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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일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반려견 장례식"을 찾아보세요. 
- 남태일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반려견 장례식"을 찾아 읽어보세요. 

“뭐, 반려견 장례식에 참가하라고요?”
나는 전화를 받고 어이가 없어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난생처음 듣는 ‘개 장례식’에 꼭 참가하라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옛날부터 개는 인류와 제일 가까운 영장동물이라고 해도 사람이 어찌 반려견 장례식에 참가할 수 있단말인가? 그래도 나는 반드시 참가해야 할 처지였다.
나는 현재 자그마한 철물점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며 때로는 자물쇠 교체, 열쇠 복사 작업도 하고 있다. 겨울의 어느 일요일 오후,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기가 울리고 전화에서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는 공원 옆에 사는 황 씨 아줌마인데요. 시장에 갈 때 가스 불을 끄지 않고 간 것 같아요. 문을 열려고 하니 열쇠가 없어요. 사장님 빨리 오세요!”
나는 공구를 챙기어 오토바이를 타고 공원 쪽으로 달렸다. 조금 전까지 내리던 눈은 멎고 대지는 온통 하얀색으로 포장되었다. 갑자기 공원 뒷문으로부터 하얀 푸들(반려견)이 불쑥 뛰쳐나왔다. 흰 눈 바탕에 하얀 반려견이라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쩔새 없이 오토바이 뒷바퀴가 반려견 몸뚱이 위로 지나갔다. 너무나 놀란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돋아났다. 체구가 작은 푸들은 그 자리에서 입으로 피를 토하며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조금 뒤에 젊은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달려왔다. 반려견 주인인 그녀는 피범벅이 된 하얀 반려견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나는 개도 안 먹는다는 돈을, 인간만이 쓰는 ‘부의금’이라 쓴 봉투에 넣고, 펫팸족 젊은 여성의 집으로 갔다. 현관 입구에 황색 국화와 흰색 국화 꽃말이 조화를 이룬 근조 화환 하나가 다리를 쩍 벌리고 서 있었다. 흰 국화 꽃말들이 반려견 영정사진 주위에 하트 모양으로 정교하게 꽂혀 있었다. 어쩐지 그 꽃말들은 피곤한지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하는 듯 보였다. 영정사진 밑에는 “별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검정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반려견 장례식’도 인간들과 똑같은 장례식이었다. 굳이 구별하자면 반려견의 장례식에 반려견 한 마리도 참가하지 않고 사람들만 참가했다는 점이다. 반려견의 영정사진 앞에 앉은, 검은 상복을 입은 여주인은 반려견의 영정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너무나도 창백했고 눈, 코, 입 곳곳마다 비애와 피로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녀는 손님이 들어오자 눈물을 흘렸다. 슬퍼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반려견을 죽인 범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찰이 와서 사고 현장을, 사람과 똑같이 감정을 해도 나의 잘못은 없었다. 여주인은 눈물을 흘리며 경제적으로 보상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충분한 금액으로 보상해 주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어찌해서 작은 동물의 죽음에 대해 장례식까지 치러주고, 또 그렇게까지 슬퍼하는지 그 원인이자못 궁금했다. 저녁에 그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그녀는 좀전보다 얼굴빛이 괜찮아 보였다. 호기심 많은 나는 참을 수 없어, 그녀에게 술 한잔을 부어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반려견에게 장례식까지 치르게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술잔을 비운 그녀의 얼굴은 점차 발그레 상기되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과 긴 속눈썹, 그리고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큰 눈…… 미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묘하게 남자의 눈길을 끄는 여자였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별’과 맺은 인연을 들려주었다. 

“때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찌하여 대학까지 졸업한 제가 말도 할 줄 모르는 작은 동물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그 작은 동물을 통해 괴로움과 고독을 해소하게 되었는지 의문스러웠어요.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만약 전남편이 가출한 다음 별이 옆에 없었다면 저는 아마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했을 거에요. 
