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료녕성 수필 문학상 대상 수상작

거듭되는 천재지화의 강타 속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촉촉이 내리는 봄비가 분주한 아침의 창을 토닥토닥 두드린다.   

나는 부랴부랴 정원으로 뛰어나가 방금 손빨래해서 널어놓은 애들의 양말이며 속옷가지들을 걷어 들여놓고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호젓한 방안에 홀로 기대는 자신에게 따끈한 차 한 잔을 장려한다.

언뜻 TV 스크린에 어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앞치마 두른 내 모습에 뿌듯해지는 마음을 차 한잔으로 적셔주며 여유로움을 찾아가는 나의 아침이다.

어느새 밑굽을 드러낸 찻잔을 들고 막 일어서려는데 테이블 우에 놓인 휴대폰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얼른 들여다보니 웬 낯선 미국 번호인지라 한참 망설이다 받는다.  " 김사장, 잘 있었는가? 나 조사장이여…."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서며 외친다. "어~엉 조사장?! 아니 근데 워디 갔다 인제서야 나타나는 거유! "  

조사장은 나의 무역 생애의 첫 파트너이고 제일 바이야 이기도 하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배려심 깊고 유머 넘치는 충청도 젠틀맨이다.

그는 늘 "혜자 씨, 우린 남자친여..." 하는 스스럼없이 소탈하고 미더운 오라버니 같은 분이시다. 아들애 결혼식에 부부 동반으로 다녀간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끊겼던 십수 년 만에 이어지는 연락이다.  그렇게 시작된 국제 전화는 장장 두 시간을 넘기며 이어졌다. 통화를 끝낼 무렵 그는 " 혜자 씨 치맛자락에 찬 바람 씽씽 불더니 세월이 약인가벼? 이젠 아주 부드러워 졌구먼 ... " 하며 예외 없이 유머러스를 던진다. 내가 냉큼 예전에 하던 식대로 " 됐네요, 이 사람아 하하하" 하고 받아 넘겼더니 "옳거니 인제야 김김혜자답구먼그려, 허허허..." 태평양 피안에서 무무전 선의전파를 타고 전해오는 포복절도 소리는 나를 세월의 저편에 두두고 온내 삶에서 지울 수 없는 날들의 기억들을 불러들이게 한다.    

1993년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한국에 출장갔을 때 있은 일이다. 

그날도 조사장님 회사에 들려 오전 업무 상담을 끝낸 후 사무실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오는 길에 5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먹음직스러운 딸기를 예쁘게 진열해놓고 팔고 있었다. 그때 만해도 국내에는 그 계절에 딸기를 보기 힘들 때라  다가가서 "아저씨 딸기 얼마예요?"라고 물었더니 6,000원에 600그램(한국에서는 600그램이 한근)란다. 나는 "2만 원 어치만 주세요" 하며 지갑에서 세종대왕이 찍혀있는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건넷다. 그는지폐를를 받아 챙기고 나서 하얀스테인리스스 주걱으로 진열된된  밑창의 딸기를 봉투에에 푹푹 퍼담는다. 잠깐 지켜보던 나는 "에이, 아저씨! 그 먹을 걸 줘야지요~ 다 물커진걸 주면 어떻게요?" 하며 시비조로 쏘아 붙혔다. 그랬더니 그는 대뜸 주걱을 홱 내동댕이 치고는 내게 삿대질을 하며 "이~ 아줌마가 어디서!"  순간 "어디서" 하는 그 한마디 말에 우리 교포들이 일부 한국인들의 편견과 차별 시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뇌리를 스치면서 예리한 비수가 되여 내 정수리에 내리 꽃힌다.  나는 왈칵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을 억제할 수 없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충동적으로 그 손에 들린 딸기 봉지를 와락 나꾸채서 딸기 더미 우에 냅다 패대기치면서 "뭐, 어디서? 그래 중국에서 왔다 왜 !" 하고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순식간에 예쁘게 진열되어 있던 딸기 무지가 "펑" 하고 무너진다. 화가 돋힌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욕설을  퍼부으며 나를 향해 뛰쳐나온다. 당장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로…. 다행히 옆에 서 있던 조사장님 일행이 달려들어 말렸기에 치열한 "전쟁"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라고 그날의 이야기가 내 이름 석 자에 그토록 지울 수 없는 낙으로 찍혀서 온 한국 땅에 굴러다닐 줄이야.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업무 상담차 인천에서 "훼리호"를 타고 위해 부두에 도착한 한국 손님들을 픽업하여 "위해위" 호텔로 안내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조 사장님께서 같이 온 일행에게 "김사장, 인사해 김혜자 씨." 하며 나의 어깨를 짚는다. 그런데 그 김사장이 대뜸 몹시 놀란 기색으로 나를 아래 우로 훑어보며 뒷걸음질을 친다. 곁에 섰던 나도 덩달아 흠칫 놀라며 "아니 왜 그러세요?" 했더니 "김혜자 씨? 아니 나는 김혜자 씨가 억대우 같은 여자인 줄 알았잖아요!" 하며 두 주먹을 얼굴에 갖다 대면서 험상궂은 시늉을 한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천정을 바란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날 거래처 윤 사장님이 부산에서 국제 전화를 걸어왔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옆에서 "무신놈우 국제전화를 그래 오래하노, 여자 목소리구 만은…." 하는  사모님의 나무람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곧바로 "시끄럽다, 저~어 여자느 여자도 아이다 고마!" 하는 윤사장님의 말소리가 나의 귀청을 두드린다. 

