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여름 워싱턴 DC는 한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쏟아졌다. 나는 오후 내내 상품 배달로 분주하게 돌아쳤다. 갈증에 시달린 목구멍은 역겨운 내가 확-확- 풍겼다. 어느덧 전신이 물참봉이 되였다. 뒤늦게 사무실로 돌아와 흠뻑 젖은 웃옷을 갈아입었다.

“조 실장, 오늘 한턱 쏴야겠어.”
안사장님이 벙글벙글 웃으며 사무실에 나타났다.
“왜요? 뭐 저한테 팁이라도 주시게요? 얼마 주실 건데요? 200불 주실 건가요? 그럼 100불은 거뜬하게 쏠게요.”
나는 괜스레 억지를 썼다. 그래도 안사장님은 여전히 웃는 모습이었다.
“조 실장, 축하해 <주간 코레아>서 팩스 보내왔어.”
“팩스요?”

 

일전에 나는 <<주간 코레아>>에 “디아스포라(离散)의 비극”이란 문장을 투고했다. 뜻밖에 <<주간 코레아>>에 채용되었다. 며칠 한인문화센터에서 개최되는 “미국 이민 100주년 세미나(交流会)”에 참석하라고 통지했다.

“미국 이민 100주년 세미나”는 애난데일 한인 문화 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모임에는 버지니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 산재한 한인회의 회장 20여 명이 참석했다. 세미나의 개최에 앞서 일동은 정중하게 기립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아리랑”을 열창했다. 후리후리한 키에 머리칼이 번쩍번쩍 빛나는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는 괜스레 헛기침을 토했다.

 

“오늘 무더위를 마다하고 자리를 빛내주신 회장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나무 목자(), 아들 자자() (李氏) 고요 이름은 경원(静远)입니다. 현재 동양식품을 경영하고 있어요. 이곳 애넌데일 한인회 회장직과 으뜸 교회 장로직을 겸직했어요.

오늘 세미나에는 <주간 코레아>의 발행인 박선영 여사님을 특별히 모셨습니다. 박여사님은 서울 세종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요 1980년대 말에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박여사님은 1994년에 사재를 털어 <주간 코레아>를 발행했어요. 현재 2만여 부를 돌파했어요. 그럼 박선영 여사님의 특별강연을 청취하겠습니다.”
장내에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50대로 보이는 성이 마이크 앞에 나섰다. 중키에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옇은 화장기가 내비.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깊숙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미국 이민 100주년 세미나에 요청해 주신 경원 회장님과 여러 한인회 회장님들에게 감사드려요. 강연에 앞서 특별한 손님 분을 소개해 드리겠어요.”

  미국견학기념
  미국견학기념


박선영 여사님은 바른편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는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분은 멀리 중국 연변에서 오신 기자분이세요. 적은 한국 경상남도 창녕군이고요 간도 이민 4세대예요. 연변대학 국문학과(조선언어문학과)를 졸업하고 연변텔례비죤방송국에서 다년간 기자, PD로 근무했어요. 일전에 <주간 코레아>에 간도 이민사를 담은 글을 투고했어요.”
일순간 나는 20여 쌍의 뜨거운 눈길을 감지했다. 괜스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였다.

 

“돌아오는 2003년에는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요. 사료는 이렇게 기재했어요. 1902년 12월 22일 한겨울, 제물포항에 혹독한 추위가 덮쳤어요. 이날 102명의 한국인 개척민이 일본 여객선 캥가마루에 승선했어요. 당시 이들은 3년간 단기 동계 약을 맺고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게 되였어요. 일행은 1903년 1월 2일 일본 규슈에서 미국 갤릭호선에 환승했어요. 11일간의 힘든 여정을 거쳐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했어요. 당시 102명의 이민 행렬에는 남성 56명, 녀성 21명 그밖에 어린이 13명, 젖먹이 유아 12명이 포함되었어요. 이들이 아메리카 코레아 이민 제1세대였어요.

