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날 수 없는 교단 

 

잃어버릴 번 했던 것이 한결 소중했던 법이여서인지 나에게는 다시 교단에 오른 것이 더없이 소중한 존재로 되고있다.
3년전 나는 "하해"바람에 유혹되어 신성한 교단을 버리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처럼 매혹적인 바깥세상에서 한번 큰 사업을 벌려 자신의 인간 가치를 과시해보고싶었던것이다.
나는 한 한중합자기업의 수석통역으로 채용되었다. 신사 일에 대우도 아주 좋았다. 에어컨이 있는 고급 침실, 식사때마다 차려지는 진수성찬, 두툼한 월급봉투……이런 것들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상상도 해보지못한것들이였다.
업무에 익숙해 지고 한국관리자들과의 관계가 밀접 해지자 회사에서는 나에게 중임까지 척척 맡기었다. 일은 잘 되가도 있었지만 어쩐지 마음한구석은 허전함이 가득했다. 낮에는 일에 바삐 돌아치다나니 몰랐지만 저녁이 되면 뜻 깊던 학교생활이 그리워 났고 "선생님! 선생님!"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귀염둥이들이 너무나 보고싶었다.
그래서 직장의 귀청을 째는듯 한 기계작동음을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로, 나이 어린 직장동료들을 나의 학생으로, 넓다란 직장을 교실로 여기며 심리상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으나 그것은 헛수고였다.
특히 나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1996년 단오 날과 그해 여름방학에 있었던 일이다. 직원들에게 단오명절선물을 나눠주던 한국인부장님이 단오 명절 유래에 물었는데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에 한국인부장님은 이건 한국에선 초등학생도 다 아는 것이라면서 이해가 되지 아는듯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본인의 이력서도 쓸 줄 모르고 가장 기본적인 역사상식마저 모르는 어린 여자애들은 학교 다닐 때 나처럼 무책임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생각되니 말이다. 오늘 부장님이 비록 가볍게 웃고 지났지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나는 처음으로 나의 "하해"에 자책감을 느끼게 됐다.
그해 여름방학의 어느 날, 부장님이 날 불렀다. 한국에서 놀러 온 여덟 살 딸애가 엄마보다 선생님을 더 찾는다며 며칠동안 중국어도 배워주며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은지라고 부르는 예쁜 그 여자애는 나와 익숙해지자 신나게 학교생활을 얘기하다가도 선생님이 너무 보고싶다며 눈물까지 글썽이었다.
그날 밤 나는 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도 은지처럼 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언제나 내가 코를 닦아줘야 하던 개돌이, 머리를 묶어줘야 하던 꽃분이……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부르기나 하듯이 개학 전에 고향에 돌아가 교편을 잡으려고 이틀 뒤에 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뜻대로 다시 교단에 올라 교편을 잡았다. 얼마 후 한국인부장님이 만장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나를 승진도 시켜주고 임금도 배로 올려줄 테니 빨리 오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천금 만금을 준다 해도 다시는 교단을 떠날 수 없다고 단연히 거절하였다.
나는 지금 그 어떤 유혹에도 끄떡하지 않고 성스러운 일터를 굳게 지키리라고 다지며 교단에 오른다.

 


커다란 뒷모습 

한강공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중한수교 30주년을 맞으면서 재한 중국인 웹사이트 분한넷의 주관으로 한강변 20키로 장거리 걷기대회가 곧 시작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악몽 같던 코로나가 종결되고 곳곳에서 야외 행사가 열리면서 오래 만에 야외로 나온 사람들은 너도나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학입시를 앞둔 아 들이 머리도 식힐 겸 주말 나들이 나가자고 해서 따라 나온 나도 어느새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그때 출발을 알리는 신호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종착지는 롯데 타워 근처 동방명주 크루즈 호였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강변이라 공기도 시원하고 나무들 도 연두색 잎사귀들을 팔랑 이며 산들산들 춤추고 있는듯 싶었다. 나는 준비해온 셀카봉으로 이 뜻 깊은 순간들을 남기랴 아들 뒤를 따르랴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 숨쉬는 운동 외엔 별 운동을 하지 않는 나지만 아들이랑 요즘 별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0키로나 걸어왔다. 정오가 다가오면서 햇볕은 점점 강해지고 아들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기 시작하는데도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다리가 시큰거리고 발바닥도 따끔거리고 숨도 차서 아들을 따라 걸을 수 없었다.

