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생 도화지

 

어렸을적 비가 온뒤 하늘에 걸려있는 이쁜 무지개를 종종 볼수 있었다. 

가난해서 크레용마저 가질수 없어 백색 도화지에 칠색 무지개조차 그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 하늘에 반원 모양으로 걸려있는 무지개는 자연이 준 이쁜 한폭의 아름다운 선물이었고 나를 대신해 그린 이쁜 도화지였다.

10여리길을 걸어서 중학교로 통학하였던 나에게 있어서 친구들이 타고 다니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자전거는 오랜 기다림 뒤에 찾아오게 될 무지개와 같은 동경이었고 꿈이었다. 빨간색 자전거를 보면 뒤동산의 빨간 개나리꽃이 떠올랐고, 노란색 자전거를 보면 마치 노랑나비가 훨훨 날아가는 느낌을 주었다.

책가방을 메고 매일 한걸음, 한걸음씩 먼길을 걸어야만 하는 나의 옆으로 이쁜 색상의 자전거를 씽씽 타고 지나가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가질수 있는 자전거를 나는 가난해서 가질 수 없다는 슬프고, 아픈 생각이 이쁜 색상의 자전거에 대한 갈망을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이룰 수 없었던 갈망의 빨갛고, 파랗고, 노란 색상은 저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래서 불혹의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여전히 환하고 밝으면서도 이쁜 색상에 더 선호하고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작년 가을, 서울에 있는 남편이 가을에 입을 옷들을 한상자 부쳐왔다. 옷상자를 여는 순간 나의 기대가 빗나감을 느꼈다, 남편의 눈에 보이는 “이쁜” 옷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결코 이쁜 옷들이 아니었기때문이다. 나와 딸에게 어울리는 색상이라고 이 옷들을 좋아할것이라고 보냈을 남편에게 의문 의 꼬리표를 달아보게 되었다. 문뜩 결혼 후 나를 백색 도화지 같아서 그리고 싶은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가 있어서 좋다고 말하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결혼하여 지금까지 남편과 함께 살아오면서 과연 남편의 모든 색상을 받아주는 백색의 도화지였을까. 

남편의 성의라 우선 부쳐온 옷들을 깨끗이 빨아 딸애 옷장과 내 옷장에 넣었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색상의 옷들만 쏙쏙 뽑아 입었지만, 딸애는 아무 색상의 옷이나 돌아가며 입었다. 내 마음속으로 흉보았던 밉상 색상은 딸애는 아무런 편견도 없이 싫다는 말도 없이 잘만 입었다. 내가 만일 내 생각을 딸애에게 주입하여 이 옷이 안 이쁘다고 말을 했더라면 딸애는 안 입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색상을 자연스레 받아주는 딸애를 보고 나도 어두운 색상의 옷들을 하나, 둘 꺼내 입기 시작하면서 어두운 색상의 옷들에는 이쁜 색상이 주지 못하는 묵직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늦게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지개라면 우선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아름답다 이다. 무지개의 사전적 정의는 대기중에 떠있는 물방울이 해빛을 받아 반원형으로 나타나는 일곱색갈의 띠라고 되어있지만 실제 무지개 색상은 134-207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색이 모여 만든 아름다운 무지개, 만일 한가지 색상만 있었다면 아주 단조로웠을 것이다.

자연이든 인간이든 단지 적, 등, 황, 록, 청, 남, 자색뿐이 아닌 수많은 자신만의 색상이 있다. 그동안 나는 자신의 색상이 가장 좋다고 고집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색상은 단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접촉을 꺼렸고 내가 싫어한다는 원인으로 딸애가 그걸 좋아하는지 잠깐 고민한적도 없이 내 느낌에 좋고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선입견만으로 딸애의 백색 도화지에 나만의 색상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닐까. 다양한 색상들이 알록달록 엮여서 아름다운 무지개가 하늘에 걸려있음에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색상만을 쫓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동안 너와 내가 달라서, 어울릴 수 있어서 아름다운 인생 도화지를 그릴 수 있었던 것같다.

