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5년 4월, 나는 다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나는 신비한 아메리카 대륙을 영원한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가장 상적인 코스는 동부의 워싱턴에서 출발해 시카고를 경유한 서부의 로스앤젤레스에 이르는 3박 4일 대륙횡단 앰트랙 티켓이었다.

내가 구입한 1등석의 티켓값은 600달러였다. 사실 항공편을 용하면 티켓값이 불과 200달러 안팎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의 신비함을 육감으로 느끼려면 외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용하는 기차 편이 가장 상적이였다. 나는 고달픈 육신을 달래고 싶었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싶었다.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3박 4일의 기차 행에 각별한 호기심이 쏠렸다

 

워싱턴에서 시카고로 향하는 트랙은 오후 17시 20분에 발차했다. 나는 오후 15시경에 기차역에 당도했다. “코레아 쇼핑”의 안사장님과 사모님, 한국인 친구 미스타 서, 몽골공화국 친구 아부 라이 함을 비롯한 회사 직원들이 이미 기차역에서 대기했다. 지난 년간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고 지내왔던 잊지 못할 친구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석별이나 별에 대해 남다른 절절한 애수의 정을 갖고 있었다.

      "코레아 쇼핑"회사 직원들과 함께
      "코레아 쇼핑"회사 직원들과 함께

한국인의 시각으로 중국과 한국은 이웃집같이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미국인의 시각으로 중국과 미국은 지구를 바퀴나 에돌아야 하는 머나먼 곳이었다. 나는 머나먼 중국 땅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언제 다시 미국 땅을 밟을지 아무런 기약도 없이 떠났다. “코레아 쇼핑”의 직원들은 부디 행복하게 살라는 인사말에 앞서 눈시울부터 붉혔다. 나도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사장님은 벌써 번이고 다시 다시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부죽한 얼굴에 항시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미스타 조, 나 미국서 살면서 중국 조선족 많이 접했어. 근데 미스타 같은 사람은 처음이여. 아무튼 그동안 정두 깊었고 고생도 많았어. 나 미스타 조 굳게 믿어. 중국으로 돌아가면 꼭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아."
“안사장님. 그동안 여러모로 따뜻하게 대해주셔 진짜 감사합니다. 안사장님의 말씀 꼭 명기할게요.”
나는 머리를 깊이 숙여 정중하게 인사드렸다.

한국인 친구 미스타 서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님,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는 평생 실장님을 잊지 않을 거예요.”

 

몽골인 친구 아부 라이 뚜로 함이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수걱수걱 일만 잘하던 친구였다. 서툰 한국말 때문에 때로는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한량없이 너그럽고 착하고 다정했던 친구였다. 나는 몽골인 친구의 우악 손을 부여잡고 오래오래 흔들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몽골인 친구도 눈시울을 붉혔다.

      안사장님 사모님과 함께
      안사장님 사모님과 함께

“여러분, 부디 몸 건강히 잘 사시고요. 언제 한번 중국으로 꼭 여행 오세요.”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깊이 숙여 정중하게 인다 드렸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중국서 행복하게 잘 사세요.”
한국인 직원들은 나를 향해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들과 송별한 곧추 대기실로 향했다. 워싱턴 역의 대기실은 축구장만큼 널찍했다. 실내는 도처에 모니터 머신(显示器)이 설치되었다. 수시로 기차의 발차 시간과 게이트 남벌(检票口)를 체크할 있었다. 나는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끝마치고 시카고발 열차 대기했다. 어느새 오후 16시를 넘겼다. 그러나 모니터 머신에는 여전히 시카고발 열차 발차 시간과 게이터남버가 뜨지 않았다.

나는 의아쩍은 생각이 들어 인포메이션(问事处)으로 찾아갔다.
“익스큐즈미, 캔유 텔미 왓츠 마이 게이트 남벌?”
(안녕하세요, 출구에서 검표하는지 알려줄 있겠어요?)
40대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내가 내미는 티켓을 체크했다. 그는 인포메이션 뒤편에 있는 출입문을 가리켰다.
, 플리지 인사이 디스 름.”(좋아요, 안쪽의 대기실로 들어가세요.)