평소에도 늘 들어오는 소리이지만 그날만은 왠지 그에게 투영된 자신의 정체를 새삼 감지하며 참담한 충격으로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지천명을 지나 불혹의 나이에서 이순에 이르기까지 정부 기관을 떠나 대외무역의 전방에서, 산업의 가장 험하고 거친 주조(铸造)공장이란 합작기업을 설립, 경영하기까지 긴 세월을 청 일색 남자들과 부딪혀야 하는 삶의 현장에서 나는 자신이 마치 버들치 속에 엉거주춤 끼어 있는 잉어 새끼 같이 느껴졌다. 

하여 "여자로 보이지 말자"라는  나름의 신조를 지니고 같은 말도 퉁명스럽게 내뱉으면서 고슴도치처럼 까칠하고 모난 성격에 오만과 방자함이 고질화가 되어 여자라는 이름을 좀 먹는 줄도 모르고 천방지축 달려온 그 날들이 결국 이토록 남루한 궤적의 한 획을 그어 놓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돌아보니 음영 짙은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나의 인생은 참 많은 후회와 아쉬움을 남긴 여정이었다.  은연중 여자의 운명을 거슬러 분별없이 살아온 자신이 너무나도 측은하게 느껴진다.   

오랜 고심 끝에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심의 회한을 어루만지며 내 안에 박혀있는 관습의 틀을 벗어던지고 작은 "영역", 가정으로부터 시작하여 환골탈태는 아니더라도 여자다운 여자로 거듭나리라는 자각에 이르렀다.                  

때마침 일본에서 돌아온 아들애에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이쁜 며느릿감을 알선하여 바닷가에 널찍한 집을 마련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치렀다.    

두 아이를 해외로 신혼여행을 다녀온뒤 한동안 둘만의 오붓한 신혼을 즐기라는 배려심으로 나도 3개월 남짓할 때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토록 정성 들여 꾸며놓은 집 안 구석구석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고 무엇보다 내가 무척이나 아끼는 2층 계단 입구에 예쁘게 피어있던 커다란 꽃나무가 바싹 말라서 앙상한 가지만 뻗쳐 들고 서 있지 않은가? 

아무리 도우미 아줌마가 한동안 휴가를 갔다고 해도 그렇지! 가끔 물만 주면 될 것을...게을러 빠진 아들애도 미웠지만 좋은 집에서 저를 맞아들여 손 군들과 함께 잘 살아 보겠다던 알량한 나의 꿈을 여지없이 짓뭉개듯, 이 가정에 대한 며늘애의 무관심이 무참한 배신감으로 가슴속 한가득 갈마든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가까스로 삼키며 짐도 풀지 않은 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 여기저기 쌓인 먼지를 털어내면서 풍전등화처럼 휘청이는 마음을 다잡는다. 