“아들, 우리 저기 벤치에 앉아 좀 쉬었다 갈까?”  
“아니, 난 계속 걸을 거야. 엄마 혼자 쉬고 천천히 따라와.” 
아들은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나도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을 따라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한시간도 넘게 걷고 걸었는데 겨우 5키로 더 왔다고 했다. 아들은 말수가 점점 적어졌고 점점 더 빨리 걸었다. 하지만 나는 다리가 천근만근이 돼서 더 걷기 힘들었다. 나는 끝내 멈춰서고 말았다.  

저만치 앞서 가던 아들이 뒤돌아보더니 달려와 나의 어깨에서 배낭부터 벗겨서 자신이 메었다.  
“엄마, 난 오늘 꼭 100명 안에 들 거야. 그래야 대회에서 주는 경품을 받을 수 있거든.” 
“그까짓 경품 받아서 뭘 해, 별거 아닐 텐데. 오늘 좋은 체험 이만큼 했으면 됐다.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걷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거나 해먹자.” 
“아뇨.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없어. 엄마는 천천히 와, 내 먼저 종착지에 가서 기다릴게.” 말을 마친 아들은 배낭을 단단히 고쳐 메고 앞사람들을 뚫고 뛰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아들의 뒷모습은 엄청 커 보였다. 배낭을 멘 어깨가 한없이 넓어 보였다.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씩씩하고 듬직한 남자로 성장한 것인가? 아들은 여덟 살 나던 해 한국말을 한마디도 모른 채 나의 손에 끌려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국 행 비행기를 탔다. 기대에 부풀어 한국땅에 내렸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애 아빠의 콧구멍만한 회사 기숙사였다. 한 여름인데 작고 낡아 빠진 벽거리에어컨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 집안이 화 가마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어 아들애를 데리고 근처 개천에 나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아들은 중국에서 넓은 거실에서 자전거를 타던 일을 생각하면서 자꾸 큰 집에 돌아가자고 졸랐다. 그렇게 방학간 아들한테 한국어를 좀 배워주고 나니 개학할 때가 되였다. 나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홀로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월셋방 원룸을 맡았다. 아들을 근처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원래 아들이 학교생활에 적응 하는걸 보면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는데 애 아빠 혼자 월급으로는 세식구가 살아가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중국어방문수업 다니며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다. 아들한테는 대중교통 타는 법 알려주고 폴더 폰에 교통카드 하나 목에 걸어주고 왕복 2시간거리를 혼자 등하교하게 했다. 사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셔틀버스도 있었는데 셔틀비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서 아들 저녁밥까지 챙겨 놔야 했는데 전자렌지도 없어서 보온병에 밥과 반찬을 넣어두었다. 수업이 끝나 밤늦게 집에 오면 아들은 숙제 하다 말고 학교 갈 때 옷차림 그대로 이불도 펴지 않은 채로 몸을 움츠리고 잠들어 있군 했다. 보온병에 반찬은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  

