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찾아서
                                        

아직 3월이라 바람이 쌀쌀하여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가 싶더니 겨울 끝자락에 찾아온 봄비에 귀 맛 좋은 새들의 지저귐 소리와 돌돌 흐르는 강물의 노랫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와 고요하던 내 마음을 싱숭생숭 흔들어 놓는다. 모처럼 생긴 휴일 방콕 하려던 생각은 어느새 구중천에 날려버리고 저도 몰래 나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나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버스커 버스커”의 봄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둘러 화장을 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봄의 향기를 만끽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기에 바쁘다. 궁리 끝에 집에서 멀지 가산디지털역 금천 벚꽃 십리 길 과 안양천 제방 길을 찾기로 했다. 봄에는 그래도 꽃구경이 제일이니까.

빨간 립스틱으로 입술을 물들이고 향수까지 쏙쏙 뿌리고 나니 거울 속에 영락없는 봄 처녀가 나타났다. 화장은 마쳤으니 옷은 뭘 입지? 나는 잠시 고민 끝에 옷 궤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잔 꽃무늬 플레이 원피스를 꺼냈다. 몇 년 전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흰 바탕에 연분홍 잔 꽃들이 수놓아진 쉬 폰 소재 원단의 원피스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충동구매를 한 것이다. 사놓고 너무 화사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이 원피스를 오늘은 꼭 입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았다. 나는 한껏 들뜬 마음으로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봄바람이 들어와 하늘거리는 원피스의 옷깃을 흔들어놓는다. 거울 속의 처자도 빨간 립스틱 사이 박씨 같은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서니 따스한 햇살이 반갑게 맞아준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봄의 행적을 찾아 떠났다. 육교를 지나 광명 쪽 징검다리를 건너니 멀리서부터 강변을 따라 쫙 늘어선 벚꽃나무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나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조그마한 가슴도 한껏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다. 

주말이라 벚꽃 나뭇길은 벌써 쌍쌍이 연인들과 산책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저마다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야단법석이다. 꽃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꽃송이에 코를 대고 혹은 나무 아래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모두가 탤런트가 된 듯싶다. 그러나 떠들썩한 인파는 하늘을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벚꽃을 감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밤새 내린 비로 이슬을 머금은 꽃송이들은 해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다치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것만 같은 꽃봉오리들은 암팡지기 그지없다. 만발한 꽃송이들 사이 뾰족뾰족 돋아난 연두색 아기잎사귀들은 봄의 생기를 한층 더해 주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다가도 솔솔 봄바람이 불어오면 하얀 꽃잎들이 흰나비 떼 마냥 하늘하늘 춤추며 날아 내린다. 그 사이를 거닐고 있노라니 향기에 취해서인지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왠지 몸이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벚꽃향기를 탐욕스레 들이키고는 길옆 벤치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원피스자락을 정리하며 머리를 숙이다가 문득 땅에도 봄이 찾아왔음을 발견하였다. 겨울을 견디고 눈보라와 비바람을 이겨낸 작은 풀들이 배꼼이 머리를 내밀고 수줍게 나한테 인사를 하고 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식지로 야드르르한 작은 풀을 콕 누르며 악수를 하였다. 봄과의 악수였다. 

다시 일어나 벚꽃 가로수 길을 가로질러 안양천 제방 산책로에 들어섰다. 도로 한 켠에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가사 “꽃송이가~ 꽃송이가~ 그래 그래 피었네~”처럼 샛노란 개나리 꽃들이 아주 예쁘게 피어있다. 한 송이 한 송이 정성을 다하여 핀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빨간 장미, 분홍장미들이 조화롭게 어울러져 있다. 꽃망울마다에 물방울이 맺혀있어 마치 구슬을 머금은 섹시한 입술을 방불케 한다. 꽃송이를 받혀주는 푸른 잎사귀들 사이로 잔뜩 머리를 쳐들고 보란 듯이 도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래서 여인을 장미에 비유하는지도 모르겠다. 

봄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나서 머리를 돌려 보니 40대 초반의 한 여자가 18세 소녀인양 환성을 지르며 마구 셔터를 누르고 있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이며 반짝이는 눈동자는 지금 이 시각만큼은 소녀임이 틀림없다.  그렇다, 봄은 모든 여자를 소녀로 만들어주는 재간이 있는 것이다.  나도 이 아름다운 순간을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워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꽃도 찍고 봄도 찍고 그 봄을 즐기는 사람도 찍었다. 그러다가 저도 몰래 홀린 듯 벚꽃나무 가지를 잡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벚꽃 잎들이 내 코 끝에서 퍼지는 그 향이 내 페속 깊은 곳에 들어가 새로운 세포로 태어난다.

