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중국에 들어왔다가 바로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흔드는 바람에 한국에 들어가는 계획은 틀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올해 여름 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학교의 허락을 받고 한국에 잠깐 다녀오게 되었다. 중국에 들어오면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짐이나 일들을 다 처리하는 것이 이번 한국행의 주 목적이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들을 만나는 것이 그 다음 목적이었다. 특히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했을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3살 위 언니였다. 작년 가을에 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약속대로 부산에 내려가서 언니를 만났지만 내 일정상 바쁜 관계로 이야기는 별로 하지도 못하고 헤어졌고, 언니는 수술도 하고 항암치료도 받으면서 거의 건강을 회복한 상태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울로 다시 올라와 또 다른 친한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도 암 판정을 받고 치료 중이었다. 부산의 언니는 미리 알고 있었지만 예상치도 못하고 만난 이 언니의 상황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막 불혹을 넘긴 나이에 왜 다들 이렇게 건강을 돌보지 못한 걸까? 

질병 뿐만이 아니다. 요즘 내 주위에 마음이 아픈 사람들도 부쩍 늘었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쳐 있으며 하루 일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조급함과 초조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물론 바쁘게 지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고 또 이 스트레스들이 여러 가지 질병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부모와 아이를 돌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지금의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최근에 문득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슬로라이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슬로라이프는 현대 사회에서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느림의 철학을 제시하며 잠깐 쉬어갈 것을 권하는 라이프 스타일, 즉 직장 생활에 치이지 않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느리게 산다는 의미이겠지만 바쁜 현대 생활에서 가능이나 한 것일까? 

우선 여기서 ‘느림’이란 단순히 느리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 속도를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꼭 필요한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분하고, 정성 들여 해야 하는 일과 대충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처럼 일은 꼭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주어진 시간 내에 우리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내어 쉬는 것은 꼭 필요하다. 

또 사전에 주어진 시간 내에 실현 가능한 하루 일과의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일을 차근차근 완성한다면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 일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슬로라이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하고 일상을 간소화하여 균형 있게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으며 속도를 조절한다는 것도 일을 뒤로 미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슬로라이프는 삶의 지혜이다. 어쩔 수 없이 빠른 삶을 살아야 하는 현대사회에서 현대인들은 건강을 시간에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시간에게 빼앗긴 건강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다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존 레논은 “즐겁게 낭비한 시간은 낭비한 시간이 아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바쁜 와중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일에나 적당한 휴식에는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잠깐 쉬어 간다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새해에는 꼭 여행을 한번쯤은 다녀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그 시점이 닥쳐오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일 때문에 꼭 생각했던 여행을 뒤로 미루게 된다. 이렇게 한해한해 미루다 보면 ‘쉬어 가기’는 전혀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일정표 짜듯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설정해 놓고 실현할 것을 제안한다. 그럼 이 꼭 필요한 일 때문에 다른 일들이 양보를 하게 되고 나의 즐거운 시간 낭비가 다가온다. 

류경자 프로필 

현재 서남민족대학교 강사. 연변대학교 중문과 학사∙석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사회질서의 형성』. 논문 「루쉰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자기반영성과 메타픽션적 글쓰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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