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맥주 캔 밑바닥을 잠든
이산화탄소를 흔들어 깨웠다 
아무렇지 않게
의미심장한 사연들이
거칠게 
또르르 솟아오른다
방안 가득
어둠이었다

턱을 날 세운
자리에서
수염들의 별자리를 찾던
손끝이 문득
하늘로 향한다
 
—저기 저 4월은 어디쯤 걸려 있을까
 
—그곳에는 계절이 없어 외로움뿐이야 
 
—아니야 계절이 있어 외로운 거겠지 
 
내 눈가 가까이에서
가지런한 수염들이 
아른거린다 

- 외로움에는 계절이 없어 너처럼 
 
네게 가고 있는
이 길에는
세월만 없다 

여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의미심장한 기도를 담은
흔적 위로 시간들은  
서로를 얼룩져간다

또르르

 

혜화, 길음
 
 
캄캄한 골목에서
눈을 감고
잦은 기침소리를 찾았다
비는 내렸고
족함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울음들이
괴괴하게 삐었다
허연을 읽고
김경주를 베껴썼던 날들
울다가 깨여나
그것들을 외웠던 날들은
북극과 남극을 자주
다녀오곤 했다
한 때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우물이란 게

어둡고 깊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과 인내가 내 안에서
깊어야만 했던 날들은
가지런한 것들만 찾곤 했다
언젠가 역주행하는 지하철에서
길음역을 지나친 적이 있다
서 있거나 앉거나 온통 무리수였다
무궁진창 쏟아지는
유령들을 읽을 수가 없어
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던 순간
그렇게 심장도 함께
쿵—
밑바닥 쳤다
여러 날을 깎지 않았던
그 사람의
자지러진 수염이 떠올랐다
그게 인생이라면
나는 그것들을 어뤄만져야 했다
가지런했으니
그것ㅍ만으로도
가끔
이 사랑을 다녀오곤 했다
 
 
낙화 (落火)


어항 속 배꼽은 외롭다
나긋한 빗물들이
위로의 말로 되기까지
배꼽은 하늘로 가득 차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말이야 
불을 훔치고 있는 동안 
우리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에티오피아를 볶고 있었을 거야
우리가 게이샤를 맛보고 있을 때도
엄마는 볶고 있던 에티오피아의 맛을 
상상하고 있었을 거야 

인생 뭐 다를 게 있나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치고 있는 동안 
엄마는 에티오피아를 
볶고 있었던 거지 

내 앞을 파도치는 외로운 불똥 하나
거품을 달리는 밀물을 물고 
세월을 힘껏 
부딪치다―

인생 뭐 다를 게 있나? 
엄마가 에티오피아를 볶는 있는 동안 
모두가 배꼽의 언어로 
울고 있었던 거지

어린아이를 울리려고 
인생이 에티오피아와 
엄마를 만나게 했듯 
그게 뭐 다를 게 있나 


느린 아이
 
 
늑장을 부려보았다 여리게 나부끼고 정처 없이 떠도는 먼지 같은 신세였지만 닿지 않으려고 바람을 기다려본다 이보게, 마음을 열어보게 그 손바닥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곧 스며들거야 이보게, 조금 망설여도 돼 늑장을 부려보았다 마지막이다 다가오는 손바닥으로 내려앉기로 했다 내 가벼움은 여기까지다 도망다니려는 마음도 여기까지다 모두가 졸릴 때까지 그 때까지만 바람을 기다리겠다


수상낙화밤이란어둠이란 무엇인지 소용돌이 안에서 가만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시작과 시작이 끝이 된 곳모르는 누군가가 발가락 사이에서자꾸만 얼굴을 내민다 혼자서 얼마나 쓸쓸했겠냐 아니에요 전 혼자가 아니에요달력이 어제 도착해서 말이야미안하다 많이 늦었지? 먼 이곳에서 콧물을 훌쩍거리며나무토막 같은 검지 손가락으로왼 뺨을 훔치는 모습이 자꾸만 농담처럼 간지럽혔다아니에요 저는 혼자가 아닌걸요발가락 사이에서 모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 아니에요...
 
겨우
목소리를 버린다

아니라는 것에 이젠 길들여졌나봐요


 

시간은 나에게 잠시 그대를 빌려주었을 뿐이다

 

꿈속에서 그대가 나를 바라본다 총구로 함구무언들을 쓰러뜨린 이별 같은 날들을 그대는 고요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의 표적이었던가 깃발도 없이 바람이 불었다고 그 바람에 그대의 눈초리가 흔들렸다고 그래서 비가 쏟아지고 숨 죽인 열병난 날씨가 그대를 못 견디게 했다고 결국 그대도 그곳의 날씨를 닮아 열병에 지쳐버리게 되었다고그런데시간은 왜 꿈속에서조차 흐르는 걸까나는 알고 있다 그대란 없는 시간들이라는 것을 나는 또 한 가지를 알고 있다 그대의 멕시코 만에는 별자리가 없다는 것을 그 촘촘한 것들은 급히 다녀간 눈동자들이었으니 그 속에서 그대의 눈이 깨어났고 눈물이 자라났다는 것을 지금 내 안에서 시간들이 자라나는 것처럼 하지만 어딘가에 풀어놓은 별떼들은 언젠가 그대를 스칠 것이다 그것들이- 으깨지지 않게 그대의 눈을
잠시 입맞춤으로 
잠가 놓을 것이다 

 

2차 맞물림 
 
 
단 하나를 살아 갈 때가 있다
티비도 없는 빈 방에서 바람을 얻어가는 일조차
이젠 귀찮다
바닥에 몸을 붙여 침대를 올려다 보았다
어지럽게 쌓인 책 무덤 위 커피잔에
한이 맺혀 있다
말라붙은 커피얼룩의
끈적끈적하게 바닥으로 붙어가는 몸은
자꾸 바닥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나는 현제와 과거를 오가며 결국
라디오에서 흘러가는 먼 목소리를 따라간다
낯선 여자의 상처를 물려받고 낯선 여자로 되어버린다
내 목소리의 사연들로부터 누군가가 나를 이어갈 수 있다면 창틀은
여름만의 무덤은 아니겠다는 착각을
간이역의 맥주간판에 버리고 온다
어떤 시선보다 서늘한 바람 한 점이 그쳤다
다시 불었다 잠 뚜껑이 열렸다
 
이번에도 바람이었다 나는 잘 안다
그건 당신이 아니라는 걸

 정희정 프로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13년 《연변일보》가 주최한 <해란강문학상>에 수필 <한번 쯤 사랑했다>로 등단했고, 2017년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에 가입했다. 그 사이 《연변일보》, 《연변문학》, 《송화강》,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등 매체에 시, 수필, 소설을 발표하며 문필활동을 적극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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