는 공 씨 아저씨를 편집장님이라고 호칭했다.

“편집장님, 뉴욕 월가가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고뿔에 걸린다고 하던데요. 이 말이 뭔 뜻을 의미하세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공 씨 아저씨는 의아한 눈길로 나를 지켜보았다.
“조 기자, 한국 음식 부대찌개 먹어봤어요?”
갑자기 공 씨 아저씨가 이렇게 물었다.
애난데일 한인타운에는 강원도 출신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설악 가든” 한식점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부대찌개를 맛보았다.

“조 기자는 부대찌개가 한국 전통음식이라 생각하지요? 내말 맞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중국에는 부대찌개가 없어요. 맛본 적도 없고요."
“조 기자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요. 부대찌개 한국 음식 맞아요. 그러나 전통음식은 아니에요."

“6.25”전쟁이 결속된 후 한국은 완전히 폐허나 다름없었어요. 그때 하도 배고파서 미군이 먹다 버린 깡통을 주어 가마에 집어넣고 펑-펑 끓인 음식이 부대찌개였어요. 그때 떠돌이 실향민들이 서울의 청계천 일대로 구름떼같이 모여들었어요. 게딱지같은 판자촌이 장사진을 이루었어요. 그 시절 실향민의 목줄을 연명시킨 것이 다름 아닌 부대찌개였어요.

지금 60~70대의 한국인들 중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어섯눈이 각별히 많아요. 이들이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언제 내일을 걱정했겠어요. 그러니 그때 한국이 무슨 미래가 있었겠어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철도와 새마을운동을 가동했어요. 한국은 온 나라가 부풀었어요. 드디어 배고픈 걱정이 사라졌어요. 풍요로운 내일이 눈앞에 닥쳤어요. 그 시절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참으로 큰 목을 감당했어요.

1960년대 말까지 한국은 단 한 명의 “엔지니어”(工程师)도 없었어요. 그래도 한국은 일본 제품을 분해하고 모방하며 마침내 자동차 산업을 발전시켰어요. 당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수억 대의 자금을 융자했어요. 그렇게 투자된 자본이 결국 80년대의 한강 기적을 쌓았어요.

근데 한국은 “88올림픽”을 치른 후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흥청망청 돈이 춤췄어요. 닥치는 대로 먹고 마셨어요. 닥치는 대로 놀았댔어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참으로 세상이 녹두알 지경으로 놀았댔어요. 그때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한국을 두고 누가 앞날을 걱정했겠어요.

결국은 “IMF”가 덮쳤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식을 잃었어요. 와이프를 잃었어요. 직장을 잃었어요. 회사를 잃었어요. 심지어 목숨마저 다 잃었어요. 산같이 쌓였던 달러가 번개치듯 가뭇없이 사라졌어요. 불에 태워도 일 년은 족히 태웠을 돈이었어요. 실로 기막힌 아수라장이었어요.

나도 내일이면 70고래희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도 미국으로 이주했기에 다행히 노후 걱정은 별로 없어요. 그러나 지금 한국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직도 한숨이 절로 나와요. 조 기자가 내 심정을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지금 미국이 돌아가는 형편도 영 시름이 놓이지 않아요. 자식 둘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치는 걸 보면 불쌍하기두 하구 원망스럽기도 하지요.

저 애들은 우리 세대처럼 부대찌개로 허기진 배를 채워본 적이 없어요. 근데 왜 돈에 대한 탐욕은 저렇게도 지독한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허구한 날 무작정 일에만 묶여있다가 명줄이라도 제대로 연명할지 걱정되네요.

나는 불현듯 지난 일이 상기되었다. 1980년대 초 중국은 온 나라가 “만원호”(万元户)를 꿈꿨다. 연변에서도 보따리 장사 붐이 극심하게 불었다. 서시장에는 하루아침에 몇천 호의 개체호가 나타났다.

당시 보따리 장사군 한옥희는 한때 신나게 광주를 드나들었다. 얼마 후 연변에서 규모가 가장 큰 조선족 이불공장을 경영했다. 그 시기 나와 직장 동료였던 ㅇㅇㅇ는 어느 날 갑자기 사직하고 이불공장의 부총경리로 취직했다.

어느 해 나는 공무로 북경 출장을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공항에서 ㅇㅇㅇ와 대면했다. 그는 한옥희와 함께 태국에 다녀왔는데 마침 북경공항에서 연길행 항공편 대기 중이었다.
그는 고급 양복에 금테를 두른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바른편 손에는 고급스런 일본산 서류 트렁크가 들렸다. 왼손 식지와 무명지는 큼직한 황금 가락지를 부착했다. 당시 돈 냄새를 풍겼던 대만 상인, 귀국 화교, 홍콩 기업주(老板)를 상기시켰다.

