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아 쇼핑”무역회사의 창시인 심사장님은 “웨스트비치”(西海岸)에 거주했다. 이곳은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바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이곳의 호화주택은 부지면적이 3000평도 넘었다. 부동산가격은 시가로 800만 달러를 웃돌았다. 많은 사람들만 모여사는 부자동네였다.

심사장님은 매주 토요일마다 토런스에 위치한 “비행 애호 센터”로 나갔다. 이 센터에는 무려 200여 대의 크고 작은 경비행기가 보관되었다. 모두 돈맛을 풍기는 부자들이 비행을 즐기려고 구입한 사인 비행기였다. 심사장님은 12인승 경비행기를 마련했다. 주말이 돌아오면 하루 종일 비행을 즐겼다.

 

2002년 2월 나는 구정을 며칠 앞두고 목사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노모님에게 새해 인사를 드렸다. 근데 뜻하지 않은 소직을 접했다. 심사장님이 “엔론”“(Enron)의 주식 투기에 말려들었다. “엔론”주식이 폭락하며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코레아 쇼핑”무역회사는 부도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코레아 쇼핑”은 부지면적이 2000평에 달하는 물류창고 5개를 잃었다. 심사장님은 주말마다 즐기던 경비행기도 날려버렸다. 다년간 열심히 영위했던 "엘 제일 장로교회”의 장로 내놓았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주야장천카지노에 파뭏였다.

 

“엔론”은 미국 에너지 기업의 거두였다. 1990년대에 재벌급 기업으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엔론”의 연간 수입은 한때 1000억 달러를 넘겼다. “포천지”는 “21세기 가장 유망한 기업”으로 선정했다. 지난 1990년대 초 미국은 걸프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엔론”은 쿠웨이트 석유산업에 대한 재건을 독점했다. 인도, 인도네시아, 터키, 폴란드, 이탈리아 등등 20여 개 국에서 천연가스 개발과 발전소 건설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엔론”은 명실공히 "지구촌 에너지 기업의 거두”로 대두했다.

 

“엔론”주식은 다년간 뉴욕 월가의 주식시장에서 한고에 90달러를 호가하는 호황을 누렸다. 사실상 “9.11테러”전까지 “엔론”의
“CEO”(高层领导)와 산하 3000여 명의 직원들은 “엔론”의 주식 투기에 광분했다. 백만장자를 넘보기도 하였고 억대 부자를 넘보기도 하였다. “엔론”과 특수 관계를 가진 정치인들도 “엔론”주식을 투기해 엄청난 익을 챙겼다.

          "9.11"테러 사진 자료
          "9.11"테러 사진 자료

그러나 “9.11테러”직후 갑자기 경제 불황이 닥쳤다. “엔론”은 순식간에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다. 2001년 12월의 어느 , “엔론”의 “CEO” 컨 레인이 갑자기 텔례비죤에 나타났다. “지난 한시기 <엔론>의 부실경영을 책임지겠다. <엔론>의 총재직에서 사직하겠다.” 5일 후 “엔론”의 창업주 제프 스킬링이 텔례비죤에 나타나 공식적으로 “엔론”의 파산을 선포했다. 일순간 “엔론”주식이 25센트의 싸구려 주식으로 폭락했다.

당시 “엔론”의 직원들은 무려 12억 달러의 퇴직금을 의연히 “엔론”주식으로 소지했다. 창업주 제프 스킬링은 전날까지도 “엔론”주식의 호황기는 영원히 살아지지 않는다고 떠버렸다. 3000여 명 직원들은 여전히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노후생활을 환상했다. 그러나 “엔론”의 황금빛 신화가 살아졌다. “엔론”의 거대한 재부가 바람결같이 살아졌다. 장미꽃 노후생활도 물거품이 되였다. 3000여 명 직원들이 무참하게 거리 바닥으로 내몰렸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노숙자로 전락했다.

