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봄 도쿄 메지로역에서 

김광림박사는 나보다는 10살 손아래인데 1990년대 초 일본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일본에 류학하던 우리 연변대학 출신들이 동방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초창기부터 김광림씨도 열정적으로 참가했다. 아마도 동방학우회 출범식을 마치고 가이켄(外苑)이라는 유명한 불고기집에 갔던 것 같다. 서로들 맥주잔을 부딪치며 중구난방으로 떠드는데 광림씨는 너부죽한 얼굴에 싱긋이 웃기만 했다. 옆에서 권하는 맥주는 조금만 마시고 사나흘 굶은 호랑이처럼 불고기만 먹었다. 그래서 조금은 촌스럽게 보였다. 듣자니 왕청 출신이고 동북사범대학 일어학과를 졸업하고 연변대학 일어학과 강사로 배치를 받았다고 한다. 연변대학에서는 광림씨의 얼굴을 본 적 없기에 어떻게 일본에 왔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광림씨는 "제가 2년 남짓이 연변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일본 문부성 장학생을 선발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오르지 못할 나무는 바라보지도 말라고 하면서 슬슬 눈치를 보다가 물러서더군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제가 달려들었지요. 북경에 가서 시험을 보았는데 운이 좋게 파스가 되였어요."
하고 히죽이 웃었다. 일본 문부성 장학금은 월 13만 엔에 학비 전액을 면제해 주었다. 하지만 중국 교육부에서 조직하는 일어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명문대학을 나와 7,8년씩 일어강의를 하던 사람들도 십중팔구는 락방거자로 나앉았다. 그런데 광림씨는 단번에 파스가 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성적이 만점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의 일본어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1989년 말에 내가 와세다대학에 방문학자로 가있을 때 광림씨는 한해 먼저 쯔쿠바대학에 가서 연수하고 있었다. 

그후 몇 번 더 만나보니 위인이 순박하면서도 정직하고 예의가 바르면서도 목적한 바는 반드시 일구어내는 성품이였다. 동방학우회 행사에도 솔선수범으로 참가했고 어려운 일에는 언제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들었다. 

동방학우회 성원 25 명이 한국 여행을 할 때 우리 둘은 거의 붙어 다녔고 여러 번 둘이서 맥주 한 잔 나누기도 했는데 그의 일어 실력은 물론이요, 일본문학에 대한 이해도 아주 깊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어느 한번은 조선의 시조와 일본의 하이쿠를 화제에 올렸는데 그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작품을 술술 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이쿠는 5, 7, 5의 3구 17자로 된 일본 특유의 단시지요. 아무래도 세계에서 제일 짧은 시라고 해야 하겠지요. 고려나 조선왕조의 고시조도 하이쿠보다는 두 배도 더 되는 40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렇게 짧은 시를 일본인들은 천여 년 동안 좋아하거든요. 웬간히 유식한 '옥상'들은 서너 날 건너 한번씩 하이쿠를 지어 비단 띠에 적어 분재에다 매달아놓거든요. 제가 일본인들이 왜 하이쿠를 좋아하는지 좀 공부를 해보았어요. 섬나라인데다가 시도 때도 없이 지진이 일어나니까 빨래줄처럼 긴 시를 짓고 읊조리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겠죠. 그래서 하이쿠 같은 단시를 좋아한 것 같아요. 꽃도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무궁화나 백일홍 같이 오랫동안 피는 꽃을 좋아하지만 일본인들은 활짝 피였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사쿠라, 즉 벚꽃을 선호하거든요. 프랑스의 문학리론가 타이너의 말 그대로 환경이 문학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한다 그 말씀입니다..."

일리가 있는 견해였다. 나는 점점 광림씨의 순박하고 솔직한 성품, 학구적인 자세에 마음이 끌리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광림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1년간의 연수 기간이 끝나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왕 일본에 온 김에 석, 박사 공부까지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모시고 있는 지도교수는 쯔쿠바대학에서 석, 박사 공부를 한다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단다. 하지만 광림씨는 도쿄대학에서 석, 박사 학위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 친구가 도쿄대학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하고 슬그머니 근심을 하면서도 
"귀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낀 손에 맞으라고 했어. 일본에서 석, 박사 학위를 할 바에는 그래도 도쿄대학에서 하는 게 좋지. 하지만 만에 하나 랑패를 볼 수도 있으니 쯔쿠바대학 시험도 보시게." 
라고 조언을 했다. 그랬더니 광림씨는
"김선생까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도쿄대학 대학원 시험을 보겠습니다. 그렇지만 도쿄에 가면 사흘 동안 김선생의 숙소에 묵게 해 주십시오. 침대가 없다면 김선생 침대 밑에서 자겠습니다."
"에끼 이 사람아, 도쿄대학 대학원 입학시험을 보는 사람을 어떻게 침대 밑에서 자라고 하겠어? 그런 근심일랑 말고 어서 오시게."

