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김성철선생의 근작기행수필 3편과 나눈 대화

기행 수필이란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표현한 수필이라고 한국 어학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우리한테는 다소 생소한 제기법일지 몰라도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이 기행 수필을 읽어왔고 써왔었다. 다만 기행 수필이라고 버젓이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오늘 우리는 김성철 선생의 기행 수필 3편을 펼쳐놓고 산천경개를 둘러보면서 선생이 느낀 감수에 같이 젖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독서를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고 한다면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누군가는 말을 했었다. 서서 하는 독서라는 제기법이 재미있다.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고 해도 통할 것이다.

여행자들은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작가들은 좋은 소재를 찾기 위해 여행에 나선다. 그렇다면 작가 신분의 여행하자는 과연 어떠할까. 새로운 것도 찾고 겸손하게 사양하여 좋은 소재도 찾고 꿩 먹고 알 먹기를 하는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도 국내 명승지나 해외를 다녀오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내 고향 주변의 산천경개를 둘러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여행길에서 보고 듣고 느낀 감수를 문학적 사고를 통해 펼쳐보인다는 데서는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기행수필 <중회사, 가을로 익어가다>는 중회사(中会寺)를 찾아가는 려정을 쓰고 있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햇빛 가득한 화창한 날이다. 그것도 가을의 쾌청한 하루다. 산을 찾아가기 참 좋은 날씨이다. 저자는 가을이면 본래 개울 물량이 적어져야 자연스러운데 간밤 내린 눈이 녹아내리면서 물의 양이 불어났다고 하면서 그런 물소리를 <괜히 호들갑스럽다>고 표현하고 있다. 세심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해야겠다.

그리고 우리는 저자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눈이 닿는 대로 경관을 구경하게 된다. 활엽수들은 벌써 나뭇잎이 태반이나 떨어졌고 우듬지 쪽 이파리 몇 점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는 풍경이다. 게다가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머루 덩굴이 다가온다. <수분이 다 빠져 쭈그러진 머루 송이가 가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공중에서 대롱거리는> 모습이다. 저자의 관찰력은 얼마나 섬세하고 알찬 것인가. 그야말로 한번 발걸음을 옮겨서 절대 헛걸음하지 않는 그런 신통한 기행인 셈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냥 산수를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고전을 인용해서 풍경을 더욱 생동하게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 인용을 여기 잠깐 다시 인용해보기로 한다.

절은 멀고 승려는 적은데 수림 속 풀숲길 깊기만 하여라/돌계단이 벼랑에 감기고 대전이 구름 우에 떴구나/빼곡한 나무가지 개울을 만나는데 구석진 바위는 해를 봐도 어둑진다/벼슬 따위 소탈이 내려놓고 좌선하며 마음 다스리리(远寺山僧少, 丛林草径深。悬崖盘石磴,古殿度云岑。枝密回溪合,岩幽向日阴。欲将金印解,潇洒定禅心。)

어떤가. 한결 풍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가. 마치 산천경개를 유유히 구경하며 옛시조를 읊조리는 우리의 옛 선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어서 우리는 저자의 철학사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이 기행 수필의 핵이기도 하다. <계절은 부르지 않아도 올 때를 알고 시키지 않아도 갈 때를 안다>는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산자락에 서서 이와 같은 돈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더 깊은 의미까지 견인해낸다. <수행은 출가한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헛된 욕심에 기분이 울적해지고 완숙한 가을의 숲이 그리워지면 어둑한 내심을 비추는 밝은 등잔, 메마른 마음을 적시는 맑은 샘이 되어주는, 바라로 걷는 산행이 아니라 마음으로 걷는 그런 산행을 다시 하고 싶다>고 노래하듯 읊조리고 있다.

이것은 웬만한 경지가 아니다. 수십 년 수행 끝에 득도한 고행 승이 마침내 세상에 던지는 개도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리만치 깊은 철학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산행을 마친 저자는 다시 속세로 돌아와 한 보통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산과 산 사이로 엿보이는 뜬구름 바쁜 걸음 잡아놓고 가을주 한잔 하고 싶어진다.>는 결말이 더없이 친근하게 다가오면서 이웃집 아저씨를 불러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게 만든다.

