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여행 작가, 동북아신문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대한민국에 ‘한강의 기적’이 있다면 베트남엔 ‘홍강의 기적’이 있다. 한국 전쟁 후 최빈 국가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한국의 급속한 성장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베트남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유학 중이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에 베트남 유학생이 7만212명으로 가장 많고, 뒤이어 중국 6만3,859명, 우즈베키스탄 1만1,974명, 몽골 1만1,603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베트남 유학생 중 약 40퍼센트가 한국어를 배우러 온 학생들이다. 베트남의 60여 개 대학에서 5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고, 한국어는 베트남에서 교육 규모 면에서 아시아 최고의 언어이다.  또한 베트남의 약 80개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고, 2021년부터는 시범적으로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는 곳도 생겨났다. 

2023년 4월 기준 베트남에서 한국은 등록 자본금이 약820억 달러(한화 약106조 9,625억 원)에 달하는 최대 외국인 투자국이며, 베트남 내 개발원조 2위, 무역규모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삼성, LG, SK, 포스코, 현대, 롯데 등 한국 대기업의 적극적인 대(對)베트남 투자로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베트남에서 한국어 학습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베트남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외 유학지로 등극하였다. 2022년 기준 베트남 여성이 한국에 결혼 이주한 사람은 3,319명이다.

하노이 CJ 푸드빌 제과제빵 훈련원. 2013년 9월 처음 시작했으며, 6개월 동안 60가지 제과제빵 기술훈련을 실시.
하노이 CJ 푸드빌 제과제빵 훈련원. 2013년 9월 처음 시작했으며, 6개월 동안 60가지 제과제빵 기술훈련을 실시.

이와 같이 현재 베트남과 우호적인 국가이지만 월남전(越南戰)에는 적대 국가였다. 이 전쟁은 1955년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치렀다. 1965년 미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우리나라 베트남 파병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여 참전한 사건이다. 정부의 파병결정에 따라 제1차 파병으로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요원 10명 등 140명이 1964년 9월 11일, 해군 전차상륙함(LST: Landing Ship Tank)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9월 22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이후 제1이동외과병원은 붕타우에 주둔하고, 태권도 교관단은 육·해군 사관학교와 육군 보병학교에서 남베트남군을 지도하게 되었다. 

파병기간 동안 32만5,000명이 베트남에 갔고 그중 5,000명 이상이 돌아오지 못했다. 많은 우리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戰)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이다. 이후 백구부대(1965년), 비둘기·청룡·맹호부대(1965년), 백마부대(1966년), 은마부대(1967년)가 차례로 사이공부터 다낭까지 배치됐다. 1973년까지 참전한 국군은 32만5,517명이다. 이 중 4,407명이 전사(통계 자료가 다소 차이가 있음)하였고 1만7,060명이 부상당했다. 자유월남을 제외한 참전 7개국 가운데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 군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월남전 중 아마 전국에 모든 학생들이 필자와 같이 학교에서 강제로 시켜 참전용사들에게 위문편지와 위문품을 여러 차례 보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전교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맹호부대, 청룡부대, 비들기부대 등의 군가를 배워 불렀다. 의미도 내용도 시대적 상황도 전혀 모르고 학교에서 가르치니 무조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배웠다. 다음은 맹호부대 노래이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자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님의 뒤를 따르리라.

세월이 흘러 지금 필자가 베트남 정부를 위해 무상원조 지원 사업을 하고 있으니 감개무량함을 느낀다. 필자는 하노이에서 공식 업무가 끝나고 199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하롱베이와 베트남 국부(國父)로 불리는 호찌민 생가를 찾았다.

베트남 정부 공무원들과 대학운영 등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가운데 액자 사진이 호찌민.
베트남 정부 공무원들과 대학운영 등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가운데 액자 사진이 호찌민.

하롱베이는 베트남 꽝닝성 통킹만 북서부에 위치한 만으로 해안선 길이는 120km에 이르며 총 면적 1,553 km²(우리나라 소양강 호수: 70km²), 깊이 30미터, 부속 도서1,969개의 각양각색 모습과 이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경과 숨막히는 경치를 지녔다. 이 거대한 규모의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들은 석회암이 풍화작용으로 깎여나가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20~30여 채의 수상가옥이 무리지어 존재하는 곳을 볼 수가 있다. 

하롱베이.
하롱베이.

하롱베이에는 약1,600명의 사람들이 4개 어업 마을에 살고 있다. 이들은 어업을 해서 먹고 살기도 하고, 아니면 관광객을 상대로 작은 배를 이용해서 과일, 잡화 등을 팔기도 한다. 필자가 탄 유람선은 사오십 명에서 백여 명까지 탈 수 있고 주방과 노래방 시설까지 갖춘 단체용 큰 배였다. 