“뭔 일로 북경에 왔습니까?”
그가 이렇게 물었다.
“북경 방송 학원의 단기 강습반에 참가하려고 왔습니다.”
“잘 됐습니다. 강습반 학업을 잘 마무리 짓고 나중에 유망한 기자로 되십시오."
그는 못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몇 달 후 나는 단기 강습반 학업을 끝마치고 돌아왔다. 근데 뜻밖에 ㅇㅇㅇ가 이불공장에서 사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지금도 그의 사직 원인을 똑똑히 모른다. 그러나 당시 한옥희의 이불공장이 이미 이상한 기미를 보였다. 얼마 후 한옥희는 특대 경제 사기 사건에 연루되여 감금되었다.

“편집장님은 앨 고어 후보와 조지 워커 부시 후보 중에서 누구를 지지하세요?”
공 씨 아저씨는 이렇게 되물었다.
“조 기자는 어느 후보를 지지하세요?”
"솔직히 저는 그래도 인텔리 멋이 확 풍기는 앨 고어 후보가 더 희망이 큰 것 같아요.”

“확실히 그래요. 앨 고어 후보는 지금 대학가에서 인기가 만점이지요. 그에 비하면 조지 부시 후보는 대학가에서 별로 점수를 따지 못해요. 근데 미국이 참 이상한 나라지요. 턱사스 사투리가 극심한 조지 부시 후보가 평민층에서는 도리여 인기가 하늘을 찔러요. 그러니 어떤 승부가 날지는 두고 봐야 알지요.”

공 씨 아저씨는 어느 결에 탁주 두 병을 비우고 취기가 거나했다.
“오늘 기분이 참 좋았어요. 나중에 또 이야기를 나눠요. 나 탁주 좀 과했네요. 조 기자한테 미한해요. 그럼 여기서 끝내고 침대에 좀 누워야겠어요.”

나는 2층 방으로 돌아왔다. 잠자리에 누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현듯 ㅇㅇㅇ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턱수염을 쓰다듬던 라파의 모습도 상기되었다.

2001년 1월 공화당 후선인 조지 워커 부시가 제4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이해 3월 심사장님이 “워싱턴 DC”로 출장 왔다. 그는 알링톤 카운에서 4000여 평의 매장을 새롭게 선정하고 렌트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해 4월 “코레아 쇼핑”은 알링톤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했다. 그 후 나는 매일 워싱턴 DC와 알링톤을 분주하게 오갔다.

4월도 막가는 어느 날 장나연이 라파 부부와 함께 사무실에 나타났다. 라파는 근래에 은행융자를 대여해 50여 평의 매장을 렌트했다. 직원도 2명을 고용했다. 그는 앞으로 구입할 물량이 엄청 많을 것이니 사전에 “공급 계약서”를 체결하자고 요청했다.

나는 “공급 계약서”체결에 동의했다. 그러나 외상구매는 절대 안 된다고 맺고 끊었다. 반드시 선불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모를 박았다. 라파는 별다른 변명도 없이 선선히 동의했다. 그 후 라파는 물건 구입 시 언제나 선불금을 지불했다.

2001년 9월 11일 “9.11테러”가 미국을 강타했다. 미국은 순식간에 테러의 먹장구름에 뒤덮였다. 그 여파로 도처에서 경기 침체 현상이 나타났다.

세계 굴지의 에너지그룹(能源集团) “엔론”(Eiren)은 갑자기 닥친 경제 불황으로 대량의 노동자를 감원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50세 전에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을 더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CEO”(总经理)부터 말단의 단순직 노동자까지 해고는 이미 보편화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직장을 떠난 사람들은 언제 다시 고용될지 그저 막연한 기대뿐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두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조였다.

“뉴욕타임스지”의 기사에 따르면 통신장비업체 “ESCO”는 단번에 7500여 명의 직원을 감원했다. 지난 한시기 닷컴기업(高新技术产业)의 전문가들은 10만 달러를 웃도는 연봉을 챙기며 세상 걱정 없이 살았다. 그러나 “9.11테러”이후 경기 침체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은 노숙자로 전락했다. 당시 마약에 찌들고 정신질환에 찌든 엔지니어들이 줄줄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미국은 150년 전에 “흑인 노예제도”를 철폐하고 “가난한 노예”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150년 이후 미국은 이른바 돈 잘 버는 “부유한 노예”를 새롭게 생산했다. 이른바 미국의 신경제가 낳은 "역사의 비극"이었다.