 


2.사 랑 니

나에게는 그 여느 누구처럼 네개의 사랑니가 있다. 

세상살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인지 입안 오른쪽 아래에 위치한 사랑니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빠끔히 열기 시작하더니 어느날에는 입쌀알만한 방울눈으로 변해 초롱초롱  나를 바라보며 쿡쿡 쏘아오르며 괴롭힌다. 내 입안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아 가증스럽게 나를 향해 앙탈을 부리며 때로는 문뜩문뜩, 때로는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나의 심신을 갉아먹으며 나를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점점 파도처럼 심하게 밀려오는 아픔때문에 내 몸은 이리 치우고 저리 치워서 초라해지고 찌들어져 방불히 지옥을 련상케 한다.

1년반전 눈을 뜬 사랑니를 발견하고 의사선생을 찾아 검진한 결과 사랑니는 치솔이 닿지 않는 관리가 미약한 곳에 위채해있어 그대로 방치해두면 다른 치아에도 영향줄수 있기에 뽑으라고 권했음에서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다할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몸을 잘 지키는것은 효의 첫걸음이라는 공자의 훌륭한 가르침을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 기능 없는 실제 생활에 전혀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랑니를 조물주의 배려로 생각해보려 하지만 이 세상에 올때도, 이 세상을 떠날때도 잘했다는 칭찬의 말 한마디 못받고 인간에게 고통만 주는 그 존재의 가치에 관해서는 의문의 부호를 달아보게 된다.

하도 궁금해서 사랑니를 인테넷에서 검색한 결과 사랑니는 입안 제일 뒤쪽에서 세번째로 나는 큰 어금니로 그 치아가 ‘사랑을 느낄만한 나이’인 19세에서 21세쯤 난다고 하여 붙여진것이며 영어로는 ‘wisdom teeth’라고 부르는데 이것은‘지혜를 알만한 나이에 나온다’는 뜻이며 한자로 바꿔 지치(智齿)라고 한다.

사랑니 통증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삶에 있어서의 고통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고통이라면 우선 먼저 떠오르는것이 중학생들에게 작문을 가르치면서 들려주었던 사마천의 궁형에 관한 이야기다.

사마천은 리릉이라는 장군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50만을 내거나 사형 또는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을 당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돈을 내놓을 형편은 못되고 그렇다고 사형을 선택하면 아버지의 유언인 사서를 편찬하는 과업을 이룰수 없게 된다. 그래서 부득이 사형보다 더 치욕스러운 생식기를 잘리는 궁형을 감내해야 했다. 감옥에서도 사마천은 사기를 꾸준히 견지하여 써나갔다. 후에야 한무제는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하고 사마천의 사기가 미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만큼 훌륭하다는것을 깨달으면서 결국 사마천은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되며 14년간 노력끝에 중국 최초의 기전체 력사서를 완성한다. 이렇게 사기는 사마천의 고통속에서 잉태되었다.

또 하나의 떠오르는 이야기는 <<삼국연의>> 에 나오는 화타와 관우에 관한 이야기다. 관우는 번성에서의 조조와의 싸움에서 어깨에 독화살을 맞아 화타가 뾰족한 칼로 째고 푸르게 독이 든 뼈를 드러낸후 뼈속에 스며든 독을 긁어내고 뼈에 약을 바르고 살을 바늘과 실로 꿰맨다. 관우는 담소하면서 치료를 받는다. 부하들이 피를 보고 기겁을 하지만 관우는 아픔을 인내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강한 의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지금까지도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수 없게 한다. 이렇듯 고통이 주는 의미는 크다.
전 우주의 력사를 놓고 보면 한 사람의 삶은 아주 짧은바 어쩌면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한 순간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동안 인생이라는 장소에 머무르면서 어쩌면 인간은 무수히 많은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통해서 더 완미하고 성숙되고 바른 삶을 살아는것이 아닐까?

