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대통령 평민 생활 시작”
이는 2001년 1월 중순 “한국일보”의 톱기사였다.
지난 8년간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가난한 천재, 지적인 정치가”로 호평받았다. 1월 20일 그는 대통령직을 만기하고 평민 생활을 시작한다. 돌아오는 1월 21일 “FOX TV”등 5개 방송회사는 퇴직 후 빌 클린턴의 평민 생활을 실시간 보도한다고 홍보했다.

나는 한석준 씨를 찾았다. “FOX TV”가 빌 클린턴의 평민 생활을 어떻게 실시간 보도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여태껏 그런 보도는 시청한 적이 없다고 하였다. 혹시 매니저 미스타 박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한국일보”를 들고 미스타 박을 찾았다. 그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조형은 왜 이런 기사에 흥취를 가져요? 빌 클린턴의 평민 생활이 조형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TV를 시청하려면 영어가 통해야 할 거 아닌가요. 근데 조형은 아직 영어에 귀가 뚫리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미스타 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듯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나는 다년간의 기자 생활에서 직업적인 호기심을 키웠다. “FOX TV”의 실시간 보도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나는 미스타 박에게 1월 22일의 휴식일을 21일로 변경해줄 것을 부탁했다.

1월 21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었다. “FOX TV”채널에는 60대의 남자 리포터가 나타났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공군 1호기에 탑승하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리포터는 현장에 출동한 기자와 긴장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다음날 “한국일보”의 톱기사를 읽고 비로소 이날 실시간 보도의 내용을 확인했다.

2001년 1월 20일 아침.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타원형 테블 위에 제43대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에게 전하는 편지를 남겨놓았다. 그 후 공군 1호기에 탑승하여 뉴욕으로 향발했다. 지난 8년간 그는 공군 1호기와 함께 세계 각국을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그러나 내일부터는 뉴욕의 차팔과이에 새로 구입한 저택에서 퇴직 후의 평민 생활을 맞게 되였다.

21일 아침 뉴욕시가지는 새벽부터 흰 눈이 부실부실 떨어졌다. 빌 클린턴의 저택 주변에는 이른 새벽부터 카메라 기자들이 진을 치고 대기했다.
“오늘 클린턴 일가에서 누가 눈 치러 나올까?"
기자들은 호기심이 어린 눈길을 주고받았다. 누군가 심심풀이로 50달러 내기를 걸었다. 저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대문은 여전히 꽁꽁 닫겼다. 9시가 넘도록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날 빌 클린턴은 시름 놓고 늦잠을 잤다. 전날까지도 잠에서 깨여나면 즉시 당일의 조간신문을 읽고 TV 뉴스를 시청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조간신문을 읽지 않았다. TV 뉴스도 시청하지 않았다. 백악관을 떠난 후 처음으로 방이 11개나 되는 호화주택에서 애견 보디와 함께 잠을 잤다. 사랑하는 딸 첼시는 대학 공부 때문에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했다. 지난 8년간 미국 제1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의원직때문에 워싱턴에 남았다.

오전 10시경 빌 클린턴은 애견 보디와 함께 집문을 나섰다. 수수한 평민 복차림으로 길가의 음식점에 들렸다. 여느 미국인들처럼 커피와 도넛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그 후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부근의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청바지에 스웨터 차림의 빌 클린턴은 성큼성큼 다가가 일일이 악수했다. 전날까지도 그는 백악관에서 세계를 지휘했다. 그러므로 오늘 갑자기 닥친 평민 생활이 다소 익숙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8년간 대통령직을 다시 역임할 것을 희망한다”
누군가 이런 현수막을 내들었다. 빌 클린턴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기자가 마이크를 내밀었다. 빌 클린턴은 혼쾌하게 대답했다.

“지난 8년간의 대통령 임기는 여간 힘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마음이 허전하다. 그래도 다시 대통령으로 부임하라고 강권하니 사뭇 즐겁다. 지난 8년간 나는 매우 지쳤다. 지금은 좀 더 늦잠을 자고 싶다. 다음주부터 주밀한 계획을 작성하고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싶다.”

