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이 한창이던 그날 저녁. 
밤 하늘에 걸린 둥근달이 유달리 마음을 쓸쓸하게 흔들었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그리움의 순간들 
다시는 복원되지 않는 욕망의 시간들...
가지가지 정제되지 않은 추억과 한많은 사연들이 청풍명월의 교교한 월색에 오버랩되며 곧 쓰나미처럼 밀려오려고 하는데...

그때, 운명적인 핸드폰 벨이 울렸다.
“전선생님이시죠?”
젊은 여인의 가늘고 청아한 목소리가 고막을 달콤하게 흔들었다. 
“네에, 제가 맞습니다만?”
“저예요...”
다시 들려오는 녀인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의 임자가 선명한 색채로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갑자기 산소가 희박해지고 가슴이 뻑뻑하게 조여들며 온몸이 저릿저릿 녹아내렸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버벅거리기만 했다. 

그녀였다!

전정환 작가 
전정환 작가 

2. 
분명 무슨 일이 벅차게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봄바람 춘풍은 자기가 가던 노선을 그냥 가지 않고 굳이 이 늙은 아저씨의 메마른 품을 파고들려고 하는 것 일까! 

 

3.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딱 10년 전의 일이다.
심양에서 선발된 우리 일행 여덟 명은 단동의 한 호텔에 묵으며 어느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다. 

남자는 나 혼자였고 나머지는 칠선녀! 이 정도로도 기분이 둥둥 뜨고 헛바람이 실실 차올랐는데 그보다도 더 내 마음을 즐겁게 휘젓는 일이 호텔에 도착해서 행장을 풀고 나서 발생하였다.

칠선녀중 한 명이 이십대 후반 미모의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그 말을 듣고 내가 또 한번 입이 쩍 벌어져서 그 의미를 해독하느라고 한창 허둥거리고 있는데 단동의 파트너인 천서방이 먼발치에서 나를 부르며 여기 또 ‘꼬리빵즈 한사람이 더 있군요’ 하며 히물히물 웃었다. 그 아저씨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녀인이 서 있었다. 청바지 차림을 하고 있는 늘씬한 체격이 돋보였고 세련되면서도 품격 있는 도시미가 바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조선족의 이 젊은 청춘과 이 한정된 공간에서 3개월 간 일을 같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실물로 확인하고 나서 내가 다시 한번 흥분이 끓어올랐고 사기가 충만해났다는 얘기는 생략하겠다. 

그때 그녀는 스물일곱 살 난 젊은 청춘이었고 나는 반백을 넘어선 시들어 가는 늙은 아저씨였다.

단지 조선족이라는 이유로 우리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것은 퍼그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주변에서도 아버지와 딸 같은 두 사람의 어울림을 확대해석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우리 둘을 친밀하게 어울려 정담을 나누는 남자와 여자로 봐주지 않았다. 

사실 나 역시 추호도 그녀를 여자로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조선족의 피가 흐르는 젊고 싱싱한 미녀와 말을 섞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었던 같다.

 

4.
하지만 세상일은 규칙대로 원인과 결과가 딱딱 맞물려서 일사불란하게 단순명료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어떤 인과의 논리를 떠나 그저 일어나는 것이다. 만남과 함께 느낌이 일어난다. 만남이 있으면 느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어린 양처럼 착하고 선량한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말갛게 나를 바라보는 얼룩 한 점 없는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오르며 맑게 반짝일 때마다 나의 내면에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서서히 괴여 올랐다.

하얗고 뽀얀 얼굴에 아기 같은 웃음이 피어오를 때면, 티끌만큼도 오염되지 않은 것 같은, 사람 죽이는 그 청초한 미소가 나타나면 격렬한 떨림과 함께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급격한 감정에 휩싸이곤 하였다.

그건 질정 없이 촐싹이는 사춘기의 격정 같기도 하였고 또 무슨 안타깝고도 절박한 그리움 같기도 하였다.

그 정체불명의 아찔한 매력 앞에서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원리와 절차와 규범들이 순식간에 증발하여 버리는 것 같았다. 
내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상식과 규범의 구조물들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백일몽의 망상에 사로잡혔다. 