 

한국인의 해외 이민 역사는 19세기 중엽 중국 동북지역과 20세기 초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농업이민으로부터 시작되었어요.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된 해외 이민자 수는 급속하게 상승했어요. 특히 1930년대 일제의 강압적인 이민정책에 의해 중국 만주지역으로의 대규모 집단이민이 있었어요.

<한국전쟁>이 결속된 외화벌이에 나선 광부, 간호사들의 독일 이민이 있었어요. 시기 또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부분적 한국인의 베트남 이민도 있었어요. 1970년대 유신정권의 강압을 피해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미국 이민 붐이 형성되었어요. 1980년대는 브라질, 오스트랄레아, 캐나다,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세계 각국으로의 해외 이민이 있었어요.

 

2000년을 기준으로 미국 센서스(人口调查)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혼혈을 포함해 122만 8400명으로 집계되었어요. 그러나 한국 외교통상부의 <재회동포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을 기준으로 해외에 거주한 한국인은 142개국에 564만 명으로 집계되었어요. 그중 현재 미국에 거주한 한국인은 205만 7000여 명으로 집계되었어요. 이는 미국 이민국 센서스 통계수치보다 무려 100만여 명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어요.

한국은 지난 100여 년의 해외 이민 역사를 통해 이미 중국, 이스라엘과 함께 세계 3대 해외동포 보유국의 행렬에 올랐어요.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으며 여러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지난해 미국 이민국은 중국계, 히스패닉계(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스페인 혈통)를 비롯한 8개의 소수민족을 상대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원하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어요. 중국계와 히스패닉계를 비롯한 7개의 소수민족은 90% 이상이 미국 시민권 취득을 원한다고 밝혔어요. 그러나 유독 한국인만은 90% 이상이 <미국 시민권 취득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응답했어요. 당연히 <코레아는 본국 지향성이 지나쳐 주인의식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어요.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한인 커뮤니티는 같은 문제점을 반드시 심사숙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9.11테러”이후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은 갈수록 난관에 봉착했다. 근래에 “E-2 비자”(비이민 소액 투자비자)를 용해 미국으로 들어오는 한국인이 점점 많아졌다. 이들은 달에 6~7천 달러는 식은 먹기로 벌수 있다는 이주공사의 말만 믿고 무작정 미국행을 선택했다. 대개 10만 달러를 웃도는 자금을 투자해 세탁소, 리커 스토어, 그로서리, 커피숍 등 비즈니즈에 종사했다.

그러나 “9.11테러”와 함께 갑자기 경제 불황이 닥쳤다. 다수의 한인 업소들은 근근 특식으로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다. 그러므로 많은 한인 업소들은 미국의 이질적인 택스(税收) 제도를 가장 꺼려 했다.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택스”를 기피했다. “돈을 벌려며는 세금을 적게 납부해야 한다. 가능한 아예 납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한인 업소들은 같은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엄격한 신용사회제도를 구축했다. 누구나 반드시 개인소득세를 납부해야 하였다. 그래야 퇴직 후의 노후생활을 보장받을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탈세하지 않으면 돈을 벌수 없다. 돈을 벌지 못하면 노후생활을 보장할 없다.”라는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주류사회로부터 “납세를 거부하는 이상한 소수민족”으로 지목받았다.

미국은 해마다 4월이면 전국적인 세금 조사를 진행했다. 그때마다 한인 업소들은 중점적인 조사대상으로 지목되었다. 2001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인 의사가 탈세 협의로 법정에 기소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민 2세대 김병기 씨는 한인타운에서 20여 년간 의사직에 종사했다. 연방 세무국은 지난 5년간 추적 끝에 200만 달러의 탈세 협의 사건을 사출했다. 김병기 씨는 즉시 의사 라이선스(医生执照)를 차압당했다. 법정에서 600만 달러 벌금액이 책정되여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한국일보”미주본사의 주필은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다.”라는 한편의 칼럼을 등재했다. 그는 한인 커뮤니티의 그릇된 금전 의식을 통절하게 질책했다.

