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소설에서 나는 작가의 연륜이 느껴졌고 한국인의 삶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소설에서 작가의 정체성이 궁금해졌다. "

남태일이라는 작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모른 채 그의 소설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새 두 마리는 왜 호수에서 날아갔을까>(이하 <새 두 마리>)라는 그의 소설을 읽고 얼마전 출간을 앞두고 이 소설집에 수록될 작품 다섯 편을 다시 읽게 되었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새 두 마리>에 이어 이번의 다른 네 편의 소설도 나의 뇌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그의 소설에서 나는 작가의 연륜이 느껴졌고 한국인의 삶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소설에서 작가의 정체성이 궁금해졌다. 

류경자 평론가  

중국에서 활동하는 초기의 조선족 작가들과 달리 요즘의 몇몇 조선족 작가들은 한국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조선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중국의 문단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이제는 더욱 많은 조선족 작가들이 더 큰 무대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남태일 작가 또한 현재 중국 조선족 문단 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에서도 그 창작 활동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남태일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느낀 그 소설의 이미지는 ‘섬뜩함’ 그 자체이다.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죽음이 등장한다. <정>은 따뜻한 온정으로 가득 찬 가족들의 죽음, <바다는 말이 없다>는 인간의 힘으로는 방어 불가능한 운명적인 죽음, <새 두 마리>는 타인의 강제에 의한 죽음, <반려견 장례식>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살로서의 죽음, <아파트에 감도는 잿빛 구름>은 자기 구원으로서의 죽음 등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로서 죽음 서사 그 자체로서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소설들에서 죽음을 만나는 순간들에 대한 묘사가 디테일하면서도 다양하고 기괴하다는 점이다. 특히 그의 많은 소설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죽음과 관련된 인간의 따뜻한 온정과 함께 그 반대의 그로테스크함의 기묘한 결합이다. 많은 경우 이 상반된 정서가 한 편의 소설, 혹은 한 인물에 동시에 존재한다. 

 

1. 예상된 반전: <정>
‘정’이라는 제목처럼 이 소설은 기타 네 편의 소설과는 다르게 따뜻한 온정으로 가득 차 있다. <정>은 혈연관계가 없는 두 형제의 지극한 형제애를 다룬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둘의 형제애는 ‘나’의 잘못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동생인 ‘나’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를 다치게 하여 형님에게 고발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돈을 주기로 한 후 맞선 보러 가려는 형의 돈을 훔쳐 형의 맞선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에 형이 자신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아챌까 전전긍긍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나’는 평생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 후 형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이혼을 한다. 이에 ‘나’의 죄책감은 더해가고 형은 중풍에 걸린 아버지의 대소변도 직접 받아내면서 여전히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며 ‘나’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 뇌물을 들고 청탁하러 갈 정도로 ‘나’의 일에도 지극정성이다. 그런 형이 ‘나’가 사업을 하며 한창 잘나갈 무렵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만다. 그제서야 ‘나’는 그동안 죄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돈 훔친 사실과 형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이 자기 때문이라며 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여기서 소설의 첫 번째 반전이 나타난다. ‘나’를 평생 괴롭힌 비밀이 형에게는 이미 ‘비밀 아닌 비밀’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결혼의 불행은 누구의 탓도 아니라며 운명으로 믿는다. 그러다 형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소설은 두 번째 반전을 맞는다. 아버지의 유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 유서에는 형이 입양아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강한 충격을 받지만 ‘나’는 결국 친형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편지를 아버지와 형의 묘지 앞에서 불태우며 “피는 물보다 진하고, 정은 피보다 더 진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맑고 깨끗한 물이 어느 계곡에서 흘러나왔는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듯이 혈연관계의 유무는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이 소설은 두 사람의 남다른 형제애를 다루면서 두 번의 반전으로 소설을 이끌어간다. 현실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지극한 형제애와 형제라는 사실 자체를 뒤집는 반전으로 이 두 상황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두 사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은 중간중간 삽입한 복선에 의해 그 충격이 완화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정도의 형제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소설을 읽는 내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이 조금씩 엄습해 오며, 특히 소설 시작 부분의 사뭇 다른 외모나 형이 죽기 전에 동생에게 친형제가 맞냐고 물어보는 장면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완충 장치일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적이지 않은 두 형제의 사랑은 오히려 소설을 읽어 내려 갈 수록 독자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러한 설정은 어느 정도 예상된 반전을 만든다. 