내 몸안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을 느끼면서도 어머니의 자식 사랑 깊이를 몰랐던 나는 출산의 고통을 겪고나서야 어머니가 나를 출산하던 때의 고통의 깊이를 알게 되었고 어머니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둘이상이 하나가 되는 퓨전의 시대라 하지만 나의 가정은 하나가 둘이 되어 서울과 혜주에 떨어져 살고 있다. 살면서 가끔은 모든것을 잠시 멈추고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하늘은 흰색과 파란색이 잘 조화되어 너무나도 아름답기만 한데 그 아름다움 너머로 내 마음속 그리움의 고통이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것은 무엇때문일까? 혹시 사자모양의 저 구름은 그리움을 싣고 서울에서 혜주까지 온건 아닐까? 그래서 잠간이라도 나를 더 보고싶어서 그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방황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환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그리움에 푹푹 빠질때면 고(故)김광석의 <<일어나>>를 속으로 부르면서 자신을 달랜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있어
한치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불러봐도 소용없었다.

인생이란 강물위를 뜻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수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이 노래에 담겨있는 뜻처럼 행복이란 깊은 고통 뒤에 맛볼때에 어느때보다도 그 느낌이 진한것 아닐까? 나 혼자 그리움, 외로움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딸을 훌륭하게 키워 그때 남편과 함께 할 날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높은곳을 보기보다는 낮은곳을 보면서, 욕심은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서, 옹졸함은 버리고 너그러움을 베풀면서, 불신보다는 믿음을 주면서, 욕보다는 칭찬을 주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법을 배우면서,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랑니를 앓으며 육체적으로 너무나도 힘들었던 나는 다시 한번 고통의 뜻을 음미해보고 내 삶을 반추해보게 되었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 나이에 내 몸안에 태어나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고통을 통해 사람의 참뜻을 음미해보게 하였고 중년쯤 나이에 다시 한번 나에게 고통을 주어 고통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것을 보게 하고 미래를 향한 교훈을 주면서 자아성찰을 통해 좀 더 완미한 가정을, 삶을 영위해나가라는 의미에서 사랑니를 준 조물주의 배려가 아닐까고 생각해본다.  

 

3. 홍콩 파변주(破边洲)를 찾아서

 

지난 5월 밀리호경 제2구간 산행의 아름다운 추억과 설레임과 감동들이 늘 시간의 저편에서 잊지 못할 순간들로 마음속에 따뜻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찾고 싶었던 홍콩 밀리호경, 이번에는 제2구간 반대 방향에 위치한 파변주를 찾았다.
홍콩 파변주는 홍콩 돈 500원짜리 배경지이다. 파변주는 원래 육지였는데 하늘 신이 도끼로 힘주어 쪼개어 파변주를 육지에서 떼어냈다는 전설이 있지만 실제로 파변주는 쥐라기이기에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과 오랜 기간 동안 파도의 침식과 부식으로 인하여 형성된 섬이다. 
심천 뤄후 해관을 거쳐 지하철을 타고 대학 역에서 내려 세계지질공원 만익저수지로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만익저수지와 가까워지면서 커다란 위엄 있는 산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나뭇잎 들 사이들로 만익저수지 푸르른 물결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금시 후련해지면서 가벼워진다. 많은 잡초며 나무들이 푸른색으로 늦여름의 산을 무성하게 덮고 있었는데 21°C ~ 27°C의10월 중순 홍콩의 대자연은 계절에 관계없이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거의 한시간 만에 땜에 도착하였다. 왼쪽은 세계에서 바다 옆에 건설한 제일 큰 인공 저수지이고 오른 켠은 일망무제 한 태평양 바다이다. 
대자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며 어서 오라고 맞아주고 있는데 그 사이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겪어왔다. 딸애가 대학교에 가면서 그동안 혼자서 딸애를 키우느라고 버거웠던 짐을 완전히 내려 놓았다. 더는 한밤중에 딸애가 다쳤다는 전화를 받고 놀란 마음으로 학교로 정신없이 달려가지 않아도 되었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딸애를 끄떡끄떡 졸면서 지켜주지 않아도 되었고, 등수 경쟁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코로나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고향 연길에도 다녀와서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풀 수 있었고, 방학 동안 딸애의 사춘기와의 갈등도 무난히 넘겼다. 바다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바다는 약손처럼 나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어루만져 준다. 바다와 산을 마주하면 도시의 번화한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되돌아보고 사색하게 되어 바다와 산이 그렇게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땜에서 오던 방향으로 되돌아서 왼쪽 방향의 계단을 내려와 바다 가의 동굴부터 찾았다. 바다 물의 오랜 침식작용을 받아 형성된 들쭉날쭉한 돌들로 이루어진 동굴은 조물주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들여다 보이는 물에서는 고기들이 한가롭게 자유로이 헤엄치며 오고 간다. 살아가면서 혼자서 늘 외롭고 끝없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비해 고기들은 삶의 아픈 고달픔이 없이, 그리움 없이 살아가는 것 같아 부러웠다. 