 

“하와이 농장 이민 본격적인 미국 이민 시점은 1966년으로 잡을 있다. 이미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재 한인 커뮤니티는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아직까지 재벌은 없지만 많은 부자는 적지 않다. 그러나 별것 아닌 재산을 갖고 마치도 억만장자인 요란스레 자화자찬한다. 고개를 쳐들고 도처에서 냄새를 풍기는 꼴을 보면 매우 촌스럽다.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다. 돈을 번 사람은 그 돈을 쓴 다음에 평가해야 한다.

 

한인 커뮤니티에는 한결같이 선호하는 생활양식이 있었다. 남보다 더 좋은 호화주택을 마련하려고 애쓴다. 남보다 더 좋은 고급차를 구입하려고 설친다. 남보다 더 값비싼 골프장을 드나들려고 경쟁한다. 그러나 미국의 억대 부자들은 재부를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재투자한다. 아니면 자선단체에 기부해 약자를 구제한다. 당연히 연방정부로부터 세금 감면 혜택을 누린다. 세계제1갑부(甲富) 빌 게이츠는 해마다 5억 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는 흑인 노숙자들에게 제공하고 견지 벌을 지원하고는 흡족해한다.

 

지난 1992년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센트럴에서 “4.29”흑인 폭동이 발생했다. 당시 극단적으로 자아중심적이었던 한인 커뮤니티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폭동의 주요 원인은 백인 경찰이 공권력을 용해 흑인 청년을 총기로 죽였다. 그러나 법정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분노한 흑인들은 한인 상가가 밀집한 사우스 센트럴에 집결했다. 분노의 타깃을 “코레아 타운”에 돌렸다.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닥치는 대로 방화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는 도리여 이렇게 비꼬았다.
“흑인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있는 코레아는 베푼 것이 너무나도 적었다. 코레아와 흑인 간의 인종 갈등은 결국 유혈적인 폭동 사태로 비화했다.”

폭동 사태는 갈수록 심각했다. 그러나 경찰은 건너 불구경식으로 여전히 수수방관했다. 한인 커뮤니티는 부득불 자구책으로 총기를 들고 나섰다. 마침내 인명사고가 발생했다. 한인 상가는 수십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연방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도리여 폭동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들썼다. 결국 사우스 센트럴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2002년 봄에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4.29”흑인 폭동 10주년을 맞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는 외면했다. 근근이 흑인교회를 찾아 위문한 급급히 백악관으로 돌아갔다. 백악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이 코레아 타운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코레아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코레아 타운의 실상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코레아 타운은 아직도 놀라운 거리감을 두고 있다.”

“9.11테러” 이후 한국계 출신의 미셀 박은 피해자 실태조사를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그는 대통령 국정 자문 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당시 중국인 커뮤니티는 관광객이 급격히 줄어들어 비즈니스가 안된다는 리유로 100만 달러의 패해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미셀 박은 한인 커뮤니티도 피해 보상금을 받을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인회 회장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당했는가고 문의했다. 그런데 한인회 회장은 헛기침을 토하며 뜻밖에 이렇게 대답했다.
“다 지나간 일이에요. 우리는 진짜 괜찮다니가요. 피해 보상 신청은 전혀 필요 없어요.”

미셀 박은 기가 막히도록 안타깝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미국인은 눈곱만한 피해를 당해도 즉시 항의하고 소송까지 제기한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는 분명히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도 항시 이런 식으로 넘겨버린다. 결국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거절한다. 반드시 함께 뭉쳐 단합된 힘을 보여줘야 한다. 아니면 한인 커뮤니티는 영원히 주류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수직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계층 사회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수평적으로는 각자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다원화 사회였다. 미국은 누구든지 능력만큼 대접해 주었다. 또 누구든지 능력만큼 대접받을 것을 선호하였다. 하지만 한인 커뮤니티는 부질없는 허풍을 떨며 주류사회에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하였다. 흡사 두루마기 차림으로 미국의 거리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시골선비를 방불케 하였다.

