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역시 학술의 범주에 속했다. 서구의 종교는 시초부터 독립된 “신학”(神学)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동양의 종교 특히 중국의 종교는 시초부터 “인문학”(人文学)으로 정립되었다.

“사서오경”(四书五经)은 공자의 유교 학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 “도덕경”(道德经)은 로자의 도교 학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사서오경”과 “도덕경”은 서구의 “신학”이 신봉한 우주 만물의 창조주 “신”()이 없었다. 절대자로 존재하는 “신”()이 없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는 당연히 "무신론"(无神论) 이었다.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夫夫子子)를 유교의 교리로 내세웠다. 그러므로 "예의 지학""(礼仪之学)으로 되였다. 로자는 “호기심, 실기, 약기지, 강기골, 상사, 무지무욕, 시이성인지치”(虚其心,实其腹,弱其志,强其骨,常使民,无知无欲,是以圣人之治)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상을 다스리는 “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성인 지학”(圣人之学), “군자 지학”으로 되였다.

“성경”(圣经)은 기독교의 경전이다. “성경”의 “사도신경”에는 이런 내용이 기술되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옵니다. 그 외아들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사옵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였사옵니다. 본디 빌라들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박혀 시였사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셨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시는 것과 영원히 사시는 것을 믿사옵니다.”

“성경”은 믿음의 저서였다. 창조주 하나님과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앙의 저서였다. 서구의 기독교“신학”(神学)은 19세기까지도 줄곧 “신”의 존재를 주요한 과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현대 과정 신학”이 출두했다.

 

“과정 신학”의 창시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itehead)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는 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신을 찾고 있다. 우리는 신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에 앞서 종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종교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과정을 갖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새로운 “과정 신학”의 학설이었다.

    류기종목사님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토렌스카운)
    류기종목사님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토렌스카운)

2005년 4월 나는 귀국을 앞두고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에 위치한 미국 감리교 신학대학교로 향했다. 이날 화이트헤드의 “과정 신학”에 대한 기종목사님의 특강을 청취했다.
목사님은 강의에 앞서 이렇게 물었다.
“미스타 조, 가지 물어도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근데 뭘 물어보시려는지요?”
“미스타 조는 왜 과정 신학에 흥취를 갖게 되였어요?”

 

“목사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자연과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와 신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는 지극히 모순되지요. 그런가요?”
기종목사님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셨다.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특강을 시작했다.

화이트헤드는 1861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내여 났어요. 청년 시절에 브리지 대학에서 자연과학에 대한 계통적인 교육을 받았어요. 1914년부터 1924년까지 10년간 런던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여 수학과 물리학을 강의했어요. 미국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로 취직했어요. 1947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귀천했어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과학에 기초한 독창적인 형의상학을 진지하게 탐구했어요.

 

이것이 “과정 신학”의 기초 원리였던 "유기체 철학"이었어요. 영어로 표현하면 “philasopjy of organism”였어요. “유기체 철학”의 핵심은 실재를 정적인 개념으로서의 “존재”(bcing)가 아니라 동적인 개념으로서의 “되어감””(becoming)으로 인식한 "과정형의상학"이었어요.

“수학 원리”(数学原理)는 화이트헤드의 중요한 저서였어요. 저서는 당대의 사상가 버트란드 럿셀과 함께 집필한 공저였어요. “수학 원리”는 이미 수리철학의 고전으로 되였어요. 그러나 “자연의 개념”, “과학과 현대 세계”, “종교의 형성”, “과정과 실체”, 념의 모험”, “사유의 형식” 등등 저서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극명하게 체현했어요.

 

화이트헤드는 학계가 주목하는 수학자였고 철학자였어요. 그러나 그의 사상의 저변에 흘렀던 지속적인 관심사는 여전히 종교와 신학이었어요. 그는 1929년에 “과정과 실제”란 저서를 출간했어요. 저서는 “하느님과 세계”라는 새로운 “과정형의상학”의 철학 사상을 설토했어요.

“미스타 조, 종교란 구경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믿음에 대한 학설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신앙에 대한 학설이라고 할까요?"
“종교는 물론 믿음과 신앙을 떠날 없어요. 그러나 미스타 조가 뜻하는 종교는 근근이 전통적인 편협한 종교 개념이었어요."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어요.
“종교란 인간의 내재적인 생명에 대한 예술이며 론이다.”
오늘날 모든 종교가 일치하게 지향하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어요. 바로 인간의 내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의로워짐"(Justification)이었어요. 그러나 인간은 구구단을 외우듯 쉽사리 “의로워짐”을 실현하지 못해요. “의로워짐”은 반드시 “진지함”이 따라야 하지요. 화이트헤드는 “진지함”을 “성실””(Sincerity) 또는 “침투적인 성실”(Penetrating Sincerity)로 표현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같은 “성실” 또는 “진지함”을 상실했어요. 참다운 종교의 기능을 상실했어요.
“종교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종교란 인간의 고독을 처리하는 행위이다. 또는 고독 속에 있는 순간이다.”