저는 S대학교 패션디자인 학과를 졸업했어요. 그 후에 A회사 브랜드 디자인실에 취직했어요. 자청하여 여러 협력업체를 다니며 의류 생산 과정을 점검하고 체크하는 실무직을 맡아 하게 되었어요.”하고 숨을 고르더니, 
“봄날 어느 하루였어요. 부장님과 동행하여 지방 협력 업체에 의류 작업 상황을 파악하러 갔어요. 우리 회사에서 디자인한 의류였어요. 진열장 한쪽 구석 마네킹에 입혀 놓은 의류가 눈에 확 다가왔어요. 부장님을 불러 함께 마네킹에 입힌 옷을 찬찬히 살펴 보았어요. 우리가 디자인한 옷을 수정했는데 원래보다 훨씬 우아하고 자연스럽고 편해 보였어요. 
디자인 경력이 있는 부장님도 마네킹에 입힌 옷을 자세히 보고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나왔을까하며 찬탄을 금하지 못했어요. 부장님은 옆에 있는 협력 업체 인사과 과장에게 물었어요.
-어떤 분이 이렇게 예쁘게 디자인 수정을 했나요, 혹시 당신들 회사 사원인가요?
인사과 과장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어요.
-네, 우리 회사 사원인데 골치 아픈 청년이에요.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출근하면 엉뚱하게 옷 패턴 도면에 낙서하면서 이것저것 트집만 잡아요. 어느 날 사장이, 그러면 네가 한번 이 디자인을 고쳐 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그 청년은 어제 휴일에 술을 많이 마셨는지 오늘 또 결근했네요. 
한참 뒤, 부장님은 옆에 사람이 없을 때 나에게 조용히 말했어요.
-은혜 씨, 이 청년이 생활은 산만해도 패션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젊은이 같아요. 나는 요즘 바쁘니 은혜 씨가 내일 찾아가서 그 청년을 만나 보고, 우리 회사로 데리고 오도록 해 봐요…… 은혜 씨 믿을 게요.
이튿날, 전 그 청년을 만났어요. 얄궂은 옷을 걸친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부스스한 머리가 흐트러지고, 턱밑 코밑 수염은 오래 깎지 않아 지저분했어요. 두 눈은 정기 있었지만 어딘가 우울해 보이기도 했어요. 그는 정면으로 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쑥스러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저는 김은혜라고 부릅니다. 말투를 들으니 선생님 고향은 영남 쪽인 것 같네요. 성함은……?
-고향은 경주이고요. 이름은 차영삼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차츰 얼굴이 밝아지고 기분도 활발해졌어요. 얘기하다가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어요.
언제부터 의류 디자인, 패션을 하기 시작했는가 물었어요.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창밖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란 나지막한 산을 바라보며 얘기했어요.
-부모는 일찍 돌아 가시고 저의 할머니가 저를 거두어 주었어요. 할머니는 젊을 때부터 한복 가게를 했는데 주위에서 한복 기술이 최고였지요. 점차 철들면서 저는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를 많이 도와 주었어요. 할머니가 저를 보고 옷 디자인에 감각이 좋다며 앞으로 크면 옷 디자인을 하라고 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에 큰 재앙이 덮쳤고, 가족, 친척도 없는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옷 공장을 찾아다니며 일했어요. 정식으로 디자인 기술을 배운 적은 없어요. 
저는 그의 슬픔에 잠긴 얼굴을 바라보다 물었어요. 
-영삼 씨는 지금 무엇을 제일 하고 싶어요?
-의류 패션디자인요. 그런데 학벌도 없고 영어도 잘 못 하는데 누가 디자인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어요.
-네, 영삼 씨, 저를 따라 서울로 가겠어요? 현재보다 대우도 좋을 것이고 옷 패선 디자인실에서 작업하면 돼요.
그는 벌떡 일어서서 곧은 자세로 두 손을 비비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물었어요.
-네? 그게 정말이에요? 아가씨, 아니, 누님 정말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런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지금 무어라고 했어요? 누님이라고 했어요? 나는 오빠도 친 남동생도 없는데, 좋아요. 영삼 씨 먼저 상점에 가서 옷 한 벌 사고 이발 하고 식사하면서 또 얘기해요. 
이발 하고 양복을 입은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어요. 옛날 어른들이 옷이 날개라고 하더니 양복을 입은 그는 헌칠한 키에 정말 멋진 청년이었어요.
이튿날부터 디자인실에 출근했어요. 우리가 상상한 것처럼 패션디자인 기본 지식이 부족하고 영어 실력도 딸렸어요. 부장님이 말씀했어요. 
