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송 흑룡강신문 논설위원/사회학 박사

김범송 박사 

얼마 전 나는 2박3일 일정으로 서울 나들이를 다녀왔다. 이는 4년 만의 ‘한국 방문’이다. 그동안 자주 드나들던 서울에 발길이 뜸해진 것은 지구촌 ‘대형 악재’인 코로나19 때문이었다. ‘나들이’의 주된 목적은 책 출간을 위한 출판사 방문과 서울의 지인에게 부탁한 한국어 도서를 찾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금번 서울 나들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호사다마(好事多魔)’였다.

택시를 타고 대련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였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입구에 긴 줄이 늘어섰다. 입구를 통과하려면 필히 ‘건강신고서(健康碼)’를 작성해야 했다. 휴대폰 사용에 익숙지 않은 나에게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앞에 선 젊은 중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등록을 마쳤다. 모바일 기기 사용에 서툰 필자는 코로나 유행 기간 매번 지하철을 탈 때마다 휴대폰 기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에 아니었다.

오른쪽부터, 하얼빈 출간식(2016.9)에 참가한 배규식 전 노동연구원장과 저자, 곽승지 교수 순이다. 
오른쪽부터, 하얼빈 출간식(2016.9)에 참가한 배규식 전 노동연구원장과 저자, 곽승지 교수 순이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동안 신세를 진 서울의 지인에게 줄 선물과 출판사 임원진과 마실 중국술 네 병을 챙긴 것이 신경이 쓰여 은근히 가슴을 졸였다. 몇 년 전 인천 공항에서 세관 공무원으로부터 벌금을 당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무사히 통과돼 벌금을 면했다. 그런데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4년 전의 ‘불미스러운 일’로 공항에서 벌금 세례를 당한 것이다. 이 또한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는 이른바 ‘호사다마’였다.

공항에서 대림에 도착하는 리무진버스 요금은 1.6만원이었다. 4년 전의 9000원에 비해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가 사실임을 체감했다. 대림역에 하차해 자주 머물던 모텔을 찾아갔더니 ‘폐쇄’된 상태였다. 동포분의 소개로 어렵게 대림의 한 싸구려 여인숙(旅館)에 여장을 풀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2호선 전철을 타고 서초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와이파이(Wi-Fi)가 작동이 안 돼 휴대폰이 먹통이 됐다. 마침 출판사 기사분이 차를 몰고 마중 나왔다. 후에 알고보니 기사가 아닌 박태훈 영업이사였다.

출판사에 도착하니 이대현 사장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그의 머리에 흰서리가 많아졌으나 여전히 정력이 충만했다. 이대현 사장은 나의 창작 인생에 길라잡이 역할을 한 분이다. 2000년대 후반 나는 역락에서 책 세 권을 출간했다.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해 출간한 ‘인구문제 연구’는 우수학술 저서(2010)로 선정된 ‘출세작’이었다. 그 덕분에 네이버에 등록되고 2010년 ‘한국인물사전(연합뉴스)’에 재외동포학자로 선정됐다. 그동안 중국 굴지의 대형 출판사와 제휴해 많은 (中國)도서를 출간한 이 사장은 조선족 지성인 김호웅·정신철 선생의 작품을 출간했다며 나에게 관련 도서를 증정했다. 

저녁은 서초구 한 고급 한정식에 초대를 받았다. 오랜만에 가진 임원진과의 회식 자리였으나 분위기가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해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2차는 내가 두 분 이사를 대림동의 (重慶)샤브샤브 식당에 청했다. 박태훈 이사는 일면지교(一面之交)였으나 이태곤 편집이사는 나와 15년 지기였다. 술자리가 3차까지 이어져 나는 만취했다. 휴대폰 알람을 이튿날 11시로 설정했으나 대취(大醉)한 나의 단잠을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튿날 12시에 대림동에서 만나기로 서울 지인과의 약속을 파기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서울 지인’은 다년간 (延邊)과기대에서 교양학부 교수를 지낸 곽승지 박사이며 필자와는 20년 지기이다. ‘조선족 사위’로 불린 곽 교수는 조선족 관련 저서 여러 권을 펴낸 지성인이다. 몇 년 전 나는 곽 교수의 초청을 받아 과기대에서 ‘특강’을 했다. 또 곽 교수와 배규식 박사는 하얼빈에서 진행된 출간식(2016)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전 노동연구원장 배 박사는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낸 경제 전문가이다. 4년 전 그의 초청을 받아 세종에서 중국경제 관련 강연을 했다. 저녁은 대림역의 조선족 식당에서 ‘상경(上京)’한 배 박사를 청해 소맥을 마셨다. 전날에 과음했고 또 소맥에 약한 나는 맥주를 마셨다. 필자는 상기 두 분에게 여러 번 도서 구입을 의뢰해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다.

이튿날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던 가을비가 10시에 멎었다. 공항에 도착해 탑승 수속을 할 때 사달이 생겼다. 카운터 여직원은 짐 무게가 초과돼 벌금 20만원을 내라고 했다. 30여 권의 책 무게가 40kg에 달했다. 한국돈이 없어 휴대폰을 이용한 ‘인민폐 지불’ 여부를 물었더니 그녀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마침 다가온 남자 상사에게 하소연했더니, 그는 ‘하불위례(下不为例)’를 충고하며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인천 공항에서 겪은 ‘일비일희’였다. 그들은 필자를 중국인으로 간주할 때는 가차없이 벌금을 부과했으나 한민족 동포로 여길 때는 인정을 베풀었다. 미상불 인천 공항은 ‘법’과 ‘인정’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대련 공항 도착 후 세관 담당자는 의심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도서 사용처를 캐물었다. 홀연 필자는 적대국의 ‘금서(禁書)’를 밀반입하는 불순분자로 취급됐다. 섬찟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도서 용처’를 구구히 설명했다. 몇 년 전 일본의 지인에게 부탁한 (毛澤東)관련 도서를 대련 세관에 압수당한 적인 있는 나는 어렵사리 구입한 도서를 몰수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조바심에 마음을 졸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었다. 다행히 필자의 신분을 확인한 담당자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악화된 한중(中韓)관계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세상만사 쉬운 일이 없다. 우리네 인생에는 좋은 일과 궂은일이 병존한다. 즉 ‘호사(好事)’에는 ‘다마(多魔)’가 따르기 마련이다. 또 ‘좋은 일’을 이루려면 많은 풍파와 좌절을 겪어야 한다. ‘호사다마’,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 또한 지천명인 내가 어렵사리 깨친 인생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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