빌 클린턴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난 8년간 수입면에서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누군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년간 이 마켓을 드나들며 물건 구입을 해왔다. 지난 8년간 이곳의 물가는 자장 온정적이었다. 나의 경제 수입도 3배로 껑충 뛰었다. 지금 두 자식이 모두 대학을 다닌다. 그러나 별로 부담이 없이 생활한다.”
빌 클린턴은 미남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8년간 나는 여러분들의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을 대통령의 유일한 직책으로 간주했다. 방금 누군가 전보다 더 만족된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이는 퇴임 후의 나에게 너무나도 큰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미국에 감사드린다. 미국은 나를 대통령으로 키웠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나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8년 전 나는 여러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때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오늘 나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여전히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다시 한번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나 빌 클린턴의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의 속담에 “人走茶凉”이란 말이 있다. 백악관을 떠난 빌 클린턴은 자의와는 상관없이 언론의 엇갈린 말밥에 올랐다. 그리고 리해 득실에 따른 정계의 비난이 쏟아졌다.

“뉴욕 타임스”지는 “미국 경제를 일궈세웠다”라는 한편의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역사학자들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미국 역사상 최장기 경제 호황기를 이끈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할 것이다. 얼마 전 풍자만화에는 이런 전경이 묘사되었다. 빌 클린턴은 위대함이란 글자가 적힌 공을 잡으려고 몸을 힘껏 날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공을 놓쳤다. 이 만화는 빌 클린턴이 위대한 재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백악관을 떠난 유감을 표달했다.

1970년대, 로널드 레인 건 전 대통령은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재천명하기 위해 <강대한 미국>을 구축했다. 그 후 1989년에 구소련이 해체되었다. 1991년에는 냉전시대가 결속되었다. 그러므로 1990년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미국의 거대한 경제력을 재천명하기 위해 <부유한 미국>을 구축했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포스트”지는 “빌 클린턴은 기회를 상실했다.”라는 부정적인 사설을 발표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비범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미국인의 생활에 변화를 주도록 사용하지 못했다. 그가 후세에 어떤 업적을 자랑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지난 8년간의 대통령 직무를 돌이켜 보면 결국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별다른 결과가 없었다.”

빌 클린턴은 언론의 엇갈린 시비에 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민 생활을 시작한 후 “클린턴 도서관”건설과 “클린턴 자선단체”사업이 가장 큰 관심사로 되였다. 그는 조용한 시간을 마련해 독서를 즐기고 회고록을 집필하려고 서둘렀다.

미국의 출판계가 발칵 뒤짚혔다.
“빌 클린턴은 역대의 대통령들 중에서 할 말이 가장 많은 대통령이었다. 그의 회고록 판권료는 최소한 1천만 달러를 넘을 것이다.”
출판상들은 분분히 목소리를 높였다. 너도나도 앞다투어 빌 클린턴의 회고록을 출간하려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렸다. 빌 클린턴의 “회고록”은 결국 코로 모사와 출판계약을 맺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지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빌 클린턴의 회고록은 돌아오는 2003년에 출간하기로 예정되었다. 코로 모사는 판권료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계는 1천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전망했다. 출판상의 눈길은 특이했다. 빌 클린턴 회고록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 추문 스캔들(性丑闻), 그리고 빈 샌트 화이트 워터 사건에 대해 구경 어떤 진실을 털어놓을지에 주목했다.”

“회고록”에 대한 엇갈린 비난은 빌 클린턴의 평민 생활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금융재벌 마그 리치에 대한 특별사면이 일파만파로 탄핵 위기를 초래했다. 지난 1월 20일 빌 클린턴은 백악관을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대통령 권한을 이용해 마그 리치에 대한 특별사면 보고서에 사인했다.

마그 리치는 유대계 거부(巨富)였다. 지난 1984년에 그는 무려 4천800만 달러의 세금을 포탈한 협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죄가 두려워 유럽으로 도주했다. 범죄 인도 조약을 피면하려고 미국 시민권도 포기했다.

마그 리치에 대한 특별사면은 당연히 뒷돈거래가 있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이번 특별사면 로비(幕后交涉)의 핵심 인물은 작곡가 출신의 데이스 리치였다. 그는 마그 리치의 미혼녀였다. 1993년 빌 클린턴 재선운동과 힐러리 클린턴의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 그녀는 1300만 달러의 후원금을 제공했다. 그리고 “빌 클린턴 도서관”건설 항목에도 450만 달러를 기부했다.

