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8일 나는 아메리카 NW-88항공기 편을 탑승하고 텍사스주의 디트로이트(低特律)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뉴욕발 항공편을 대기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 흑인을 목격했다.

공항에서 손님을 운송하는 전차(电车) 기사는 일색으로 흑인 아저씨였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전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때마침 전차 기사가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호 아유, 해브 나이스 데이.”(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흑인 아저씨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당시 나는 “굿모닝, 굿바이.”(좋은 아침입니다. 다시 만납시다.)
정도의 영어만 통했다. 그러나 흑인 아저씨의 친절한 인사말에 얼결에 “굿모닝” 하고 인사말을 건넸다. 사실 디트로이트 공항은 당시 시간으로 이미 정오가 넘었다. 그러니 “굿모닝”은 어느 정도 빗나간 인사말이었다. 그래도 흑인 아저씨는 별로 개의치 않고 나를 향해 손을 저었다.

이날 오후 17시경에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입국심사를 하려고 해관 검역대 앞에 줄을 섰다. 나의 입국심사를 체크한 해관 검역원은 20대 후반의 흑인 남자였다. 그는 수박씨같이 흰 이발을 드러내며 “하이”라고 인사말을 건넸다. 나도 얼결에 “하이”라고 응대했다.

해관 검역원은 내가 영어가 통하는 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두유 푸람 차이나?”(당신은 중국에서 왔습니까?)
나는 일순간 난감했다. 그러나 “차이나”는 귀에 익었다.
“예스, 예스, 차이나.”
나는 이렇게 곱씹었다.

해관 검역원은 나의 여권과 콜롬비아 방송 협회의 초청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케이, 칸 인 플리즈.”(좋아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나는 또다시 당황했다. “오케이”는 귀에 들어왔다. 그러나 "칸인 플리즈”가 뭔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해관 검역을 통과한 후 심수 대학의 구양 위(欧阳伟) 교수에게 물어서야 이 말의 뜻을 이해했다.

며칠 뒤 우리 일행은 마빈(马斌) 가이드의 안내하에 나이아가라폭포로 향했다. 다섯 시간을 족히 달려야 하는 노정이였다. 지루함을 달래고저 마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7년 산둥성 일조시는 새 농촌건설에 공헌이 큰 촌장들을 선발해 미국 방문 고찰단을 조직했다. 일행은 뉴욕에 도착한 후 어느 고급 호텔에 투숙했다. 다음날 아침 나 젊은 흑인 웨이터(服务生)가 방문을 노크했다.
“굿모닝”
흑인 웨이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당시 방안에 있던 촌장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중 한 촌장이 이런 기발한 생각을 가졌다. “굿모닝”은 세 마디 말이니 아마 중국어로 ““你贵姓”이라고 어림짐작했다. 옆에 있던 촌장이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对对,你好聪明。”(맞아맞아, 정말 총명하네.) 촌장은 중국어로 “我姓李”라고 신나게 대답했다.

이날 아침 식사 시간에 촌장은 마빈 가이드에게 “굿모닝”이 무슨 뜻인가고 문의했다. 마빈은 중국어로 “早安”이라고 알려주었다. 촌장은 또다시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웨이터가 성씨를 묻는 줄로 알고 그만 “我姓李”라고 대답했다며 혀끝을 튕겼다. 일행은 눈물이 찔끔 나도록 포복 요절했다.

다음날 아침 흑인 웨이터가 또다시 방안에 나타났다. 촌장은 앞질러 “굿모닝”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흑인 웨이터는 웃음 띤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웨이터는 “我姓李” 하고 서툰 중국 말로 인사를 건넸다. 촌장은 또다시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이날 마빈 가이드는 뉴욕의 흑인 커뮤니티 할렘을 소개했다. 할렘은 갱단 조직의 세력 다툼 때문에 살인과 방황을 일삼았다. 마약과 매춘이 난무하는 “지옥 중의 지옥"이었다. 구양 위 교수가 할렘을 견학할 수 있는가고 문의했다. 마빈 가이드는 낮 시간 때는 잠깐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절대로 버스에서 하차하면 안된다고 모를 박았다. 할렘은 낮에도 총기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밤이면 경찰들도 순라하기를 꺼리는 무법지대였다.