서양에 “못 하나가 없어 나라가 망했다”라는 격언이 있다.
“못 하나가 없어 말편자를 박지 못했다. 말편자를 박지 못해 말 한 마리가 출전하지 못했다. 말 한 마리가 없어 장수가 전쟁터에 나가지 못했다. 장수가 출전하지 못해 전투에서 패배했다. 전투에서 패배해 나라가 망했다.”

이 격언은 미첼 바이겐 바움의 “나비의 현상”과 지극히 흡사한 “카오스”적인 사회현상을 철리적으로 설명했다. 사실상 미국은 대통령도 말 한 마디를 잘못하면 대통령 보좌를 잃었다. 부부 사이가 아무리 끔찍해도 남자는 항시 호주머니에 500달러의 비상금을 챙겼다. 이는 한 달분의 렌트 값과 맞먹었다. 언제 닥칠지 모를 이혼 풍파를 대비해 렌트 비용을 비축해야 비로소 노숙자의 신세를 모면했다.

“하루가 24시간인가?”
미국인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너는 빈곤한 주인을 원하는가? 그러면 하루가 24시간으로도 족하다.”
“너는 부유한 노예를 원하는가? 그러면 하루가 48시간으로도 부족하다.”

“9.11테러”가 발생한 후 라파는 한동안 물건 구입을 올 때마다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 크리스마스 휴가철이 지나고 마침내 2002년 새해를 맞이했다. 그러나 라파는 지난해보다 상품 구입 차수가 눈에 확 띄이게 줄었다. 3월부터는 아예 2주에 한 번씩 상품 구입을 다녔다.

어느 날 나는 하도 오랫동안 라파가 보이지 않기에 장나연을 불렀다.
“미스 장, 라파한테 뭔 일이라도 생겼어? 왜 보이지 않아?"
“라파는 와이프랑 애랑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뭐라고? 돌아갔다고. 가게는 어쩌고?"

“은행융자를 지불하지 못해 부도났대요. 엄청난 빚더미만 걸머졌대요. 공립학교도 교원을 엄청 많이 감원했대요. 라파는 억울하게 부부동반으로 해고당했대요.”
나는 코끝이 찡- 저렸다.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라파의 모습이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2005년에 귀국했다. 그때 고향의 엄청난 변화에 두 눈이 뒤집혔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이곳은 대형마트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천 평에 달하는 백화 청사 마트가 성업 중이었다. 매장의 크기나 시스텀이 미국의 월마트와 일맥상통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중국 돈 100원은 제법 "큰돈"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 나는 100원을 들고 대형마트로 가기를 주저했다. 미국산 맥주 “버드와이” 한 병이 10원이었다. 와인 한 병이 300원을 넘겼다. 입이 딱 벌어졌다.  1980년대 “만원호”는 돈 잘 버는 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돈줄이 그리운 “빈곤호”였다.

미국의 부유층은 억대의 자산을 소유했기에 항시 흠모를 받았다. 미국의 중산층은 학문과 지혜를 소유했기에 항시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저서 “부유한 노예”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했다.

“자산에 대한 단순한 흠모는 인생의 즐거움을 말살했다. 부유한 노예는 삶을 옥죄는 쇠사슬로 되였다. 천당으로 가려면 가차 없이 부유한 노예를 쫓아버려라.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삶을 옥죄는 부유한 노예를 찢어버려라.”

라파 부부는 한때 자산에 대한 단순한 흠모 때문에 “따불 인컴 노 섹스” 신경제 부부로 되였다. 그러나 “9.11테러”는 느닷없이 미국을 강타한 신경제 시대의 “카오스”였다. 라파 부부의 "아메리칸드림"은 일장춘몽으로 사라졌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미국 사회는 모험적인 부유층과 보수적인 중산층, 그리고 불안한 평민층과 분노한 빈민층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는 살벌한 전쟁터였다.”

나는 줄곧 “만반개하품, 유유독서고”(万般皆下品, 唯有读书高)를 지향하였던 랑만주의자였다. 그러나 미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랭철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했다. 하지만 귀국 후 단돈 100원을 들고 마트에 가기를 주저하는 “실망주의자”로 전락했다.

어느 날 나는 또다시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집어 들었다. 매번 불안하고 허전하고 방황할 때마다 “도화원기”를 읽으며 마음의 탕개를 풀었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다.

“채구동리하, 유연견남산”(采菊东篱下,悠然见南山)
“도화원기”는 언제나 새로운 힘을 심어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지혜를 깨우쳐 주었다.
“도화원기”는 다시 한번 나를 랑만주의자로 변모시켜줄 것이다.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년~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