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북아신문]역사는 흐르면서 변곡점을 만든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된 후, 전례 없는 개혁개방의 시대가 힘찬 서막을 열었다. 급기야 대학 시험이 회복 되었고, 국가에서 외자 유치와 IT 인재 양성을 위해 해외로 유학생을 파견하고, 경제발전을 전제로 중한수교 건립을 위한 물밑 작업을 끈끈히 진행해 왔다. 마침내 세기의 소망 중한 국교가 성립되고, 수많은 조선족 유학생들이 일본과 한국에 진출해 해외 조선족 지역사회를 구축하는 등 개혁개방 이후의 30여 년간은 역사적인 변혁의 전환점을 만들어 낸 격동의 연대였다. 그 시대, 그런 역사의 전환점마다 자신의 성실한 노력과 배움의 열정, 견인불발의 정신으로 빈틈없는 업무능력을 과시하며 선구자의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2023년 Astalive(아스타라이브)컵 세계 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 이름을 걸고 주요 후원자로 나선 ‘아시안익스프레스’ 이용식(李龍植) 회장이다.

「2023년 Astalive(아스타라이브)컵 세계 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 이름을 걸고 주요 후원자로 나선 ‘아시안익스프레스’ 이용식(李龍植) 회장.
「2023년 Astalive(아스타라이브)컵 세계 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 이름을 걸고 주요 후원자로 나선 ‘아시안익스프레스’ 이용식(李龍植) 회장.

여기에는 재미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중한수교가 수립된 후 중국 정부의 두뇌집단으로 구성된 중국 국무원 발전연구 중심에서 당시의 형세를 총화 한 업적 보고서에는 “‘동방경제학술회의’(이하, ‘학술회의’)는 중한 국교 수립을 위한 경제 방면에서의 환경을 구축하는 데 커다란 이바지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중한수교 전후 한·중 두 나라 고위급 ‘학술회의’가 네 차례 열렸는데 당시 중국과학원 소속으로 중국 측 대표의 일원으로 초청되어 연락 총책을 맡아서 세미나 발제자 및 참석자들과의 일정을 조율해 학술회의가 물 흐르듯 성공적으로 진행시킨 인물이 바로 이용식 회장이었다.
 
이번 ‘2023 세계 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 대해 이용식 회장은 “작년에 진행한 ‘세계 조선족 글짓기대회’에 이어서 또 한 번 조선족 사회를 놀래우는 거사다.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못하는 조선족 사회의 ‘세계급’ 행사를 일본에서 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의 흥과 끼와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을 만천에 과시하고, 조선족 사회의 사기를 북돋우워 주며 함께 미래를 개척하도록 고동해 주는 대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며, “주최 측과 특히 이번 큰일의 총책을 맡고 노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공헌하고 있는 박춘화 집행워원회 위원장님께 감사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역경을 딛고 학문의 길 열심히 탐구    
 
1972년 9월 9일, 이용식 회장은 중앙민족대학 민족언어문학부의 입학통지서를 가방에 넣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생의 첫 전환점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것도 수도 북경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것이다. 흥분에 잠긴 그는 좀처럼 차창 밖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 이제 그 어떤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장미빛 미래가 너무도 궁금해 났다. 가난한 가정 출신인 그는 아주 소박한 결심부터 했다. “대학 졸업하기전에는 술을 적게 마시자. 연애하지 말자. 집 생각 적게 하고 잡념을 없애자.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자.” 그는 어머님의 기대와 은혜에 보답하고 존엄 있는 훌륭한 인재가 되어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이용식 회장, 어머니와 함께. 
이용식 회장, 어머니와 함께. 

그는 웃옷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흰 손수건에 싼 단단한 뭔가가 만져졌다. 1원, 5원, 10원짜리 종이돈 뭉치! 꼭 300원! “배곯지 말고 사 먹고 싶은 거 사 먹어라. 외지에 나가면 다 고생이란다….”라며, 먼 길 떠나는 아들 손에 아글타글 모은 돈뭉치를 쥐여주던 어머니의 그 모습, 그것은 어머니의 다섯 달 분의 월급이었다. 이용식은 가슴이 뭉클해 나서 뭐라고 대답을 못 올렸다. 돈이 아닌 어머니의 깊고 깊은 사랑,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슴속에 심어준 희망의 씨앗이었다. (네, 어머님! 꼭 성공하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지고 다졌다. 그것이 바로 그 후 끊임없이 분투해 나가는 길에서 그의 마음속 깊이 뿌리 박힌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동생들한테도 미안했다. 5남매 맏이로 자라 아래 여동생들한테 부모님을 맡기고 떠나야 했으니까. 그 눈치를 깊이 알아챈 둘째 여동생이 오빠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빠, 여긴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는 내가 잘 모실 테니까. 우린 그저 오빠 성공하는 날만 기다릴게요.”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 남을 억누르며 둘째동생 손을 꽉 잡았다, “고맙다…오빠, 꼭 노력할게.” 그는 무거운 심정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오빠의 성공을 간절히 바랐던 여동생들과 함께.  
오빠의 성공을 간절히 바랐던 여동생들과 함께.  

1949년 9월 18일 이용식은 할빈 교외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64년 8월 할빈조선족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할빈조선족제1중학교 고중으로 진학했다. 집 형편이 하도 어려워 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때 베개도 요도 없이 작은 이불 하나만 달랑 메고 나타나는 바람에 마중 나온 여학생들이 입을 막고 킥킥 웃어대던 장면이 오늘까지도 이야기거리로 되고 있다.
 