당시 앨런 스펙터 상원 의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기술적으로 탄핵이 가능한 상태였다. 만약 그가 탄핵을 받을 경우 퇴임 후 향수 받는 연봉과 경호비용 등 각종 대우가 중단될 것이다.”

뜻하지 않은 탄핵 위기로 빌 클린턴은 퇴임 후 심각한 고독에 시달렸다. 부인 힐러리와 딸 첼시가 없는 호화주택에서 오로지 애견 보디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지난 8년간 굳게 의지했던 측근들도 탄핵 위기로 등을 돌렸다. 주밀하게 작성했던 노후 계획도 이미 엉망진창으로 되였다.

빌 클린턴은 퇴임 후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탁월한 연설가로 호평받고 싶었다. 만인이 주목하는 회고록도 집필하고 싶었다. 정치가의 존엄을 지켜주는 각종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가하고 싶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탄핵 위기로 “세계 일주 강연 계획”이 오뉴월의 된서리를 맞았다. 오매불망 바랐던 “회고록”집필도 시나브로 지필묵을 들지 못했다. 그는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인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를 순방하며 강연을 추진했다. 그리고 강연 수입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러나 퇴임 후의 빌 클린턴에게 또 한 번 섬뜩한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의 제1 탕녀” 모니카 르윈스키가 어느 날 갑자기 TV에 등장했다. 27세의 금발 미녀 르윈스키는 인턴사원(实习生) 시절에 빌 클린턴과 부정당한 섹스 스캔들 풍파를 일으켜 백악관에서 쫓겨났다. 그 후 뉴욕의 맨해튼에서 브랜드 가방점을 운영했다. 어느 날 TV에서 그녀는 엉뚱한 청원을 하였다.

“빌 클린턴의 정액이 묻은 청색 드레스를 돌려달라.”
그녀의 청원에 따르면 특별검사관이 사건 수사를 종료한 후 증거물로 제출했던 청색 드레스를 여태껏 돌려주지 않았다. 당시 그녀가 청색 드레스를 경매할 경우 적어도 50만 달러 이상의 경매가를 돌파했다.

빌 클린턴은 대문을 굳게 닫고 두문불출했다. 쓸쓸하고 고독하고 지루한 생활이 신물 나도록 지겨웠다. 크리스마스 휴가철을 맞아 그는 부부동반으로 특별비행기를 전세 내여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 뉴욕의 저택에서 장장 2년간 주야장천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2003년. 빌 클린턴 회고록 “My Live”(나의 생활) 영문본이 드디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2004년 역림 출판사(译林出版社)에서 중역본(中译版) “我的生活”를 출간했다. 이 책은 무려 1,020페이지에 87만 자의 방대한 분량의 회고록이었다.

1946년 8월 19일, 빌 클린턴은 가난한 아칸소주의 시골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생모는 호사 출신이었고 23세의 나 젊은 과부였다. 생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퇴역군인이었다. 빌 클린턴이 출생하기 3개월 전에 의외의 교통사고로 불행히 목숨을 잃었다.

유년 시절에 빌 클린턴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외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했다. 모래먼지가 휘날리는 시골에서 그는 유일한 백인으로 흑인들과 어울려 뛰놀았다. 생모는 로 걸 클린턴과 재혼했다. 계부는 소문난 술주정뱅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빌 클린턴과 트집을 잡고 충돌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은 소년 시절부터 학업에서 남다른 총명을 과시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그는 마침내 가난한 아칸소주를 벗어나 명문 대학인 예일대학에서 법학과를 전공했다. 그 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했다.

1979년 빌 클린턴은 아칸소주의 주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32세의 빌 클린턴은 미국 역사상 가장 나 젊은 주장으로 주목받았다. 그 후 1992년에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을 물리치고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6년에는 재선에 성공해 8년간 백악관의 주인으로 되였다.