이 소설에 나타난 죽음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게 되는 평범한 죽음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으로 이어지는 가족들의 죽음은 타인의 죽음 체험을 통해 소중한 가족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산 자의 슬픔을 이야기한다. ‘나’는 사랑했던 형에 대한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묘지를 통해 죽은 자를 다시 추모한다. 그러나 이 산 자의 슬픔과 달리 죽은 형의 입장에서 볼 때 형은 아내와 이혼하고 동생도 결혼하여 혼자 지내면서 오히려 죽음을 통해 지독한 고독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형님에 대한 정으로 가득 찬 주인공은 형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질병으로 인한 죽음은 남태일의 소설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죽음을 안타깝고 슬프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일생에 완전 이타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달콤함도 맛보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남태일 소설가 작품집 표지 
남태일 소설가 작품집 표지 

2. 대체 (불)가능한 사랑: <반려견의 장례식>
사랑이란 대체가 가능할까? 물론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반려견의 장례식>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하고 그 대체품으로 반려견에 집착하는 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황당한 반려견 장례식’이다. 소설의 시작을 장식하고 있는 이 사건은 철물점 가게 사장이 개의 부주의로 그 개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다시 그 개의 황당한 장례식에 초대된다는 내용이다. 

남태일 작가는 이 ‘반려견의 장례식’을 극히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도 안 먹는다는 돈을, 인간만이 쓰는 ‘부의금’이라 쓴 봉투에 넣고” 준 것, 조문객들을 조롱하려는 듯이 “하품하는 듯 보”이는 국화꽃, 인간의 장례식과 별반 차이가 없는 반려견 장례식, 동종인 개는 없고 사람들만 참가한 장례식.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풍자적인 장례식 장면 묘사와는 달리, 동물의 죽음에 장례식까지 치러주며 그토록 슬퍼하는 여인은 오히려 자못 진지하다. 그 이면에는 사랑의 이동이 존재한다. 숨겨진 이야기는 반려견의 주인인 여자가 ‘나’에게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액자 이야기이다. 

김은혜라는 개의 주인은 부모를 일찍 여읜 패션 디자이너 차영삼에게 접근하여 회사로 데려오라는 부장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잘 수행하는 대신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년기 홀로 살아온 차영삼은 타인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항상 일 순위인 생존 방법을 갖고 있었다. 결국 차영삼이 회장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김은혜에게 털어놓은 그의 진심은 그녀를 절망하게 만든다. 그녀에 대한 사랑이 사실은 “닭이 꿩을 대체하듯” 어릴 때 엄마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의 대체품이며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와 사귀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자살까지 시도했던 김은혜가 하얀 푸들을 키우게 되면서 점차 남편과 헤어진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가 반려견에게서 느낀 것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와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반려견을 치유와 사랑의 대체품으로 여겼던 여자는 강아지에게 집착을 한다. “생명의 은인과 같”은 강아지를 그녀는 동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며 강아지가 사고로 죽자 그녀는 유일한 의지처마저 잃게 되어 펫로스 증후군을 앓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나’의 발견으로 실패한다. 그러다 그 강아지의 대체품으로 똑같은 푸들을 발견한 ‘나’는 그녀에게 가져다 주지만 그 강아지가 전남편 부인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녀는 돌변하면서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 “자기 품에 안기려는 푸들을 발로 힘껏 차내며 앙칼지게 소리” 치면서 그 개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분노한다. 그후 며칠이 지나 다시 찾아갔을 때 그녀는 전남편 부인의 강아지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한 상태였다. 결말 부분 여자의 갑작스러운 히스테리는 소설의 시작에서 시각적으로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강아지의 죽음 현장과 묘하게 겹친다. “흰 눈 바탕에 하얀 반려견”이 오토바이에 깔려 “피범벅이 된” 장면은, 마치 순백의 눈처럼 온순하고 순수했던 여자가 푸들에게 폭력과 욕설을 가하며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다 결국 강아지를 살해하고 자살을 동시에 감행하는 그녀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 소설의 죽음 현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전남편 부인의 푸들은 가느다란 노끈으로 목을 매어 옷걸이에 매달아 놓은 모습이다. 거기다 바람이 불어오자 네 다리를 쭉 뻗고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검은 피가 덕지덕지 말라 있는 방바닥, 흰털과 피가 묻어 있는 몽둥이, 온몸이 피투성이이고 머리는 가죽이 찢겨져 흰 뼈가 드러난 푸들, 이 모든 것들은 잔인한 동물 학대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창백하고 야윈 김은혜의 굳어진 표정에는 “마치 승리를 거둔 전사의 표정처럼 흐뭇해 보”인다. 여자는 사랑을 잃은 분노를 푸들에게 전가하면서 그 푸들의 죽음에서 전남편 부인에 대한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똑같이 생긴 두 푸들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여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장례식을 치른 푸들은 사랑하는 남자의 대체품으로 그 존재로 마음의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고, 여자가 잔인하게 죽인 푸들은 전남편 부인에 대한 증오의 대체품으로 푸들에 대한 학대를 통해 복수의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여자의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말한다. “죽음은 이미 그녀의 푸르딩딩한 살결, 굳은 피, 고독과 절망이 가득한 영혼 속에 침투되어 있었다. 죽음은 단지 한 모금의 숨을 앗아갔을 뿐이다. 겨우 촛불 정도나 끌 수 있는 한 모금의 숨은, 그녀의 참기 힘든 모든 고통을 안고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프로이트는 죽음본능은 유기체 본연의 충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명이 없는 무기체 상태로 회귀하려는 충동이자 생의 고뇌로부터 도피하려는 충동이라고 했다. 김은혜는 사랑을 잃은 동시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숨만 쉬고 있을 뿐, 삶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그녀의 말처럼 이때 자신의 인생에 나타난 푸들은 자신을 살려준 ‘은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생명의 끈을 놓지 않게 한 유일한 의지인 푸들마저 죽자 그녀는 더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다. 마지막 복수와 함께 완성된 자살은 그녀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게 했다. 그것 또한 무의미한 생의 고뇌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자 모든 고독, 절망, 고통에서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이다.