1966년 5월 세계를 진감하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학교는 계급투쟁의 치열한 싸움터로 변했고, 대학교 진학의 문도 닫혀 버렸다. 그해 7월부터 홍위병의 전국 대연결(大串联)이 시작되자 학교는 더한층 수라장으로 변했다.
 

사진 자료 
사진 자료 

1966년 8월 31일 오후 4시경, 그는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 주석의 제2차 홍위병 접견 때 자리를 같이하는 행운도 가졌다. 바로 5메터쯤밖에 안 되는 코앞에서 모택동, 림표, 주은래, 류소기, 주덕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순간을 그는 친 눈으로 목격했다. 당시 학생들이 본 모택동은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모주석어록을 손에 높이 쳐들고 “모주석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17세 어린 나이에 체험한 “기적적인 순간”이었다.
 
1968년 11월 그는 모주석의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돌아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라는 호소에 따라 봇짐을 싸서 노3기 졸업생(老三届毕业生, 66, 67, 68년 졸업생) 60여 명과 함께 할빈 교구의 태평구 민주공사에 하향(下乡插队)해서 단련을 받기 시작했다. 1969년 3월 그는 할빈시 당 건설(整建党工作队) 선전대로 추천되어 모주석이 직접 지휘하는 지방 당 건설 사업에 참가했다. 당시 역사가 남긴 지방 경제 사건의 난제를 해결하는데 업적을 세워 할빈시 정부로부터 “할빈시 당 건설 5호 대원”이란 표창을 받았다. 그해 12월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71년 3월에는 할빈조선족제3중학교 교원으로 초빙돼 이듬해 8월까지 교단에 서기도 했다.
 
그에게 마침내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기가 찾아왔다. 
1972년 6월, 등소평의 교육개혁 방침에 따라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 것이다. 전국 대학교들에서 시험을 봐서 학생을 뽑는 제도가 새로 실시됐다. 당시는 소련과의 관계가 최악이었기에 학교에서는 반수정주의 교육이 주제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늘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바로 그해 중앙민족대학이 할빈에 와 학생 모집을 했다. 할빈 지역에서 단 한 명만을 뽑는다는데, 시험에 참가한 응모자는 30여 명이나 되었다. 내가 정말 뽑힐 수 있을까? 시험을 치른 뒤 잠 못 이루는 수일간이 지났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신입생 모집을 나온 담당 책임자로부터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중앙민족대학 언어문학학부에 일등으로 녹취되였던 것이다. 농촌에 내려간 보통 지식청년으로부터 대학생에로 발돋음하는, 새로운 운명의 열쇠를 쥐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체험
 

대학교 생활에서 그는 잊지 못할 역사적인 사건도 경험했다. 1972년 9월 30일 북경 수도체육관에서 중일(中日) 수교 경축대회가 열렸는데 그도 행운스럽게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주은래(周恩來)총리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수상이 참석해서 인사말과 축사를 했다. 덕망 높은 주은래 총리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의 친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또 처음으로 일본총리를 대면하면서 그는 설레는 가슴을 금할 수 없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1975년 7월, 그는 문화대혁명 후의 첫 시련인 대학교 교원으로 뽑히면서 중앙민족대학에서 언어문학학부 교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도전과 경쟁 속에서 얻어낸 대학교단의 자격, 그는 크나큰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런데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1977년 3월, 그는 국무원 신문중심(新闻中心)의 위임을 받고 14일간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취재기자로 뛰게 되었다. 주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수민족 대표들을 상대로 취재를 담당했다. 당시 4인방을 분쇄한 당과 정부의 주요 인물인 화국봉 주석과 엽검영 부주석을 가까이 뵈면서 일하는 영광의 순간이 차례졌다. 그번 ‘대표대회’는 ‘4인방’을 분쇄한 후 전체 인민이 “중국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느냐?” 하는, 이론적인 방향을 잡는 회의였다.  
 
그는 국무원 신문보도센터에서 나흘간의 교육을 받았다. 신화통신사 취재기자가 모자라 북경대학 등 각 중점대학에서 임시로 심사를 거쳐 기자를 뽑았는데 중앙민족대학 2명 명액중, 그도 선발되었다.
 
회의 기간 주로 민족 지구의 여러 지역 취재속보를 많이 썼는데 지금껏 억눌려 살다가 이제 해방이 되니 “이 말을 해도 되느냐?”라고 묻는 대표들이 많았다. 특히 변경 지역에서 올라온 소수민족 대표들은 “이런 말을 했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래서 그가 보도국장한테 문의하니 “그대로 올리라”는 대답이었다. “세상이 변했구나!” 하는 눈앞의 현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올린 대표들의 속심말이 곧 “대표 대회”의 내부 신문 “속보(速報)”에 실리자, 당사자들은 그의 두 손을 꼭 붙잡고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줘서 감사하다.”면서 울먹거렸다.
 

대학원에로의 도전
 
1978년 4월 중국에서 10여 년간 문이 닫혔던 대학원생(연구생)모집 제도가 회복됐다. 학구열은 또 한 번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대학기간 학생 신분이 “공농병대학생”이었기에 대학원 입학을 통해 그 감투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또 1년을 열심히 공부했다. 1979년 6월, 그는 북경대학 동방언어문학부 문체론 연구생시험에 합격했다. 중앙민족대학에서 처음으로 연구생이 나타났다. 또 한차례의 인생도전에 성공한 그였다. 
 