이날 경원 회장은 “미국 이민 100주년을 기념” 하여 이런 건의를 제기했다.
“돌아오는 2003년 1월에 <미국 이민 100주년 사료>를 출간하려 합니다. 사료의 수집과 정리는 박선영 여사님이 책임졌어요. 지금 계획으로는 <미국 이민 100주년 사료>를 2만 부 정도 펴내려고 하는데요. 후원금은 한인회에서 책임지기로 했어요. 저는 애난데일 한인회를 대표해 5000달러를 기부합니다.”

한인회 회장들은 분분히 후원금을 내놓았다. 많게는 5000달러 적게는 1000달러 기부했다.

  미국이민 1세대 (유기종목사님일가)
  미국이민 1세대 (유기종목사님일가)

어느 나는 “주간 코레아”에 실린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란 기사에 시선이 끌렸다. 일전에 “뉴욕 타임”지의 기자가 보스턴에 거주하고 있는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 취재한 글을 작성했다. 박선영 여사가 한글로 옮겨놓았다. 나는 만여자에 달하는 문장을 단숨에 읽었다.

노엄 촘스키 교수는 “좌파 지식인”에 대한 감수를 이렇게 피력하였다.
“나는 좌파 지식인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 좌파란 정치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뉴욕타임스>지와 케네디 상원 의원이 좌파로 불렸다. 유럽에서는 <온건한 사회주의자>가 좌파로 인정받았다.”

나는 “미국의 양심 노엄 촘스키"에 매료되었다.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 대해 심사숙고했다. 어린 시절 내가 받은 교육은 “좌파”란 언제나 혁명, 폭동, 동란과 관되였다. 반면에 “우파”란 반동, 퇴보, 보수적인 것과 관되였다.

나는 여태껏 미국에는 “우파 지식인”은 있어도 “좌파 지식인”은 없다고 인식되었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지식인은 “좌파”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더구나 한편의 문장을 통해 “미국의 양심"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 교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어느 나는 용기를 내여 박선영 여사님을 찾아갔다.


박선영 여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1928년에 미국 필라델피아 시티에서 내여 났다. 그의 부모는 가난한 유대인 희부리어학자였다. 1913년에 러씨야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노엄 촘스키

동년 시절에 보냈던 마을은 대부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이민 토릭 신자였다. 당시만 하여도 가톨릭 신자들은 강렬한 반유대주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걸핏하면 “유대인을 쫓아내라”라고 웨치며 나어린 촘스키를 괴롭혔다. 그러나 동년 시절의 촘스키는 반유대주의 공포 속에서 무엇이 사회적인 편견인가를 감촉했다. 무엇이 민족적인 증오심을 도발하는가를 심사숙고했다.

 

노엄 촘스키에게는 “좌파 지식인”삼촌이 계셨다. 뉴욕에서 자그마한 신문가게를 경영했다. 동년 시절의 촘스키는 삼촌의 책가게에서 “좌파 지식인”들이 저술한 책을 접촉했다. 그는 삼촌의 인도하에 급진적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약자와 빈자와 패자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백인 우월주의”를 반대하고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하는 정의로운 청년으로 변모했다.

대학을 졸업한 노엄 촘스키 교수는 언어학, 철학, 심리학, 교육학, 인지과학 등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따냈다. 이미 세계적인 언어학 대가로 추앙되었다. 그는 미국 정치에 대해 다년간 시종일관하게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했다.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주목받았다.


“9.11테러”이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을 제거하는 “성전”을 호소했다. 당시 노엄 촘스키 교수는 추호의 주저심도 없이 단호하게 질책했다.
“부시 대통령은 <악의 축>이란 단어의 뜻도 모른다. 이른바 <악의 축>이란 문구는 한낱 언어람용에 불과하다. 이란과 이라크는 이미 20여 년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무슨 >이란 걸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은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이란 용어에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상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를 보복의 타깃으로 선정했다. 같은 편견을 감추기 위해 부득불 <악의 축>이란 괴상한 문구를 조작했다.”