그 후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키꼴이 훤칠하고 몸매가 다부진 흑인 경찰을 자주 목격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흑인 경찰과 마주치면 언제나 “호 아유.”라고 친근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곳의 버스기사는 대부분 흑인 아저씨였다. 승차 손님에게 언제나 “해브 나이스 데이” 하며 열정적으로 대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 흑인에 대해 색다른 편견을 가졌다. “헐벗고 굶주리고 교육도 받지 못한 야만인이고 미개인이다.”라는 피상적인 인상만 소지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감촉한 흑인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다. 이들은 한결같이 친근하고 부드러워었다. 교양도 있고 다분히 신사다운 기질도 있었다.

2000년 4월 나는 워싱턴 DC로 옮겨왔다. 당시 한국인 강 사장님이 흑인 집거구에서 마켓을 운영했다. 나는 그곳으로 종종 물건 배달을 다니며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폭넓은 감수를 가졌다.

어느 날 오후 나는 몽골인 직원 미스타 함과 함께 강 사장님 가게로 물건 배달을 갔다. 때마침 근처의 흑인 공립소학교가 오후 학업을 끝마쳤다. 수십 명의 흑인 학생들이 물밀듯이 가게로 몰려왔다. 근데 이상한 전경을 목격했다. 강 사장님이 말뚝같이 가게문을 가로막았다. 한 번에 7~8명의 흑인 학생들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강 사장님은 구슬땀을 뻘뻘 흘리며 족히 20여 분간 가게문을 지켰다.

나는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강 사장님, 왜 가게문을 지키세요?”
“조 기자님도 방금 보셨겠지요. 저 흑인 애들은 죄다 도둑놈이에요. 그냥 어린애로 봐선 절대 안돼요. 이렇게 감시하지 않으면 아예 가게를 싹쓸이해요. 날마다 이런 곤욕을 치러요. 인제 정말 지겨워 죽겠어요.”
강 사장님은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방금 눈앞에 펼쳐진 전경이 새록새록 상기되었다.

10세 미만의 흑인 여자애 셋이 가게에 들어섰다. 등에 지고 있던 책가방을 가슴 앞으로 당기더니 잽싸게 침써(봉투 과자)를 낚아채 감쪽같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는듯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강 사장님은 매일 보초병처럼 가게문을 지켰다. 그러나 달말에 확인하면 잃어버린 물량이 엄청났다. 그래도 별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여태껏 흑인 집거구에서 마켓을 운영했다.

강 사장님은 한국 경기도 평택 출신이었다. 서울 고려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시기 파주 출판 단지에서 “20세기 북스”(20世纪图书)를 운영했다. 1997년 “IMF 충격”으로 일산의 아파트와 시골의 뙈기밭을 처분하고 1998년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강 사장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매일 교회에 나가 하느님 앞에서 성실하게 기도 드렸다.
“거룩하신 우리주 예수그리스도 하느님, 이곳 흑인 커뮤니티에 복음을 전해주세요. 다시는 도적놈이 없도록 흑인들을 구원해주세요.”

사실 강 사장님은 당시만 하여도 한창 창업 중이었다. 그는 흑인 밀집구역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돈을 모았다. 마음 같아서는 불쌍한 흑인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많이 베풀고 싶었다. 그러나 사정이 딱해 허락되지 않았다. 요즈음 그는 교회에서 흑인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했다. 매번 이런 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어느 날 강 사장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828년 10세의 흑인 노예 프레더릭 베일러(Frederlck Baily)는 가축처럼 10달러에 팔렸다. 그는 올드 대령이란 새 주인을 따라 번화한 도시 “벌티몰”(Baltimore)로 실려왔다. 그는 여태껏 시골에서 자랐다. 거리에서 오가는 마차와 분비는 인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미지와 신비의 세계였다.