 

미국은 줄곧 자유시장경제가 지배했다. 그러므로 중소기업 또는 재벌기업의 파산은 “병가의 승패”와 같이 극히 사로웠다. 그러나 에너지 기업의 거두 “엔론”은 “9.11테러”이후 불과 3개월 만에 파산을 초래했다. “CEO” 컨 레인은 기업의 부실경영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면서 총재직을 사직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섶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마침내 “엔론”의 특대 경제 사기극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개입된 정치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미국은 막히는 충격을 당했다.

 

클리프 백스터는 다년간 “엔론”의 부회장으로 근무했다. 1년 전부터 이미 “엔론”의 부실경영을 감파했다. 총재 켄 레이에게 수차례나 “엔론”의 파산을 경고했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켄 레이는 마이동풍으로 흘러버렸다. 백스터를 한직으로 밀어냈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기어이 “엔론”에서 축출했다.

샤른 왓킨스는 “엔론”의 유일한 부장이었다. 그는 켄 레이 총재에게 “엔론”의 경제 사기극을 즉시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더는 직원들을 우롱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러나 켄 레이 총재는 도리여 왓킨스를 즉시 해고시켰다.

 

“9.11테러”이후 켄 레이 총재는 이미 “엔론”의 파산을 직감했다. 그는 “엔론”이 고용한 회계 공사와 손잡고 부랴부랴 기업의 경제 장부를 소각했다. 그리고 3개월 내에 무려 350차나 “엔론”주식을 투기해 1억 달러를 챙겨 넣은 갑부로 되였다. “엔론”의 창업주 제프 스킬링도 비빌리에 “엔론”주식을 투기해 3억 5천만 달러의 거금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은 “엔론”의 파산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양심이 없는 자본주의란 있을 없다. 인품이 없으면 부도 없다. 미국은 인품을 갖춘 기업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야망과 파괴적인 탐욕을 가진 기업인도 필요하다.”

부시 대통령은 “엔론”의 파산을 특대 경제 사기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기업 경영에 존재하는 도덕적인 문제로 인정했다. 역시 “엔론”을 감싸려고 애썼다. 부시 대통령은 득실에 따른 숨은 사연을 덮어감췄다.

1994년 조지 워커 부시 텍사스주의 주장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엔론”은 10만 달러의 정치후원금을 지원했다. 2000년도 대통령 선거때도 “엔론”은 2억 달러의 정치후원금을 지원했다. 2001년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 진출했다. “엔론”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득불 “엔론”의 경영진을 육속 등용했다. 하비 피트를 연방정부 에너지 관리 위원회의 주석으로 임명했다. “엔론”의 기업 경영은 당당하게 정치적인 보호막을 챙겼다.


“엔론”은 부시 대통령을 추종하여 새로운 국가에너지 정책을 제정했다. 2020년까지 미국의 에너지 수요량을 32%로 급증시켰다. 미국은 앞으로 부득불 석유산업, 석탄산업, 천연가스산업 등 각종 에네지산업을 대폭적으로 발전시켜야 하였다. “엔론”은 누워서 먹기식으로 일확천금의 재부를 쌓게 되였다.

 

“9.11테러”직후 “엔론”은 마침내 파산 일보에 직면했다. “엔론”의 상황은 한층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엔론”은 부시 대통령을 추종해 인도정부와 무려 23억 달러의 발전소 개발 항목을 체결했다. 부시 행정부는 “엔론”의 특대 경제 사기극에 두툼한 정치적인 보호막을 설치했다.

 

2002년 구정이 지난 후였다. 어느 뜻밖에 “주간 코레아”의 발행인 박선영 여사님이 나를 찾았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웃음 얼굴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마도 기자님의 손을 좀 빌려야 같아요. 미국 이민 주년 사료 정리 작업이 산더미 같아요. 어때요? 도와줄 있겠어요?”