 

5.
나는 그녀 앞에서 남자이고 싶어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단둥에서 약 2~3일간 지났을까 말까 하는 시점에서 그녀가
아직 싱글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리고 나서부터이다.
그 말을 듣는 찰나에 마음속에서 무지개 같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고 
곧 그녀의 마음 심연으로 연결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이다. 
나는 허세가 잔뜩 낀 중학생이 되어 그녀 앞에 등장했다. 어깨에다 힘 딱 주고 각 딱 잡았다.
교양 있는 식자층이 누리는 고상한 취향과 깊고 오묘한 “고급지식”이 나의 삼촌불란지설(三寸不烂之舌)을 타고서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그때 요령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 내 그녀를 자지러지게 웃기거나 쉽게 거역할 수 없는 즐거움 속으로 휘몰아넣기도 하였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그때마다 내가 정밀하게 준비한 가지가지 화젯거리들이 탁상우에 올랐다. 그것들은 체계 정연하기도 했고 눈물겹기도 했고 유머러스하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치명적인 매력을 만들어 가고 싶은 아저씨의 처절한 노력은 날마다 새롭고 강도 높게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를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의 동공에 나를 향한 애틋한 정이 모여들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강물 같은 푸른 추파가 나를 향해 넘실거리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까지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싶었다.

 

6.
어쩌면! 가면을 벗지 않는 나의 참모습이 결정적인 순간에 흉물스러운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을까.

어쩌면! 나는 벌써 어두운 수풀 속에서 몸을 숨기고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던 황야의 외로운 늑대였던 것이었을까. 

아아, 그건 정말 나도 모를 일이다.

 

7.
정말 여자 때문에 다시 한번 가슴이 설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노욕인 줄 알면서도 꽃을 찾는 나비가 되어 사악한 눈빛을 두리번거린 적은 있었지마는 정작 지척으로 성큼 다가온 도화(桃花)의 향기가 이토록 치명적인 줄은 정말 몰랐다. 
세상의 상식적인 이치나 질서 같은 것들이 나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식하게 돌진하고 싶기만 하였다.

하지만 주변이 조용해지고 차분한 호흡이 돌아오자 이런저런 생각들이 막 머리를 뚫고 들어왔다.

반백의 노구, 혼자 살아가는 ‘홀아비’의 삶이 이제는 날마다 마시고 내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는데….

자칫 말도 안 되는 격세의, 망년의 연정에 휘말려 들어 출구도 없는 어둡고 칙칙한 터널에서 허우적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막연한 두려움이 치밀어올랐다. 급기야 내가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비분의 망상에 잠겨 있는 것이냐.
더 빠져들었다가는 뼈다귀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황량한 들판에서 분별없이 미쳐가는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8.
낙엽이 나뒹구는 늙은 나무 아래서 앙상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푸른 초록이 다가올 때까지 끝까지 버텨보려는 아저씨의 배짱과 뚝심은 절대 여기서 끝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단연코 타향에서의 순간의 감정적 허기를 달래기 위한 객기가 아니었다. 영원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고 본질적인 관계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한한 동력을 머금고 있었다.

 

9.
내일 당장 벼락 맞아 죽더라도!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가 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의 그림자로 꽉 들어차 있었고 온 신경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떨리고 설레었고 가슴이 뭉클뭉클 크게 출렁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녀가 식당에 내려오는 시간을 정확하게 측량하고 그 시간대에 “우연히” 나타나곤 하였고 때로는 저잣거리의 허드레 잡놈처럼 그녀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녀가 없는 세상은 이미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되어있었다.
나는 평생 축적해 놓은 ‘기술’들을 총동원하였다.
처절하고 눈물겨운 사랑 행보는 날이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의미 있는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살구씨 같은 눈망울에서는 언제나 고만고만한 빛이 반짝일 뿐 내가 원하는 정보는 감지되지 않았다.
가볍게 살짝 밀고 들어갈 수 있는 틈새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마지막 하루를 앞둔 시점까지 아무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속이 빠질빠질 타들어 갔다. 
나는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날 송별 파티에서 나는 녹초가 되도록 마시고 그녀를 호텔커피숍으로 불러내었다.

 

10. 
“나 너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아!”

이튿날 새벽녘에 깨어나서 생각나는 말은 딱 이 한마디였다. 그 뒤로 필름이 끊기었다. 취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인사불성으로 마취된 상태에서 무슨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하는 우려가 나를 공포 속으로 몰고 갔다.

문득 저세상으로 떠나간 마누라가 생전에 한 말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당신 술 마시면 눈빛이 굉장히 징그러워지는 거 알아요?”