남태일 소설집 뒷표지(류경자 평론가의 평이 실렸다.)
남태일 소설집 뒷표지(류경자 평론가의 평이 실렸다.)

3. 이산가족의 비극: <바다는 말이 없다>
<바다는 말이 없다>에는 두 이산가족이 등장한다. 중국, 북한, 남한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이산가족의 삶과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에는 또 중국과 북한의 민간 무역 현장, 북한 주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소설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이산가족 찾기는 성공하지만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으면서 아쉽게도 만남은 실패로 끝난다. 

중국 조선족인 대성이 중국에 진출한 한 한국 회사 회장을 도와 북한에 거주하는 동생을 찾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기본 줄거리이다. 물론 대성이 이 일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는 일이 성사되면 한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또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은 해군 부대에서 4년 복역하고 제대해 향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가난한 그와 누구도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그때는 가난한 집안일지라도 한국에 갈 수만 있다면 돈이 생긴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맞선 본 여자들은 가족 중 외국에 다녀온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한국에 있는 큰아버지를 떠올린다. 이때 이들에게 가족의 정보다 앞선 것은 한국행이 가능하여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대성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한국 회사에 들어가기로 한다. 단지 열심히 일하면 한국 본사에 연수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큰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한국 회사에 입사하여 회장이 친동생이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며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대신 한국 체류나 유학 경비까지 책임지겠다고 한다. 여섯 손가락이 회장 동생의 중요한 특징이어서 대성은 이 단서를 가지고 바다에서 북한 주민과 거래하는 중국인 상인에게 통역일을 해주면서 사람 찾기에 나선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회장의 동생으로 판단되는 사람을 찾고 바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예상치 못한 태풍으로 회장의 동생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성은 북한 회장 동생의 아들에게 맞아 기억을 상실하고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후 현미가 대성의 집에서 오래된 가족 사진을 보고 대성과 자신의 죽은 남편이 사촌 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들이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큰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바로 눈앞에 있는 걸 대성이 죽을 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현미는 대성이 죽기 전 그의 아이를 갖게 되면서 이 복잡하게 얽히고 상처로 얼룩진 이산가족들이 아이를 통해 다시 연결이 되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도 중국, 북한, 남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은 만남이 성사되기가 쉽지 않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듯이 현실에서 가능한 것은 이산가족의 아픔과 슬픔을 아는 이산가족들이 서로 돕고 위로하는 것뿐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볼 때 이산가족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초래된 것이 아니며 그 만남 또한 한 개인의 힘과 노력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이것 또한 한민족의 비극이다. 인간의 정은 국경이 없지만 인위적으로 만든 그 국경선에 의해 이산가족의 만남은 무척 어려워진다. 그래서 작가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이 소망을 ‘행운’에 맡긴다. 헤밍웨이의 “행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사고 싶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행운에 대한 절실한 바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행운’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의 연속이다. ‘불행’인 태풍의 도래로 이산가족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고, 이산가족의 만남을 성사시키려고 중간 역할을 맡은 사람마저 죽게 되며, 그 중간 역할을 맡은 사람 또한 이산가족이자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에 나타난 죽음은 모두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이별로, 산 사람들은 그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산다. 현미 남편의 교통사고, 만나기 직전 태풍으로 인한 회장 동생의 죽음, 대성의 교통사고 모두 예상치 못한 사고에 의한 죽음이다. 이 죽음들이 아쉬운 것은 바로 예상 가능한 아름다운 미래가 도래하기 직전 죽음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현미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둘은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회장의 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자신의 친형과 만날 수 있고 무역도 하면서 잘 살 수 있었을 것이고, 대성이 죽지 않았다면 현미와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아들이 태어나는 것도 볼 수 있으며 큰아버지도 찾았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직전 이 모든 행복을 그들에게서 박탈해버린다. 

