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인


    
   연인이라면 사랑이 등장하고 사랑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 내 나이에 연인을 들먹이니 주책 같고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지만, 연인만큼 애지중지 내 마음을 사로잡는 보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글짓기이다. 글을 쓰는 것이 꼭 마치 연인과 노닥거리는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글이란 연인이 나에게 손짓하며 오라고 하니 그 매력에 내가 푹 빠질 수밖에.
   나는 글이란 사람의 영혼이 잠재의식 속에서 갑자기 투명한 발산을 요구할 때 써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책을 보다가 이젠 날마다 들어서 귀에 익숙해진 레코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갑자기 궁금해지더니 저도 모르게 레코드 지망생하고 내가 어딘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초점을 레코드 지망생하고 나한테 맞추어 보았다. 
   초저녁 이맘때면 꼭꼭 들려오는 레코드 소리이기에 간혹 늦어져 제시간에 들리지 않으면 은근히 귀가 기울어진다. 어느 층에서 들려오는 레코드 소리인지 소학생인지 중학생인지도 알 길이 없으나 가끔 들려오는 젊은 선생님의 가르치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레코드 지망생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너무 잘 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못 부는 것도 아닌 레코드 지망생을 떠올리자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레코드 지망생의 서투른 연주나 나의 서투른 글, 그리고 레코드 지망생의 부푼 꿈을 이루고자 하는 저 열정과 패기, 끈질긴 노력이 내가 쓰려고 하는 글에 대한 애착 시도들과 엇비슷하게 엮이면서 나의 마음이 레코드 소리의 진전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와 내가 영원히 비슷할 수가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떠올라 잠시 서글프기도 하였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초록의 빛깔과 늦가을 서리맞은 단풍잎이 뇌리에서 교차 되면서 세대 차이라는 장벽이 마음 한구석에 우울함의 그늘을 드리워 주는 것 같았다. 
   그런들 어찌하리? 각자의 인생, 갈 길이 따로 있고 각자 꿈이 따로 있는데 말이다.
   내 나이 육십 대 후반, 이젠 여유를 즐기며 쉴 만도 한데 60이 청춘이라니 마음으로 믿고 싶어서 안달이다. 이루고 저 했던 문학의 꿈에 도전하여 성취하고 싶은 심경이 굴뚝같고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것만큼이나 급하다. 아마추어의 글이라 독자도 없겠다 싶지만, 마음에서 용트림하며 나를 윽박지르니 어쩔 수 없다. 가는 데까지 가는 것이다. 먹고 사는데 별지장 없으니,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60대 후반에 나만큼 건강한 사람도 별반 없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한국에 와서 큰딸의 집안 살림은 물론 막내딸의 해산 뒤 바라지에 육아까지 책임져 주면서 거기에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책을 보고 나의 정신 지주인 글 창작에 여력을 쏟아부으며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이를 먹고 보면 모든 것이 마음과 같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행간의 소문이 아닌 나의 실제로 실감하고 있다. 갑작스레 숨이 차며 호흡하기 힘들어서 병원에 갔더니 심혈관이 막혔다며 스탠드 하나를 넣어주었고 어제나 그제나 맨날 아팠어도 약 먹고 뻗치며 지냈던 허리도 한꺼번에 고장이 나 MRI를 찍어보았더니 디스크가 너무 심하여 수술받아야만 한단다. 그 외에도 매일 먹는 심혈관 약의 부작용으로 여기저기 멍이 들고 허리 아픔은 진통약 없이 견딜 수가 없다.
   먹구름 잔뜩 품은 하늘이 천둥을 만들어 내듯이 건강이 없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아픔이 늘 정신적인 고민까지 겹치게 하여 마음은 온통 고민의 번복과 고통의 눈물로 얼룩져 있다.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게 되지만 건강이 무너진 것만큼이 나 사람을 힘들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학업의 실패, 혼인의 실패, 사업의 실패 등등은 건강의 실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만성병의 보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같이 70을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에게는 앓음자랑이 보편화되었고 만성병을 친구처럼 보듬으며 사는 것이 일상으로 되었다. 노년에 들어선 많은 사람이 역동적인 감정이나 비애 환희 기쁨이 메말라가는 그 나이에 왔다고 의식하고는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올라가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퇴락하는 과정에서는 불행과 고통을 겪게 돼 있다. 인간의 일생은 큰 강을 건너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103세이지만 한국에 살아계시는 연세대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의 말씀이다. 큰 강이란 이런저런 인생 역경의 소용돌이를 의미하겠지만 자연적인 노화도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 나이를 먹으면서 노화되는 몸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나이에 어울리게 일상을 설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 70대 노인들한테 대두된 아주 큰 문제이다.
   ”인생의 12가지 법칙“이란 책의 저자는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으면 인간의 회복력은 상상을 넘어선다”라고 말했다. 나이를 먹었어도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젊은 야망을 품고 산다면 그의 인격은 청춘의 빛깔로 향상될 것이고 활력으로 차 넘칠 것이다. 
    김형석 교수님은 인생을 3단계로 나누었는데 30세까지는 배워가는 단계, 30세부터 60세까지는 직장에 순응하며 일하는 단계, 60세부터 90세 100세까지의 삶은 살면서 사회에서 받은 것들 나누는 단계로 나누었다 그렇다면 우리 이 나이가 3단계 즉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회에서 받은 것을 정신적으로 나 물질적으로 사회에 반납하고 헌신하며 살아야 하는 나이란 얘기다. 우리 이 나이에 젊은 사람들처럼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오기 위하여 바로 실천에 옮기고 하는 것은 그림의 떡과 같은 일이지만 느긋하게 책을 보고 글을 쓰며 살아온 삶의 체험으로 인생 고락의 추억을 회고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고 바람직 한 일이다. 물론 자기 적성에 맞아야 하지만 말이다. 그럴진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회나 나 개인에게 너무 유익한 일이고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써서 사회에 헌납한다면 나의 인생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석양의 낙조처럼 아름다워질 것이다.
    주변에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무슨 글을 쓴다”라고 하면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종 종 있으나 나는 그런대로 심장에 스텐드를 넣고 약 먹으며 관리하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허리도 다행히 수술 없이 시술로 큰 고통을 덜고 보니 좀 살만해졌다. 또다시 하고 싶은 일이 스멀스멀 머리를 쳐들며 나를 닦달하고 있다. 
   신체적인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자기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더하면 얼마든지 청춘의 기백을 유지할 수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글이란 연인이 나를 포옹하고 나를 잡아주는 한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며 아침 8 – 9시경의 태양이 무색할 정도도 연인과 함께 찐한 연애 팔팔한 연애를 할 것이다.