아, 봄의 향기…… 참 좋다.  봄을 찾은 여자가 느끼는 행복이다. 
                                                                         
                                                                               2017년 4월 한국에서 

생존의 욕구

   

맑은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따뜻하게 나를 반겨준다. 나는 안녕이라는 인사대신 두 팔 벌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오늘도 열심히 살자”라고 나에게 말을 하면서 전철을 탔다.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 출근족 사이에서 앉을 자리를 찾던 나의 시선은 책을 읽는 한 여자에게 고정되었다.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은지 꽤 오래된다. 무슨 책을 읽을까?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릴 때 책을 덮고 일어나는 순간 ‘살아 있기 때문에 아프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아프니 산다. 13년 전 아팠던 기억들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공부를 채 못했던 나는 결혼 후 다시 공부했다. 하지만 꿈을 향한 마음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하루 종일 내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아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음 한구석은 늘 아렸다. 그때마다 울컥하는 마음의 눈물을 꾹 눌러가면서 공부를 해야 했던 운명도 내 편이 아니었다. 졸업논문을 쓰랴, 공무원, 회계사 시험에 취업까지 고민해야 했던 나는 결국 앓고 말았다. 

2004년 봄, 감기 증상인지 컨디션 때문인지 기운이 없었다. 친정에서 쉬려고 길을 떠났다. 그때 팔다리에 아주 작은 검붉은 의문의 반점들이 발견했다. 이상한 걸 먹은 것도 없는데…… 이튿날엔 검붉은 반점들이 팔다리에서 온몸으로 퍼졌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만 같은 검붉은 물집들이 입안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을 치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응급실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고는 “큰일 날 뻔했어요. 눈에까지 출혈이네요. 빨리 입원 수속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날 입원하고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간호사들은 여러 가지 기계를 내 몸에 붙이고 피를 뽑고 링거까지 꽂으면서 바빴다. 눈만 뜨면 눈물이 마구 쏟아질 것만 같아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몸이 지쳐서인지 나도 몰래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온통 벌레가 우글우글 거리는 구멍에 빠져 허우적대는 꿈에서 깨어났다. 불이 꺼진 병실 안은 조용하고 이름 모를 의료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갑자기 복도에서 오고 가는 조급한 발걸음 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여 밤은 요란스러웠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으나 무서움에 오들오들 떨며 온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튿날 빈혈 소녀가 숨졌다고 누가 말했다. 그제야 어젯밤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다시 공포가 밀려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할 새도 없이 간 호사는 내게 골수검사를 진행했다. 사실은 임신 때 혈소판 (血小板) 감소증 진단을 받았으나 무사히 아들의 출생 후 잊고 살다 이렇게 재발했다.

나의 투병의 길은 눈만 뜨면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감옥’에서 매일 채혈을 하고 12시간씩 수액을 맞으면서 소독약 냄새가 나는 환자복을 갈아입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나만 홀로 생존하는 공간에서 이젠 죽음밖에 없다는 느낌이 든다. 고작 몇 주인데 몇 달이 지난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때가 잊히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양쪽 팔다리에는 하얗게 부풀어 올라와 진물이 군데군데 터진 자리에 주삿바늘이 남긴 시퍼런 멍 자국은 빨그스름한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가끔 물집이 생긴 곳에 고름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끔찍한 것을 경험을 했다. 사람들도 하나 둘씩 죽어갔다. 그들은 심장이 멎으면 피가 흐르지 않는 입술, 손가락, 발톱은 파래지면서 푸른색을 띤다. 한 열두 시간이 지나면 시체는 가스로 인한 자연분해하며 썩은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마치 죽음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장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는데 혈소판 수치는 오르락내리락하고 부작용만 점점 심해져 몸은 퉁퉁 부었다. 혈소판 수치가 곤두박질칠 때마다 죽음을 암시하는 그 순간마다 더 이상의 호전이 없자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권합니다”라고 말했다. 비장절제술을 권유하지만 선뜻 받아들일 수 없어 다른 병원 (천진에 있는 중국의학과학원 혈액질환병원) 에 가서 치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중약과 서약을 동시에 처방했다. 다행히도 몇 달 치료 끝에 퇴원을 했다. 그러나 프레드니솔론(强的松)약물의 부작용으로 염증, 그리고 발열과 기침으로 이어져 이번은 늑막염(肺结核胸积水)로 진단을 받았다. 손가락 굵기의 호스를 삽입하여 흉수를 제거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갈기갈기 찢기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나는 결핵이라는 질병에서 또 다른 질병으로…… 

오랜 투병 끝에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 종일 누워만 있는다. 가끔 돌아누울 때마다 온몸이 부서지는 같았다. 이젠 누워 있는 것도 지겹다. 일어나 간신히 걸어보려고 했지만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가 몇 발자국도 걷지 못한 채 침대로 돌아와 산소호흡기를 부여잡았다. 이렇게 연명을 하는 그 순간 나는 여태껏 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만 증폭했다. “아, 죽겠구나! 이 병 저 병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구나.” 매번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숨 쉬는 것마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병원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엄마는 여기저기 돈을 꿔서 병원비를 대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불면증으로 수면제에 절어야만 했다.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그리고 불안한 삶의 연속에서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기생충처럼 사는 삶에서 행복보다 고통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 유언장을 쓰려고 하니 눈물부터 앞섰다. “엄마 죄송합니다. 어린 내 아들 미안해”라는 말뿐이다. 엄마에게는 빚만 그리고 아들에게는 아무것도 해줄게 없었다. 허약 체질에 나는 잔병치레가 많다 보니 출산 이후 어린 아들과 늘 떨어져 보냈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도 별로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명화야, 너 대신 아파 줄 사람이 없더라도 누군가 아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나에게“아직 찾아오지 않았는데 왜 죽음으로 몰고 가니?”라고 물었다. 나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랐을 뿐입니다”라고 변명을 했다.