알고 보니 1등석 티켓은 대기실이 따로 있었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30대로 보이는 흑인 남자가 카운터에 서있었다.
“메이 아이 헬프 유?” (뭘 도와드릴까요?)
흑인 남자는 웃는 모습으로 반겨 맞았다. 나는 얼른 티켓을 내보였다.
, 유 고투 시카고, ?”
(당신은 시카고로 가는 것이 맞지요?)
나는 “Yes”라고 대답했다. 그는 안쪽으로 들어가 대기하라고 하였다. 16시 50분에 탑승 체크를 한다고 알려주었다.

 

1등석 대기실은 바닥에 정갈한 붉은색 카펫이 깔렸다. 가장자리에는 짛은 회색의 진피 소파가 둘러 있었다. 안에는 이미 7~8명의 손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었다. 켠에 커피 머신(咖啡机)이 놓였다. 위에 모니터 머신이 설치되었다. 시카고발 열차 출발시간은 정각 17시 20분이었다. 게이트 버는 29번이었다.

실내에는 대형 TV 스트린이 설치되었다. “CNN”방송사의 “World Toady”(오늘의 세계) 뉴스 프로를 방송했다. “9.11테러”이후 테러리스트로 잡혀온 용의자들이 콴타 나모 수용소에서 어떻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소개했다. 나는 커피 머신에서 뜨거운 커피를 뽑았다. 널찍한 소파에 앉아 뉴스를 시청했다. 호텔 로비의 아늑한 커피숍에 있는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16시 50분에 탑승 체크가 시작되었다. 29번 게이트를 빠져나오니 플랫폼(站台)에서 뚱뚱한 흑인 남자가 손님들의 티켓을 재차 확인했다.

내가 구입한 티켓은 완룸(包间)이였다. 창문 아래편에 양쪽으로 널찍한 의자가 놓였다. 마주 당겨놓으면 침대로 사용할 있었다. 창문 위에는 시트가 달려있었다. 접었다 폈다 있었다. 물건을 올려 놓는 선반이나 또는 침대로도 사용할 있었다. 발차 시간은 아직도 30분 정도 남았다. 그러나 열차 안은 이미 에어컨이 작동되었다. 천정에서 시원한 찬바람이 뿜겨 나왔다.

 

열차 정각 17시 20분에 발차했다. 조금 출입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 검은색 승무원 제복을 입은 흑인 남자가 웃음 얼굴로 서있었다.
“호 아유, 캔 아이 유얼 티켓?”
(안녕하세요. 티켓을 보여줄 있겠습니까?)
나는 얼른 티켓을 내밀었다. 그는 티켓을 확인한 안의 조명 버튼을 일일이 작동하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에어컨의 온도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알려주었다. 혹시 밤중에 추우면 에어컨을 히터(热风)로 변경할 있다며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나는 연신 “땡큐 땡큐”를 곱씹었다.

 

흑인 승무원은 출입문에 설치된 콜버튼(呼叫铃)을 가리켰다. 서비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콜버튼을 눌러 자기를 찾으라고 알려주었다. 화장실은 2층에도 있고 1층에도 있으며 샤워룸(淋浴室)은 1층에 있다고 설명했다. 커피 머신은 복도 출입구에 있고 카페테리아(餐厅)는 건너편 차량 있다고 알려주었다.
“위스 유 해브 프래 전트 죠니”(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흑인 남자는 깍듯이 인사말을 남기고 다음 룸으로 향했다.

나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부터 3박 4일 아늑한 침대방에서 조용히 지내게 되였다. 어쩐지 구름을 잡아타고 하늘을 유유하게 날아가는 신선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이 사무치게 례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육신의 고달픔을 잊게 되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활시위같이 팽팽했던 마음의 탕개를 풀게 되였다. 지난 수년간 무정한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갔다. 어쩌면 손가락 한번 튕기는 짧은 순간이었다. 애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년 북경공항을 떠날 때였다. 나는 없는 미래 때문에 걱정부터 앞섰다. 돌이켜보면 마치 어제 일같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렇게 아늑한 침대방에 몸을 담았다. 유유 작작 귀국길에 올랐다. 참으로 남가일몽같이 믿어지지 않았다.

“타향살이 몇십 , 낯설고 물선 곳, 부평초같이 떠돌던 나그네의 설음 누가 알아주랴. 하늘 저산 아래 아득히 먼 천리 타향. 서럽게 우는 몸 하냥 외로워도. 꿈속에서 그렸던 내 고향은 마냥 그리워라.”
옛날 조선팔도를 바람같이 구름같이 옆같이 떠돌던 나그네의 망향의 설음이었다.