 

“9.11테러” 이후 “애국인가?” 아니면 “반전인가?”(反战) 또는 “악의 축”인가? 같은 엇갈린 시비가 미국의 시선을 흐리웠다. “좌파 지식인” 노엄 촘스키 교수는 선뜻이 나서서 미국의 엇갈린 시선을 똑바로 잡아주었다.

“<9.11테러>는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러나 정직한 눈으로 관찰하면 결국은 단순한 문제였다. 지난 한시기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빈번하게 테러리즘(恐怖主义)을 조장했다. 정치적인 득실 따라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팔레스타인에 폭력적인 무력을 행사했다. 10년 전의 걸프전쟁이 없으면 10년 후의 <9.11테러>도 없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자 노엄 촘스키 교수는 주저 없이 “불량 국가”라는 저서를 집필했다. 촘스키 교수는 미국의 “야만적인 대외정책”에 대해 맹렬하게 질타했다.

 

“1975년에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침공해 불과 2개월 사이에 무려 6만여 명을 살해했다. 잔혹한 살육은 1999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줄곧 수하르토 정권을 절친한 우방으로 간주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미국은 지난 40여 년간 사회주의국가 쿠바에 대해 줄곧 엄밀한 경제봉쇄정책을 감행했다. 미국은 가난하고 소외된 쿠바가 혁명을 일으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가봐 두려웠다. 쿠바에 사회주의 깃발이 나부끼면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민주주의 깃발을 휘날릴 수가 없었다.

미국의 야만적인 대외정책은 다년간 세계 곳곳에서 폭력을 자행했다. 미국은 드디어 <9.11테러>의 타깃으로 되였다. 미국은 테러를 야기하는 <불량 국가>로 매도당했다.”

 

박선영 여사님은 책장에서 두루마리로 된 포스터를 찾아냈다. 영국의 좌파 철학자 베트 런트 러셀의 포스터예요. 한편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세 가지 열정이 나의 생애를 지배했다. 첫째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었다. 둘째는 지식에 대한 탐구였다. 셋째는 약자에 대한 인간애였다.”

박선영 여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노엄 촘스키 교수는 다년간 베트 런트 러셀의 포스터를 소중하게 간직했어요. 그는 ‘지식인의 사명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어요. 지식인은 흔히 공식적인 학설에 순응한다. 용이하게 정치권력의 함정에 빠져든다. 그러므로 반드시 확고한 정치적인 사명감을 소지해야 한다.”

 

나는 박선영 여사님에게 유대인 커뮤니티에 대해 설명해 것을 요청했다.
“조 기자님은유대인 커뮤니티에 흥취를 가졌어요?”
나는 기종목사님의 서재에서 우연하게 “탈무드”를 읽게 경과를 말씀드렸다. “탈무드”를 통해 유대인의 생활철학에 대해 다소 인식을 갖게 되였다고 설명했다.

박선영 여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2000년도 미국 제43대 대통령선거는 역사상 유례없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 민주당은 앨 고어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리고 조셉 리버만 상원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앨 고어 후보는 “투표수 통계 비리 사건”때문에 결국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했다. 상원 의원 조셉 리버만도 당연히 대통령 보좌에 오르지 못했다.

 

조셉 리버만은 유대인 출신이었다. 그의 정치 생애는 좌절을 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유대인 커뮤니티는 이미 대통령 보좌를 넘보는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다.

“조 기자님은 한국의 독립투사 안창호 선생님을 알고 있어요?”
박선영 여사님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 임중빈이 집필한 “도산 안창호- 그 생애와 정신”이란 저서를 접했다. 책은 한국의 명지사에서 펴냈다. 어느 나는 길거리의 싸구려 책가게에서 단돈 5원을 주고 책을 구입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한일합병>이후 망국의 설음을 안고 미국으로 망명했어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단연히 <국민회>를 조직했어요. <국민회>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어요.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먹었다.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잤다. 이는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님은 끝내 대한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어요.