북경대학에서 문체론 연구를 하는 기간 그는 중국 최고학부의 우수한 교육 환경에서 훌륭한 학자 및 교수들과 많이 사귀었고, 또 그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문의 시야를 크게 넓혀나갔다. “이 시기는 저에게 있어서 새로운 지식의 축적과 사물에 대한 인식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려 나에게 인생의 성숙한 가치관을 부여해 준 황금 시기였습니다.”라고, 그는 감개무량해서 회고했다.
 
1982년 4월 그는 북경대학 문학 석사학위를 따내고, 그해에 중앙민족대학교의 거듭되는 요청 아래에 모교로 돌아가 민족 언어학부(民语系)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후로 모두 7년간 그는 백여 명 이상의 조선족 인재들을 육성하는데 자신의 온갖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중 많은 인재들이 졸업 후 동북 3성과 북경 등 지역에 널리 자리 잡고 우리 조선족 사회의 건설에서 중요한 직책과 역할을 맡아 크게 이바지했다. 물론, 학문에 대한 그의 끝없는 추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일본 유학의 길에서
 
중일(中日) 수교는 1972년 9월 30일에 성립됐지만 중일 간의 민간 교류는 거의 되지 않고 있던 현실이었다. 등소평 개혁개방의 정책에 힘입어 중국 정부는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인적 왕래와 경제협력의 물꼬를 텄다.
 
1984년 9월, 그에게는 운명을 바꿔놓는 또 하나의 기회가 나타났다. 그해 북경시에 일본 문무성 국비 장학금 명액이 두 명 떨어졌는데 그도 경쟁에 뛰어들었다. 중일 두 명 교수의 추천과 시험을 치른 후 그는 교육부의 엄격한 정치 심사를 거쳐 마침내 일본 유학의 자격을 따내게 되었다. 당시 외국 유학이 아주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사실상 많은 사람에 앞서 외국 유학 선구자의 자격을 딴 셈이었다.
 
1985년 1월 14일, 그는 도쿄행 비행기를 타고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해 월급이 46원인지라 먹고 살기가 바빠 몇백 원씩 하는 옷치레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에서 주는 의장비 700원으로 겨우 양복을 한 벌 해입었다. 넥타이는 민족대학 은사인 최재우 교수한테서 빌려서 맸고, 겨울 코트는 북경대학 은사인 최 응구 교수한테서 선물 받았으며, 트렁크는 학교 외사처에서 임시로 빌렸다. 자기 돈으로 장만한 건 약간의 내의와 책밖에 없었다. 이게 1985년 당시 중국 대학교 선생들의 보통 생활 수준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착찹한 생각에 잠겼다. 제2차세계대전 때 중국과 아세아 나라들에 저지른 일본군국주의의 용서할 수 없는 만행에 분노하며 살아온 자신이 지금 선진 과학기술을 배우고자 “적국”으로 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등소평은 자기가 강해지려면 우선 빨리 외국의 선진기술을 흡수해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소평의 말에 그는 일본 유학의 깊은 의미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자신과 만나게 될 미래의 동경이 꿈처럼 느껴졌다.
 
1985년 1월부터 그는 동경외국어대학에서 연구생 공부를 하였다. 환경에 차차 익숙해지자, 그는 늘 마음속에 간직해 있던 우리 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기회를 찾았다. 그가 최초에 주숙하던 중국 대사관의 기숙사에 우연하게도 그를 포함해서 조선족 3명이 있었다. 한 명은 길림대학 한계동 교수이고 다른 한 명은 과학원 심양분원의 박영민 선생이었다. 당시의 유학생들은 모두 대사관 기숙사에 주숙해야 했다. 그들 3명이 최초의 일본유학 조선족 유학생이었으므로, 말하자면 조선족 유학생의 선구자가 아니었든가 생각된다. 그후 이 두 분은 86년도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이용식 회장은 교육부의 지시에 따라 동경학예대학의 법률학연구생 코스를 밟게 되었다. 

중국과학원 도쿄 주재 대표로 임명된 이용식 회장.
중국과학원 도쿄 주재 대표로 임명된 이용식 회장.

1989년 3월 동경학예대학 대학원을 마치자 그는 귀국을 서둘렀다. 빨리 북경으로 돌아가 북경대학이나 중앙민족대학의 교수자리를 하나 찾고 싶었다. 그런데 그 무렵 중국대사관의 추천을 받아 중국과학원 소속 일본 주재 대표로 임명될 줄이야. 소속 전칭은 중국과학원 과학기술그룹 도쿄사무소였다. 운명의 갈림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중국과학원 원장 주광소(周光召)가 이사장인만큼 도쿄사무소의 격은 높았다. 매년 이사장이 직접 시찰을 와서 사무소 운영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청와대학이며 북경대학을 비롯해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유학생들을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도쿄사무소를 운영하면서 그는 일본의 기술을 중국에 유치하는 투자회의와 세미나를 적극 진행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 재임 4년 동안 120여 명의 정보통신 기술 인재들을 양성하는 성과도 올렸으며, 일본의 첨단기술을 중국으로 이전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중국과학원 주광소(周光召) 원장이 도쿄 주재 사무소와  일본의 첨단기술 기업을 방문했다.(오른쪽 첫 번째 사람이 이용식 회장이다.)
중국과학원 주광소(周光召) 원장이 도쿄 주재 사무소와  일본의 첨단기술 기업을 방문했다.(오른쪽 첫 번째 사람이 이용식 회장이다.)

