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10월 9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제577돌의 날입니다. 우리글의 우수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사용하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도모하고자 제정한 날인데 중국 조선어도 한글입니다. 뜻깊은 이 날을 맞이해 본지는 김광림 일본 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의 '조선어는 나의 인생의 동반자'라는 수기를 실으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편집자 주-

김광림 일본 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발전기금회 이사장)

올해 환갑의 나이를 맞이하여 세상을 두루 경험해 본 나에게  조선어가 과연 무엇인가 묻는다면 서슴없이 이 언어가 부모님과 영혼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대답하고 싶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 태아인 내가 뱃속에서 어머님의 속삭임을 들은 것이 이 언어이고,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과 꿈에 만나서 대화나눈다면 역시 이 언어를 쓸 것이다. 고향을 떠나서 수십년간 해외살이하면서 여러 언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그래도 조선어로 글을 읽고, 들을 때가 마음이 제일 편해진다. 모어에는 필경 불가사의한 마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다른 언어로 지식을 습득하고, 대화를 나누는 데는 아무 문제없지만 모어인 조선어에는 항상 진한 정감이 묻어난
다. 부부 사이는 갈라질 수 있어도 부모 자식간에는 갈라질 수 없듯이 모어는 우리의 인생여정에서 떠어놓을 수 없는 동반자이다. 
 
내가 태어나서 대학에 가기까지 자란 마을은 길림성 왕청현의 인구 수백명의 자그마한 농촌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내가 자랄 때 거의 조선족 일색이고, 한 가구밖에 없는 한족 식솔들이 마을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한 정도인 전형적인 조선족 마을이였다. 조선족 여성과 결혼하여 사는 만주족 남성도 한명 있었는데 본인도 가족도 모두 조선어로 생활했다. 이런  마을에서 자랐기에 소학교도 자연스레 조선어반에 입학했다. 향 소재지에 있는 소학교에는 조선어반이 두세 개 있으면 한어반이 하나 있을 정도로 다수가 조선족 학생이였다. 한어도 잘 공부해야 한다는 형님의 권고로 소학교 3학년에 올라갈 때 한어반에 편입되려고 면접시험까지 봤는데 성공하지 못하여 고중졸업까지 조선어반에서 모든 수업을 조선어로 교육받았다.

김광림 교수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연변을 떠나 멀리 가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고향마을에서 지내면서 한어로 변변히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다. 처음으로 연변을 떠나 이 세상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장춘에서 대학생 생활하면서 전혀 다른 언어환경에 맞닥뜨렸다. 대학입학 첫날부터 서투른 한어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자라면서 한어로 변변히 소통도 못하는 조선족 학생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다른 민족학생들의 놀라움이였다. 그때부터 한어를 잘 해보겠다고 힘썼지만 하루이틀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고, 나 스스로 한어를 잘 못한다는 열등감이 따랐다. 그래서 한어를 잘 하는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대학교에서 2년간 일본어강사를 하다가 일본에 류학하는 기회가 생겨 1988년에 일본에 왔다. 일본어는 처음부터 외국어이니 잘 하든 못 하든 열등감은 생기지 않았고, 외국인으로서 일본어를 잘 하는다는 칭찬도 자주 받았다. 운도 잘 따라주어 동경대학에서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방대학에 교수로 취임하였다. 일본에서는 조선어, 중국어를 다 안다는 것이 장점으로 평가받아 대학원입학, 교수채용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 자신이 한어를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오랬동안 한어로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다보니 그래도 많이 진보한 셈이다. 2009년부터 2년간 미국과 영국의 세 대학교에서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영어를 습득할 기회가 늘었다. 이로부터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는 내가 생활에서, 학문연구에서 항상 동반하는 언어가 됐다. 

일본에서 장기체류하면서 오히려 일본어를 제일 많이 사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조선어는 내가 습득한 여러 언어의 제일 기초이다. 조선어를 모어로 배웠기에 이미 중국에서 나는 조선어와 한어의 이중언어사용자가 됐고, 이 두 언어를 아는 우세를 발휘하여 일본어를 쉽게 배웠다. 내가 만약 한어를 잘 배우겠다고 조선어를 뒷전에 두고 소학교에서 고중까지 한어로만 교육받았다면 지금처럼 조선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일본어공부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서 한어를 잘 못해서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어도 자연스레 익히게 된 것이다.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두루 다 안다는 다언어능력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생에 도움이 많이 됐고, 다언어를 기반으로 다문화 이해력을 키웠기에 국제사회에서 넓은 활약이 가능해졌다.

이것은 나만의 사례가 아니다. 현재 일본에 수만명 이상의 중국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조선어, 중국어, 일본어를 다 알고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문화를 잘 리해하고 있기에 생존능력이 높고, 인맥이 넓으며,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이 많다. 언어를 하나라도 더 알수록 우리의 시야가 넓어지고 인생은 행복해진다.  

내가 중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도 조선족 젊은이들 사이에 모어인 조선어를 소중하게 못 여기는 경향이 존재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경향이 더 심해졌을 수 있다. 한어를 능통하게 해야 모든 것이 잘 통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강하다. 중국에서 살다보면 한어는 필수적이고 꼭 잘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모어까지 포기해야 한어를 더 잘하게 되는 것만 아니고 모어인 조선어와 한어를 병행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 이 두 언어를 다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조건이 없다. 

나는 소학교에서 고중까지 조선어를 위주로 교육받았기에 부모, 형제들과 제일 자연스러운 언어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족에 대한 애정도 뿌리깊게 내렸다. 조선어로 조선의 옛날 이야기와 중국의 고전소설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신라의 향가와 고려가요의 은은한 정서, 조선시조의 풍류를 조선어를 모어로 배웠기에 제대로 리해할 수 있었고,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의 운률에 깊은 동감을 가지게 됐다.

어느 민족에게나 모어는 소중한 법이다. 몽골족 지성인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자신들의 몽골어에는 다른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깊은 철학이 담겨있다고 하고, 티벳(서장)에서 일본에 나온 류학생의 말로는 티벳어는 성조가 많아서 시적표현을 아주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조선어는 모음이 풍부하고 한글의 음운적인 표현능력이 높다는 장점이 뚜렸하다.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한류가 세계적인 붐을 이루고 한국어가 인기언어가 돼가고 있다. 

조선족이 사용하는 조선어도 우리가 소중하게 대하고 알뜰하게 가꾸어 간다면 어느 언어 못지 않는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 예술가, 문학자가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이 꿈속의 얘기만이 아니다. 

김광림 프로필 

일본 니가타산업대학교 교수.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 발전기금회 이사장.

1963년 중국 연변출신. 중국 동북사범대학 외국어학부 졸업. 일본 도쿄대학교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에서 석사, 박사학위 취득,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역임하고, 2009년 9월부터 2년간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UC버클리) 동아시아연구소,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Fairbank Center for Chinese Studies),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스쿨(SOAS)에서 방문학자로 체류.

주요 연구과제: 동아시아 문화사, 동아시아의 성씨・족보에 대한 연구.

*세계속의 코리언의 생존전력과 문화발전에 관심이 크고, 한류,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사, 조선족의 일본, 미국 등 지역에서의 활동에 대한 논문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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