인간은 깊은 고독의 순간 또는 진지하게 홀로 있는 순간에만 로써 궁국적인 실재와 존재를 체험할 있어요.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었어요.

화이트헤드는 “신의 실재”에 대한 종교 개념에는 가지 유형이 있다고 지적했어요.
첫째, 신을 비인격적인 실제로 간주하는 동양의 아시아적인 견해였어요. 이는 종교의 내재적인 교리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였어요.
둘째, 신을 창조자와 초월적인 인격적 실제로 간주하는 유대적인 개념이었어요. 이는 종교의 초월성의 극단적인 사례였어요.
셋째, “2원론”적인 견해였어요. 현실 세계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분적인 서술로 간주했어요. 우주는 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나타남”으로 간주했어요.

 

화이트헤드는 유대적인 초월적 신관과 동양적인 내재적 신관을 조화시켰어요. 그러므로 그의 “신관”(神观)은 사실상 “범신론
(Panentheism)에 속했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종교는 반드시 과학과 철학이 말하는 이상의 것을 말해야 한다. 종교적 지식은 반드시 일상적 지식 이상의 초지식이어야 한다. 이는 중세기 스콜라 신학자가 말하는 신앙으로부터 오는 지식, 즉 성을 초월한 지식이어야 한다.”

1925년,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현대 세계”라는 저서를 출간했어요. 책의 서두에서 그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종교와 과학은 언제나 충돌이 있었다. 충돌 중에서 항상 지속적인 발전이 있었다. 종교가 인류를 위해 구경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과학이 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이는 현세대가 종교와 과학에 대해 구경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달렸다.”

화이트헤드는 탁월한 신학자에 앞서 정직한 과학자였어요. 그의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신학에 비해 훨씬 변하기 쉬운 학설이었어요. 오늘날 과학의 영역에서 갈릴레오와 뉴턴의 학설에 대해 무조건 찬성하는 과학자는 사람도 없어요. 이는 과학의 보편적인 신념으로 되였어요.

 

17세기 뉴턴과 호이겐스 시대 이후 빛의 물리적 성질에 대해 가지 부동한 학설이 있었어요. 뉴턴의 리론에 따르면 빛은 극히 작은 입자”(粒子) 또는 “미립자”(微粒子))의 흐름으로 파악되었어요. 그러나 호이겐스의 론에 따르면 빛은 광선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파악되었어요. 17세기에는 뉴턴의 입자설”이 신봉되었어요. 그러나 18세기에는 호이겐스의 “광”이 신봉되었어요. 하지만 현대물리학은 빛의 속성에 대해 뉴턴의 자설”로 설명되는 거대한 “일군””(Graup)이 있다고 인정했어요. 동시에 호이겐스의 광파”에 의해 설명되는 거대한 “일군”도 있다고 인정했어요.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론은 과학의 역사에서 지난날의 모든 전통 관념을 철저하게 부정했어요. 그러나 같은 현상을 과학의 다른 패배로 간주하는 과학자는 단 사람도 없어요. 도리여 “진화론”과 “상대성”론은 과학의 다른 새로운 통찰이고 진보이며 승리라고 인정했어요.

사실상 종교도 과학과 마찬가지였어요. 새로운 변화가 없으면 필연코 쇠퇴하였어요. 필연코 타락하였어요. 종교의 제반 원리는 영원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를 수요하였어요.

 

화이트 헤드는 이렇게 말했어요.
“과학의 진보는 종교적 신념의 다양한 진술 방식에 대해 대체로 수정을 가첨해 준다. 특히 과학과 철학에 대한 랭철한 비판은 종교 발전에 지극히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

서구 문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종교적인 영향력은 점차적으로
쇠퇴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있어요. 물론 차례의 종교 부흥도 있었어요. 그러나 차례의 종교 부흥은 분명히 앞세대에 비해 추락되었어요. 그때마다 종교는 새로운 침체기를 맞이했어요.

미국은 전통적인 종교 관념이 매우 짛은 나라였어요. 그러나 세대가 교차됨에 따라 종교적 관심은 갈수록 하락되고 있어요. 이는 부인할 없는 현실로 되였어요.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지적하였어요.
“종교는 본래 인간의 안락한 생활을 장식해 주는 형식으로 타락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종교의 출발점은 인간의 미개한 상상력이었어요. 조잡한 환상이 가미된 복잡한 경험이었어요. 같은 환상적인 경험은 결국 종교적인 통찰로 승화했어요. 종교적인 통찰력은 지속적으로 확충되었어요. 참으로 낙관적인 종교관이었어요.