혹여, 청바지에 꽉 쌓여있는 그녀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곡선에 징그러운 나의 시선이 가닿았다면…. 생물학적 관능적 갈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 퇴폐한 눈빛을 그녀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온몸이 오싹했느냐며 소름이 돋아났다. 쥐구멍이라도 찾아들고 싶었다.

그날 자정을 많이 넘긴 시간대이다. 나는 부랴부랴 짐보따리를 챙겼다. 집에 급한 일이 생겨 먼저 떠난다는 쪽지 한 장을 남겨놓고는 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미련 철철 넘치는 짝사랑의 고백을 뒤로 남겨놓고 나는 줄행랑을 놓았다.
 
모든 건 한바탕의 봄꿈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다.

 

11.
그런데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전화로 해후하고 있다.

“이렇게 만났는데 밥이라도 한잔 사시던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사시나무 떨 듯하며 몸을 추스르느라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만들어 내지 못하고 계속 버벅거리기만 하다가 “날 잡고 알려줘요.” 하는 그녀의 말이 다시 야무지게 들려오자 서툴고 어색하게 “호우, 호우”만 연발하다가 말았다.

며칠 후 우리는 심양 샹그리라호텔 중화요리 점에서 만났다.

내가 아직도 10년 전의 그 청초한 모습에서 조금도 퇴색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 취한 듯 바라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눈을 껌뻑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맑은 옥음이 노랫가락처럼 흘러나왔다. 
“저는 아직 혼자 몸이에요. 그리고 전 선생님도 혼자라는 사실을 이미 조사하고 왔어요! 더 이상 도망치려고 하지 말아요.”
“10년 동안 전 선생님밖에 보이지 않아서 참 힘들었어요.”
그녀는 말은 거침없었고 당돌했다. 
10년이 지난 오늘 그녀는 느닷없이 공격 모들도 둔갑하여 내가 꿈에도 그리던 말들을 낭자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렸다.

내가 그처럼 갈망하던 행운이 바로 눈앞에 강림했다. 
멀리 돌고 돌아서 우리는 결국 다시 하늘이 이미 점지해준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뼛속까지 비열했던 나의 음모와 간계가 그녀의 마음을 10년 동안이나 옭아매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마음이 언제 어디서 그 아슬아슬한 중간선을 넘어선 것일까?
그 무서운 격세의 장벽을 그녀는 어떻게 넘어섰을까? 

수많은 일들이 맥락이 잘 닿지 않았고 안개처럼 구름처럼 아리송하고 흐리멍덩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결과만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나는 1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이 거창한 행운을 뒤로 미루어 두며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12.
그날 이후 우리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거의 날마다 만났다. 거리에 나서면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타인의 시선 같은 것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어색해하며 쭈뼛거리면 그녀의 따스한 손이 더욱 조여왔다. 
“청나라 사람 온 줄 알겠네요.” 
이 세상 그 누가 봐도 형평성이 무너진, 균형이 터무니없이 깨어져 있는 이 그림을 그녀만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그림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별로 뜸을 들이지도 않고 곧바로 나를 자기 또래 취급했다. 때로는 아예 손아래 동생이다! 반말을 찍찍 해대기도 하였고 개구쟁이 장난꾸러기 어린 남동생을 타이르듯 하였다. 

재롱이 쉼 없이 모락모락 끓어올랐고 조미료가 조금도 첨가되지 않은 천연 애교가 호숫물처럼 넘실거렸다. 
내가 그녀의 작은 동작, 소소한 움직임의 세부 하나하나에 진심이 꽉 들어차 있음을 간파하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흐름의 기저에는 골수에 깊이 새겨진 연모의 애틋한 정이 서려 있었다.

나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잘 짜인 각본에 따라 그녀의 마음을 훔치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녀는 천연자원으로 나를 연정의 늪으로 몰아넣고 나의 마음에 빈틈없이 숨 막히게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뿌리째로 빨려 들어갔다.

 

13.
하지만 온 세상을 다 거머쥔 것 같은 충만감과 행복감은 나의 마음속에 머물렀다가 사라졌고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의식의 밑바닥에 완고하게 버티고 있어 금방 달아올랐던 마음과 상큼한 기분을 무시로 잠식하곤 하였다. 나는 그렇게 온탕과 냉탕,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허우적거렸다. 꺾지 못할 꽃인 줄 알면서도 내가 너무 순진한 꿈을 꾸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무시로 덮쳐들었다. 