-그의 모든 부족한 점은 노력으로 메울 수 있지만, 천부적인 감각은 노력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부장님은 저에게 차영삼의 누님처럼, 선생님처럼, 생활 습관, 예의, 영어와 의류 팬션 디자인 기초지식을 하나하나 잘 가르쳐 주라고 했어요.
그와 저는 매일 잠만 따로 잘 뿐이지, 한 사무실에 출근하고, 함께 지방 협력 업체에도 가고, 같이 디자인실에서 일했어요. 그는 약한 자아로 홀로 사회생활을 하느라고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노력형인 동시에 자기의 목표를 위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앞으로 달리는 그런 청년임을 점차 알게 되었어요. 
어느 여름 날의 일요일이었어요. 아침에 내리던 비가 점심이 될 무렵 완전히 그치고 빗물에 씻긴 나뭇잎이 바람에 하느작거리며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뿌렸어요. 나들이하기 너무 좋은 날씨였어요. 집 근처 공원에 혼자 놀러 나갔어요. 
공원 북쪽 모퉁이에서 한 젊은 청년이 벤치에 앉아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숙여 무엇을 골똘히 보고 있었어요. 혹시나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영삼씨가 영어책을 보고 있었어요. 그를 바라보는 순간 반갑고 기뻤어요. 그도 놀란 듯 벌떡 일어서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어요.
-오늘 어쩐지 누님이 이곳에 올 것 같아 책을 보면서 기다렸어요. 허, 허, 허. 
그는 보통 때보다 화려하게 입은 저의 옷차림을 신기한 듯 한참 바라보았어요.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눈은 놀랄 만큼 맑고 깊이가 있었어요. 저는 남산 쪽을 가리키며 물었어요.
-오늘 날씨도 좋은데 저 산기슭에 있는 ‘벚꽃 개울’에 놀러 갈래요?
-좋지요. 요즘 날마다 집안에 갇혀 있었는데 오늘 우리도 나들이해 봅시다.
그는 활짝 웃으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저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어요. 그가 사투리를 많이 쓰다 보니 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우리의 대화는 활발했고, 어쩌다 몸과 몸이 부딪칠 때면 남자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체취는 묘한 느낌을 주고, 이름 모를 신선한 감격이 가슴을 설레게 했어요. 
우거진 숲속으로 흐르는 ‘벚꽃 개울’의 물은 맑고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어요. 강렬한 여름 햇빛아래 걷다 보니 온몸에 땀이 났어요. 그는 슈퍼에 가서 맥주와 마른 안주를 가득 사 들고 왔어요. 조용한 곳을 찾아 발을 차가운 물에 담그고 맥주를 마셨어요. 가끔 계곡물을 스치며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은 몸의 열기를 식혀 주었어요. 저는 원래부터 술을 잘할 줄 모르는 편이었으나 그날 만큼은 조금씩 마시며 그와 동무했어요. 
제가 캔맥주 하나를 마실 동안 그는 이미 세 개나 마셨어요. 그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어요. 저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밝고 행복한 빛을 보았어요. 
-누님, 요즘 저에게 과분한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항상 옆에서 착하고 예쁜 누님이 알뜰하게 챙겨 주니 저는 정말 행복해요. 때로는 저같은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냐며, 혼자 치솟는 감정을 꾹꾹 누르곤 해요. 
그는 저의 앞에서 애교와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저의 가슴이 뭉클해지며 한번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우리는 처음으로 많은 얘기를 했지만,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그러나 생일이 언제인가고 묻자 그가 고개를 숙이고 매우 슬퍼하던 모습만은 똑똑히 기억되네요.
-저는 할머니가 돌아간 뒤 생일을 모르고 살았어요…….
나는 그의 힘 있고 부드러운 왼손을 살짝 쥐었어요. 그도 오른손으로 저의 손을 으스러지게 꼭 잡았어요. 그의 억센 손을 통해 막연하고 어슴푸레한 욕망도 느꼈어요.