신의 능력은 항시 감을 주는 예배를 통해 드러났어요. 인간이 신을 예배하는 것은 결코 안위를 위한 해법이 아니었어요. 예배는 인간의 령혼을 정화하는 위대한 모험이었어요. 새로운 비상이었어요. 종교가 살아야 인간의 령혼이 살수 있어요. 인간의 령혼이 살아야 종교가 발전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세계는 세계가 되기 위해 창조주 신()이 필요하였어요. 창조주 (神)도 신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세계가 필요하였어요.

 

종교와 과학도 결국은 같은 치였어요. 종교는 항시 랭철한 과학적 해설이 필수적이었어요. 과학 역시 여태껏 종교의 초월적인 통찰력을 부인하지 않았어요.

목사님의 강의는 장장 120분간 지속되었다. 나는 눈과 귀와 손과 머리가 동심 일체로 되여 돌아갔다. 부지런히 듣고 열심히 기록하고 끊임없이 사색을 더듬었다.

서구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흡사 빵을 먹지 못한 날의 밤같이 길다.”
빵을 먹지 못해 굶주린 날의 밤이 세상에서 제일 밤이었다.
이날 나는 빵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았다. 그러나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임어당(林语堂) 선생은 “중국인의 가족 ”(中国人的家族理想)이란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중국의 신도들이 각종 조상숭배 의식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 유는 매우 단순했다. 중국의 신도들은 조상 앞에서 무릎을 굽혔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시각으로 이는 분명히 십계명(十戒命)을 위반했다. 그러나 사실상 중국인의 무릎은 서양인의 무릎보다 존귀하지 않았다. 중국인은 황제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현령 앞에서도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도 무릎을 굽혔다.”

 

중국인의 조상숭배 신앙은 갑골문을 사용한 역사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상고 시기의 중국에는 이미 “3역”(三易)이 존재했다. 첫째는 “하나라”(夏代) 시기의 “무자천서”(无字天书). ”(连山)이였다. 둘째는 “상나라”(商代) 시기의 "귀장"(归藏) 이었다. 셋째는 “주나라”(周代) 시기의 "주역"(周易) 이었다. “3역”은 “길흉화복”(吉凶祸福)을 판가름하는 "점술"(占术) 이었다. 하지만 속에는 우주 만물의 변화 법칙을 터득한 중국인 특유의 지혜가 엿보였다.

 

특히 “주역”의 “태극 8괘도”(太极八卦图)와 “역경”(易经)의 “64괘도”(六十四卦图)는 우주 만물의 변화 법칙을 “음양설”(阴阳说)로 풀이한 중국 전통사상의 기원으로 되였다. “역경”(易经)의 “역자”(易字)는 “변역”(变易)을 뜻한다. 태양을 뜻하는 “일자”(日字)와 달을 뜻하는 “월자”(月字)로 조합되었다. 낮에는 태양이 있고 밤에는 달이 있다. 태양이 살아지면 달이 뜬다. 달이 지면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의 근원은 우주 만물이 “음양태극”(阴阳太极)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역경”은 도합 “64괘”의 점괘를 추출했다. 그러나 “64개”의 점괘는 단지 "양"(阳卦)와 “음괘”(阴卦)로 조합되었다. 중국은 상고시기부터 "양"와 “음괘”로 “천, 지, 인”(天地人)이 자연의 순리대로 조화되는 점술을 터득했다. 같은 지혜는 지난 수천 년간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 그와 동반해 조상숭배 신앙도 지난 수천 년간 줄기차게 전승되었다.

조상숭배 신앙은 당연히 "무신론"신앙이었다. 공자는 “경귀신, 이원지”(敬鬼神,而远之)라고 했다. 로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지난 수천 년간 중국은 드팀없이 유교와 도교를 숭상했다.

 

그러므로 임어당 선생은 이렇게 개탄했다.

“도교 철학은 중국 사상의 낭만파였다. 유교 학설은 중국 사상의 경전파였다. (道家哲学为中国之浪漫派,孔教则为中国思想之经典派.)

1911년, “중화민국”이 출범했다. 청조(清朝)의 멸망과 더불어 지난 수천 년간 존속했던 황권 독재체제가 무너졌다. “군위신, 부위, 부위처강”(君为臣纲,父为子纲,夫为妻纲)의 유교전
통신 무너졌다. 손중산이 개척한 “중화민국”은 “삼민주의”
(三民主义)를 신앙했다. 첫째는 “민족주의”였다. 둘째는 “민권주의”였다. 셋째는 “민생주의”였다.