“이 깜둥이 새끼는 금년에 열 살입니다.”
옛 주인이 베일러를 팔기 전날 올드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제야 베일러는 비로소 열 살이란 사실을 알게 되였다. 여태껏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흑인 소녀 낸시와 함께 주인집의 머슴으로 살았다.

어느 날 베일러는 낸시가 주인 몰래 창고에서 종이에 무엇을 적는 것을 목격했다. 이날 저녁 주인 나리는 낸시를 대나무에 달아매고 호되게 채찍질을 했다.
“깜둥이 새끼야. 이런 걸 또다시 종이에 적으면 아예 죽여버릴 거야. 알아들었어?”
주인 나리는 성난 사자같이 으르렁거렸다.

다음날 낸시는 또다시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날 밤 또다시 피 터지게 물매를 맞았다. 주인 나리는 갑자기 베일러를 불렀다. 피못에 쓰러진 낸시를 가리키며 이렇게 을러메었다.
“내 말 잘 들어. 너도 이년처럼 남모르게 종이에 적으면 당장 죽여버릴거야. 깜둥이 새끼야, 알았어?”
베일러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가누었다. 주인 나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 때문에 연신 머리만 조아렸다.

그 뒤 낸시와 주인 나리는 며칠간 똑같은 일을 연속 반복했다. 어느 날 밤 주인 나리는 또다시 낸시를 대나무에 매달았다. 베일러는 주인 나리의 호령에 따라 대나무 아래에 무릎을 꿇고 대기했다. 갑자기 주인 나리가 쇠몽둥이로 낸시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낸시는 “헉!”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한옆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낸시는 끝내 숨져버렸다. 주인 나리는 낸시의 손에서 종잇장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깜둥이 새끼야. 내 말 잘 들어. 네놈도 저년처럼 글을 배우려고 하면 이 쇠몽둥이로 때려죽일거야.”
주인 나리는 공포에 떨고 있는 베일러에게 표독스레 내쏘았다. 얼마 후 베일러는 10달러에 팔렸다.

올드 대령의 집에는 아리따운 부인과 8살 나는 아들이 있었다. 부인은 매일 어린 아들에게 글 읽기를 가르쳤다. 베이러는 자석에 끌린 듯 창턱 아래에 숨어 여주인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베일러, 밖에 서있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오거라.”
뜻밖에 여주인이 베일러를 불렀다.

일순간 베일러는 눈앞이 캄캄했다. 피못이 되여 숨진 낸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두 귀를 의심했다.
“깜둥이 새끼야. 너 죽고 싶어? 왜 글 읽기를 배우려고 해?”
여주인이 왜 이렇게 욕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여주인은 베일러에게 알파벳을 가르쳤다. 베일러는 밤마다 방안에 숨어 주인집 아들의 철자 책을 열심히 읽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올드 대령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부인, 깜둥이에게 글을 가르치면 위법이란 걸 알고 있지요. 내일부터 당장 끝내세요. 깜둥이는 글을 배울 필요가 없어요. 만약 깜둥이가 글을 깨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깜둥이를 망칠 수도 있어요. 더 이상 깜둥이를 가축처럼 부릴 수가 없어요. 내 말 명심하세요.”

이날 밤 베일러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난생처음 무엇 때문에 10달러에 팔렸는지를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낸시가 주인 나리의 쇠몽둥이에 맞아 죽었는지도 생각했다.

1838년 베일러는 20세의 젊은이로 성장했다. 어느 날 여주인은 베일러에게 신문 몇 장을 주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기사에 베일러는 가슴이 널뛰듯 두근거렸다.

루이지애나주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가 밤중에 탈출해 버지나아주로 도주했다. 농장주는 경찰과 함께 한주일간 추적했지만 붙잡지 못했다. 농장주는 신문에 흑인 노예의 선색을 제공하면 후한 사례금을 주겠다고 밝혔다. 베일러는 버지니아주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더구나 흑인 노예가 주인 나리의 손아귀를 벗어나 어디론가 도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어느 날 저녁 올드 대령이 베일러를 불렀다.
"내일 아침 마차를 준비해 두어라.”
“네. 알겠습니다. 주인 나리.”
베일러는 두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대답했다. 올드 대령의 날카로운 눈매를 감촉했다.