조금, 조금씩 그는 제게 익숙해지고, 저도 그에게 익숙해져 갔어요. 풍성한 열매를 맺는 가을이 돌아왔어요. 저는 며칠 전부터 그의 생일을 어떻게 축하해 주겠는가 고민했어요. 생각 끝에 우리 집에서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로 했어요. 마침 휴일이었어요. 저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대했어요. 처음에는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잠시 후, 집에서 먹지 말고 식당에서 간단히 먹자고 했어요. 허나 결국, 내가 이겼어요.

남태일 소설가
남태일 소설가

어쩐지 오늘은 다른 때보다 말이 적었어요. 밥상을 차릴 때 밝은 달이 뜨기 시작했어요. 그는 열린 창문턱에 팔꿈치를 괴고 저 멀리 창백한 달빛에 흠뻑 젖은 울창하면서 거무스레한 야산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저는 생일 케이크 위에 초를 25개 꽂고 불을 붙이었어요. 그를 보고 소원을 빌라고 했어요.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아주 진지하게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어요. 제가 그의 술잔에 포도주를 부어 줄 때,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은 그렇게도 밝고, 명랑하고 행복해 보였어요. 그는 자기의 술잔을 저의 술잔에 살짝 부딪치며 감동된 어조로 말을 했어요.
-누님 너무너무 감사해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올해 누님과 함께 생일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자꾸 올라와요. 마음껏 배우고, 배불리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고, 너무너무 행복해요. 아까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아세요? 누님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말고 저를 지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저는 어머니 같은 누님의 사랑이 너무 그리워요.
그는 몹시 흥분했고 술기운이 오르자 말이 많아졌어요.  그가 태어나 8개월 채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또한 여섯 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그를 거둬 주었대요. 그가 중학교에서 기숙할 때 한밤중에 전기로 인해 집에 화재가 발생했고, 할머니도 처참하게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홀로 남은 그는 까마귀가 울어대는 할머니 묘지에 엎드려 많이 울었다고 했어요. 당장 저녁에 가서 밥 먹을 자리와 잠자리도 없었다고 하며 눈물을 흘렸어요.
저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어요. 불쌍한 마음과 연민의 정이 울컥 치솟자 그를 와락 끌어안았어요. 그는 마치 어린애가 어머니 품속에 안기듯이 저의 가슴에 파고들어 소리 내어 울었어요. 그의 눈물과 뜨거운 숨결은 저의 앞가슴을 촉촉이 젖게 했어요. 
-누님 지금 저는 너무나 행복해요. 저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그의 말은 매우 애절했어요.
그는 술에 취해 저의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어요. 윤곽이 뚜렷한 그의 멋진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불을 끄고 술에 취해 자는 그의 옆에 옷도 벗지 않고 조용히 누웠어요. 순간 술 냄새가 섞인, 뜨거우면서도 힘찬 젊은 남자의 숨소리와 입김에 저의 가슴은 격렬하게 뛰었요.
새벽녘이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 한참 주위를 살피더니 다시 누웠어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말없이 은근히, 그 큰 손으로 저의 젖가슴을 어루만졌어요. 저는 온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났어요. 제 육체를 통제할 수 없어 그를 꼭 껴안았어요. 
한 달 뒤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는 가족이 없다 보니 결혼식도 간결하게 치렀어요. 남편은 자기의 끝없는 노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회사에서 인정 받았어요. 결혼한 지 3개월 뒤, 본사로 발령 났어요. 본사에는 옛날에 같이 일하던 저의 친구이자 후배인 영옥이가 있었어요. 
신랑이 본사에 발령 난 지 4개월 뒤였어요. 영옥이로부터 이런 문자가 왔어요.
-은혜 선배, 선배 신랑이 우리 회사 젊은 여성들 중에서 인기 최고야. 선배 정말 남자 보는 안목 탁월해, 부럽다! 능력 좋고, 마음 착하고 거기에다 인물 잘 생겼고. 나도 언제 그런 남자 친구 만날 수 있을까?”
7개월 뒤에 영옥이로부터 또 이런 문자가 왔어요.
-선배, 신랑 주변에 젊은 여자들이 엄청 많아졌어, 아가씨 두 명과 쩍하면 퇴근하고 술을 마시곤 해. 그 중에 세 살 아래인 우리 회장 딸도 있어. 신랑 단속 잘하기를 바람. 