        대모님과 함께(로스앤젤레스 토렌스 카운)
        대모님과 함께

돌이켜 보면 머나먼 이국 만  아메리카는 얼굴이 달랐다. 말도 달랐다. 피부색도 달랐다. 생각마저도 달랐다. 낯설고 물설고 정마저도 설었다. 부평초같이 떠돌던 나그네였다. 지난 수년간 언제 한번 시름 놓고 발편잠을 자본 적도 없었다. 언제 한번 마음 놓고 육신의 탕개를 풀어본 적도 없었다. 언제 한번 유유 작작 콧노래를 부르며 즐겨본 적도 없었다. 애오라지 육신의 기름을 바짝바짝 짜냈다. 주야장천 일손에 쫓겨 곁눈 한번 팔아보지도 못했다. 고달프고 힘겨웠다. 외롭고 서러웠다. 허전하고 쓸쓸했다. 하건만 설움을 알아줄 이도 없었다. 고달픔을 달래줄 이도 없었다. 애오라지 천애지각 벼랑 끝에 외올로 서있던 망향의 나그네였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메리카로 보내라. 아메리카는 천당이니까. 증오하는 사람은 아메리카로 보내라. 아메리카는 지옥이니까.”
지난 수년간 나는 매일 천당과 지옥을 드나들었다. 매일 팽이같이 숨가삐 돌아쳤다. 마침내 등허리가 휘도록 지쳤다. 마침내 마음도 메마르게 말라버렸다. 어느새 눈시울이 척척하게 젖어들었다. 저도 몰래 가슴속이 아릿하게 저려났다.

“익스큐즈미”
갑자기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20대로 보이는 흑인 남자가 웃음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눈덩이같이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받쳐 입었다. 식당 웨이터를 상기시키는 유니폼 차림이었다.

 

“익스큐즈미. 왓 타임 두유 디너?”(미안한데요. 저녁식사는 시에 하시겠습니까?)
알고 보니 앞으로 3박 4일간의 식사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되었다. 저녁식사시간은 18시 30분부터 20시까지였다. 나는 19시 30분으로 예약했다. 흑인 웨이터는 체크카드를 넘겨주었다.

나는 약속된 시간에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손님 주방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칸막이가 없었다. 손님 에서 요리사의 일쏨시를 구경할 있었다. 매우 이색적인 분위기였다. 주방은 손님 보다 갑절이나 더 컸다. 요리사와 웨츄레스는 백인이었다. 밖의 직원은 일색으로 흑인이었다.

 

백인웨츄레스는 40대로 보였다. 절구통같이 묵직한 뱃살을 힘겹게 가누며 손님들의 저녁 메뉴를 주문받았다. 내가 좌석을 정하고 앉자 그녀는 대뜸 환한 웃음을 지으며 메뉴짱을 내밀었다. 조금 그녀는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깜찍하게 자른 빵과 샐러드가 담겼다. 저녁 메뉴는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 스테이크와 치킨 햄버거 등속이 있었다. 나는 치킨과 핫티(热茶)를 주문했다.

나는 식탁에 놓인 빵은 벌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양상추, 당근, 양파, 쌜러리, 부로커린 등 야채가 뒤섞인 샐러드로 가벼운 입가심을 하였다. 이윽고 웨츄레스가 내가 주문한 리를 가져왔다. 기름에 튀긴 큼직한 다리 개와 으깨진 감자가 있었다. 쪄낸 통강냉이알도 수북하게 담겼다. 데쳐낸 브로커리 몇쪼각도 눈에 뛰었다. 나와 마주 앉은 백인 할머니는 햄버거에 베이컨과 계란 볶음을 겯드렸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챙겨 먹었다. 식사가 끝난 1달러 지폐 장을 식탁 위에 남겨놓고 좌석에서 일어났다. 나도 팁으로 2달러를 남겨놓고 객방으로 돌아왔다.

                             2.