그 후 그가성한 IT 기술 인재는 중국 각 지역에서 중견 역할을 했다. 이를테면 회사원이 2천여 명이 되는 중국 방정집단(方正集團)의 대외기술 관리 총경리가 그때의 유학생 출신이었다. 도쿄대학에 들어가 우주물리학을 배우는 인재가 있는가 하면, IT 첨단기술을 배우고자 히타치에도 가고, 중국 최고의 IT 연구 분야 등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따라서 개혁개방 후 중국과학원이 일본의 최첨단 기술을 끌어들이는 전선에서 선두 지휘를 하였다면 이용식 회장은 위임받고 관리를 책임지고 그 진행을 주도한 장본인이었고, 당시 역사의 산 견증인이었다.   

중국 과학원 원장이 도쿄주재 이용식 대표를 회견했다. (오른쪽 첫 사람 이용식 회장.) 
중국 과학원 원장이 도쿄주재 이용식 대표를 회견했다. (오른쪽 첫 사람 이용식 회장.) 

그가 인내심을 갖고 뒤에서 늘 인간적으로 유학생들을 많이 도왔기에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유학생이 별로 없었다. 하여 중국과학원 원장이 직접 조사를 내려와도 유학생들은 한결같이 “우리 소장님 정말 잘하신다. 인간성이 너무 좋다.”라고 칭찬 일색이었다. 그로 인해 과학원 원장은 이용식 대표를 굉장히 믿었고, 2년간 그를 더 연임시켰다.   

 

중한 수교전야 경제교류의 환경을 닦아놓은 선구자 - 「동방경제학술회의」
 

1990년대에 세계 정세는 냉전 모드의 해방기를 맞게 되었다. 이념전쟁보다 경제가 첫째라는 인식하에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은 상호 간의 봉쇄를 풀고 경제발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본주의 나라는 상품 판매 시장이 필요했고 사회주의 나라는 아이템과 기술이 필요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산업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배경하에 89년부터 92년까지 중한 정부는 중한수교를 전제로 한 최고급 레벨의 「동방경제학술회의」를 비밀리에 개최했다.
 
이 시기 이용식 회장은 중국 정부의 위임을 받고 학술회의 사무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양국 정부의 레벨에 맞춰 참가자 명단을 확정하고 양국 정부와 소통하면서 의견 조율과 일정을 조절하는 등 조직과 연락의 중심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양 국간의 중요한 역사를 쓰는 시점이었다. 

「제1차 동방경제학술회의」가 1989년 4월 9일∼13일 산동성 옌타이시에서 5일간 중국 국무원 사회경제발전 연구중심 국제기술 경제연구소의 주최하에 비밀리에 열렸다.(오른쪽 첫 사람 이용식 회장)
「제1차 동방경제학술회의」가 1989년 4월 9일∼13일 산동성 옌타이시에서 5일간 중국 국무원 사회경제발전 연구중심 국제기술 경제연구소의 주최하에 비밀리에 열렸다.(오른쪽 첫 사람 이용식 회장)

「제1차 동방경제학술회의」는 1989년 4월 9일∼13일 산동성 옌타이시에서 5일간 중국 국무원 사회경제발전 연구중심 국제기술 경제연구소의 주최하에 비밀리에 열렸다. 중국 측 대표로는 중국 개혁개방의 기치라고 칭송받는 중국 국무원 사회경제발전연구중심 오경연(吳敬璉) 고급연구원(교수), 중국 국가계획위원회 경제연구중심 부주임(고급연구원) 왕몽규(王夢奎) 등 경제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용식은 중국과학원연구원 및 중국 연락 책임자로 동참했다.
 
한국 측에서는 동훈(董勳) 한국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 이헌재(李憲宰) 한국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후, 대한민국 부총리), 이한구(李漢久) 대우경제연구소 소장(이후, 한나라당 정책의장), 정운찬(鄭雲燦) SEOUL대학 경제학교수(이후, 대한민국 총리) 등이 참석했다.
 
그 후에도 이 중한세미나는 계속하여 세 차례 거듭되면서 중한 양국의 경제환경을 조율하여 나갔다.
 
이번 세미나는 경제 분야에서 중한 양국이 협력할 수 있는 정책 기반을 만들고 분야별 협력할 수 있는 영역을 확정하며 경제협력의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는 데서 양국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학술회의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국무원발전연구중심의 평가에 따르면 “중한수교의 경제환경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회의”라고 정의했다. 특히 그 번의 세미나는 중한 수교의 역사 발전의 필연성을 입증하고 6.25전쟁 이후 양국 간 삼엄하게 막혔던 냉전의 벽을 완전 허무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데 의미가 깊었다. 그 네 차례의 심포지엄에서 연락 총책의 세밀 주도한 업무수행 능력과 추진력을 보여준 이용식에 대해 중·한 양측 참석자들은 높은 평가를 하였다.