사실 신랑은 그때쯤 술 마시고 집으로 오는 때가 많았어요. 때로는 그의 웃음이 어쩐지 공허하고 솔직하지 못해 보였지만, 그러나 여성의 직감으로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아무리 젊은 여성들이 신랑 옆에서 까불어도 제 남편만은 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라며 혼자서 믿음을 다졌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전혀 생각 밖으로 성실하고 순박한 신랑이 외박하기 시작하고, 갈수록 차수가 잦아졌어요. 어느 하루 영옥이가 밤에 신랑과 회장 딸이 모텔로 들어가는 사진을 저에게 보내왔어요.
저는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솟아오르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어요. 차영삼이 저를 배반했어요. 하늘만큼 사랑했던 남편! 나의 생명 같은 존재! 네가 어찌 나를 배반할 수 있어? 가슴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찢어지는 듯했어요. 
그래서 그의 앞에서 악다구니를 하며 물었어요. 무엇 때문에 배신하고, 제가 무얼 잘못 했는가고?…… 따지고 묻고 물었어요. 그도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말했어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여자와 사귀면서 알게 되었는데, 자기의 사랑 감각도, 팬션 디자인 감각처럼 남달리 예민했다고. 누님에 대한 사랑은 결국 닭이 꿩을 대체하듯, 어릴 때 엄마에게서 받아보지 못했던 그런 사랑을 누님의 사랑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은 진정한 남녀의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 젊은 남자, 저는 꿈꾸듯이 젊은 남자의 달콤한 사랑에 취했다가 마치 우박에 맞은 꽃다발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무정하게 짓밟혔어요. 그는 유년기 홀로 살다 보니 언제나 자기가 일 순위였고 타인의 고통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어릴 때 형성된 내면의 생존 방법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남편이 곧 회장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식을 영옥이 알려 주었어요. 지금 회장은 앞으로 사위에게 회장 자리를 넘겨줄 거라는 소문도 들려왔어요. 남편의 배신으로 우울증을 앓게 되고 자살까지 시도했어요. 친척, 친구들은 그런 배은망덕한 놈과 일찍 갈라진 것이 외려 잘 되었다고 했어요. 그 무렵이었어요. 중학 동창이 캐나다에 이민 가면서 반려견을 키워 보라고 했어요. 사실 저는 남편이 가출한 뒤, 또다시 사랑 같은 것에는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어요. 결국, 친구의 진심 어린 부탁에 못 이겨 반려견을 보러 갔어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체구가 자그마하고 복슬복슬한 푸들이 처음으로 보는 저에게 다가와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푸들을 품에 안았어요. 푸들이는 어머니 품속에 안긴 어린아이같이 제 앞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살포시 두 눈을 감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나 귀여웠어요. 친구는 푸들에게 ‘별’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대요. 그 친구는 ‘별’의 물건을 챙기어 가방에 넣어 주면서 말했어요.
-별과 너는 인연이 있는 것 같아, 딸처럼 잘 키워 봐. 호호호.
그날 저녁, 남편이 가출한 뒤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어요. 별은 저에게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은 물론이고 웃음을 주는 재롱둥이었어요. 시간이 가면서 별과 눈길로 마음을 서로 나누었고, 제가 하품하면 별도 따라 하품할 땐 반려견이 아니라 사람 같았어요. 반려동물과 서로 잘 교감하면 사람들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와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동창의 경험담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어요. 
저는 남편의 가출로 늘 여러 사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이 든 상태였어요. 그러나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면 기다리렸다는 듯이 별이 달려나와 폴짝폴짝 뛰며 더없이 반가워했어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촉촉한 눈망울로 저를 빤히 바라볼 때면 온종일 쌓였던 울적한 마음도 눈 녹듯이 사라지곤 했어요. 별은 정말 저의 심리를 알아내는 기묘한 능력이 있다는 믿음까지 주었어요.
여동생은 저보다 회사에 이태 늦게 입사했는데 과장으로 승진하고 저는 요즘 청소 반으로 가게 되었어요. 여동생을 만날 때마다 대학 졸업한 사람이 강아지에게 너무 집착하더니 이상해졌다고 야단쳤어요. 그리고 저 몰래 별을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겁이 나서 그날로 집 자물쇠를 교체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잠시라도 별이 옆에 없으면 허전해지고 일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그 무렵 저는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했어요. 죽기보다 싫었지만, 할 수밖에 없는 걸음을 내디뎠죠……. 