이렇게 광림씨는 나의 비좁은 숙소에서 자면서 사흘 동안 시험을 보았는데 무난히 도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후에 듣자니 쯔쿠바대학 대학원 시험에도 응시했고 무난히 입학을 했는데 지도교수도 도쿄대학에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격려해 주었단다. 도쿄대학 대학원에 들어간 광림씨는 석사과정 2년 간, 박사과정 4년 간 절치부심 열심히 공부했고 일본 도쿄 외각에 있는 고마신사(高丽神社)를 연구해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 석사학위 논문으로 도쿄대학 김소운 문학상을 받았다.

김소운이라 하면 최초로 일한사전을 펴낸 저명한 학자요, 수필가이다. 그리고 광림씨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외국의 신을 모시는 일본 여러 지역의 신사들을 통합적으로 연구했다. 여기서 일본의 신사에 대해 좀 더 소개한다면, 고마신사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일본에 들어와 세운 신사이고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약광(若光)이라는 고구려사람이였다. 그리고 "800만의 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인본 신사들에서는 외래 신들도 적잖게 모시고 있었다. 아무튼 광림씨는 일본의 신사와 그곳에서 모시는 외래 신을 연구해 도쿄대학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니가타산업대학 교수로 취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좀 망신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도쿄에서 자전거절도범으로 취급되였다가 광림씨가 신분보증을 해준 덕분에 풀려났던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다. 와세다대학 부근에 있는 와게이쥬쿠(和敬塾)라는 곳에 머물고 있을 때인데 동숙생인 한성우라는 한국 친구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자기가 타던 자전거를 선물했다. 일본은 선진국이라 하지만 시민들이 자가용보다 자전거를 선호했다. 자전거를 타면 쇼핑하기도 좋거니와 주말이면 주변의 공원을 돌면서 신체단련을 하기도 좋았다. 도로 량 쪽에 자전거가 다니는 길도 잘 되여 있거니와 자전거 앞에 소형 헤드라이트가 달려 있어서 밤길을 다녀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전거를 오오쯔까(大塚) 역 부근에 있는 구름다리 밑에 놓아두었는데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였다. 내 자전거는 없어졌으되 그 옆에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자전거 한 대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혹시 어떤 녀석이 내 자전거를 바꾸어 타고 가지 않았나 해서 그 자전거를 타고 갈가 했다가 한두 날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내 자전거는 보이지 않고 여전히 웬 자전거 한 대가 자물쇠를 잠그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어떤 덤베 북청 같은 녀석이 제 자전거는 놓아두고 내 자전거를 타고 간 것 같았고 나는 또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그 자전거를 슬슬 끌고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두어 달 무사태평하게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저녁 역시 그 구름다리 밑에 자전거를 세웠다가 끌고 나오는데 웬 경찰관이 문득 나타나면서 
"이 자전거, 당신 겁니까?" 
하고 다짜고짜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그날따라 외국인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았는지라 경찰관과 함께 내 숙소에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남의 자전거를 타게 된 자초지종을 공손하게 말했으나 경찰관은 자전거절도는 일본 법률에 의하면 경범죄(轻犯罪)에 속한다고 하면서 일단 오오쯔까 파출소로 가자고 했다. 파출소에 도착하자 경찰관은 나더러 외국인신분증을 바치게 하고 서류 한장을 주면서 인적 사항을 기입하라고 하더니 향후 당신의 행동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런 망신스러운 일로 지도교수인 오오무라 마스오 선생의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면 됩니까? 일본에 장기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도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바삐 광림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실직고했고 빨리 좀 와 달라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광림씨가 오오쯔까 파출소로 달려왔고 능란한 일어로 자기의 신분을 밝히면서 도쿄대학 대학원 학생증을 내놓았다. 경찰관은 금시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도쿄대학 박사생이시군요!” 
하고 깎듯이 경례하고 나서 나와 광림씨더러 사인을 하라고 했다. 우리 둘이 사인을 하고 재삼 사죄하면서 문밖으로 나오는데 경찰관은 바깥에까지 나와 배웅하면서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내가 귀국할 때 광림씨는 먼 길을 달려와 귀한 탁상시계 하나를 선물했고 사시미에 술 한잔을 사서 대접했다. 나는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으니 연변에서 다시 만나면 "원수를 갚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날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고 서로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2010년대 초반 김문학씨가 어느 잡지에 《조선족대개조론》이란 장문의 글을 련재해 커다란 론란을 불러일으켰고 조성일, 김관웅 등 학자들이 그의 불미한 문필활동에 대해 비판할 때 중, 조, 한, 일 문화에 조예가 깊고 미국 하버드대학에 방문학자로 가있던 광림씨가 좋은 글들을 발표해 측면지원을 해주었다. 말하자면 《벌거숭이 김문학》이라는 총제목 아래에 <김문학이 욕 먹는 이유>, <김문학, 그는 누구인가>, <우리 모두의 문제로서의 김문학>과 같은 소제목을 달고 론지를 전개했다. 특히 광림씨는 김문학씨의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고 그의 식민지사관과 중, 일, 한 3국 사이에서 개인의 리해득실에 따라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는 그의 저질적인 인간성과 문필활동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비판했다. 우리는 그의 글을 보면서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김문학과 그의 추종자들이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하면서 인신공격을 할 때도 김광림씨는 학자의 인격과 품위를 지키면서 의젓하고 정중한 어조로 김문학의 아름답지 못한 문필활동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하고 충고를 주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나는 일본에서 갈라진지 20년 뒤에야 광림씨를 연변대학에 초청할 수 있었다. 연변대학에서 두만강포럼을 개최했고 이 포럼은 조선-한국학연구센터에서 주관했는데 그 무렵 내가 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림씨는 좋은 발표를 해주었다. 광림씨는 사나흘 여러 나라에서 온 학자들과 좋은 교류를 하고 나서 래일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흘 후 연변대학 캠퍼스에서 또 맞띄우게 될 줄이야! 내가 
"왜 일본에 있을 사람이 여전히 연변에 있는 거요?"
하고 물었더니 옛날 연변대학에 있을 때 여러 모로 가르침을 받고 신세를 진 선생님 한분을 뵙지 못해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오늘 연변대학에서 만나뵙기로 했다고 하였다… 