현재 미국에는 한인회, 침목회, 종친회, 친우회 등등 단체들이 무성하게 많아요. 지어 민족통일련합회와 같은 정치조직까지 있어요. 같은 단체와 조직은 모두 한인회 회장님들의 몫으로 되였어요. 한인회는 독립투사 안창호 선생님과 같이 대한 독립을 성취하려는 막중한 과업이 없어요. 그러나 하루빨리 한인 커뮤니티를 미국의 메인 스트리트(主流社会)으로 진출시켜야 하는 막중한 과업을 짊어졌어요.

 

안창호 선생님은 일찍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다.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라고 절규했어요. 역사는 흘러가기 마련이지요. 한인 커뮤니티도 언젠가는 반드시 메인 스트리트로 진출하는 날이 있을 거예요.”

나는 박선영 여사님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여사님은 다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부랴부랴 서재로 들어가 책 권을 뽑아들고 쫓아 나왔다. 한글본 막스 디몬스 저서 “세계 최강 성공 집단 유대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정중하게 인사드렸다.

유대인이 미국으로 이민한 시기는 서기 17세기 중반이었다. 당시 뉴욕에 유대인 집단부락이 형성되었다. 1775~1778년까지 “독립전쟁”시기 미국의 유대인은 약 25000여 명으로 집게 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세계 곳곳에 산재한 유대인들이 미국으로의 본격적인 이민붐을 형성했다. 2000년도를 기준으로 유대인 이민자 수는 이미 56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2%를 점했다.

현재 유대인의 80%는 뉴욕과 보스턴 일대에 집거했다. “유대인을 찾으려면 대서양과 허드슨강이 만나는 곳으로 찾아가라"라는 일설이 있있다. “미국의 돈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려면 유대인 커뮤니티로 찾아가라"라는 일설도 있다. 유대인은 분명히 소수민족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억만장자는 분명히 유대인이 독점했다.

 

유대인 커뮤니티는 현재 미국의 할리우드와 교육계, 법조계, 의학계, 섬유, 언론계를 전면적으로 통제했다. 특히 교육계는 줄곧 유대인이 독점하는 업종으로 되였다. 명문 대학교의 20% 학생은 유대인 출신이었다. 정상급 의과대학의 교수진은 25% 이상이 유대인 출신이었다. 심지어 하버드 법대의 교수진은 50% 이상이 유대인 출신이었다. 2000년도 하버드대학의 유대인 학생 수는 전체 학생 수의 25%를 점했다. 그리고 아세아 혈통의 학생 수가 전체 학생 수의 20%를 점했다. 결과 유대계와 아시아계가 하버드대학의 “절반 강산”을 점했다.

 

유대인은 기원전 1800년경에 중앙아시아의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목민족이었다. 유대민족의 선조는 야브라함이였다. 기원 70년경에 이스라엘 제국은 강대한 로마제국에 정복당했다. 유대민족은 세계 곳곳으로 흟어져 기나긴 “디아스포라”(离散)의 수난을 겪었다.

서기 1605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으로 선교를 왔다. 당시 그는 허난성 개봉(河南开封) 일대에서 유대인 마을을 발견했다. 이들은 잡혼으로 이미 동화되었다. 그러나 유대인 회당 “시나고”는 의연히 보존되었다. 유대인 계율도 의연히 전승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들을 “求忽”라고 불렀다.

 

지난 1800년간 유대인은 기나긴 “디아스포라”(离散)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유대민족은 오늘까지 의연히 끈끈하게 생존했다. 유대민족에게는 “지혜의 서”로 불리는 “탈무드”와 “토라”가 있었다. 유대인은 지금도 “3일간 탈무드를 접하지 않으면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탈무드”는 지난 5천 년간 유대민족의 지성을 보존했다. “탈무드”는 지금도 유대민족의 령혼을 지배하고 있다. 유대인 남성은 기도를 할 때 반드시 “깃바”라는 둥근 모자를 정수리에 얹어놓는다. “탈무드”의 해 따르면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보다 높은 존재란 가르침이 바로 “깃바”였다.