그렇다. 어쩌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삶에 대한 갈망이 움트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파 보니 삶의 소중함을 알았다. 만약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분명 한을 품고 미련을 갖고 가는 가장 불행한 영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닥쳐온 죽음 앞에서 아픔보다는 죄책감이 먼저 들것 같았다. 그래 죽으면 그만인데 남겨진 가족 한데 얼마나 미안하고 잔인할까…… 

그 다음날부터 주변을 관찰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밥 먹는 시간마다 너도 나도 뛰쳐나왔다. 중요한 것은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뭇잎은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다할 때까지 결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는 듯 삶의 애착으로...... 

또 다음날은 창밖에 내리는 봄비를 보았다. 나는 창가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귀를 쫑긋 세워 음악 대신 빗소리를 감상했다. 저 하늘의 구름 속에서 시작되어 땅속으로 사라지는 빗방울은 짧은 생을 다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틔우며 희망을 주듯이 세상 만물이 각자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입원한지 몇 개월쯤 뒤에 엄마는 “시장을 가겠니?”라고 물었다. 매일 병실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냉큼 가겠다고 했다. 연길 아침 시장에 갔는데 죽음의 고비에서 돌아온 나에게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분비는 아침시장은 삶의 활력이 넘쳤다. 새벽 4시부터 일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열심히 산다. 이들의 생존도 결코 쉽지 않았다. 나도 이분들만큼 삶의 열정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힘든 고통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매일 눈만 뜨면 나의 에너지 활력소를 채워주는 이 "낙원"을 찾았다. 여기서 음식을 먹고 반찬도 사 왔다. 그러면서 사람과 어울려서 사는 특유한 분위기 속에서 삶의 희망과 용기를 찾았다.  

그 후 엄마가 나를 위하여 용하다는 한의사와 밀방(秘方)을 찾아 정체불명의 약물을 받아왔다. 그저 건강해지길 바람에 나는 쓴 약도 삼킬 수 있었다. 구병성의(久病成医)라고 의학책도 읽다 보니 절반 의사가 되었다. 어떤 병인지, 뭘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진정한 치료는 약을 안 먹는 것이다. 나는 과감히 부작용이 있는 호르몬제를 감량하고 자연치료방법을 찾았다. 또 식사 메뉴와 소화상태, 컨디션 등도 유심히 살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나의 몸도 하루하루 좋아졌다. 

긴 투병생활 속에서 종합병자가 되어 죽는 줄로만 알았으나 몸에서 아프다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아픔도 고맙게 여겼다. 나는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면서 지금까지도 다른 진료 중이다. 어쩌면 끝까지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생의 마지막까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 한 권을 써도 아마 모자랄 투병생활에서 힘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런 삶은 언어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내가 여기까지 걸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넘쳐나는 사랑과 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매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되어 오늘날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아픔은 나눌 수 없지만 당신에게도 작은 사랑을 심어주고 싶다. 당신의 병도 마음도 나처럼 치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마지막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내릴 역에 왔다 오늘도 힘차게 앞으로 걸어간다.

글 쓰는 이유
의사는 나에게 완치라고 말 한 적은 없다. 단 10년쯤 재발이 되지 않는 것을 봐서 병은 치료된 것 같다. 지난날들은 나의 아픈 추억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질병 속에서 계속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굳이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내가 아팠고 힘들었다 해야 하나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글은 쓴 이유는 나의 글이 누구의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 아니라 다만 질병을 시달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꼭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정말 너무나 소중한 것이니까! 

                                                                         2017년 8월 한국에서


삶은   

 
어두운 곳에서
작은 구멍 하나
오색찬란한 불빛이
조금씩 보인다
 
와~
몰랐던 바깥세상
나는 충동 끝에 
살며시 문고리를 잡아
힘껏 당겨 본다
 
삐걱대는 소리
한 가닥의 희망이었는데
열리긴커녕 오히려
꽝 닫 겨 버린 문
언제면 
다시 용기
낼 수 있을까?
오늘도 연습한다.
삶은 이런 거더라


여행 
      

이젠 
혼자라도 좋습니다 
그 누구도 걷지 않은 길
그런 길로 가려 합니다
 
외로워도
혼자 즐길 수 있는 길에서 
바람 따라 멀리 가려 합니다 

힘들 땐 
쉬다가 걸을 수 있는 길로
무거운 짐은 등에 지고 갑니다  

보기엔 많이 쓸쓸해도
그 속에서 걷는 자
행인의 마음은 행복합니다 


박명화 프로필

1976년 중국 길림성 왕청 출생
대학졸업 후 여행사업에 종사.
현재 서울 거주 무역회사 근무.
수필, 수기, 시, 디카시 다수 발표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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