다음날 아침 올드 대령은 베일러를 운전석에 앉으라고 호령했다. 마차가 다운타운에 도착할 때까지 올드 대령은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말고삐를 잡고 있는 베일러는 오싹오싹 한기를 느꼈다. 전신이 으스스 떨렸다.
“꼼짝 말고 여기에 앉아 있어.”
마차가 멈춰서자 올드 대령은 길옆의 빵 가게로 들어갔다.

한식경이 지나서 올드 대령이 백인 남자와 함께 빵 가게 앞에 나타났다. 백인 남자는 베일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올드 대령과 백인 남자는 다시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후 올드 대령이 돌아왔다. 베일러는 지령에 따라 집으로 향했다.

베일러는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빵 가게 앞에서 보았던 백인 남자의 모습이 자꾸 얼른거렸다. 이날 밤 그는 침대 밑에 숨겨둔 낡은 신문을 꺼냈다. 그때 누군가 다급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새파랗게 겁에 질린 여주인이 방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쥔 종이 장을 급급히 넘겨주었다.

“베일러, 당장 도망쳐야 해. 올드 대령이 오늘 빵 가게 주인한테 너를 팔기로 약속했어. 여기에 내가 적어 놓은 주소가 있어. 무슨 대가를 치르던 반드시 이곳으로 찾아가야 해. 그래야 너는 자유의 몸으로 될 수 있어. 지체 말고 당장 뛰쳐나가.”

베일러는 부랴부랴 집문을 나섰다. 그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난신고 끝에 찾아간 곳은 “뉴잉글랜드”(New England)였다. 그는 더글러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고 평범한 로동자로 일했다.

4년 후의 어느 날 베일러는 성대한 집회에 참가해 흑인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흑인은 절대로 백인의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흑인으로 태어난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백인과 흑인은 모두 평등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백인은 글을 배웠기에 주인으로 되였습니다. 흑인은 글을 배울 수가 없기에 노예로 되였습니다. 이것이 백인과 흑인 간의 불평등의 씨앗입니다.”

누군가 청중석에서 소리높이 웨쳤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들은 말은 백인의 소유물이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한 인간이 말한 것입니까?”
“인간입니다. 백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청중들은 우르르 강단으로 몰렸다. 베일러를 들어 힘껏 하늘로 내던졌다.

프레더릭 베일러는 저명한 흑인 연설가였다. 그는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열창했다. “남북전쟁”시기에 그는 링컨 대통령의 고위 자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작가, 편집인, 출판인으로 활약했고 1895년에 타계했다. 2006년 한국 청아출판사는 이구항의 “이야기 미국사”를 출간했다. 이 책에 흑인 연설가 프레더릭 베일러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어느 날 강 사장님은 진지한 열변을 설토했다.
”조 기자님, 저는 미국사가 전공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구항의 <이야기 미국사>에 각별한 흥취를 가졌어요.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태어났어요. 그러나 로마의 위대한 철학가로 되였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오로지 자유인만 교육해야 한다는 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로지 배운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철인(哲人)의 말은 믿어야 한다.

사실 흑인 노예 프레더릭 베일러의 일생은 로마 철학가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 진리였음을 실증했어요.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신이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은 인간이었어요.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낸 사악한 작품은 흑인 노예제도였어요. 1862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을 반포했어요. 아메리카의 모든 흑인 노예들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라고 호소했어요. 역사는 이미 150년이 지났어요. 그러나 지금도 흑인들은 허망하고 더럽고 위험한 올드타운에서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을 살아요.

조 기자님도 보셨지요. 저의 가게는 매일 수많은 흑인들이 드나들어요. 이들은 1달러 빵, 1달러 소시지, 1달러 주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있어요. 일자리가 없어 하루 종일 유령처럼 길거리를 떠돌아요.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술과 마약에 찌들렸어요.