남태일 소설가 
남태일 소설가 

4. 욕망으로 인한 나비효과: <새 두 마리는 왜 호수에서 날아갔을까>
<새 두 마리는 왜 호수에서 날아갔을까> 역시 액자소설이다. 서술자가 1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중서의 사형 집행을 떠올리면서 그 사건의 전모가 점차 드러난다. 이 소설에는 여러 사람의 죽음이 등장한다. 철우에 의해 살해된 미희의 죽음,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진 중서의 억울한 죽음, 철우네 집 앞에서 자살을 선택한 중서 어머니의 죽음, 15년 징역형을 받고 탈옥하는 과정에서 늑대에게 목숨을 빼앗긴 철우의 처참한 죽음, 유기징역 8년형을 받고 심장병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철우 아버지의 죽음. 이 죽음들은 모두 철우의 욕망이 일으킨 나비효과이다. 

이웃이자 동기동창인 중서와 미희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성인이 된 중서는 어느 순간 미희에게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미희는 중서에게서 동생 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으며 한국으로 시집갈 꿈을 꾼다. 바로 조선족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큰 도시로 돈 벌러 나가던 시기였다. 이에 중서는 괴로움에 술만 마신다. 그러나 미희는 한국인과 맞선 보러 간 날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술에 취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중서가 살인자로 지목되며 사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병적인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는 철우가 미희를 겁탈하려다 죽이게 된 것이다. 권력과 돈이 있는 철우는 거짓 증인을 찾아 중서에게 살인의 누명을 씌운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밝혀지지만 이때 중서는 이미 사형 집행이 끝난 후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우는 이 소설에서 철저한 악인 이미지이다. 아버지가 향장이라는 이유로 타인은 안중에도 없으며 도덕성이 결여된 인간이다. 사람을 죽인 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타인에게 누명을 씌우며 살인 사실이 들통난 후에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사건에서 벗어나려 한다. 철우에게는 법 자체가 무의미하며, 그는 돈과 권력으로 법 위에 서려 한다. 철우라는 한 존재가 일으킨 나비효과는 수많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했다. 

아무 권력이나 돈이 없는 중서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철우네 집 앞에서 자살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하며 그들의 권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중서 어머니의 죽음 현장은 ‘섬뜩함’ 그 자체로 철우네 가족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퍼런 번갯불 속에서 흰 머리에 소복을 입은 흉물스럽게 생긴 여인이 벌건 혀를 길게 빼물고 목에 밧줄을 건 채 대문간에 매달려 있었다.” 중서 어머니의 이 모습을 본 후 철우 아버지는 심장병을 앓게 되며 결국 이 병으로 죽음에 이른다. 이렇듯 미희, 중서, 중서 어머니, 철우, 철우 아버지로 이어지는 이 죽음들은 모두 철우의 성적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남태일 작가의 약력이 
표지 안쪽에 남태일 작가의 약력이 실렸다.

5. 자기 구원의 죽음: <아파트에 감도는 잿빛 구름>
이 소설은 초반부에 충격적인 자살 현장을 목격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영팔이는 아파트 건물을 배경으로 급속히 하강하고 있는 물체가 흰옷 입은 여인임을 알아챈다. “여인은 엉덩이가 먼저 떨어질 듯 하더니 방향을 바꿔 ‘퍽-’하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오른팔이 먼저 떨어졌고 다음에 머리를 보도블록이 깔린 인행도에 처박았다.” 그리고 묵사발이 된 여인의 얼굴, 비릿한 피 냄새, 붉은 핏물 위에 눈가루처럼 흩어진 허연 뇌수, 그것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시신이었다. 아주 처참한 자살 현장이다. 