     미국 견학 기념
     미국 견학 기념

나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쉽게 읽었다. 그러나 막상 응답하려니 주저심부터 앞섰다. 사료 정리 작업은 구경 어떻게 착수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두툼한 서류를 내밀었다.
“조 기자님, 서류 내용에 대해선 신경 필요가 없어요. 우선 문맥이 통한 국문으로 정리해 주세요.”
그제야 나는 선뜻이 그녀의 요구에 동의했다.

 

“조 기자님은 혹시 미래학자 앨빈 (Alvin Toffler)에 대해 알고 있어요? <엔론>의 특대 경제 사기극의 면에 숨은 탐욕의 비밀을 투철하게 까밝히려면 어차피 앨빈 토플러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을 앨빈 토플러의 대표작 “제3의 물결”을 읽었다. 박선영 여사님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연후에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빈 토플러
    미국의 사회학자 앨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는 1928년 뉴욕에서 출생했어요.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백악관 출입 기자로 활약했어요. “미래”잡지사의 편집으로 근무했어요. “포천지”는 앨빈 토플러를 저명한 미래학자로 선정했어요. 중국의 “인민일보”는 앨빈 토플러를 현대 중국의 발전에 기여한 50인의 외국인으로 선정했어요.

 

앨빈 토플러는 1970년대에 “미래쇼크”를 출간했어요. 1980년대에는 “제3의 물결”을 출간했어요. 그리고 1991년에는 “권력의 이동”을 출간했어요. 이 3부작 저서는 출간 직후 세계적인 쇼크를 자아냈어요.

“제3의 물결”에서 앨빈 토플러는 이렇게 지적했어요.
“인류가 문명사회에 진입한 제1물결의 농업사회는 수천 년의 역사를 소요했다. 그러나 제2물결의 산업사회는 근근이 3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실현되었다. 하지만 수천 년간 축척한 농업사회의 재부보다 엄청난 규모의 재부를 창출했다. 같은 재부는 지난 모든 역사 시기에 비해 인구의 급속한 대폭적인 증가를 초래했다.

3물결의 지식경제는 불과 20~30년간의 짧디짧은 역사를 통해 실현되었다. 지식경제가 창출한 재부는 제1물결의 농업사회, 제2물결의 산업사회가 창출한 모든 재부의 합계보다 수억 배에 달했다. 인류는 지식경제시대에 진입한 지난 모든 역사 시기에 이룩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생활을 향수하게 되였다.”

“권력의 3대 요에는 폭력, 재부, 지식이 포함되었다. 제1물결의 농업사회는 폭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왕권 독재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제2물결의 산업사회는 자본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권력은 자본 즉 재부가 주도했다. 그러므로 자유와 민주를 주장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미 제3물결의 지식경제시대에 진입했다. 오늘날 사회 부의 배분에서 지식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21세기에 권력투쟁의 핵심은 지식의 장악 여부에 있다. 인간의 지혜를 총화 지식은 소실되지 않는다. 지식경제시대에서 강자나 약자 부자나 빈자나 모두 평등하게 지식을 소유할 권력을 갖게 되였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폭력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한 권력은 언제나 파괴적이었고 편향적이었다. 또는 비민주적이었고 횡포적이었다. 그러나 지식에 의한 권력은 지난 모든 역사 시기에 존재하였던 파괴적, 편향적, 비민주적, 횡포적인 권력을 유력하게 제압하였다.”

앨빈 토플러의 “권력이동”은 미래쇼크를 일으켰어요. 자본에 의해 지배되던 권력의 시대는 이미 종결되었어요. 지식이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의 시대가 도래했어요. 재부 창출의 결정권은 자본이 아닌 지식이 점유했어요. 그러나 “엔론”의 특대 경제 사기극은 다른 권력의 상실을 의미했어요. 지식이 주도하는 권력이 결코 재부의 공평한 배분을 지배하지 못했어요. 도리여 새로운 극단적인 기심을 야기했어요. 정치권력은 여전히 폭력적으로 검은 손길을 뻗쳤어요. 지식경제시대는 다른 기로에 봉착했어요.