이곳의 흑인 공립소학교는 단 한 명의 백인 학생도 없어요. 흑인 중학생이 80센트(1센트는 100분의 1달러)에 20센트를 더하면 1달러로 계산해요. 그러나 85센트에 15센트를 더하면 1달러로 계산할 수 없어요. 소학교 6학년생이 시침이 12시를 가리키고 분침이 15분을 가리키면 몇 시인가고 멍청하게 물어요. 13세 미만의 흑인 소녀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를 낳았어요. 흡사 매일 먹는 1달러 빵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어요. 사생아는 부모와 학교의 교육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러나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는 길거리의 교육에는 제법 익숙해요.

이곳은 아이들이 넘쳐나요.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50세 이상의 흑인을 찾아보기가 여간 힘들어요. 흑인 커뮤니티의 평균 수명은 아직도 50세를 넘지 못했어요.

조 기자님은 혹시 워싱턴 DC의 “제2할렘”에 가보신 적이 있으세요? 저는 봉고차를 운전하고 그곳을 수차례 통과했어요. 진짜 등골이 오싹하게 소름이 끼쳤어요. 알코올중독자, 마약중독자, 에이즈 말기 환자, 정신분렬증환자. 해골같이 앙상하게 말라버린 흑인 남녀들이 주인 없는 폐허에서 유령처럼 떠돌았어요.

새날이 밝으면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가 있어요. 집 모퉁이, 나무 밑, 쓰레기 박스 옆에 숨져버린 시신이 놓였어요. 청소부는 쓰레기를 수거하듯 닥치는 대로 시신을 쓸어가요.

조 기자님, 저는 미국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철저한 자유와 철저한 민주를 숭상하지요. 이점은 한국과 판이하게 달라요. 그러나 역사학을 전공한 저로서 참으로 이해 하기가 힘든 점이 있어요.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류는 언제나 문명사회를 소망했고 문명사회로 진화했어요. 미국은 현재 3000만의 흑인이 있어요. 그러나 아직도 1500만의 흑인은 극빈층에 속해요. 조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안사장님과 함께 뉴욕으로 출장 갔다. 마침 차이나타운의 “올드 북스”(旧书店)에서 중역본(中译版) “미국 흑인사”(美国黑人史)를 구입했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프랭클린(约翰• 富兰克林) 이었다. 중역본 저자는 장빙제(张冰姿)였다. 이 책은 1988년 상무인서관에서 출간되었다.

역사 기재에 따르면 흑인 노예 매매는 대략 기원전 1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波斯人)들이 선참으로 흑인 노예를 매매했다. 인류 문명의 여명기에 전복과 피전복의 역사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전쟁 포로는 영락 없이 정복자의 노예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흑인 노예 매매는 유럽 열강들이 돈벌이를 위한 흑인 노예 매매와는 판이한 역사였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 후 16세기부터 스페인, 네덜란드인, 뽀르뚜갈인들이 아프리카의 콩고, 안골라, 세네갈 등지에서 흑인 원주민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송하였다.  1619년 8월 약 20명의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이 네덜란드(荷兰) 화물선에 실려 아메리카 신대륙의 찰스턴에 도착했다. 이들이 역사 기재에 수록된 제1대 뉴잉글랜드의 아프리카 이주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흑인 노예”로 팔려온 것이 아니었다. 백인 업주들과 고용계약을 맺은 "하인"(仆人) 이었다. 이들은 계약 기한이 만기되면 자유인 신분을 취득했다. 그리고 토지까지 분배 받았다. 문헌 기재에 따르면 1680년 아프리카 흑인 이주민 수는 약 700명에 달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1730년 아프리카 흑인 노예 수는 9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1800년에 이르러 아프리카 흑인 노예 수는 무려 100만 명으로 급증했다.