결말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자살한 사람은 미경이라는 조선족이다. 그녀의 인생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한국붐으로 동네 사람들이 잘 살게 되면서 그녀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한국인 영팔이를 따라나선 것이 그 시작이다. 미경이의 미모에 반한 송영팔은 자기가 있는 한국 회사에 통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한다. 미경이 또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과 딸을 뒤로 한 채 따라간다. 그러나 경원이는 가짜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서도 매일 아내에 관한 악몽에 시달린다. 아내의 연락도 줄어들고 점차 소원해지자 경원이는 고통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는 시신까지 이미 부패한 충격적인 죽음 현장이었다. 

미경이 또한 영팔이의 덫에 걸려 결국은 그와 동거를 하기 시작하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영팔이는 사랑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자에게 또는 놀음에 쉽게 빠져든다. 그러다 미경이가 아들을 낳게 되는데 불행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공장은 화재로 잿더미로 변하며 그들은 빈털터리가 된다. 경원이가 죽은 관계로 미경이는 결혼비자를 받을 수 있어 한국행을 선택한다. 그래도 열심히 일한 끝에 미경이는 한국에서 식당에 노래방까지 운영하면서 삶이 점점 좋아졌고 아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다.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아들이 여자친구라고 데려온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입양 보낸 자신의 딸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경이는 또 영팔이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나마 모은 돈과 아들, 딸이 빌린 돈을 모두 사기당하고 만다. 거기다 어떤 여자가 영팔의 자식이라며 갓난아기를 집 앞에 두고 가는 일이 발생한다. 한꺼번에 덮친 이 악몽들에 미경이는 남보다 잘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친 자신이 허망한 짓을 했다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지나친 욕심과 허영 때문에 빚어진 악과라고 한다. 결국 미경이는 아들과 딸이 남매라는 관계를 옥경이에게 알려주라는 문자를 남기고 자살한다. 이 모든 악과의 장본인인 영팔이도 결국 딸까지 팔며 빚쟁이에게 콩팥까지 떼이게 된다. 미경이와 영팔이는 모두 욕망 때문에 파국을 맞은 인물들이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은 그들 자신 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 소설에서 경원이의 자살은 사랑을 잃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이며 미경이의 자살은 자기 구원으로서의 죽음이다. 미경이는 스스로 자신이 죄가 많은 여자이며 모든 것이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망이 빚어낸 악과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미경이는 구원을 하고자 자살을 선택한다. 그동안 경원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린 미경이의 자살에는 속죄의식이 들어있다. 유서에 경원이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나 자살을 선택한 자신의 행동이 무책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나는 것은 자기 구원에 이르기 위한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죽은 경원이에게 속죄를 해야 그녀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미경이는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자유로이 나는 새도 고통이 있을까? 하늘에는 아픔도 슬픔도 없는, 행복하기만 한 딴 세상이 있겠지? 자살 직전 자유로이 나는 새를 보고 미경이도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죽음을 통해 그녀는 드디어 이 세상의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중국 조선족들이 개혁개방과 함께 추구하게 되는 더 나은 삶을 향한 노력은 모험과도 같다. 어떠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가듯 미지의 세계를 향해 무조건 달려드는 것이다. 영팔이를 따라나선 미경이는 대신 남편과 아이를 떠나야 했고 가난하지만 안정적이고 확실한 삶을 멀리해야 했다. 미경이와 같이 그때 당시 한국 기업 혹은 한국을 향해 집을 떠난 조선족들 중 결과적으로 파탄을 맞이한 가족은 적지 않다. 소설에서 경원이가 가짜 이혼을 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말처럼 그 시대 돈을 벌기 위해 가짜 이혼을 하고 한국행을 선택한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한 노동이 아닌 가족의 파탄을 전제로 한 경제적 추구는 결국 파국을 만든다. 경제적 여유를 얻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을 선택하지만, 끝없는 욕망은 그 길을 선택한 순간부터 인간을 삶의 노예로 전락하게 만든다. 그 시점부터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는 행위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삶이 남태일의 소설에서는 여러 가지 죽음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류경자 프로필 

현재 서남민족대학교 강사. 연변대학교 중문과 학사∙석사,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역서 『디지털기술과 신사회질서의 형성』. 논문 「루쉰의 탈경계적 상상력과 치유의 글쓰기」, 「장용학 소설의 자기반영성과 메타픽션적 글쓰기」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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