결국 이 기행 수필은 사찰을 찾아 떠나는 과정을 쓰면서 가을의 경치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절대 부족하지 않으며 그런 과정을 밑그림으로 깔면서 나중에 클라이맥스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고 그로부터 인생의 의미를 반추해 보이고 있다.

기행 수필 <외길로 톺는 서악, 선풍도골 완연해라>에서는 중국의 5알 중의 하나인 서악 그 화산 등반 과정을 스케치하고 있다.

우선 김성철선생의 언어구사력에 대해서 한 마디 해야겠다. 요즘 우리 조선족문단을 일별하면 언어 공부를 게을리하면서 얄팍한 감정을 섞어 얍삽한 수필들을 펑펑 쏟아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글은 그것이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언어라는 벽돌장으로 쌓아 올리는 금자탑이다. 그러므로 언어 공부를 하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그 굉장히 제한된 언어로만 멋진 금자탑을 쌓아 올리려면 따분하고 단조롭고 물린 글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철선생의 언어구사력은 참으로 좋은 보기가 된다 하겠다. 한 구절만 빌려다 같이 들여다보자.

급급하던 나의 귀가 행보는 경유지인 서안 함양(咸阳) 공항에서 일단 멈추었다.
대체 얼마나 매혹적인 곳이길래 고스란한 직행을 꺾으면서까지 굳이 그곳을 찾아야만 하는 걸까. 그 바람에 지연되는 일정까지 감수하고 항공편까지 변경해가면서 말이다. 더구나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2월 중턱이 아닌가.

수필은 이렇게 서두를 떼고 있다. 여기서 <고스란한 직행>이라는 표현만 봐도 그가 얼마나 언어 공부에 열심이고 우리말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현들은 기행 수필의 처처에서 때론 차분한 색조로, 때론 엷은 향으로, 때론 가녀린 몸가짐으로 독자들의 사망 막을 어지간히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것은 일일이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아도 독자들 스스로 그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약한다.

다시 수필로 돌아와 보자. 중국에는 5대 명산을 5억으로 일컫고 있다. 동악은 산동성의 태산, 남악은 호남성의 형산, 북악은 산서성의 항산, 서악은 섬서성의 화산, 중악이 하남성의 숭산이다. 평소 우리는 형산과 항산은 언급을 잘 하지 않고 숭산은 소림사가 있어 유명하고 태산은 워낙 세상만방에 이름난 명산이라서 해마다 관광객 수만 연인 수로 5천만 명을 훨씬 웃도는 상황이다. 그런데 가장 험악하기로 이름난 화산은 태산만치 알려지지 않았고 예전에 영화 <화산을 지혜롭게 탈취한다>를 보면서 화산의 모습에 다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 화산을 조선족 등산가이자 수필가인 김성철 선생이 등반하게 된 것이다.

여행에서는 일행이 중요하다. 사방팔방에서 모여와 서로 일면식도 없지만 같은 산을 찾아왔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은 일행이 되어 기꺼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것이다.

독자들은 저자가 이끄는 대로 그의 등반코스를 따라 화산 등반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저자는 등산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고 쉬운 케이블카 대신 머리로 화산의 구석구석을 밟아보련다는 말하자면 그가 수필에서 밝혔듯이 <왠지 두 발로 톺아야만 서악이라는 이름에 죄송하지 않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우리는 글줄을 따라 화산 등반을 하게 된 것이다.

명산이 괜히 명산이겠는가. 발길이 닿는 곳마다 명소이고 하다못해 풀 한 포기, 돌 한계를 보아도 그것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닌 명산의 명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게다가 저자의 멋진 표현이 곁들여져서 구수한 토장이 맛깔스러운 된장찌개로 다시 살아난 기분마저 든다.