18세기 초부터 유럽 이민자들은 광활한 미대륙을 개척하기 위해 대량의 염가 노동력이 수요되였다. 그러나 인디언 원주민은 생존공간을 보존하기 위해 이들과 총칼을 맞대는 피비린 전쟁을 벌였다. 그러므로 유럽 이민자들은 부득불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를 염가 노동력으로 고용했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유럽 이민자는 대부분 청교도였다.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숭고한 종교 신앙을 소지했다. 당시 버지니아주, 펜실베이니아주, 매닐랜드주 등 북부지역은 “흑인 노예 매매”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1640년 매사추세츠 주에 거주하는 스미스 선장이 아프리카에서 몇 명의 흑인 원주민을 선적하여 미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스미스 선장은 아프리카의 흑인 원주민 부락을 습격해 10여 명의 흑인을 납치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 주는 흑인 노예 매매를 엄격히 금지했다. 결국 스미스 선장은 체포되었고 납치된 흑인 원주민은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다. .

1712년 펜실베이니아주는 “흑인 노예 과세 법안”(进口奴隶课税)을 통과했다. 이는 “흑인 노예 매매”를 부도덕한 행위로 인정해 처벌 성적인 과세를 징수한 시초의 식민지 구역이었다. 그러나 이 과세법은 당시 영국정부의 금지령을 받아 실행되지 못했다. 1662년 영국정부는 찰리 2세(查理二世) 시대부터 “황가 아프리카 무역회사”(皇家非洲贸易公司)에 “특허장”을 반포했다. 그리고 흑인 노예 매매를 공개적으로 합법화하였다. 부과된 세금은 당시 영국정부의 주요한 재정수입래원이였다.

그러나 북부지역은 한결같이 “하느님은 절대로 노예 매매를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청교도 신앙을 준수했다. 그러므로 “흑인 노예 매매”에 반기를 들었다. 
1816년에 “미국 식민지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는 독립적인 “흑인 가원”(黑人家园)을 건립할 것을 주장했다. 무릇 신대륙으로 팔려온 흑인 노예를 조직적으로 아프리카 서해안의 리비리아로 이주시켰다. 그러므로 리비리아는 “자유국가”라는 뜻을 갖고 있다. 1847년 리비리아는 드디어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리비리아로 이주한 흑인 노예 수는 무려 1만 9천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남부지역의 유럽 이민자들은 시초부터 일확천금의 황금 몽을 꿈꾸며 “흑인 노예 매매”를 극구 찬성했다. 조지아주는 가장 완고하게 “흑인 노예 매매”를 고수했다. 가장 잔혹하게 흑인 노예를 착취하고 박해했다. 남부지역의 조지아주, 미시시피주, 루이지안나주의 드넓은 사탕수수 농장에는 대량의 흑인 노예들이 고용되었다. 이들은 수확 계절이면 하루 18~20시간씩 비인간적인 노역에 시달렸다.

1861년 “남북전쟁”이 폭발했다. “흑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북부지역과 이를 반대하는 남부지역이 드디어 총칼을 겨누었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남북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1862년 9월 “남북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 링컨 대통령은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을 반포했다. 

1863년 1월 1일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은 정식으로 실시되었다. 그 후 자유를 찾은 흑인 노예들이 생계수단을 위해 분분히 도회지로 몰려왔다. 이는 백인 로동자들에게 날 따라 가심한 실업 위기를 초래했다. 이른바 “백인 우월주의”를 숭상한 “3K 당”(美国民间排外团体)은 앨라배마주, 테네시주 등 지역에서 가장 창궐하게 흑인 이주민을 박해하고 유린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나섰다. 그는 남부지역인 조지아주의 애틀랜타(Atlanta)에서 태어났다. “흑인 민권운동”의 목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는 현유 제도를 저항하지 않는다. 다만 현유 제도의 개선을 촉진하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DC에서 “나에게도 꿈이 있다”라는 저명한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20여만 명의 청중을 향해 소리높이 웨쳤다.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언젠가는 백인과 흑인이 형제처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형제처럼 나란히 함께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1968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을 반대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폭발했다. 이번 시위운동은 워싱턴을 비롯한 168개의 도회지에 신속하게 파급되었다. 그 후 1970년대부터 백인과 유색인종의 집거구를 격리하는 붐이 형성되었다. 부유층과 중산층의 백인은 앞다투어 외곽지역의 “뉴타운”(新城区)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빈곤층과 극빈층의 흑인은 여전히 “올드타운”(旧城区)에 집거했다. 이 시기 뉴욕에는 흑인 극빈층이 집거한 “할렘”이 형성되었다.