중세기의 암흑시대에 유럽에서는 법적으로 유대인의 토지 소유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토지가 없는 유대인은 농사일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부득불 “천민”으로 취급된 상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탁월한 생존 지혜를 터득했다. 미국의 유대인은 남새와 과일을 직접 재배하기 않는다. 그러나 남새와 과일 도매상의 억대 부자는 일색으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은 은행을 경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계는 유대인이 통제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보석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뉴욕의 보석 가계는 유대인이 독점하고 있었다.

 

1948년 “이민의 나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다. 예루살렘에는 지금도 “통곡의 벽”이란 돌담이 보존되여 있다. “통곡의 벽”은 유대민족의 신전이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정복된 유일하게 파손되지 않은 역사유물이었다. “통곡의 벽”은 뼈아픈 망국을 상징했다. 그러나 유대민족에게 망국의 설음을 가르쳐 주었다. “통곡의 벽”은 이미 유대민족의 생명의 피와 물로 되였다. 유대민족의 정신과 령혼을 지켜준 “에덴동산”으로 되였다.

 

나는 막스 드의 저서를 읽고 중국으로 이주한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상기했다. 부친의 회억에 따르면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은 한국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이었다. 1909년 증조할아버지 일가는 고향을 등지고 중국 간도 살길을 찾아 떠났다. 대대로 살아오던 허름한 한옥을 팔아 여섯 식솔의 여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머나먼 간도 땅까지 안되는 여비는 밑빠진 아리 격으로 어느새 바닥이 드러났다.

별수 없이 9살배기 누이동생을 최령감댁의 민며느리로 들여보내고 얼마간의 여비 돈을 더 구했다. 증조할아버지는 간도땅에 당도할 때까지 3살배기 어린 남동생을 내처 등에 업고 걸어왔다. 증조할아버지의 모친은 생후 8개월의 어린 딸을 업고 장사진을 이룬 이사 행렬을 따라갔다. 간도땅에서 증조할아버지 손아래로 남동생 둘이 더 태어났다.

 

1931년 “9.18사변”이후 일제는 간도땅을 신속하게 강점했다. 국자가 동쪽에 브르하통하를 가로지른 계동 철교를 부설했다. 당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증조할아버지는 부친을 따라 계동 철교 공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역에 시달렸다. 증조할아버지 부친은 밤마다 가슴이 찢기는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어느 끝내 공사현장에서 쓰러졌다. 며칠간 모금도 넘기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성격이 과격한 증조할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였다. 그길로 십장 놈에게 달려가 부친의 장례비를 요구했다. 그러나 도리여 혹독하게 구타당했다. 그 미열로 결국은 왼팔과 다리가 불구로 되였다. 더는 농사일에 종사할 수가 없었다. 봄철과 가을철에는 산나물을 뜯고 약재를 채집했다. 여름철에는 브르하통하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겨울철에는 야산을 누비며 산닭과 토끼를 사냥했다. 그러나 살림은 따라 쪼들렸다. 산사람 입에 거미줄을 칠 지경이었다.

 

1945년 8월에 일제가 드디어 패망했다. 증조할아버지는 꿈만 같게 광복의 기쁨을 맞이했다. 어느 마을 어른들과 함께 국자 우시장으로 향했다. 점심때 국밥집에 들러 식사를 했다. 푼돈 생겨 내친김에 소주도 곁들였다. 이날 오후 집에 돌아온 증조할아버지는 갑자기 혓바닥이 시커멓게 변색했다. 배를 부둥켜 안고 가쁜 숨을 톱았다. 날색녘에 끝내 눈을 세상을 떠났다.