그런 생각이 치밀어오를 때마다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마다 따스한 손길이 그리웠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한테 에둘러 얘기를 꺼냈더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화들짝 놀라셨고 여동생한테 이실직고했더니 “오빠, 정신 차려!”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돌아왔다.
친구들한테 말하면 “한번 도전해 봐!” 라는 격려의 말이 들려올까!?

산은 높고 물은 깊다.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그녀가 있는 곳까지 너무나 요원했고
푸르고 젊은 그 마음에 다가서자니 곳곳에 가시밭길이다.

무엇보다도 나하고 나이가 비슷한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내가 넘어야 할 높고 험한 산이었고 깊고 세찬 강물이었다. 
자칫하면 장인어른이나 장모님보다 내가 먼저 늙어서 돌아가실 수도 있는 나이이다. 
그들이 우리들의 이 만남을 찬성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부모님이 막아 나서면...”
“막아 나서면?”
“수면제를 먹고 죽어버린다고 할 거예요!”
“오, 거참 좋은 방법이로구나. 기왕이면 수면제가 아니라 쥐약을 먹는다고 해”
“네. 쥐약을 숨이 넘어갈 때까지 먹어드리겠다고 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송골송골 고여들었다. 
그 순간 무슨 쇠꼬챙이 같은 것이 염통을 쑤시고 들어오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정말 잔인하게 고통스러웠다. 
나는 혹시 우리를 갈라놓을 수도 있는 그 삶의 기로를 원망하고 한탄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쥐약은 내가 먼저 먹어야 할 것 같구나’ 하는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기 전에 용케도 삼켜버렸다.

 

14.
항상 숫기 없고 어설프고 언제나 뭔가 좀 모자라게 살아온 아저씨의 인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멍청하게 굽이치며 질척질척하게 흘러간다. 
나는 영광과 상처가 뒤섞인 세월을 전전하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여야 했다.

왜서일까?!

세속적이고 교과서적인 목소리는 자주 들리고 크게 들리는데 구원과 희망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결정적인 한 방은 천둥 번개가 울고 비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고 난 뒤에 오는 게 아니다. 
때로는 가만히 살짝 간사하게 고개를 쳐든다.

당사자인 그녀가 확고부동한 의지가 있다!
어느 날 밤 느닷없이 떠오르는 이 진리의 말씀에 나는 소스라치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앉았다. 당사자가 죽자 살자, 하는 판인데 무엇이 더 두렵단 말인가? 그녀 외의 모든 요소는 한낱 곁가지에 불과하다. 아무리 가로막고 새로 막으며 날쳐봤자다. 
홀연 나는 지금까지의 미망에서 빠져나와 숙연해지고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몰두하고 집중해야 할 일은 나를 향해 열려있는 그녀의 마음이 느슨하게 풀리지 않도록 꽉 조여주는 일이다. 나의 ‘가치’를 그녀의 뼛속까지 새겨넣는 일이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건 이 늙은 여우가 가장 잘하는 일 중의 하나! 하면 된다!

“전 선생님 내면에 있는 담벼락부터 허물어버려요!”

그녀가 담담하게 보태주는 한마디가 또한 부처님이 하신 말씀처럼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 주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장벽도 높고 험했지만 내 마음속에 장벽이 너무 높았고 너무 견고하였다.
내가 만고불변의 틀에 맞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하고 상처를 안 받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믿음과 신뢰를 보내주는 그녀가 더없이 미더운 뒷심이다. 내가 넘어져도 엎어져도 그녀의 따스한 손길이 와닿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에게 끝없는 용기와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세상이 만들어 낸 고정 격식과 편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기로 작심했다.
더는 남들이 규정해 놓은 관념의 등 뒤에 숨지 않겠다. 
더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뒤에 숨지 않겠다.

나의 외부에 그리고 나의 내면에 완고하게 버티고 있는 담벼락을 몽둥이로 쳐 내리고 도끼로 까 내리고! 