그리고 저자는 코스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전혀 시끄러워하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어서 우리는 편히 집에 앉아서 글로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특히 등산하기도 숨이 벅찰 노릇인데 이 코스로 가면 어떻고 저 코스로 가면 어떻다는 둥 여기로 빠져나가면 어디에 이를 수 있고 길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등등 하여튼 웬만한 가이드 찜쪄먹을 정도로 상세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게다가 평소 독서를 많이 해둔 덕분에 적재적소에 명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곁들이는가 하면 동행하는 사람들의 거동마저도 독자들이 궁금하지 않도록 한두 마디씩 거들어주는 친절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는 일부 작가들이 서두에 인물을 등장시켜놓고 나중에 어디에 팽개쳤는지 본인조차 몰라보라는 경우와 사뭇 대조적이다.

그리고 글은 철저히 장소의 이동에 따라 순서에 따라 흘러갔고 숨 가쁜 산행길임에도 저자의 유려 미려한 글솜씨에 편승해 늘 찬 등산길을 울랄라 즐거운 휘파람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나중에 케이블카로 내려오며 바라본 화산의 모습도 잊지 않고 소개해줌으로써 화산의 참모습에 대해 한층 더 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가히 기행 수필의 범문이라 할 만하다.

기행 수필 <산행 사계도>는 상기 2편의 기행 수필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 이번 기행 수필에서 다룬 내용은 천하의 명산대천이 아니고 저자의 생활반경 내에 있는 천산(千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천산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나누어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행 수필의 또 다른 묘미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같은 산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서 등반하면서 그 사계절에 따른 산의 모습을 그려 보이는 것은 기행 수필에서만 가능한 일이 되겠다. 시에서 이처럼 쓰려면 아마 시초로 써야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산행 사계도>는 그리하여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김성철선생의 필력이 돋을새김한 것처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글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사계절의 천산은 봄에는 얼었던 계절이 녹으면서 시린 기운이 바야흐로 물러가는 시기의 천산이요 여름에는 산속이라 도심의 뜨거운 태양처럼 열기가 심하지도 않고 잦은 비 때문에 촉촉해진 오솔길이 정답게만 느껴지는 천산이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아름다워질 대로 아름다워져 성숙미를 자랑하는 여자인 같은 천산이요 겨울에는 싸락눈으로 더없이 쾌적한 공기를 자랑하는 말쑥한 천산이다.

천산의 사계절을 둘러보면서 인생의 사계절을 연상하고 다시 봄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아직 밟아보지 못한 산길이 많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저자의 붓끝에서 우리는 진정한 산행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산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산사랑을 잘 대변해주는 구절이 있어 잠깐 빌려온다.

숨을 죽이고 산의 숨소리를 듣는 시간, 눈을 감고서 진실한 산을 보는 그 시간, 그 어느 때보다 그러한 시간이 좋다. 
사계절이 있는 한 나의 산행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산행을 나선 나의 발길에 사계절은 하나둘 계속 바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산악인의 자세요. 산을 사랑하는 사람의 몸가짐이며 <산이 거기 있어 산에 가고 물이 거기 있어 물에 간다>는 글을 사랑하는 산행의 마음인 것이다.

이상 우리는 김성철선생의 기행 수필 3편을 같이 보았다. 요컨대 그의 기행 수필들을 보면 철저하게 기행 수필의 요소들을 잘 지켜주고 있으며 광범한 독서에 따른 시문이나 경관 관련 전설과 이야기들을 적재적소에 능수능란하게 인용해서 글의 품위를 높이고 있으며 뼈여 난 언어구사력에 따른 수려한 문장의 흐름으로 독자들의 호흡을 조절해주면서 늘 찬 문장을 가쁜 숨이 필요 없이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있다.

우리 문단에 다소 생소한 기행 수필이라는 타이틀을 고집하는 산악인이자 등산가이자 수필가인 김성철선생의 또 다른 기행 수필들을 다시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2023년 정월
할빈에서

한영남 시인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