광림씨가 일찍히 1990년대 초에 동방학우회의 후신인 연변대학학우회 회장을 맡아가지고 맹활약을 했고, 몇 해 전에는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설립을 제안하고 추진하는 모습을 여러 사이트를 통해 볼 수 있었다. 현재는 글로벌조선족연구자넷이라는 그룹을 운영하고 온라인으로 인기강연회 시리즈를 주최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1980년대 중반부터 연변대학을 많이 사랑하고 도와준 동훈선생에 관한 기록물을 만든 것을 보내와서 본 적 있고 작년에는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라는 작품으로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접하기도 했다. 니가타산업대학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기로 하자. 

--우리 대학교 김광림교수가 세계조선족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 글짓기대회는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했는데 조선족의 많은 학자와 문화인들이 지지, 동참하고 중국, 한국, 일본의 조선족 미디어가 협력하여 실시하였다. 모두 125편의 중국,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들인데 사전심사를 통과한 작품 55편에 대하여 중국, 한국에서 선정된 심사위원 5명에 의한 심사와 국적불문의 독자에 의한 평가가 인터넷에서 동시에 진행되였다. 결과 김광림교수의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가 대상을 수상했다. 내용은 글로벌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국 조선족의 군상을 그린 것이다. 시상식은 11월 3일에 이바라키현 도리데시에서 진행되였다. 김광림 교수는 상금으로 받은 30만 엔에 사비 20만 엔을 더 보태서 총 50만 엔을 전일본중국조선족련합회 발전기금회에 기부하였다. 기부금은 사회의 공익사업에 쓰일 예정이다.

<일본에서 쓰는 아리랑의 노래>를 다시 읽어보니, 광림박사는 니가타산업대학에 재직하면서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외국인연구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객원연구원을 력임하고 있었고 2009년 9월부터 2년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연구소, 하버드대학교 중국학연구센터, 런던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스쿨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한 바 있었다. 주요 연구과제는 동아시아 문화사, 동아시아의 성씨와 족보에 관한 연구이다. 이외에도 세계 속의 코리언의 생존전략과 문화발전, 한류, 조선족의 ‘만주’로의 이민사, 조선족의 일본, 미국 등 지역에서의 활동상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꾸준히 론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나는 광림씨가 자랑스러우면서 부럽기 짝이 없었다. 오직 우리 조선족 젊은이들이 성실성과 열정을 가지고 노력만 한다면 세계의 그 어디에서나 성공할 수 있고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였다.

그런데 작년 늦가을 반교반농(半教半农)의 리념을 안고 학생들을 데리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장면을 찍어 보내왔다. ‘왕청 촌놈’ 의 본색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김광림 박사>라는 련시조를 써서 보낸 적 있는데 이로써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하겠다.

도쿄대 김박사가 농사군이 되단 말가
黄龙의 허리인가 고랑도 튼실하다
좋구나 이 나라 깍두기 이 밭에서 나온다

천하의 秀才가 호미자루 잡았으니 
황금보다 짚이라는 이솝우화 떠오르네
두어라 도연명의 归去来辞 광림박사 쓴다네

제자들 거느리고 무 농사 잘 지었다
그놈 참 헌칠하다 象牙가 따로 없다
요깟다 사무라이 후예들 칼 버리고 호미 잡네

어질고 착하지만 정의감이 넘치고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고향 연변과 모교 연변대학을 잊지 못하는 김광림박사, 그는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면서 저 하늘을 비상하는 새처럼 다시 자기를 키워준 대지에 돌아을 것이다.   

광림박사가 선물한 탁상시계, 우승컵 모양의 멋진 탁상시계는 내 책상 우에서 32년 긴긴 세월 쉬지도 않고 오늘도 찰칵찰칵 잘도 돌아가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멋진 상봉을 재촉하는 것 같다.   

- 2023년 5월 3일, 연변대학 연구실에서
《연변문학》2023년 제10기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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