어느 겨울 일요일이었어요. 별과 함께 공원으로 갔다가, 저도 모르게 삼 년 전, 여름에 차영삼과 함께 갔던 ‘벚꽃 개울’ 방향으로 가게 되었어요. 아침부터 잿빛 하늘에 눈발이 날리다가 조금 뒤, 배꽃 같은 큰 송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어쩐지 지금쯤 벚꽃 개울에는 물이 없어 스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 발길이 그곳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별도 목줄을 매고 졸랑졸랑 나의 손을 당기며 앞서갔어요.
개울에 도착하니 물도 없고 검은 돌들만 여기저기 보였어요. 인적기라곤 없었어요. 저는 차영삼이랑 같이 앉았던 자리에 가보았어요. 마른 바닥 하얀 눈 위로 머리를 내민 조약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네를 찾아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동그란 돌 위에 금방 앉아 손바닥을 펼쳐 부채질할 때, 차영삼이 옆에 다가와서 손수건을 꺼내어 제 이마에 땀방울을 부드럽게 닦아주었지요. 젊은 남자의 거친 숨결을 온몸으로 느낄 때, 가슴이 왜 그렇게 콩닥콩닥 뛰던지……. 
그때는 무성한 초록색 나무들이 개울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고 벚나무가지는 긴 팔을 내밀어 우리를 위해 아늑한 터널을 만들어 주었어요. 터널 속에서 마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던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그가 개구쟁이처럼 개울물에 손을 살짝 담가 저에게 물장난치던 그때…….
왜?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흐르는가요? 차가운 눈이 계속 내려, 그때 차영삼이 앉았던 네모난 돌과 제가 앉았던 동그란 돌을 몽땅 덮어버렸어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큰눈이 온몸을 덮어 저를 하얀 눈사람으로 만들었는데, 가슴은 어찌하여 칠흑같은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가요?
집으로 돌아올 때는 눈이 그쳤어요. 몹시 지친 저는 길옆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려고 했어요. 얼핏 머릿속에 삼 년 전 추운 겨울에 차영삼과 함께 그 의자에 앉아 쉬던 생각이 났어요. 그때, 발이 시리다고 하자 그는 다짜고짜 저를 의자에 앉혀 놓고 신발을 벗기고 저의 차가운 발을 자기 가슴에 품어 주었어요. 그의 따뜻한 젊은 피가 저의 심장을 통해 발끝까지 흘러갔던 것 같았어요. 여자란 남자들의 작은 배려에도 눈물을 흘리지요. 
졸래졸래 앞서가던 별은 앞으로 다가와서 안아 달라고 앞발로 저의 신발에 신호를 주었어요. 품에 안긴 별과 눈길이 마주쳤어요.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별의 눈길은 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어요. “그래, 우리 둘이서 이렇게 조용히 살자. 우리 별이 들었지!”
공원에 도착했을 때, 뒤에서 따라오던 별은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살피다가 갑자기 대로를 향해 뛰어갔어요. 검은색 푸들 한 마리가 대로 저쪽 편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하느님 맙소사! 사장님의 오토바이가 별의 몸 위를 지나가는 것을 이 두 눈으로 목격했어요. 허둥지둥 쫓아가서 피가 낭자한 별을 끌어안았을 때, 별의 애처로운 눈길은 엄마, 나 죽기 싫어! 난 엄마 옆을 떠날 수 없어 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어요. 잠시 후 별은 숨을 거두었어요. 그때 저는 마치 바늘 한 주먹을 삼킨 듯 마음이 아팠어요.
……별을 데려와서 저의 생활에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었을 때, 별이 도대체 얼마나 살 수 있는가? 인터넷을 찾아 보았어요. 제가 아무리 별을 잘 거두어도 사람보다 일찍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별이 죽은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이 고민했어요.
별의 장례식을 한다고 할 때, 주위에 사람들이 저를 보고 미쳤다고 했어요. 사실 별은 제 생명의 은인과 같았어요. 한갖 동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이번에 별을 잃고 나서 저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제 생명의 은인과 같은 별이 죽었는데 헌신짝같이 아무 곳에 버릴 수 없었어요. 죽은 별을 바라보면 자꾸 눈을 뜨고 곧 저의 품 안에 안길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렇게 사람보다 더 충성스러운 별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답니다…….”