 

     
꿈의 마력         
                                       
        
꿈은 펼칠 때만이 그 신비의 마력을 느낄 수 있다. 꿈을 간직하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기회는 천천히 다가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즉 꿈이 도사리고 있는 한 꿈의 마력은 영원한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 라없이 한 두가지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꿈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서 하차하거나 별반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고 이룰 수 없다는 결론으로 자기의 꿈에 종지부를 찍는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장부의 일은 관 뚜껑을 덮은 후 에야 정해지는 것이야" 라고 하였는데 사람의 일은 관 뚜껑을 덮기 전 까지는 알 수 없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죽기 전 막바지까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로 어필하고 싶다.
그럼 여기에 어릴 때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한권의 책을 내기 위해 예순 여섯 해를 기다린 한 남자를 소개하고 저 한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이민한 후 뉴욕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30년가량 일을 하면서도 소설가가 되려는 자기의 꿈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이 지냈다.
나이 예순이 넘어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예순 여섯 살에 책이 나왔다.
아일랜드에서의 어렵던 유년기를 재구성한 내용이었다.  아일랜드인 특유의 유머와 가슴 찡한 정서를 잘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의 책 한 권이 미국 사회에 예상외의 파장을 몰고왔다. 결국 그는 68세였던 1997년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 비평 가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소설 제목은"안 젤라의재(AngeIa s Ashes)"이고 그의 이름은 프랭크 맥코트다.
사람들은 소설도 좋아했지만 그를 더욱 사랑해주었다. 그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말이다.
소설가 프랭크 맥 코트의 인생은 희망을 움켜잡고 놓지 않았기에 성공으로 치 닿을 수 있었다. 꿈이 현실로 대등했을 때만큼의 기쁨은 없다. 이것이 곧 꿈의 마력이다.
어릴 때 나의 꿈 역시 프랭크 맥 코트처럼 소설가, 기성 작가로 되는 것이었다.
지식인 가정에서 시간만 있으면 손에 책을 들고 있는 판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도 책을 엄청 좋아했다. 주로는 문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 시절 책을 읽으며 책 속에 빠지는 것만큼의 행복은 없었다. 차츰 나의 일상에서도 책을 빼놓을 수 없었다.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지다 보니 슬그머니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생 겨 났고 나의 마음을 빼앗는 작가들처럼 나도 유명한 작가가 되여 볼만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도 무정하였고 나는 작가라는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접어야 했다. 나의 팔자에 작가는 사치였다.
“반 우파”정치 운동과 문화혁명10년 대 동란은 우리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고 정치망명을 목적으로 해외로 피난 간 아버지와 가족이 생이별하게 되면서 어머니는 우리 집에 씌워진 정치 멍에, 그리고 어린 우리 5남매를 키워야 하는 심리적 부담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몸져누워 있었다.
“앉을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작가라는 타이틀은 하늘의 별처럼 딸 수도 만질 수 도 없는 요망한 꿈으로 어린 나의 가슴에 자리를 잡았다. 생활고의 고통보다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몇 곱절 더 힘들고 괴로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우울한 것/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 지나니.”라는 알렉산더로 푸슈킨의 시가 그나마 내 삶의 동아줄이 되여 나의 마음속 꿈을 잠시나마 달래 주었다. 
