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죽고 난 후

 

망설이다가 
주춤거리다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진작 해치울 것을
시작부터 하고 볼 것을

서툴게 건넌 강을
다시 건널 수는 없을까

숙명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웃으며 다시 시작하자
저 물소리 드높은 
마음의 고향에서

후회도 약이라면 
사발 들이로 마실 것을
무너진 가슴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의 홍수

슬픔마저 그리워지는 날
희망도 절망도 따지지 말고
오연히 하늘 보며
다시 한번 신들메를 고쳐 매자

푸른 초원이 푸른 등이겠지
푸른 하늘이 푸른 등이겠지

 

나  무

 

서 있는 그곳이 고향이어서
물어봐 주는 이 없고
대답해 줄이 없어도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살았다

가지 뻗고 잎을 피워
그늘로 덮어주고
꽃 피우고 열매 맺어 
민들레 홀씨처럼 떠나보냈다

어깨 가득 그리움을 지고  
해를 향해 뒷짐 지고 서 있는 당신
은자 백 냥 와르르 쏟아지는 달밤엔
삭정이 실루엣으로 하염없이 서 있네

바다 건너 
나 보러 오겠다는 
약속도 못 지키시고
그리움의 별이 된 아버지

당신은 나의 언덕에 서 있는 나무

 

 

거미의 일생


늙은 몸 끌고
그물을 쳐
왕잠자리 잡아준다

젊은 녀석은 먹성도 좋아
주어도 주어도 배고픈 타령뿐

낳아주었지 
키워주었지
결혼까지 시켜주었는데
아직도 달라고만 손 내미는
다 큰 새끼

그래 
낳은 이 어미 죄겠지
그 죗값이겠지

다시 후들거리는 다리 움직여
그물을 늘인다
바람이라도 잡혀라

아들아
이제 엄마는 
더 이상 해줄 게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나를 먹어라
너의 한 끼 허기는 달래줄 수 있을 테니

 


대림동 중앙시장

 

지하철 대림역 12번 출구 나오면
서울 속의 차이나타운 대림 중앙시장이 있다

붉은색 노란색 중국어 간판과
마라탕 냄새와 양꼬치 냄새가 맞아주는 곳

꽈배기 건두부 해바라기씨
월병 푸주 절인 오리알
떠우죠 모충 썅차이 마쟝
양꼬치랑 냉면구이와 야버즈는 
오리지널 중국 맛이다

우리가 여기 오는 이유 단 하나
고향의 맛 한 조각 찾으러

서울 말투 배우고
서울 스타일 옷을 입어도
입맛의 공허함은 채울 수 없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향수 달래려
김치 해 먹고 냉면 눌러 먹고 
된장찌개 잊지 않았듯이 

이국 타향 나고 자란 손자 손녀들은 
어린 시절 맛을 찾아 
중앙시장을 누빈다

음식은 과거를 기억하는 메모리
뼈속 깊이 각인 된 정체성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손발이 굼떠진 엄마를 타박하던
내가 딸애한테 느리다고 
핀잔을 듣는 일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귀가 어두워진 엄마를 놀려주던 
내 귀에 새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일

나이가 든다는 것은
냄비 태워 먹은 엄마에게 야단치던
나도 끝내 밥 새카맣게 태워버리는 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엄마의 엄마가 되는 일
아이의 아이가 되는 일

 

위챗 모멘트

 

수십 년 못 본 동창생의 생사를 확인한다
이국 타향 눌러앉은 사촌의 안부도 묻고
일 년 가봐야 전화 두세 번이 고작인
남동생의 회사 기념행사도 본다

네모난 핸드폰에 담긴 
둥그런 세상을  
흥미진진 들여다본다

잘 살고들 있겠지
행복하게 살겠지

행복의 깨소금과
부러움과 흐뭇함
불만과 넋두리와
걱정과 안도의 창(窓)

한밤중에 슬그머니
불평 한 줄 오렸다가
지워버린 친구야

행복해지자 
아름다워지자

허영은 풀로 사라지지만
진정은 꽃으로 피어나리

 

장문영 프로필 
중국 헤이룽장성 벌리현 출생
재한동포문인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예작가회 제9회 백일장 차상
2023 국제가이아 환경문화대상 문학부문 우수상

월간 국보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

저작권자 © 동북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