그녀의 슬픈 사연을 듣고 나서야 나는 무엇 때문에 반려견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순간,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연민 비슷한 감정이 내 가슴속에서 울컥 치솟아 올랐다. 남편의 배신 앞에서 그녀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제어하며 별을 동반자로 오늘까지 잘 지탱해 오지 않았나 싶었다. 
반려견 장례식을 치른 뒤, 나의 마음은 은연중 그녀에게 쏠려갔다. 애처롭고 불쌍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는 별이 죽자 심각한 펫로스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난 나흘 뒤, 그녀는 별의 영정사진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수면제를 먹고 가스를 틀어 놓았다. 다행히 내가 옆집에 자물쇠를 교체해주고, 그녀의 집에 들리면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녀를 이대로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한번씩 그녀의 집으로 드나들었다.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내 가슴은 갈고리로 긁는 듯 아파났다. 날마다 혼자 두 무릎을 끌어안고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 정말 영혼이 없는 생물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겨울의 어느 하루였다. 나는 철물 자재를 사려고 공구상사 단골집으로 갔다. 주차할 자리를 찾느라 헤매고 있는데 도매상점 후문 옆 후미진 곳에, 곱슬곱슬 하얀 털을 가진 푸들이 목 띠를 착용하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자재를 사서 차에 싣고 있는데 하얀 푸들이 그냥 그곳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의 오토바이에 깔려 죽은 ‘별’과 어딘가 닮았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하얀 푸들 앞에 다가갔다. 푸들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나를 바라보는데 눈빛에서 마치“아저씨 나를 구해줘요”하는 것 같았다. 
허리를 굽혀 강아지를 안으려고 하였더니 목줄이 쇠말뚝에 감겨 있었다. 그때, 불현듯 그녀가 생각났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별을 닮은 흰색 푸들을 안고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별을 닮은 푸들을 동물가게에서 샀다고 거짓말을 꾸며 그녀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그녀의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고독과 가지런히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하얀 푸들을 보자 두 눈에서는 안개가 사라지고 금방 밝은 빛이 반짝였다. 요즘 들어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 앞에 꿇어앉았다. 벌써 몇 번이나 고백하려고 했으나 기회가 마땅치 않아 하지 못했던 가슴속 말을 정중히 건넸다.
“은혜 여사님, 저의 집사람이 병으로 돌아간 지 이미 삼 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홀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사님께서 오늘 저와 새 별을 함께 받아 주십시오. 여사에게 더는 상처를 주지 않고 새 별이랑 같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뒤에 새로운 별을 안고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사장님,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복잡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여자예요. 새로 온 별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반려견은 욕심이 없고 주인을 배반하지 않기에 신뢰를 할 수 있어요. 새로 온 별은 제 가족이고 앞으로 그와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새 별의 얼굴에 떨어졌다.
며칠이 지났다. 우리 동네 공원과 전봇대, 학교 입구에 흰색 푸들을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전단지에 흰색 푸들 사진을 보니 내가 집으로 데려왔고, 그녀에게 선물한 흰색 푸들이었다. 푸들 목에 채운 목줄도 똑같았다.
전단지에는 푸들을 찾아 준 사람에게 후한 상금까지 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잔인한 짓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단지를 못 본 척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그녀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자기 집으로 빨리 오란다. 처음으로 나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어쩐지 싱숭생숭한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녀의 집안에 들어갔을 때였다. 새 별을 알아볼 수 없도록 요염하게 화장시켜 놓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사장님, 저 푸들은 훔쳐 온 것이 아니고 주어 온 것이지요? 그렇지요? 예?”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는 거짓말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사실대로 푸들이를 주어온 경과를 말했다.
그녀는 전단지에 있는 견주의 전화번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흰색 푸들은 저의 전남편의 푸들인 것 같아요. 견주의 두 번째 연락처는 저의 전남편의 전화번호예요. 그이는 지금 정신이 없을 거예요. 이렇게 잘생기고 영리한 푸들을 잃어버린 전남편은 지금 살점이 뜯겨 나가는 것처럼 가슴이 아플 거예요. 어서 전남편에게 연락하여 가져다 주세요. 지금 애타게 기다릴 거예요.” 