 

“민족주의”는 청조 봉건 전제 통치를 반대했다. 서방 열강의 침략을 반대했다. 군벌을 타도하고 각 민족의 평등과 자치권을 취득했다.
“민권주의”는 진정한 민주 정치를 실현했다. 인민이 선거권, 파면권, 창제권, 부결권을 행사했다. 정부는 치유권을 소지했고 인민은 정권을 장악했다.
“”민생주의”는 “평균 토지권”(平均地权)을 실현했다. 국민 생계(国民生计)에 대한 “자본통제권”(资本节制)을 실현했다.

그러나 1915년, 원세개(元世凯)가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또다시 봉건 전제 통치가 대두했다. 1917년, 장훈(张勋)이 퇴위한 부의(溥仪)를 재차 등극시켰다. 그러나 근근이 “12일 천하”(十二日天下)로 막을 내렸다. 중국은 또다시 새로운 신앙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1915년 진독수가 창간한 “신청년”잡지가 출범했다. “신청년”잡지는 이대소(李大钊) “서민의 승리”(庶民的胜利)를 게재했다. “서민의 승리”는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학설”을 신봉했다. 1921년 드디어 “공산당”이 탄생했다. 손중산의 “삼민주의”이후 중국이 선택한 새로운 신앙이었다. 1949년 모택동은 신형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설했다. 중국은 오로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신앙했다.

나는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한 부익부 빈익빈의 심각한 사회 폐단을 절실하게 감지했다. 일체는 재부가 지배했다. 돈의 힘은 무적(无敌) 이었다. 기독교 신자에게 재부와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은 죄를 속죄해 주는 정신세계의 신앙이었다. 재부는 인간의 사욕을 충족하는 현실 세계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현실 세계 신앙은 언제나 정신세계 신앙보다 앞자리를 차지했다. 자본의 본질은 영원한 실리주의였다.

 

    훈춘시 북산에 위치한 "영보선사"
    훈춘시 북산에 위치한 "영보선사"

2006년 7월 훈춘시 북산에 자리 잡은 영보선사”(灵宝禅寺)가 성대한 “개광 의식”(开光仪式)을 치렀다. “영보선사”는 민간에서 “서대묘”(西大庙)로 속칭되었다. 1714년 청조 강희황제(康熙皇帝) 시대에 수건 되였고 함풍년간(咸丰年间)에 “만인극”(万世人极) “어”(御匾)을 하사받았다.

 

2001년 7월에 “영보선사”를 재건하기 위한 “정초 의식”(奠基仪式) 개최되었다. 이날은 새벽부터 잔잔한 보슬비가 내렸다.

9시 48분 “정초 의식”이 개시되었다. 갑자기 하늘 저편에 연꽃 모양의 구름떼가 나타났다. 수천 명의 불제자들은 일거에 하늘을 향해 경건한 오체투시(五体投地)를 했다.

 

사실상 2006년 7월, “영보선사 개”때도 같은 신비한 현상이 발생했다. 이날 식에는 무려 4만여 명의 불제자들이 운집했다. 오전 9시 48분 개광식을 개시하는 둔중한 종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하늘에 먹장구름이 뒤덮였다.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조금 “동방 제일 불광”(东方第一佛光)으로 꼽힌 “천단와불”의 뒤편으로 () 모양의 황금빛 태양이 돋아났다. 순간 불제자들은 넙죽 엎드려 “천단와불”을 향해 명복을 빌었다.

 

천단와불”은 길이가 21.4미터였고 높이는 8미터에 달했다. 불제자들은 너도나도 앞다투어 “천단와불”에 향불을 공양했다. 싸구려 100원이었고 값비싼 1000원을 넘겼다. 그래도 향불을 공양하는 대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석가여래는 보리수 아래에서 6년간 깊은 묵념에 잠겼다. 어느 문뜩 “대각”(大觉)을 깨쳤다. 드디어 세상에 불교가 탄생했다. 불교의 부처님 상은 언제나 모양의 빛이 동반했다. 이는 불교의 전통인가? 아니면 전설인가?

 

    령보선사의 "천단와불"

부처님을 뜻하는 “불자”(佛字)는 사람 “인자”(人字)와 아니 “불자”(弗字)로 조합되었다. 문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불자”는 사람보다 신비한 존재였다. 부처님은 항시 신비한 황금빛 환이 동반했다. 부처님의 험함과 위대함의 구현이었다.

 

무효, ”(无孝有三,无后为大)는 중국의 전통적인 민간신앙이었다. “유자만사족” (有子万事足), “무관일신경”(无官一身轻)은 권문세가들의 전통신앙이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전통신앙에 무릎을 꿇는 중국인이 점점 줄어들었다.

“일체는 돈이 결정한다.”(一切向钱看)
“권력이 돈을 지배한다.”(权力胜于钱力)
이는 다른 신앙이었다. 같은 신앙에 무릎을 꿇는 중국인은 도리여 점점 많아졌다. 부인할 없는 현실로 되였다. 회피할 없는 현실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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