빌 클린턴은 “My Live”(나의 생활)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나는 지난 8년간 대통령 직무 수행의 유일한 기준을 미국인의 생활 변화에 기탁했다. 지난 8년간 몇백만의 미국인이 새로운 일터를 찾았는가? 몇백만이 새로운 주택으로 이주했는가? 몇백만의 어린이가 의료보험을 받을 수 있었는가? 몇백만의 미국인이 사회복지의 구제를 벗어나 새로운 일터를 선택했는가? 몇백만의 미국인이 성공 스토리를 말할 수 있었는가?”

“나는 일찍 <어떻게 자신의 시간과 생활을 공제할 수 있는가?”라는 책을 구입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앞으로 반드시 좋은 사람으로 되겠다고 맹세했다. 좋은 안해를 만나서 훌륭한 아이 몇 명을 키우고 싶었다. 좋은 친구를 사귀고 성공한 정치가로 되고 싶었다. 세상의 이목을 끄는 좋은 책을 집필하고 싶었다.

좋은 사람으로 되는 것. 이는 나의 평생의 염원이였다. 미국은 나에게 너무나도 많은 충만된 생활을 주었다. 나는 머리 숙여 미국에 감사드린다.”

2001년 여름. 나는 TV에서 제43대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가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어느 날 백악관에서 있은 브리핑에서 조지 워커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수입품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수입품은 미국 밖에서 들어온다.”
“나는 미국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바꿀 수 없는 시대적 대세를 믿는다. 그러나 지금 이 대세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은 분명히 앞뒤가 맞지 않는 괴상한 론리를 역설했다. 기자들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일거에 요란한 박수를 터뜨렸다. 부시 대통령은 부득불 연설을 중단했다. 그는 텍사스주의 특유한 지방 사투리를 구사했다. 연설 도중에 지극히 단순한 어법도 종종 틀리게 사용했다. 결국 “목 윗부분이 단순한 사람”이란 혹평을 받았다.

어느 민간단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IQ는 180점을 넘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총명한 대통령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IQ는 겨우 90점에 미쳤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단순한 미국인으로 선정되었다."

“단순한 미국인”의 병집은 국제무대에서도 스스로 얼굴에 먹칠을 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유럽 방문 시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브리핑을 가졌다. 어느 기자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근데 부시 대통령은 미처 질문사항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계면쩍은 웃음을 흘렸다. “내 나이가 55세를 넘기니 기억력이 전처럼 따라주지 않는다.”라고 변명했다. 당시 70세가 넘은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대통령은 대뜸 언짢은 기색을 지었다.

이날 NBC 방송사의 기자 데이비드 그레고리는 영어로 시라크대통령에게 유럽의 반미 감정에 대해 질문했다. 연후 똑같은 질문을 프랑스어로 다시 되풀이했다. 시라크 대통령이 말문을 열기 전에 뜻밖에 부시 대통령이 앞질러 대답했다.
“그 친구 고작 프랑스 단어 네 개를 외우고 국제 인물 행세를 하네.”
일순간 브리핑의 분위기가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분통이 터진 그레고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프랑스어로 질문 공세를 가했다.
“그 친구 참 인상적이다. 나도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말했다. 당시 유럽의 언론계는 “무엇이 단순한 미국인의 외교적인 촌티인지를 알게 되였다.”라고 비꼬았다.

사실상 부시 대통령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였다. 할아버지 “Pres Cot Bush”는 코네티켓주의 참의원이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수여받은 정치 엘리트였다. 부친 조지 부시는 제4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역시 예일대학을 졸업한 정치 엘리트였다.

그러나 조지 워커 부시는 천성이 인텔리 기질을 갖지 못했다. 그는 예일대학시절에 학업에는 별다른 흥취가 없었다. 날마다 술을 마시고 잠자는 일과로 예일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예일대학의 어느 일본인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조지 워커 부시는 나이트클럽의 훌륭한 리더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백악관의 훌륭한 주인과는 별로 인연이 없다.”

2000년 여름. 제43대 대통령 대선 당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는 대학가에서 60%의 지지율을 따냈다. 그러나 공화당의 조지 워커 부시 후보는 겨우 6%의 지지율을 얻었다. 인텔리 출신의 앨 고어는 류창한 영어를 구사해 지성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무식한 텍사스 토배기 출신인 조지 워커 부시는 “단순한 미국인”으로 비난 받았다.