 소박한 꿈도 야망도 현실을 떠나서는 한 걸음도 내 디딜 수 없다. 천진난만하게 뛰놀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돌보고 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급선무에 매달려 동년이 뭔지도 모르고 지났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 고 아프다. 부모의 사랑으로도 모자랄 나이에 오히려 우리가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생활고를 겪어야 하였고 맨날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삐 보냈어도 살아가는 꼴은 여전히 말이 아니었다. 그랬어도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것은 책만이 나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었으니까.
밥을 짓느라고 불을 때면서도 책에 빠져 밥솥의 밥을 태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밤이면 어머니 몰래 전등을 아래로 내려놓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밤을 패며 책을 읽은 적도 부지기수다.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물결치던 동란의 년대에 도 붉은 선집의 갈피를 세계 명작의 갈피에 씌워 놓고 정치시간이면 문학 책을 읽 는 무모함도 저질러 보았다.
문학의 꿈을 접지못하고 꿈을 향한 마음이 급하였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문학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만들었다. 
하느님도 나의 꿈을 가상히 여기셨던지 책을 공짜로 빌려다 볼수 있는 여건을 나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 시절 독초로 몰리어 파지의 신세를 면치못한 세계명작이나 중국의 이름있는 소설책들이 폐품 수거 조에 대량 수거 되였는데 그리로 출근하는 옆집 아주머니를 통해 나는 그 책들을 마음대로 빌려다 볼 수 있었다. 서점이고 도서 관이고 볼만한 책이 제일 없었을 때 나에겐 화가 복으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 아마도 그때 내가 책을 제일 많이 읽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사는데 전전하다 보니 작가로 되려는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세월은 나를 훌쩍 석양의 변두리에 실어다 놓았다.
언제 한번 꿈을 잊은 적도 포기한 적도 없지만 현실은 너무 나도 무자비하다. 
 내가 왜 앞에서 프랭크 맥 코트의 이야기를 했을까?
그것은 프랭크 맥 코트의 인생이 나에게 희망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마련 되였다.
가끔씩 나의 인생을 소재로 나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 가 하는 생각을 불쑥 불쑥 떠올려 보기도 한다. 
물론 무딘 필이고 아마추어의 글을 누가 읽어주겠는가 하는 우려 심에 자신감 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손을 마주잡고 먼산만 쳐다보면 흘러가는 세월이 아깝고 동년에 품어온 나의 꿈에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라도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그때 그 시절을 글로서 펼쳐 그 시대 억울하게 간 영혼들을 기리고 죽지못해 살면서도 끙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살아온 나의 인생도 곁들어 힐링하고 싶다. 이제부터 작가가 되려는 나의 꿈을 펼칠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이 나를 흡인하는 꿈의 마력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존재의 여부가 있듯이 나도 나의 존재 여부를 그것도 긍정적인 존재여부를 이 세상에 과시하고 싶다.
그 어느 날 승천하며 관 뚜껑을 덮을 때 인생의 막바지까지 희망과 용기를 저버리지 않고 “꿈의 마력”을 펼치기 위하여 오기 하나로 살아온 여장부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주변에 보여주고 싶다.

림순자프로필

1959년 연길 출생.
1975년 연길시 5중졸업.
2015년10기,2016년11기 연변작가협회 문학반수료.
2016년로신문학원 문학창작강습반 수료.
문학작품으로는 "나의 아버지" "바삭사탕으로 맺어진 우정"
"세월저편에 묻어둔 아픔" "사랑의 향기" "꿈의  마력"
등 수필 수기 20여편 발표.
2018년"자기운은 자기가 만든다"가 전국 애심녀성컵 가작상 수상.
2017년"어머니의 눈빛"이 계림문학상 동상수상.
2018년 "첫날 이불"이
계림문학상 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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