항상 우울한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풍부한 표정과 활기 띤 모습을 보았다. 
이튿날, 나는 견주와 통화했다. 점심시간에 회사와 가까운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로 만나서 보니 정말 멋진 젊은 남자였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저는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의 부인이 너무나 강아지에게 집착하여 짜증 날 때가 많고 다툴 때도 많았어요. 제가 집사람이 친정 간 동안 강아지를 버렸는데 사장님이 발견했구먼요. 부인이 나 모르게 전단지를 뿌린 거 같아요. 자, 여기 삼십 만 원을 드릴 테니 이 강아지를 사장님이 기르든지? 아니면 멀리 시골에 버리든지 사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저는 바빠 빨리 가봐야겠어요. 절대로 비밀로 해주세요.”
나는 푸들을 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생각 끝에 나보다 반려견이 더 좋다는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푸들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몹시 놀랐다. 나는 지난 번에 거짓말을 해서 많은 오해가 생겼는데 이번만은 사실대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녀의 창백하고 앙상한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다. 그녀가 불행하게 된 것도 나의 책임이 있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우리는 무슨 인연인지 내가 그녀를 도울수록 그녀에게 피해만 주고 더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고, 항상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사랑을 절절히 그리워 하면서도 자기 절로 만든 사랑의 방어기제가 해제될까 봐 두려워 고통스럽게 저항했다.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은 우울한 그녀에게 자꾸 치근대는 것 같았고, 그녀 또한 내가 자기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꺼려 하는 눈치였다.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전 남편뿐이라는 것을……. 나는 잠시 그녀의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무렵, 그녀는 웬일인지 자기 품에 안기려는 푸들을 발로 힘껏 차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더러운 년! 저리로 비켜! 이 개새끼야. 꺼져, 꺼져!”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분노한 모습을 보았다. 아마 그녀는 푸들의 주인이 남편을 빼앗아간 그 젊은 여인이기 때문에, 가슴속에 증오가 타오르고, 억누를 수 없는 원초적인 분노가 폭발한 것 같았다.
사흘 동안 그녀의 집에 가지 않았다. 사실 항상 내 마음속의 그녀는 바람 속 촛불 같았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눈만 뜨면 자꾸 그녀에게 마음이 쏠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반려견의 먹거리와 과일을 사서 들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문은 안으로 잠겼고 그녀를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차에서 공구를 꺼내 자물쇠를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등을 켜고 방안을 들여다보니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가느다란 노끈으로 푸들의 목을 매어 옷걸이에 매달아 놓았었다. 방바닥에는 검은 피가 덕지덕지 말라 있었다. 그 옆에는 팔뚝만큼 굵은 몽둥이가 있고 몽둥이에는 흰털과 피가 묻어 있었다. 푸들은 온몸이 피투성이이고 머리는 가죽이 찢겨져 흰 뼈가 드러나있었다. 
주방 쪽에는 새 둥지처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속에 눈을 반쯤 뜬 그녀의 좁고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굳어진 표정은 생각 밖으로 마치 승리를 거둔 전사의 표정처럼 흐뭇해 보였다. 그녀의 오른 손에는 술이 반쯤 남은 술병을 쥐고 있고, 그 옆에는 빈 소주병들이 사람이 누워있는 방향으로 넘어져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들었다. 가는 밧줄에 목을 매운 푸들은 네다리를 쭉 뻗고 바람에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죽음은 이미 그녀의 푸르딩딩한 살결, 굳은 피, 고독과 절망이 가득한 영혼 속에 침투되어 있었다. 죽음은 단지 한 모금의 숨을 앗아갔을 뿐이다. 겨우 촛불 정도나 끌 수 있는 한 모금의 숨은, 그녀의 참기 힘든 모든 고통을 안고 어디로 사라져버렸다. 

남태일 프로필 

2016년 <문예감성> 수필 등단
2018년 <한반도문학> 수필 등단
2021년 <세계문학예술작가협회> 소설 등단
2017년 KBC주최 체험수기 공모전 특별상, <시와 창작> 특별문학대상 수상.
현재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중무역에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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