하지만 “나이트클럽의 훌륭한 리더”였던 조지 워커 부시는 친구를 사귀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소지했다.
“거짓 없는 솔직한 친구였다.”
“믿음직한 이웃집 아저씨였다.”
“언제나 부담 없이 대하는 다정한 술친구였다.”
대중들은 도리여 조지 워커 부시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플로리다주의 70여 세 할머니는 텔레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앨 고어 후보한테서 절대로 중고차를 사지 않겠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청산유수같이 주워섬긴다.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조지 워커 부시 후보는 볼수록 차 정비소의 수더분한 아저씨 같다. 그한테서 중고차를 사면 절대로 속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지 워커 부시 후보에게 찬성 표를 던진다.”

2001년 여름 “9.11테러”가 미국을 강타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TV에 등장해 강경한 의지를 선보였다.
“어디 덤빌 테면 덤벼보라. 살았든 죽었든 상관없이 반드시 빈 라덴(本拉登)을 잡고 말겠다.”
당시 “뉴욕 타임스”지는 이렇게 혹평했다.
“흡사 갱단 조직의 두목이 내뱉은 살기등등한 망언 같다.”

그러나 언론의 비난과는 상관없이 부시 대통령은 신속하게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점퍼에 청바지 차림으로 “9.11테러”현장에 나타났다.
“지금 미국의 사명은 정의를 위협하는 사악한 테러를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대중들의 지지율은 일순간 80%를 돌파했다.

“9.11테러”이후 세상은 선과 악이 대립한 양분된 세계였다. 정의와 사악이 대립한 양분된 세계였다. 책을 별로 읽지 않은 부시 대통령도 미국의 적이 누군지를 쉽사리 판단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향해 급급히 “반 테러 전쟁”을 발동했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폭발했다. 부시 대통령은 단시일 내에 싸다무정권을 뒤엎었다. 그는 “미국의 영웅”으로 각광받았다. 2004년.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승리해 또 한 번 백악관의 주인으로 되였다. 4년 전 그는 “단순한 미국인”으로 타매 당했다. 그러나 4년 후 이라크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어 “미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참으로 세상의 풍운 변화는 종잡기 어렵다.

“9.11테러”가 발생한 후 어느 날 중문본 “세계일보”는 이런 문장을 등재했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반성”(关于反智性主义的反思) 저자는 북경대학의 유금질(刘金质)교수였다. 

문장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유럽의 귀족 전통이 없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민주화 정치문화를 형성했다. 미국은 철저하게 전제정치를 부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와 지식에 대한 전제주의도 견결히 반대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은 지식인이 공공사업의 결책에서 발휘하는 작용이 가장 미미한 국가로 전락했다. 이 같은 반지성주의 전통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미국은 여전히 그릇된 편견을 소지하고 있다. 일본은 고학점(高学分)을 따낸 엘리트가 지나치게 사회를 통제해 활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일본은 <죽어가는 일본>으로 변모했다.
유럽은 <복잡한 머리>를 소지한 엘리트가 사회복지에 지나친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오늘의 유럽은 경쟁력을 상실한 <복지국가>로 전락했다. 그러나 단순한 머리를 소지한 미국은 견결히 <반지성주의>전통을 계승했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은 활기찬 경쟁력을 과시한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다.”

1789년 미국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민투표 총선 제도를 실행했다. 조지 워싱턴이 총선제에 의해 제1대 미국연방합중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국의 민주화 정치문화의 기틀은 바로 국민투표라는 총선 제도였다. 아메리카합중국이 철저한 연방공화국으로 태어난 것도 국민투표라는 총선 제도가 드팀없이 지켜줬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지극히 세속적인 정치가였다. 재임 기간이나 퇴임 후에도 여전히 세속의 타매와 손가락질을 당했다.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이 그러했다. “흑인 노예 해방 선언”을 반포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러했다. “부유한 미국”을 위해 분투했던 빌 클린턴도 역시 그러했다.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어 “미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던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도 역시 그러했다. 

이는 아메리카합중국의 정치가들이 피할 수 없는 평생의 "희로애락"이었다.

 

조광연(曹光延)

길림성 연길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변텔레비전방송국에서 기자, 편집으로 근무.
1999년~2005년 미국에 체류. 
소설, 수필, 기행문, 실화문학 다수 출간.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