 

나는 박선영 여사님의 해박한 지식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중국에는 “청군일석화, 승독십년서”(听君一席话,胜读十年书)라는 말이 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새로운 밝은 눈을 갖게 되였다. 나는 머리를 숙여 다시 한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한국 경제신문사에서 출간한 한글본 “권력이동”을 구입하였다.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지난 300여 년간 모든 산업화 국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치투쟁은 <누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배분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른바 좌익과 우익 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의 근본적인 구별점은 재부에 대한 부동한 분배 원칙으로 구분되었다."

 

마르크스는 1867년에 “자본론”을 출간했다. “잉여가치학설”로써 재부의 배분에 존재한 첨예한 계급모순을 폭로했다. 자본은 잉여가치로 재부를 창출하였. 그러나 잉여가치는 동자가 창출하였. 동자는 분명히 재부 창출에 참여했다. 그러나 창출된 재부는 도리여 자본가의 독점 소유로 되였다. 반면에 동자는 도리여 재부의 노예로 전락했다. 칼 마르크스는 “계급투쟁 학설”을 주장했다. 폭력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동자 계급은 오로지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야만 자본이 주도하는 불평등한 사회를 소멸할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엄청난 규모의 재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재부의 배분에서 다년간 연해지구와 내륙 지구가 차별 되였다. 도시 주민과 시골 농민 간에도 차별 되였다. 부자와 평민 간에도 차별 되였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에도 차별 되였다. 심지어 남성 군체와 군체 에도 차별 되였다.


2008년 나는 한국에 다녀왔다. 당시 부산의 낡은 책가게에서 앨빈 토플러의 저서 “부의 미래”를 접했다. 한국 8000원을 주고 구입했다. 책은 김중웅 씨가 한글로 옮겼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 머리글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전통적인 관념으로 인지된 재부는 다만 토지, 공장, 또는 사무실, 기계를 통해 창출되었다. 그러나 재부는 양적 규모의 비약적인 확대만으로 <혁명적인 재부>라고 말할 없다. <혁명적인 재부>는 단순한 화폐 즉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적인 경제 즉 <비화폐 경제>에서 지금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새로운 재부를 창출하는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21세기 <혁명적인 재부>창출의 주요한 요인은 시간, 공간, 및 지식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지식은 <공급의 유한성>을 초월한 새로운 사회적인 기반을 형성하였다.”

 

지식권력 시대는 신형의 “혁명적인 재부”를 창출했다. 같은 학설을 천명하기 위해 앨빈 토플러의 저서 “부의 미래” 제8부는 “자본주의의 위기”, “자본의 전환”, “시장의 부재”, “미래의 화폐"를 언급했다. 제9부는 “빈곤의 미래”, “빈곤의 해소”를 취급했다. 제10부는 “중국은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것인가?”, “일본이 넘어야 고비”, “한반도의 시간과의 충돌”, “유럽이 잃어버린 교훈”, “미국의 내부 정세와 외부 정세”. “보이지 않는 게임 중의 게임” 등등 내용을 서술했다.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 지식경제시대에 새롭게 대두한 지식권력의 발전과 변화 추세를 예리하게 통찰했다. 그리고 새롭게 창출된 재부의 배분에서 지식권력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재차 확인시켰다.

 

근래에 나는 한글본으로 출간된 앨빈 토플러의 저서 “불황을 넘어”, “전쟁과 전쟁”, “부의 법칙과 미래” 등 저서를 구입했다. 나는 앨빈 토플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졌다. 사회 재부의 배분에서 줄곧 충돌과 대립을 형성하였던 “좌익세력”(左翼势力)과 “우익세력”(右翼势力)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가졌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주의가 <제3의 길>을 배워야 것이 아니라 <제3의 길>이 고전적 사회주의에서 배워야 한다. 좌파로 되는 것은 사회적인 불평등을 감소하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규명하면 사회적인 협력과 취약 대한 보호 등 좌파적인 가치를 뜻한다. 그러므로 <제3의 길>의 정치는 분명히 좌파 정치라는 것이 명백하다.”