천천히 걸어서 활화산 지각운동으로 형성된 S형 모양의 암석들과 6각형 모양, 수직으로 이루어진 경관을 이룬 암석들을 마주했다. 마치 그 누구의 손길로 빚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린 것 같기도 한 암석들을 쳐다보면서 대자연은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수지 보호용으로 쌓아 놓은 커다란 닻 모양의 돌들과 구멍이 숭숭 뚫린 방파제 옆 길을 걷노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아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방파제 끝에서 산밑 절벽에 올라야만 파변주로 향하는데 방파제들 사이에 커다란 공간이 있고 높이가 높아 훌쩍 뛰어 넘기에는 무리여서 방파제 제일 밑으로 내려가서 산밑에서 절벽을 올랐다. 
절벽을 올라 파변주로 향하는 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둥근 모양의 나무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길에 놓여 있고 돌이며 자갈이나 흙 길이 위주였고 울창한 숲들을 거쳐 지나야 했다. 햇볕이 뜨거웠고 과일들과 물이며 떡이며 충전기로 가득 찬 가방이 별로 무거운 줄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지는 길을 따라 설레 이는 마음으로 걷고 걸었다. 삶의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순수한 자신으로 돌아가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가볍게 걷는 길은 너무나도 행복한 길임을 가슴이 말해주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어서 드디어 파변주에 도착했다. 세로 모양의 가야금을 연상케 하는 파변주가 눈앞에 펼쳐진다. 저도 몰래 입가에서 감탄이 흘러 나갔다. 정교로운 암석의 수직 무늬는 마치 예리한 칼날로 잘리운듯한 천연조각품들로 장관이다. 무엇때문에 홍콩 돈 500원의 배경지로 택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일망무제 한 푸르른 태평양 바다가 쪽빛 하늘 아래로 멀리 아득하게 펼쳐진다. 살면서 이렇게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시간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더 소중하고 더 귀하고 더 머무르고 싶다.
파변주의 아름다움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되돌아서 백랍촌(白腊村) 방향의 산으로 향하면서 점심 먹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가방을 풀었다. 매번 산행을 떠날 때마다 입쌀 가루로 배추와 고기로 속을 만들어 떡을 빚어 휴대한다. 다른 음식보다 손수 빚은 고향 음식을 먹으면 속이 든든해서 힘이 될 것 같다. 휴대했던 떡이며 과일들을 팀원들과 함께 베풀면서 대자연을 밥상 삼아 먹는 점심은 참으로 별미이다.
점심을 먹고 백랍 촌으로 향했다. 풀들과 나무가 우거진 산속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열기가 얼굴을 향해 확확 뿜어져 왔고 햇볕에 완전히 노출되다 보니 땀이 쉴 새없이 흘러내렸고 숨이 차서 헐레벌떡 이었다. 가쁜 숨소리가 힘들게 들렸는지 힘들면 쉬라고 뒤에서 누가 말해오지만 계속해서 걸었다. 산정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이야 힘들지만 그 과정을 참고 견디면서 견지하였기에 부동한 높이에서 또다시 더 멀리까지 멋진 풍경을 향수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 때 상해 항에서 태국 람차방으로 컨테이너로 출하해도 아무 문제없이 출하되던 제품이 올해는 LCL로 출하해도 외관이 품질 문제로 이슈가 되었다. 우기에 박스가 눅눅해져 출항해서 도착까지 거의 열흘이란 시간이 걸리다 보니 팔레트 위의 박스가 눌리워져 외관상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발생원인을 분석하고 개선대책서를 세우고 개선효과가 바이어의 확인을 받기까지는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다. 때로는 반나절 수 없는 전화를 받으면서, 전화를 하면서 돌 부석이 된 마음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은 과정이야 힘들지만 풀고 참고 밀고 나가노라면 바이어와 내가 원하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때문이다. 