제4차 동방경제학술회의가 1992년11월16∼21일 사이 한국 서울에서 열렸다. (왼쪽 첫 번째 이용식 회장)
제4차 동방경제학술회의가 1992년11월16∼21일 사이 한국 서울에서 열렸다. (왼쪽 첫 번째 이용식 회장)

학술회의 기간 정운찬 교수는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노랑색 바탕에 붉은빛을 띤 넥타이를 선물하면서 “이 넥타이는 한중수교의 견증물이나 마찬가지로 아주 의미가 깊다”며, “저의 집사람이 이용식 교수님께 꼭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라고 말했다. 이용식 회장은 그 귀중한 기념품을 지금까지도 간직하고 있다.
 
이헌재 위원장과 이한구 소장도 그를 “그냥 사무소 소장만이라고 알았지, 이렇게 큰 레벨의 ‘학술회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며 엄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중국에 이런 조선족 인재가 있는 것은 한중간의 일들을 빨리 진척시켜 줄 수가 있기에 굉장히 가치 있는 역할이다.”라고 덧붙였다.
 
이외,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인 조순 부총리도 아침 식사에 초대해 주었고, 이헌제 경제부총리도 “앞으로 한국에 오면 호텔비용은 우리가 다 부담하니까 계속 한중 우호 발전에 이바지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또 후에 대한민국 총리가 된 정운찬 총리는 일본에 있는 이용식 회장한테 전화로 “서울에서 한번 식사를 같이 하자.”라는 요청까지 했었다.
 
물론 중국 측의 평가도 좋았다. 왕몽규 국가계획위원회 연구소 소장은 후에 국가발전연구중심 총재로 임명됐는데 “당신은 한국도 잘 알고 중국도 잘 아니까 중국에서 귀중한 인재다.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니 양국간 교류가 빨라진다. 이는 국가 이익에 아주 큰 공헌이다.”라고 여러 번 칭찬했다.
 
그때의 훌륭한 역할로, 1996년 10월 21∼26일 중일(中日) 간 도쿄에서 개최한 「동방경제학술회의」때도 중국 정부에서는 일본에 상주하고 있는 이용식에게 또 사무국 연락 총책을 맡겼었다. 당시 노중원(芦中原) 중국 국무원연구실 재정금융 국장과 정영주(程玲珠) 고급연구원 등이 참석했고, 일본 측에서는 마니다 유키오(間仁田 幸雄) 일본 국민 경제연구협회 이사장, 무토 에이스케(武藤 英輔), 日興 research center 기획조사 부장 등 일본 경제연구분야 연구원과 전문가 80여 명이 참석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의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용식 회장은 그 번 다섯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자신이 역사의 전환점을 몸소 겪으면서 과거의 벽을 허물고 한·중·일 상호 교류와 협력에 자신의 힘을 바쳤다는데 커다란 자긍심을 가졌다. 정부 관계의 조력자로서, 또 조선족으로서, 선구자 역할을 했으니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 후 그는 중국 국무연구발전중심의 객원 연구원직을 겸하면서 4년간 중한일 경제교류와 발전의 창구(窓口) 역할을 줄곧 담당했다.

 

조선족 유학생 「동방학우회」 발족과 활동에 기여  
 

1989년을 시점으로 등소평은 대외 개방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90년도 초반부터 국가파견 또는 자비유학 등 신분으로 수많은 유학생들이 밀물처럼 일본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동북3성에서 온 조선족 유학생들도 적잖게 섞여 있었다. 일본의 각 대학에도 조선족 학생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한족 학생들은 ‘유학’이란 명목으로 돈 벌러 왔으나 그래도 조선족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조선족 유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여기저기 자그마한 조선족 모임도 생기기 시작했다.

동방학우회 회원들이 高麗神社를 방문하고 기념 사진을 남겼다.
동방학우회 회원들이 高麗神社를 방문하고 기념 사진을 남겼다.

당시 도쿄대학에 연구원으로 유학 중이던 동훈이라는 한국의 유명한 선생님께서 이러한 동향을 아주 중시하면서 이용식에게 조선족 유학생조직을 만들데 대한 제안을 했었다. 동훈 선생님은 조선족 유학생들에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었다. 초기의 유학생 중 동훈 선생님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1991년 5월 19일, 도쿄인근 대학의 유학생 약 40명이 도쿄 신쥬쿠어원(新宿御苑)에 모여 서로 낯을 익히고 상호 간에 대학교 정보를 교류하며 또 함께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으로 첫 번째로 되는 조선족 유학생 야외놀이를 벌였다.
 
당날 오후, 동훈 선생이 마련한 저녁식시모임에서 ‘동방학우회’라는 최초의 중국 조선족 유학생조직을 내오게 되었다. 이용식은 젊은 친구들보다 일본 경험이 많고 박식하다는 연고로 유학생 추천으로 초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일본 조선족 유학생들의 선구자 역학을 한 것이다.
 
동방학우회의 성원들은 도쿄대학, 와세다대학 등 유명한 대학의 유학생들이 많고 다들 똑똑해서 관리가 거의 필요 없었다.
 
이용식 회장은 “동방학우회의 가장 큰 성과는 ‘중국 조선족’이라는 기치 아래 일본 조선족 사회를 일궈 세우자!” 라는 공동 인식을 갖게 한 점이라고 회상했다. 그 기치 아래 이들은 일본의 조선족 사회를 점차 일궈가기 시작했다. 그 몇 가지 주요 사례를 들어보자.
 