며칠 장례행렬이 북산으로 떠났다. 집에 남은 증조할머니가 사랑채에서 뜻밖에 증조할아버지의 한쪽 귀를 발견했다. 통곡소리가 마을을 진동했다. 며칠 이웃 마을에서도 장례행렬이 떠난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한쪽 귀를 발견하고 유가족들이 통곡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무슨 영문인지를 깨쳤다. 고약한 일본놈들은 비밀리에 독주를 풀어놓아 무고한 생명을 죽였다.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을 둘째 남동생과 셋째 남동생이 선후로 참군했다. 둘째 남동생은 1948년 탑산 저격전(塔山阻击战)에서 희생되었다. 셋째 남동생은 1950년대 조선전쟁에서 희생되었다.

 김춘선교수님과 함께(우 - 1) 
 김춘선교수님과 함께(우 - 1) 

나는 연변대학 역사연구소 김춘선 교수님의 요청으로 “중국 조선족 혁명 열사 ”편찬사업에 동참했다. 1945년 “8.15”광복 당시 동북지역에는 250여만 명의 조선인이 집거했다. 그러나 광복 무려 150여만 명의 조선인이 귀국길에 올랐다. 동북지방에 남은 조선인은 불과 100여만 명이었다.

 

나는 “중국 조선족 혁명 열사 ”편찬을 통해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민정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 시기에 희생된 연변지역의 혁명열사는 무려 2만여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 95% 이상이 조선족 열사였다. 100만 명에 불과한 조선민족은 나라를 위해 19000여 명의 열사를 배출했다.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 마다 렬사비라네

(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

시인 하경지가 남긴 감개무량한 시구였다. 1952년에 설립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수많은 조선족 열사들의 피와 생명으로 바꾼 귀중한 땅이었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머나먼 한국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8.15”광복 후 해방의 기쁨을 얼마 누려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증조할아버지의 두 남동생은 자치주 성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땅은 선조들의 피눈물과 생명이 스며든 귀중한 땅이었다.

나는 중국에 있을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미국에 있을 때는 무작정 쌓이는 외로움과 고달품을 달래기 위해 종종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조선민족의 대표적인 서정 가요였다. 일설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기 어느 아녀자가 처음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줄곧 조선민족의 애창가요로 전승되었다. 이미 100 가락의 부동한 곡조로 전해졌다. 대표적인 “아리랑”곡조는 강원도 지역의 “정선아리랑”, 호남지역의 “진도아리랑”, 경남지역의 “밀양아리랑”이 있다.

1910년대 “한일합병”이후 일본, 중국, 러시아로 이주한 해외 조선민족은 너나없이 “아리랑”을 애창했다. 1945년 삼천리 강산이 남북으로 분단된 브라질, 독일, 미국, 캐나다, 오스트랄 레아, 뉴질랜드 등등 세계 방방곡곡으로 이주한 조선민족들도 의연히 “아리랑”을 애창했다. “아리랑”은 무엇때문에 조선민족의 애창가요로 전승되었는가?

“아리랑”은 천해지각을 떠도는 조선민족에게 망국의 설음을 달래주었다. 나라의 독립을 학수고대하는 등탑으로 되였다. 죽어서도 잊을 없는 마음속의 고향땅이었다. 세상의 땅끝에서 살지라도 죽는 그날까지 백의동포로 살려는 애절한 민족애였다.

  딸의 대학원 졸업기념
  딸의 대학원 졸업기념

2013년, 딸애는 한국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의 “하나투어”본사에 취직했다. 딸애는 적부터 조선춤에 각별한 흥취를 가졌다. "아리랑"선율에 맞춰 8년간 조선춤을 전수받았다. 지난해 년말 행사 모임에서 딸애는 "아리랑"선율에 맞춰 우리 민족의 전통 춤사위를 선보였다. 딸애는 추는 “조선족 신입사원”으로 인기를 끌었다.

 

나는 종종 딸애와 통화했다. 번마다 딸애에게 “아리랑”곡조만은 언제든지 잊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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