백락촌으로 가는 길은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생겨난 길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수많은 몽돌이 바다 가를 장식해주고 있다. 모래며 흙으로 된 해변가는 많이 보았지만 순수한 몽돌로 된 바다 가는 처음이다. 세월의 수많은 세례를 거치면서 닳고 닳아 오늘의 몽돌로 되기까지 많은 인내심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면서 앉아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산길로 향했다. 때로는 발 디딜 공간이 부족한 움푹 패인 비좁은 곳을 지나가야 하고 때로는 커다란 나무줄기들이 엉키고 엉켜 몸을 낮추어 야만 하는 곳을 지나가야 하고 때로는 무성한 숲과 나무들이 길을 막아 어디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실수를 해서 다시 되돌아서서 길을 찾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몸 자세를 낮춰야 할 때도 있었고 잘 풀리지 않는 일을 혼자서 안고 고민하다가 한마디 힌트로 풀 때도 있었고 실수를 저질러놓고 당장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안 설 때도 있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실수를 많이 겪어오면서 성장해왔던 것 같다. 미국 발 컨테이너를 잘못 계산하여 제품을 싣고 보니 컨테이너 길이가 10cm 모자라는 황당한 실수를 한적도 있고 단가 내고를 깜박하고 수출서류상의 단가를 수정하지 않은 채 수출 통관을 한 적도 있고 바이어에서도 발주서를 낼 때 0하나를 빠뜨리고 몇 십만 개를 몇만 개로 진행할 때도 있었다. 어떠한 실수 던지 풀 수 있는 모든 방법은 동원되었고 나중에는 풀렸다.
백락촌에 도착해서 밀리호경 제1구간 7km 길에 들어섰다. 노랗고 검은 몇 십 마리의 얼룩소들이 길옆에서 한가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떤 소들의 등은 낙타의 등모양이어서 유난히 눈길을 끈다. 길에는 드문드문 쇠똥들이 널려 있다. 밀리호경 길은 도처에서 쇠똥 냄새가 풍기는 것이 하나의 특이한 점이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두시간 반 동안 걸어서 버스 역에 도착하여 289R 버스를 거의 한시간 가량 타고 싸탠(沙田)지하철역에 도착하였을 때 싸탠역은 인파들로 물결치고 있었다. 간단히 쇼핑하고 지하철을 타고 심천 뤄후를 거쳐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저녁 9시가 다 되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부터 하루 18km 거리를 걸었지만 별로 힘든 줄을 몰랐다. 지난해 4월 30일 코로나로 국문이 계속하여 막히고 종양이 커가고 있어 더는 수술을 미룰 수 없어 친구가 수술실 밖에서 지켜주어 종양 제거수술을 진행하였다. 도움이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달려와 주는 고향 친구, 한족 친구 둘이 있어서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건강이 더없이 소중함을 느끼면서 그후로 더욱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파변주를 찾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수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고 삶의 소중한 한순간을 예쁘게 기록할 수 있어 행복했다.
건강을 꿈꾸고 짬짬이 책 읽기를 꿈꾸고 나름대로의 글쓰기를 꿈꾼다. 사람은 스스로 꿈꾸고 있는 만큼의 범위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진짜 꿈꾸는 만큼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금단 프로필 

연변대학 졸업. 

전 연길시 5중학교 교사 

현재 광동성 혜주시 무역회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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