1994년 연변대학 박규찬 교장선생님이 세상떴을 때 동방학우회에서는 도쿄에서 추모회를 조직해 “박규찬 선생님의 의지를 이어받아 조선족의 교육 문화를 발전시키자.”라는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조선족 사회의 친목과 단합의 분위기를 만들어 갈 것”을 결심했다. 그 후부터 조선족 관련 학술회나 모임에는 동방학우회 성원들이 많이 참석해 서로 격려하고 성원했다.

한국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동방경재학술회에 찾아와서 이용식 회장 등과 만남을 가졌다.  
한국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동방경재학술회에 찾아와서 이용식 회장 등과 만남을 가졌다.  

어느 한번은 도쿄에서 동방학우회 모임을 개최할 때였다. 나고야와 오사까에 있는 유학생들이 “참석을 하고 싶지만, 여비가 부담되여 참석할 수 없다”라는 말을 했다. 당시 왕복 여비를 마련하자면 며칠간 알바를 해야 비용을 벌 수 있었다. 이에 이용식 회장은 일본의 큰 사업가들이나 병원장님들을 찾아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후원을 요청해서 지방 유학생들의 왕복 차비를 여러 번 마련해주었다. 조선족 유학생들은 다들 감동하여 단체 모임에 적극 참가하였다. 후에 동방학우회의 소문을 듣고 이들의 ‘동지애’에 깊이 감동한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일본에 출장 왔다가 직접 이용식 회장을 찾아와서 “많지 않은 돈이지만 유학생 대표들에게 밥도 사주고 힘을 내라.”며 100만 엔을 기부해 주고 갔다. 한국 유학생들이 아닌 조선족 유학생단체를 찾아 성원을 보낸 것은 ‘동방학우회’ 성원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한 결과였다. 

한국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동방학우회에 찾아와서 이용식 회장과 임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였다.  
한국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동방학우회에 찾아와서 이용식 회장과 임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였다.  

연변대학교에서도 적극 성원했다. 교장선생님들은 일본에 올 때마다 동방학우회를 찾아와서 격려했다. 도쿄에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동인병원의 병원장님도 늘 찾아와서 돈을 기부하고 밥도 사주군 하였다.  “모두 열심히, 성실하게 사시는 것을 보니까 감동된다”라면서. 그리하여 동방학우회는 갈수록 규모가 커져 최성기엔 인원이 100여 명에 달했다.
 
그 후 이 동방학우회는 조선족 유학생 교류회, 한국답사 등 해마다 수차의 활동을 전개하며 일본 조선족 유학생들이 활발히 활동을 벌이는 조직체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용식 회장도 앞장서서 선두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가 1998년대에 들어서면서 유학생 수가 많아지고 ‘연변대학 학우회’ 등 조선족 내부의 여러 단체가 연이어 생겨남에 따라 ‘동방학우회’는 서서히 역사적 사명을 마쳤다. 

 

창업 및 중국 환경보호 관련의 창구 역할로 활약  
 

중국 과학원 소속 도쿄사무소 소장의 임기는 2년, 연임 4년만에 만기퇴소를 하자 이용식 회장은 일본 거주를 결심했다. 따님이 일본 교육을 받고 있고, 부인도 다년간 정든 환경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경에 돌아가 대학교수를 지망했던 그는 일본 정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환경 보호에 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커지면서 일본 화학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하려면 중국 환경보호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아주 복잡해 허가 수속이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중국 환경부에서도 일본 화학기업들에게 “중국 환경보호부 법률에 관한 컨설팅사업”을 해줄 것을 그한테 주문해 왔다. 즉 중국 시장을 열 수 있는 열쇠 작업--열쇠 공정을 맡긴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시안익스프레스>란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용식 회장은 항상 회사의 신용을 첫 자리에 놓았다. 소문은 금방 퍼져 일본에 있는 수많은 화학기업들이 그를 찾아와 중국 진출의 “열쇠”를 부탁했다. 회사의 신용도가 높아지니 일반 무역회사가 다루기 힘든 위험 화학품 관련 무역 의뢰도 많이 늘었다.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초창기에 중일 창구기능을 맡았는데, 화학에 관한 법률을 모르다 보니 일을 하다 중단될 때가 많았다. 이에 중국 환경부에서는 “중국에 와서 화학 법률을 배우라.”라며 비행기표까지 사서 그를 요청했다. “중국 사람들도 신용을 아는구나!”하고 콧등이 시큼해 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저녁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술대접을 받으며 국장, 부장들하고 교류를 하면서 ‘화학 열쇠 공정’의 경험을 터득하였다. 그 와중에 가슴 깊이 더욱 신념처럼 굳어진 것은 역시 “신용의 중요성”이었다.
 
단기학습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오자, 그는 회사원들한테 ‘중국의 화학 법률’을 가르쳐 주다가 점차 전일본 화학시장을 상대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소문은 날개처럼 돋아 그는 일본의 수출입협회나 화학협회 등을 상대로 일년에 수십 번의 강연을 해야 했다. 강연 내용은 “중국의 새로운 화학 물질 등록법”, 연합국에서 규정한 “GHS(화학물질 안전 데이터)” 등이었다.  
 