2000년도를 기준으로 백인 극빈층 인구는 전체 인구수의 8.9%를 점했다. 그러나 흑인 극빈층 인구는 무려 46.3%를 점했다. 흑인 실업인구는 백인 실업인구의 6~7배에 달했다. 흑인 영아사망률은 놀랍게도 46%에 달했다. 미국은 150년 전에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을 반포했다. 그러나 지금도 흑인은 여전히 “특수한 유색인종”으로 취급되었다.

어느 날 나는 알링턴 카운으로 가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고속도로를 타려고 포토맥 대교로 향했다. 때마침 사거리에서 붉은 신호등과 마주쳐 부득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언뜻 스쳤다. 뒤미처 눈앞이 캄캄해졌다. 웬 영문인지 몰라 운전대만 붙잡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 후 갑자기 눈앞이 환히 트였다. 키가 훤칠한 흑인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방금 거품이 부풀어나는 세제를 승용차 앞 유리에 뿌리고 기다란 막대기로 말끔하게 닦았다. 그는 조수석의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부랴부랴 창문 유리를 내렸다. 그는 “마네-마네”를 곱씹었다. 나는 일순간 머릿속에서 찬바람이 휭-일었다.

일전에 간혹 흑인들이 이런 식으로 돈을 구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여태껏 한 번도 당하지 못했다. “도대체 얼마를 줘야지?” 나는 주춤주춤 망설였다. 그는 짜증난 눈길로 표독스레 쏘아보았다. 문뜩 바른편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쳐들었다. 나는 다급히 호주머니를 뒤졌다. 5달러 지폐가 잡혔다. 부랴부랴 지폐장을 내밀었다. 그는 다시 1달러 지폐 4장을 넘겨주었다. 흑인 남자는 1달러를 구걸했다.

어는 날 나는 이 일을 강 사장님에게 전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조 기자님은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떤 애들은 5달러든 10달러든 100달러든 무조건 지폐 장만 받아 쥐면 감쪽같이 사라져요. 조 기자님은 1달러를 주고 미국 공부 잘하셨네요.

저도 시초에는 얼마를 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요. 손에 잡히는 대루 5달러도 주구 10달러도 줬어요. 어느 때는 하도 급해서 그만 50달러를 준 적도 있어요. 하도 억울해 목사님에게 말씀 드렸어요. 근데 목사님은 시무룩이 웃으며 “하느님을 신봉하는 기독교 신도가 자선을 베풀면 그만큼 복음을 많이 받아요.”라고 가르쳤어요. 곰곰이 생각하면 목사님의 말씀도 맞지요. 그 후 저는 1달러 지폐를 몇십 장씩 챙겼어요. 미국 공부를 하느라 학비를 톡톡히 치렀어요.”

시초에 강 사장님은 흑인 학생들이 가게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도 많은 물량을 도적 맞혔다. 별수 없이 가게문을 굳게 지켰다. 어느 날 퇴근 무렵 난데없이 돌멩이가 날아와 승용차 뒷유리를 박산 냈다.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보험회사는 현장을 체크한 후 보험금을 지불했다.

그 후 강 사장님의 승용차는 또다시 돌멩이 세례를 당했다. 그러나 더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보험회사도 찾지 않았다. 300달러의 승용차 유리도 스스로 해결했다. 주말이면 부지런히 흑인 노숙자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가게에 적재된 상품은 무조건 흑인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그 후 물건을 훔치는 현상이 차츰차츰 줄었다. 그러나 방과 후의 고봉기는 여전히 가게문을 지켰다.

미국은 지금도 흑인과 백인 간에 선명한 분계선이 존재했다. 부유층은 여전히 백인들의 소유물이었다. 극빈층은 여전히 흑인들의 대물림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등등 분야는 여전히 “백인우월주의”가 지배했다. 폭력, 살인, 방화 등등 범죄는 여전히 "흑인 커뮤니티"의 몫이었다. 

“흑백의 갈등”은 지금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았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년~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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