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게 껍데기처럼 남겨진, 소라게 껍데기같은 그리움

 

곰팡이의 계절이 온다 
식물의 방에서 베고니아 숨소리 들으며 
누군가 한숨을 
후- 내보낸다 한 때 치열했던 
그 숨소리도 이제는 함께 식어간다
소라게가 벗어던진 껍데기 위로
그리움이 알 수 없듯 구겨져 흘러간다 
나는 가까운 남향 창에서 
매실같이 무르익은 빗방울들을 
후두둑-흘려보내고 
그게 ‘남편’의 그리움인가보다- 
더 가까운 이편의 그리움은 
병상에 들붙은 어느 일요일 아침의 
마지막 한숨에 정착한다 
20여 년 가까스로 수많은 나와 수많은 
무고한 낯선 사람들을 보내버리고
7년간의 여백 끝에 
남겨진 소라게 껍데기같은 그리움 
텅 빈 그리움 

 

질주하는 하이픈 

 

―, 
보이지 않는 소리는 흘러서 사라진다
들리지 않는 색채는 흘러는 가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가 공중에서 그은 짧고 가벼운 한 획- 
동작이 멈추자 하얀 곡선이 더욱 선명해진다
나무들마다 왜 가시들이 이렇게도 많아,
잎들은 왜 하나같이 칼날같아, 

세모가시, 네모가시, 둥근가시... 
모진 칼날, 다슨 칼날, 휜 칼날...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하품을 길게 했다 
이 모든 게 색채들이 
말에 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야 
너무 소설 같잖아 
키득키득― 

정적이 하이픈 뒤를 이었다 
이어폰을 주머니 속에 숨긴 채
나는 풀밭으로 돌아누워 오래토록 울었다
들썩이는 어깨는 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너의 보청기는 소리 없이 이 시를 
질주하는 유일한 하이픈 같아 
하염없이
하염없이― 

 

2인칭 두루미 이야기

 

그 날은 일요일 아침이었죠
천장 스피커에서 난데없이
유령같은 목소리가 힘없이 흐느꼈어요 
우-리, 신-축, 아.파.트.는. 
현-재 
찌이익― 
시작도 끝도 결론도 없었죠 
장화를 신다말고 그녀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죠 
세탁기, TV, 쇼파, 침대, 책장, 냉장고, 라디오, 할머니, 고양이... 
등 뒤로 수북이 쌓인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것들을 보면서 
이건 마치 살아있을 때 멋지게 
꾸며놓은 무덤같다
라며 “21세기, 현대 두루미 2세의 첫 릉묘(陵墓)”가 만들어졌죠
낯설음에 잔뜩 경계된 고양이의 등은 
할머니의 거북목 같았죠 
그 위로 다시 스피커의 결론이 흘러나왔죠
현.재.일.층.현.관.에.물.이.수.북.이.잠.겼.으.니. 
가.급.적.으.로.머.물.지.말.고. 
안.전.한.곳.으.로.피.신.하.도.록.하.십.시.오. 
푸드득- 
고양이, 할머니, 라디오, 냉장고, 책장, 침대, 쇼파, TV, 세탁기... 
11층, 새 거북목은 안전했지요

그 날은 일요일 아침이었죠
두루미 2세는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닦고
변기를 닦고
마룻바닥을 닦고 또 닦았죠 
빨간 고무장갑 안은 
장마철로 흥건히 젖어있었죠

정희정 프로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13년 《연변일보》가 주최한 <해란강문학상>에 수필 <한번 쯤 사랑했다>로 등단했고, 2017년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에 가입했다. 그 사이 《연변일보》, 《연변문학》, 《송화강》,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등 매체에 시, 수필, 소설을 발표하며 문필활동을 적극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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