재미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전 일본 기업들이 그를 찾아오고, 또 그의 회사통장에 엄청난 돈이 입금되는 것을 보자 당지 세무서에서 조사를 내려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돈이냐? 그 출처를 밝히라.”라고 추궁했다. 그의 해명을 듣고 나서 세무국 조사원들은 고개를 숙여가며 “이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곧 일본의 유명 신문사들에서도 그의 기사를 내고 전재해서 이용식 사장은 금방 일본 화학업계의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성공만 있은 게 아니었다. 1993년 처음 회사를 세우고 중국 과학원 측과 합작해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에 개입했다가 실패하여 50만 불이란 거액의 돈을 날려버렸다. 엄청난 빚을 지고 회사가 망하게 되자 그는 깊은 좌절에 빠졌다. 눈앞이 캄캄해났다.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제일 먼저 곁에서 힘을 실어준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이었다. 놀랍도록 강인했다. 조금도 그를 탓하지 않고 “범에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라”며, “우리 힘내자. 정신만 바짝 차리면 꼭 나갈 길이 생길 거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때시걱을 챙기고, 학교 다니는 딸애한테 도시락을 싸주고 학업을 보살펴 주면서, 또 회사에도 열심히 출근하면서 돈을 벌었다. 남편이 위기에 빠진 그 시기, 부인은 2년간 남편의 곁에서 정신적 기둥이 되어 주었다.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이용식 회장과 부인 박태순 씨

이용식 회장과 그의 부인 박태순 씨는 북경 중앙민족대학에서 인연을 맺고 결혼했다. 장인은 연변 주 주덕해 주장의 제1임 재무부 부장이었다. 배움을 갈망했던 그는 서른여섯 살에 북경 중앙민족대학교에 와서 2년간 공부를 하고는, 결국 중앙민족대학의 요청으로 대학에 남아 대학의 조직부장과 인사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이용식의 사람 됨됨이와 학문적 열정에 매료돼 다른 선생님을 통해 따님을 소개했다. 둘은 곧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에 올인했었다. 이용식은 아내의 올곧은 성정이며 생활에 대한 정열과 난관 앞에서 절대 주눅 들지 않는 강인한 성격에 반했다….   

결국은 아내의 말이 맞았다. 중국과학원사무소장 당시 신세를 입었던 큰 IT 회사에서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IT 영업관리부장을 시켜 컨설팅계약서를 들고 와서 계약을 체결해 주었고 한 달에 10만 엔씩 조건 없이 도와줬다. 그의 인성을 잘 알고 있는 IT기업 일본인 나까무라사장도 고문의 명의로 생활비를 조건없이 월 20만 엔씩 넣어줬다.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서도 고문 계약으로 다달이 10만 엔씩 보태주었다. 곤경에 빠진 그 시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모두가 오랜 세월 신용을 지켜온 대가였다. 그렇게 3년간 힘을 받자 이용식사장 회사도 마침내 빚을 갚고 살아나 중국 환경부의 중요 창구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금은 세상 떴지만 그는 후에 나까무라 사장부인에게도 은혜를 많이 갚았다. 세상에 공짜란 것은 없다. 그를 빚구렁에서 건져준 것은 결국 이용식이란 사람의 시종일관 지켜온 한결 같은 “신용”의 덕분이었다.  
 
이용식 회장은 굴곡적인 인생을 통해 만들어진 “신용”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이렇게 정리했다. “인간의 신용이란 어려울 때는 가치가 되고 어렵지 않을 때는 축척이 되어야 한다. 신용은 하루 이틀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용은 인간의 가치이다. 제일 최고 수준의 사회거래는 신용거래이다. 이는 계약서보다 한층 높은 거래이기도 하다. 신용으로 먼저 해결하고 계약은 후에 추가해도 좋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신용이란 가치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 조선족 사회에서도 신용을 인간관계의 으뜸으로 선전하면서 손수 모범을 보이고자 애쓰며 아주 자그마한 약속이라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족 지역사회의 형성에 앞장서 선구자의 역할 탐구 

 

수년 전부터 이용식 회장은 조선족이 해외에서 자기의 문화 전통을 굳건히 지키고 화목하게 살아 나가려면 반드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끼마 동네”와 같은 조선족 지역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서 선구자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철학이 있다. 고립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재일본 조선족 사회는 결집력이 부족하다. 문화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을 통해 뭉쳐서 살아가자고 노력하고 있지만 극복해야 할 부족점도 있다. 우선 지역적인 차별과 경제적인 차이가 사회활동에 반영되면 안 된다. 조선족이란 이름 하나로 무조건 서로 손잡아 주고 격려해 주면서 한데 뭉쳐 화목하게 살자.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철학이다.

다음, 5-6만명에 달하는 일본 조선족들을 리드해 가는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지 않다. 재일본 조선족 사회가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굳건히 지키고 길게 살아 나가려면 생활의 터전부터  잘 닦아가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 지역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철학이다.   

우끼마동네 정월대부름 가족 모임 가념 사진 
우끼마동네 정월대부름 가족 모임 가념 사진 

그는 자신의 철학을 실현코자 일본에서 처음으로 ‘우끼마동네’라는 조선족 지역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우끼마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조선족 10여 세대를 조직해 끈끈한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촌장과 서기를 선거해서 동네를 활성화시켜 나가도록 격려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다. 모두가 조선족의 후예답게 자기 민족의 전통을 이어 오손도손 정을 나누면서 재밋게 살아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설이나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동네 어른과 애들이 모여 민속활동을 벌이는 것, 애들은 어른들한테 세배를 하고 어른들은 애들한테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하는 것, 그리고 찰떡도 치고 맛있는 요리도 같이 하고, 윷치기 등 흥겨운 민속놀이도 하면서 행복을 즐기는 생활, 그것이다.