 

앤서니 기든스는 “사회학의 변론”, “제3의 길”, “기로에 선 자본주의” 등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에서 다년간 실행한 “사회복지”정책은 “제3의 길”을 채택한 좌파 정치였다고 천명했다. “사회복지”정책은 빈민층의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주거문제 등 기본적인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좌파 정치였다.

지나간 역사는 하나의 진리를 증명해 주었다.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주거할 곳이 있는 빈민층은 결코 유혈적인 폭력혁명에 참가하지 않았다. 중산층은 다년간 선진국의 기틀을 구축했다. “사회복지”정책은 중산층의 사회적 직위를 확고하게 보장했다. 사회적인 자존심을 확고하게 지켜주었다. 그러므로 중산층은 언제나 보수적인 “우파 세력”을 대표했다. 보수적인 중산층은 줄곧 사회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한 군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에서 나타난 경제 부진은 “제3의 길” 을 선택한 좌파 국가들에 막대한 사회적인 부담을 초래했다. 따라 위축된 “사회복지”혜택은 새로운 사회적인 동란을 야기했다.

후기 공업 사회에서 중산층을 형성하는 주요한 군체는 고학력의 지식분자였다. 미국의 경우 중산층의 90% 이상이 지식분자였다. 이들은 중산층의 신분을 이미 대물림으로 전해주고 있다. 중산층은 줄곧 “민주, 자유, 평등” 념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태껏 “사회복지”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제3의 길”을 선택한 좌파 국가와 심각한 대립을 형성했다.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야기했다. 결국 에너지 기업의 거두 “엔론”이 특대 경제 사기극을 조작한 사회적인 비리를 초래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의 고속성장은 이미 기업주를 비롯한 “자산자 계층”(资产者阶层)을 형성했다. “매 판자”(买办者)와 “사회명류”로 구성된 “중 계층”(中产者阶层) 형성했다. 그리고 “약소 군체”(弱势群体)에 속하는 평민 계층과 빈민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밖에 특수한 신분을 유지하였던 “농민공 계층”도 형성되었다.

 

저명한 사회학자 립평(孙立平)교수는 “사회 진보해야 한다(社会要进步) 새로운 이념을 주장했다. 역사학자 오사(吴思) “관가주의”(官家主义) 전통 관념을 질책했다. 이는 사회 부의 배분에서 “공정, 공평, 화해”의 길을 선택하기 위한 또다른 새로운 모색과 탐구였다.

 

     청화대학의 손립평 교수
     청화대학의 손립평 교수


일찍 일본의 출판사는 “세계가 만약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이란 책을 출간했다. 100명의 마을에는 여자가 52명이고 남자가 48명이었다. 30명이 어린이였고 70명이 성인이었다.

 

“만약 세계가 단 2명이 사는 마을”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이될까? 기독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분명히 아담과 이브가 것이다.러나 자본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분명히 부자와 빈자가 것이다. 아담이 부자면 이브는 응당히 빈자여야 한다. 반대로 이부가 부자면 아담은 당연히 빈자여야 한다.

그러나 “제3의 길” 좌파 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혁명적인 좌파와 보수적인 우파가 것이다. 아담이 좌파면 이부는 우파에 속한다. 반면에 이부가 좌파면 아담은 우파에 속한다. 자본주의는 정치 개념에 앞서 경제 개념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부익부 빈익빈”의 대립된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제3의 길” 좌파 정치는 경제 개념에 앞서 정치 개념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좌익과 우익”의 대립된 사회를 형성했다.

 

지난 모든 역사 시기에 재부는 줄곧 양분된 세계를 지배했다. 그러나 “제3의 길” 좌파 정치는 줄곧 대립된 세계를 초래했다. 양분된 세계와 대립된 세계는 여태껏 풀지 못한 역사의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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