애당초 "너만은 절대로 자식과 함께 살기 어려울 거다"라는 지인들의 우려 섞인 충고를 뒤로 한 채 "내 기어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있는 선입견을 깨버리고 변신의 본때를 보여 주고야 말리라는 아집으로 선택한 이 도전이 이제 겨우 시작인데 고작 요까짓 일에 벌써 묵은 병이 도지다니! "나는 자신을 스스로 호되게 꾸짖으며 재 다시 새 출발의 비장한 발자국을 내디딘다.

비워진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고 한다. 일찍이 엄마가 한국에 가 있어 외갓집에 얹혀 있는 며늘애가 안쓰러워 결혼 전 부터 2년 남짓이 집에 데려다가 공부도 시켜서 직장에 보내며 함께 살아왔기에 이젠 친딸처럼 정이 들 대로 들어 미움도 잠시 마음을 열고 포근히 품어 안는다. 그 옛날 아들에게 못다 준 모성애까지 보상하는 마음의 텃밭을 일구어 가기에 착수하였다.

일단 가사 도우미를 물리고 일찍 출근하는 며늘애를 위해 매일 아침 요리 수첩을 번져가며 밥상을 차린다. 늦게 일어나 아침을 못 먹고 가는 날을 대비하여 영양 만점 물만두를 빚어 두었다가 삶아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동안 한 개라도 더 입에 넣어 먹여서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직장에서 입는 가운도 언제나 깨끗하게 씻어 다려서 반듯하게 걸어놓군 하면서 팔자에 없는 딸을 하나 키우는 엄마가 되어간다.

해마다 구정이 돌아오면 나는 한국에 거주하는 사돈댁 내외분을 초대하여 근 15일간 우리 집에서 함께 보낸다. 그때마다 나는 안사돈과 며늘애의 주방 출입을 일절 금지 시킨다. 평생을 식당의 주방일에 지친 안사돈이 잠시라도 편히 쉬게 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한국 간 엄마를 그리며 외가에서 자란 며늘애가 잠시라도 엄마와 함께 모녀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고픈 배려심에서 이다. 

칭찬에는 고래도 춤을 춘다더니만 섣달 그믐날 저녁, 두 가족이 오손도손 "TV" 앞에 모여앉아 물만두를 빚을 때면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로 셋이서 싸는 만두피를 혼자서 거뜬히 감당해 내는 내 솜씨에 "아니 사돈, 철물 녹이던 그 손으로 어떻게…." 하며 사돈 내외가 연신 놀란 표정을 지을 때나 설날 아침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아이들의 큰 절을 받을 때 "요즘 세상에 한국에서도 사라져 가는 예의를 이렇게 지키고 계시니 참 존경스럽다"라고 빙그레 웃으시는 한국분이신 바깥사돈의 말씀에 나의 마음은 금세 둥둥 뜨며 행복감으로 요동친다. 

"우리가 행복을 발견하는 유일한 장소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고한 어느 명인의 격언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어느덧 조손 삼대가 한 지붕 아래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살아 온지도 어언 열여섯 번째 돌이다.

식구가 밥상 머리에 둘러앉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맛에 엄지척을 추켜들 때나, 손녀의 가정교사인 나의 구닥다리 영어 발음에 조손이 서로 목을 그러안고 집안이 떠나 갈듯이 웃음보를 터뜨릴 때, 나는 세월의 변천 속에 어느덧 유연해진 자신이 제법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충만감에 젖어 든다.

근년에 드러나는 주위의 많은 이들에게서 "그 뾰족하던 모가 많이 둥글어 지고, 아주 부드러워 졌다."라는 "칭찬"을 심심찮게 듣는다.   

이는 그야말로 십수 년의 드팀 없는 성찰과 수련을 거친 나에 대한 긍정과 편찬으로 내 생의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가장 빛나는 훈장이 아닐 수가 없다.    

어느새 심산유곡으로 접어든 인생의 끝자락에서 나는 예쁜 영혼의 꽃 한 아름 안고 모성애 넘치는 엄마로,  완숙미 풍기는 기품있는 여자로 나만의 황혼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다.    

그리하여 언제가 천국의 입장권 받아드는 날, 내 자랑스럽게 말하리라. "이제 나는 여자다운 여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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