우끼마동네는 또 여름방학이 되면 남녀로소 할 것 없이 애들까지 데리고 고려신사(高麗神社) 같은데 가서 지식도 익히고 강이나 산으로 나가 바베큐도 즐기면서 동네 이웃간의 친목을 다져가고 있다. 최근에는 또 우끼마동네 배구팀까지 만들어 지역사회의 친목과 단합력을 한층 높혀가고 있다.
 
이정희 흑룡강신문 기자는 “우끼마동네 정월대보름 민속모임 활기 넘친다”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중국 조선족들이 화목하게 모여사는 우끼마동네 11 가족, 총 37명이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정월대보름 민속모임에 자리를 함께 하였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와 일본 땅에서 마음을 모운 그들은 더없는 친목감을 느끼며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활기에 넘쳤다… 가장 선배인 이용식 어르신은 건배를 제의하시면서 ‘우리는 멀리 고향을 떠나 이국타향에서 새로운 터전을 다져가며 제2의 고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동네 이웃끼리 형제처럼 서로 도우면서 화목하게 살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우끼마 동네는 또 조선족 지역사회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올해 12만 엔이란 기부금을 모아 전일본중국조선족연합회에 기부했다.  
   
이렇게 이국타향에서도 조선족이 사는 사람냄새가 나는 동네가 만들어진다. 우끼마 조선족 동네의 미담은 금방 소문을 타고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가이부에서도 조선족 몇 호가 모여 자그마한 동네를 형성했다. 우에노(上野), 닛뽀리(日暮里) 등 고장에서도 찾아와서 경험을 소개받고 갔다. 

매년 설 명절이 오면 우끼마동네 어린이들은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이용식 회장 부부 등 어른들은 어린이들한테 용돈을 주며 "착한 어린이로 자라라"고 격려해준다. 이들은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매년 설 명절이 오면 우끼마동네 어린이들은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이용식 회장 부부 등 어른들은 어린이들한테 용돈을 주며 "착한 어린이로 자라라"고 격려해준다. 이들은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중국 오상 출신(1976년생)의 이일남 촌장은 “우끼마 동네가 만들어지니 살맛이 납니다. 옛날 중국에서 이웃사촌끼리, 동네 조선족들 끼리 모여 이런저런 활동도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보냈나요? 우리가 지금 바로 그런 동네를 만들어가고 있는 겁니다.”라고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일본 전역에 조선족 동네가 만들어진다면 조선족 지역사회가 자리잡게 된다. 조선족 동네끼리 오가며 마치 7-80년대 중국의 고향땅에서 지내온 것처럼 조선족 마을끼리 서로 다니며 민속활동을 할 수 있다.
 
이용식 회장은 “이제 한 5년 쯤 지나면 우리 조선족 사회에 조선족동네가 20-30개 쯤은 만들어 질 겁니다. 그러면 일본에서 우리 조선족 사회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게 되겠지요. 저는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려면 그 핵심은 친목이라고 봅니다. 친목을 첫 자리에 놓아야 사람들이 모이고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속이 살아남고 계승될 수가 있지요. 그래서 제가 항상 주장하는 것이 절대 잘 살고 못사는 것 따지지 말고, 배우고 못배운 것 논하지 말고, 모두가 평등의 원칙 밑에 친목을 다져나가는 겁니다. 이웃집 끼리 떡도 돌리고 맛 있는 음식을 서로 나눠 먹는 그런 인심이 필요합니다. 이러는 것이 바로  조선족사회 형성의 핵심이지요. 단합된 지역사회가 나오지 않는다면 조선족 사회는 아마 저절로 사멸되고 말겁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용식 회장은 자신의 이론을 드팀없이 실천에 옮기고저 오늘도 지역사회건설에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글을 맺으며

 

일본 조선족 사회에서 이용식 회장의 “선구자적인 족적”에 대해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말수가 적고 자기를 내세우기 좋아하지 않는 그는, 늘 조선족 사회의 발전을 근심하며, 우리 젊은 세대들로 하여금 조선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해 나가도록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격동적인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용식 회장은 새로운 국면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풀어 나가기 위한 과감한 도전과 새로운 개혁을 체험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23 세계 조선족 노래자랑대회’ 박춘화 집행위원장은 이렇게 칭찬하였다. “이용식 회장님은 너무 좋은 분이십니다. 말수가 적지만 실제 행동으로 조선족 행사를 많이 응원해주시고 계십니다. 남들이 다 하는 골프도 안 하시는 대신, 그 돈을 우리 조선족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에 쓰신다고 합니다. 우리 조선족 사회에는 이용식 회장님과 같은 열성과 신용을 가진 분들의 성원이 너무 필요합니다.”
 
이제 “이용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뭘까? “성실, 진취, 견정, 박식, 인격, 열성”, 그리고 그런 “인생 단어”를 만들어가기 위해 역사의 변곡점에 녹아들어 선구자의 역할을 해온 “신용”이 아닐까?
 
이용식 회장은 일본 땅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의 선구자이며, 30여 년간 우리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목격해온 견증인이다. 격동적인 시대의 흐름속에서 그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풀어 나가기 위한 과감한 도전과 새로운 개혁을 체험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동렬 기자, 이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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