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비죄 

 

난 애비가 없어
너무나도 불쌍하게 죽어간 내 애비
내가 사주는 술 한 잔도 못먹고
남들 앞에서 어깨와 가슴을
한번도 시원하게 못펴보고
그냥 그렇게
수많은 보통 애비들처럼
평범 이상으로 평범하게 살다가
죽을 때도 안됐는데 그만 죽어간 애비
그래서 내가 마시는 술은
갑자기 물이 되였고
나는 그만 애비 없는 놈이 되였지
애비가 없다는 건
어데 가서 잘못해도
욕을 먹거나 매를 맞을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고
마른 주정 따위를 해도
시끄러운 잔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사는 걸 게을리하거나
사업 따위를 조금 공빼먹어도
전혀 꺼리낄 게 없다는 의미이고
설명절이 되여도 굳이
술병 사들고 찾아가서 세배하는
번거로움이 생략된다는 의미이고
그런데 지랄같이
청명의 무덤가에는
잔디처럼 애비시가 돋아나서
이 호로자식을 희미하게 웃군 한다
더럽게도 청명날이면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나는 물이다
내게 무슨 상처랴
내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으깨지고
나무 만나면 베여지고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그러나 내게 무슨 상처랴
짐승들은 철버덕거리며 나를 희롱하고
자그마한 풀가지마저 내게 칼질하고
사람들이야말로 아무렇게나 나를 찢고 베이고 갈라놓고… 해도
실로 나는 물이다
내게 상처를 바라지 마라
해 아래 말리워도 좋다
오물을 퍼부어도 괜찮다
나는 물이다 
아파서 속울음 울어도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아아 그리고 차마 상처도 입지 못하는  

 

나 흔들리다가 오리라
 

나 흔들리다가 오리라
바람이 지나가다 흔들면 거기에 흔들리다가
꽃으로 피라면 피리라

나 흔들리다가 오리라
춤에 미친 나비가 훨훨거리면 거기에 흔들리다가
피리소리로 웃으라면 웃으리라

나 흔들리다가 오리라
새벽이슬이 흔들면 거기에 흔들리다가
해빛으로 빛나라면 빛나리라

나 흔들리다가 오리라
흔드는 데까지 흔들리다가
이제 그만 가도 좋다고 하면 오리라

와서,
풀잎 되여 다소곳하리라

 

꽃잎으로 불러보리라
 

해빛 쟁쟁한 
오전 아홉 시
 
이슬이 아직 
사라지기 전
 
그 이슬진 꽃잎으로
그대를 불러보리
 
설핏한 향이 코날을 스치는
그 섬섬한 꽃잎으로

 

엄마는
 

엄마는
내 마음속 엄마는
불러도 대답없는 엄마는
세상에 엄마라는 이름으로만 남은 엄마는
 
엄마는
아프게 살으시다 웃으며 가신 엄마는
등에 업어키운 내 가슴에 안겨 눈을 감으신 엄마는
새벽녘 우물가 얼음 깨고 길어오신 물을 촤르르촤르르 쏟으시던 엄마는
 
엄마는
다친 팔로도 기어이 밥 해주고 병원 가시던 엄마는
욕하지도 말고 욕먹지도 말며 사는게 제일이라시던 엄마는
단 한번도 깊은 잠에 들지 못하시다가 이제는 정말 깊은 잠에 드신 엄마는
 
엄마는
이가 아파 강낭떡 먹지 못하는 나를 눈물 그렁이며 보시던 엄마는
이가 없어 찹쌀떡도 씹지 못하시고 바라만 보시던 엄마는
틀니를 해넣고 아이처럼 웃으시던 볼 홀쪽한 엄마는
 
엄마는
잔등의 때 밀어드리다 밀리는 가죽을 보고 입을 막고 울게 만드신 엄마는
한겨울 수북수북 내리는 눈을 보며 깊은 상념에 젖게 만드신 엄마는
씹어드신 물도 소화해내지 못하시던 불쌍한 엄마는
  
엄마는
아아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도 살아계시는 내 엄마는

 

고향은 내가 울바자에 오줌을 싸도 나무라지 않았네
 

이십 년인가 삼십 년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밖으로만 밖으로만 철없이 싸대다가
어느 날 비로소 철이 든 듯 고향으로 돌아왔다
불알친구들과 술 한 잔 했다
요즘의 세간에서 나를 불러주는
모든 호칭들을 무시한 채
우리는 예전처럼
쑥스러운 별명들을 툭툭 주고 받으며 낄낄거렸다
열어놓은 방문으로 훤히 내다보이는 마당가에서는
모기불이 따악따악 소리내고 있었고
먼 곳에서는 쓸데없이 개구리소리가 요란했다
갑자기 오줌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다가
그냥 체면을 몰수하고
울바자 밑에 실례하기로 했다
세상사에 진작 지쳐버린 나의 까만 녀석은
부끄러운 듯 더욱 까부라져 있었고
그런 녀석을 간신히 끄집어내
고향 내음을 맡아보게 했다
이십 년만인가 삼십 년만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흐르도록
오랜 만에 정말 그렇게 오랜 만에 달을 보았다
어릴 적 엄마의 땀 젖은 머리에 앉아 춤추듯 돌아오던 달을
눈물이 질름질름 넘치도록 쳐다보았다

 

거기에 추억은 울바자처럼 서있었네
 

눈이 내리고 있었지
동화만큼이나 아름다운 눈이 펑펑거리고 있었어
그리고 밤이였지
아무에게라도 전화를 하고 싶은
그런 푸근한 밤이였지
열어놓은 기억 속으로는
옛날 아슴한 이야기들이
청첩이라도 받은 듯이 달려오고
겨울밤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어
그 속을 나는 아이처럼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고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손가락을 빨던 소년이 되였지
괜히 네 생각이 나서
나는 너에게 눈줴기를 뿌리고
너는 고드름을 창처럼 꼬나들고
나를 향해 달려왔어
강아지가 갑자기 부끄러워 고개를 드니
더없이 맑은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그래서 울었어
시집 못간 가시내처럼

 

용서
 

산길을 걷다가 
억수로 비뚤게 자란 
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그 나무의 휘우듬한 무릎을 만지며
그냥 용서해주기로 했다
구불거리며 자랐을망정
푸름을 퍼올리며 
싱싱한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그 모습에 왈칵
눈물을 쏟고는
그냥 용서해버리기로 하였다
그날은 괜히 연필도 깎지 못하고
볼펜으로 못난 친구한테 편지를 썼다

한영남 프로필 


1967년 길림성 안도 출생. 
시,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 300여 만자 발표. 
시집, 소설집 , 장시집 등 출간. 
중국조선족수필상, 중국조선족동시상,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다수 수상. 
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 중국시가학회 회원. 
想翔문학아카데미 원장.
자유기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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