치열한 전쟁이 끝나고 지금 이렇게 평화롭게 그곳 국민들이 살 수 있고 외국인들이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우방국들의 도움과 특히 대한민국의 용감한 군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선배들이 전투에 참여하면서 지독한 베트콩들과 싸우면서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고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 지곤 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춘천 출신 가수 김추자씨가 부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노래를

하롱베이 유람선에 승선하면서부터 한참동안 들었다. 한국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와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초등학교 다닐 때 생각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최근 노래방에 가서 불러 보았지만 제대로 감정 이입이 안 되는 경험을 했다. 그 노래 가사는 이렇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이제사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 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 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 상사 돌아온 김 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하롱베이에서 여정을 마치고 응에안성 빈시(Vinh)로 향했다. 이 도시는 인구가 50만 정도가 되는 중소도시로 베트남의 국부로 불리는 호찌민 생가(1890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응에안 성 남단현 안츄마을)가 있는 곳이다. 호찌민이 태어나서 5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필자는 어디를 가나 그 나라에서 사후(死後)에 존경받는 사람들의 생가를 찾아 가보는 것을 좋아한다. 생전에 어떠한 삶을 살아서 죽은 후에도 이렇게 자기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이다. 호찌민이 태어난 곳은 빈 시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그곳을 찾았을 때 장마철이 막 지난 시점이었지만 비가 많이 내리는 오후였다. 

생가에 들어가기 전부터 전형적인 평화로운 농촌마을로 잘 정비된 도로와 주변 환경을 보면서 국가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입구에는 경찰이 정문을 혼자서 지키고 있었으며 바로 옆에는 소방서가 있었다. 만약 생가에 불이 나면 빠르게 대처하려는 것 같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방문자들이 많지 않지만 베트남 타 지방에서 여러 명이 그룹으로 온 것 같았다. 생가에 안내를 하는 여자 2사람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지만 틈만 나면 휴대폰을 가지고 무엇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에 그들은 본업에 다소 충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휴대폰 중독중은 똑 같은 상황인 것 같다. 

호찌민 생가에서 열심히 휴대폰을 보는 직원들.
호찌민 생가에서 열심히 휴대폰을 보는 직원들.
휴대폰을 보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베트남 직장인들.
휴대폰을 보면서 사무실을 나서는 베트남 직장인들.

안내원 중 한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 반기는 모습을 하면서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데 찾아 온 것에 대해 좀 의아한 표정이었다. 사실 방문 국가의 존경받는 사람의 생가 방문은 필자의 관심 사항이고 비행기 탑승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갔던 것이다. 어쨌든 한 나라의 국부가 태어난 곳을 찾았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호찌민은 1912년에 응우옌 바(Ha)라는 가명으로 선박 요리사 보조로 취직, 선박 요리사로 일하며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12년과 1913년에 각각 뉴욕의 할렘과 보스턴에서 살았다. 보스턴에 있는 옴니 파커 하우스 호텔(Omni Parker House Hotel)에서 빵 굽는 일을 했다. 미국 생활을 하며 흑인 인권운동에도 참가했었다. 

1914년에는 배편으로 영국에 건너가, 런던에서 하인, 견습공 등으로 생활하였고, 1917년~1918년에는 미국 뉴욕 브루클린으로 건너가 부유층 집안의 집사로 활동했다. 1918년 제너럴 모터스의 영업직원으로도 일을 했다. 이 기간 할렘에서 마커스 가비(1887년 8월 17일 ~ 1940년 6월 10일, 미국에서 아프리카로 복귀 운동을 시작한 흑인 지도자. 그는 백인들이 다수인 국가들에서 흑인들이 정의를 받지 못 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흑인들이 아프리카를 고향으로 숙고하여 거기에 정착해야 한다고 주장)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만나 정치적 전망을 넓힌 것으로 알려졌다. 

1918년 다시 프랑스 마르세유로 건너가 체류하면서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식당 웨이터, 댄서, 사진 수정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호찌민은 1900년대 초반 시설, 교통 등 제반 인프라가 부족하고 국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서 도전적이고 개척자적인 정신을 키웠던 것 같다. 

필자는 호찌민에 대한 글이나 논문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그는 베트남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사후에도 후손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호찌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교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20년 전후로 호찌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핵심인물 김규식, 황기환, 조소앙, 윤해 등과 교우했음이 그를 감시했던 프랑스 경찰의 문서로 밝혀졌다.
당시 임시정부 외무총장이자 파리위원부 대표였던 김규식은 호찌민의 프랑스 기고가 중국에서 번역, 간행되도록 도왔으며, 언론과 인터뷰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통신국’을 열었는데, 호찌민에게 이 통신국을 자유롭게 쓰게 했으며, 그의 저작과 홍보물이 유포되도록 도왔다.

호찌민의 감시자는 “호찌민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베트남어: Bác Hồ)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者)라는 뜻을 지녔다.

혁명가, 정치인뿐만이 아니라 시인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 베트남 관공서에 호찌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 이 상황에 대한 평가는 모든 사람들의 각자 의견이 다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최근 국제정세 특징으로 주요국을 포함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의 증대, 주요국 간 전략경쟁 영역의 확장과 심화, ‘민주주의 對 권위주의’ 세력 간 대립구도의 강화와 연대세력 확보를 위한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과거 적대국에서 지금 우방국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제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활동을 동반자로 나아가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하롱베이와 호찌민 생각 방문 여정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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