당장 장인어른, 장모님을 찾아가서, 시퍼런 칼로 내 배를 가르고 간을 꺼내고 웅담을 꺼내서 두분에게 보약을 지어드리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 어르신들 배가 터지도록 뇌물을 잔뜩 가져다 바칠 것이다.
납작 엎드려서 그네들의 영혼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비굴한 몸짓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낀 부조리? 불편한 눈빛?
그런 맛 있는 요리는 저희끼리 마음대로 쳐드시라고 할 것이다. 
내 기꺼이 그네들이 심심하고 재미없는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반찬거리가 되어줄 것이다. 
마음대로 씹어대고 제멋대로 주물러대라고 할 것이다. 
세상의 변두리에서 초식동물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던 보잘것없는 나의 인생에 들이닥친 이 ‘유명세’를 마음껏 즐기고 늘 비어있기만 했던 허영의 주머니를 듬뿍 채워나갈 것이다.

용맹스러운 기개와 장엄하고 결연한 생각이 나의 결전 의지를 불태웠다.
나는 목숨을 건 한판의 판가리 결투를 눈앞에 둔 용사처럼 한없이 서슬푸르고 삼엄해지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한
혼하물과 치판산이 마르고 닳지 않는 한
그리고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내가 그녀를 떠나는 것,
그건 절대 못 한다! 
아니 안한다!

 

15.
연정이 가을 호수처럼 깊어져 갈수록 욕심은 한도 끝도 없이 깊어져 갔다.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다. 이대로 꼭 쥐고 있고 싶었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젊은 그녀의 머릿속에 나 하나만 꽉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한없이 덧없고 인간의 감정은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하고 모호하다.
문득문득 내가 지금 겨울의 문턱에 서 있으며 하나하나 잃어가는 상실의 시간을 소화하고 있다는 사실, 이빨이 다 뽑히고 머리털 다 빠지며 볼품없이 홀딱 늙어버리는 데까지 그렇게 많은 세월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세월이 지나도 그녀는 여전히 푸르청청한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지될 때면 한없이 혼란스럽고 우울하고 황망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파괴적인 생각이 부풀고 커지기 전에, 그런 신호 때문에 낙원에서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에 결연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서 파도처럼 출렁이는 신뢰와 믿음을 바라보면 생각은 금시 요사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더 늙는 거 두렵지 않아?”
“두렵지요!”
“나 기저귀를 차고서라도 질질 따라다닐 거야!”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둘 거예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그녀의 푸른 에너지를 만나면 주름이 깊어져 가던 내면의 질곡에서 가뭇없이 해탈되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분별하려고 하지 않았고 연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먼 훗날 정말 나이가 들고 기력이 다하여 거친 숨을 할딱거리고 있을 때, 젊고 싱싱한 마누라의 눈에 혹시 비껴들 수도 있는 어두운 그림자의 의미를 지금 미리 상상하여 내 여리고 심약한 정신을 짓이기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때 가서 볼일이다. 
그때 되면 그때의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것!

만에 하나! 내 오늘의 선택으로 마지막 한 토막 남은 삶이 거칠고 추하게 전개되더라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젊은 마누라한테 개처럼 천대받고 짓밟혀 들개처럼 불쌍한 신세가 되더라도 내가 한때 누렸던 이 극락의 행복을 떠올리며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웃으며 어루만지리라. 
그건 분명 오늘 내가 누리는 향락을 위해 내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채무이거늘. 헤헤!

 

16.
여기까지 자판을 두드리고 나니 새날이 훤히 밝아온다. 
아침노을이 창가로 스며든다.

그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리움이 숨 막히게 몰려왔다. 
그리고 그 그리움에 빈틈없이 지배당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 약발은 절대 만만치 않다.
이미 수백 수천 번을 곱씹었던 말들이 또박또박 귓전에서 메아리친다!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젊고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갈 것이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는 그네들의 지점에서 이 세상 청춘의 당당한 일부가 되어 마음껏 찬란하고 영롱하리라.

아가야! 자기야! 네가 늙을 때까지 나 늙지 않고 기다릴게!


2021년 12월 18일 아침 7시 45분에 심양 칠판 산 산속에서 탈고
(2021년 12월 17일 오후 15시부터 16시간 45분 동안 숨 한번 돌리지 않고 일장 난필) 


전정환 작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번역원
료녕인민출판사 문예편집
료녕민족출판사 조선문편집실 주임 역임
현재 한서대학 전통문화연구소 연구원
중단편소설 및 수필 수십편 발표
아리랑소설문학상 등 수상
동방문화대관(공저), 삼조시선 등 저서 및 번역도서 다수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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