‘중국에 있었으면 아들은 아직도 응석 부리며 매일 내 품에서 잠들었을 텐데, 내가 끼니마다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학교 다녔을 텐데……’ 엄마가 집에 돌아온 것도 모르고 잠에 푹 빠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느라면 그날은 이런
저런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야 하니 아들은 항상 잠이 부족해서 오후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잠들어버리곤 했다. 그러던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그날은 오전부터 날이 흐리고 눈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수업 들어갈 땐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곤 수업이 끝나서야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날도 점심때부터 시작된 수업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몇 군데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새까맣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들한테서 수십통의 전화가 걸려왔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참만에야 아들은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울면서 집 못 찾아 오래동안 밖에서 헤매고 있다고 했다. 한국말도 서툴러 주위에 도움요청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일단 아들을 진정시키며 방법을 찾아야했다. 아들은 한국말은 서툴러도 방학에 한국 글자는 뗀 상태라 글자는 알아봤다. 그래서 일단 근처에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을 찾으라고 했다. 거기 들어가 그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이름을 알려주면 엄마가 제일 빠른 속도로 찾아갈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한창 걸어서야 전철역을 찾았다고 했다. 전철역이름을 듣는 수간 나는 길옆에 택시를 잡아탔다. 마트에 가면 양배추 한통도 중국 돈으로 계산하면 비싸서 반 통만 사먹던 시절이라 택시는 비싸서 평소에는 탈생각조차 못하던 나였다. 뒤에 수업도 다 취소했다. 아들한테로 가는 길이 왜 그리도 긴지. 얼마 달렸는지 드디어 전철역에 도착했다. 역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먼 곳에서부터 입구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들이 보였다. 아들 이름을 불었다. 아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뛰어와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들을 껴안고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나의 품에서 한참 서럽게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그제야 눈물 닦아주려고 보니 겨울 패딩은 다 벌어져 있고 바지는 내려와서 그 추운 날씨에 배가 훤히 보였고 신발은 눈에 푹 젖어 있고 가방은 질질 끌고 다녀 볼모양이 없게 됐다. 얼굴은 또 뭔가. 눈물에 땀에 범벅인데 새까만 손으로 문질러서 알락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웃음이 빵 터졌다.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그제야 아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역을 나오니 바로 앞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있었다. 아들은 아직 이런 곳에 못 들어가봤다. 나는 큰마음 먹고 아들 손을 잡고 가게안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아들한텐 파스타 한 접시 시켜주고 나는 밑반찬만 좀 먹고 집에 와서 김치에 밥을 물에 말아먹었다. 그후로도 아들은 종종 버스에서 잠들었었지만 어떻게든 집을 찾아왔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집 찾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들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더 잘해가고 있었다. 과외도 안 시켰는데 공부도 제법 잘해서 상도 타오고 말하기 대회도 나가 1등도 하고 학급에서 반장도 하면서 너무나 씩씩하고 훌륭하게 커갔다. 그 덕에 우리 둘도 열심히 일하게 됐고 결과 지금은 한국에서 살집도 마련해놓고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였다. 어느덧 아들은 이렇게 커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갑자기 아들이 너무 보고싶어 졌다. 온몸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뛰다시피 해서 또 한참을 걸어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도 사람이 많아 한참 찾아서야 의자에 앉아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너무 반가웠다. 오래 만에 아들을 보는 것 같았 다. 아들도 나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웃으며 내 손에 빨강 케이스를 쥐여주며 수고한 선물이라 하였다. 완주한 아들이 기특해서 엄마가 선물해 줄 판에 선물이라니 웬일인가 하면서 빨강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빨강뚜껑의 예쁜 쿠션이 있었다. 알고 보니 100명안에 들고 싶었던 이유가 이것때문이였다. 작은 쿠션 하나지만 무겁게 느껴졌다. 이 작은 케이스안에 아들의 얼마나 많은 노력과 따뜻한 마음이 쌓여 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아들을 와락 껴안았다. 아들한테 고맙다고 했다. 집에 오려고 보니 아들 걸음이 이상했다. 보니 발에 물집이 생겨 잘 걸지도 못했다. 그래도 선물 탔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 아직도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걷기대회 참석하고나서 아들은 더 고된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하루에 몇시간 안 자고 공부 하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내지 않았다. 결과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의 명문대에 입학했다. 첫 학기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 텐데 주말에도 집에 오지 않고 공부하더니 그렇게 받기 힘들다는 최우수성적학생장학금도 전액으로 탔다. 책가방을 메고 대학교 교문을 들어가는 아들의 뒤모습은 너무나 단단하고 듬직해 보였다. 예전 8살때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이 진정한 사나이가 되였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인가 보다. 한국 와서 부모 된 우리는 돈 버느라 아들한테 많은 시간 같이 해주지 못했고 그래서 아들은 많은 일을 자기 스스로 해야만 했는데 그러다 보니 아들은 또래보다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들은 공부도 공부지만 독립정신과 배려심을 키우고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가면서 돈 주고도 할 수 없는 인생경험을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며 바르게 성장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아들의 커다란 뒤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지난 한 세월 감내해온 힘겨움과 서러움들이 내 삶의 밑거름이 돼 밝은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십 여년 그 세월의 중간에 사랑하는 내 아들이 있었고 나는 아들에게 아들은 나에게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준 것 같다. 그래서 힘든 세월이지만 삶의 보람을 가져다 준 아들에게 고맙기만 하다. 

엄분자 프로필
•1975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출생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교사 출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흑룡강신문>등 중국문학잡지에 교원수기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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