덜커덩덜커덩 열차 장막을 뚫고 없이 내달렸다.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구슬같이 빛났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반겨주는 하늘의 무리였다. 언제 한번 마음 놓고 밤하늘을 쳐다보 기억도 없었다. 고달픈 일상에 밤늦게 퇴근하면 급급히 귀가했다. 무심코 밤하늘의 무리를 쳐다볼 겨늘도 없었다. 구슬같이 빛나는 무리에 망향의 마음을 기탁할 여유도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무리를 잃고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늘 저편에 떠있는 무리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또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살아졌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였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다지도 자연의 섭리를 어기는 것일 ?

 

해가 뜨면 깨여나고 해가 지면 잠드는 것이 생명의 섭리였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나는 매일같이 뜨기 전에 깨여나야 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잠자리에 수가 없었다. 긴긴 세월 생명의 섭리를 어기고 분주하게 돌아쳤다. 어느덧 육신은 삭정이같이 바싹 말라버렸다. 기력도 물에 빠진 강아지같이 쇠진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버둥거렸는가?


나는 차창에 커튼을 드리우고 조명등 버튼을 눌렀다. 천정에서 한줄기 강렬한 불빛이 쏟아지며 자그마한 탁자를 환히 밝혔다. 독서를 즐길 있는 알맞춤한 분위기였다. 나는 역사학자 아널드 죠셉 토인비(阿诺德• 约瑟夫•汤恩比)의 저서 "역사의 연구”를 펼쳤다.

        죠셉 토인비의 저서 "역사의 연구"
       아널드 죠셉 토인비의 저서 "역사의 연구"

토인비는 당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였고 문명비평가였다. 그는 1889년, 런던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사를 전공했다. 1924년 런던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했고 1927년부터 "역사의 연구”를 집필했다. 장장 30여 년의 필경을 경유해 도합 12권으로 묶은 방대한 저서 "역사의 연구”를 출간했다.

"역사의 연구”는 기존의 결정론적인 역사관을 부정하였고 서구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반성하였다. 선사시대에 출시하였던 26개의 인류 문명권을 다루었다. 인류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떻게 성장 발전하였으며 또 어떻게 쇠퇴 해체되었는가를 밝혀내여 세계적인 대작으로 인정받았다.

 

토인비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지난 모든 인류 문명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같은 역사관을 설명하기 위해 토인비는 “죽음의 문”이란 새로운 역사 개념을 도입하였다.

선사시대의 인류는 또다시 전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실패에 직면하였다. 문명사회로의 진화는 끝없는 실패를 반복하였다. 같은 실패가 구경 어느 만큼의 시간을 소요하였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또 어느 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죽음의 문”을 넘어섰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갑자기 성공이 있었다. 진보가 있었다. 도약이 있었다. 이것이 역사학자 토인비가 인증한 "문명 역사"의 기원이었다.

 

이런 역사 스토리가 있다. 선사시대에 말할 아는 인간이 있었다. 어느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돌멩이를 쥐고 용맹하게 맹수를 쫓았다. 그러나 맹수를 때려잡지 못했다. 도리여 굶주린 맹수에게 목숨을 잃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며 무수한 세월이 흘렀다. 어느 굶주림에 시달리던 한무리의 인간들이 돌멩이를 쥐고 또다시 맹수를 쫓았다. 마침내 용맹하게 맹수를 때려잡아. 드디어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았다. 이때로부터 “여가의 시간”을 갖게 되였다.

이들은 “여가의 시간”을 용해 암석 위에 수렵한 동물의 형상을 보존하였다.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동물의 뼈를 마모하여 사냥도구를 제조했다. “여가의 시간”은 이렇게 문명의 역사를 개척하였다. “여가의 시간”은 이렇게 문명 역사의 새로운 도약과 비전을 다그쳤다.

 

역사학자 토인비와 달리 프란시스 후크 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란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괴롭혔던 “지배와 복종”이란 불평등을 진지하게 연구하였다.

“헤겔이 말하는 최초의 인간은 먹을 , 수면, 주거 등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망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본존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물질적인 것을 추구했다. 예컨대 인류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필요한 존재가 되거나 또는 주목받기를 원했다. 헤겔의 론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최초부터 사회적인 존재였다.”

 

인류의 선사시대에 등장한 “지배와 복종”이란 역사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프란시스 후크 야마는 이런 역사 스토리를 엮었다.

역사의 여명기에 한무리의 인간이 우연하게 다른 한무리의 인간과 마주쳤다. 상호 간에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별안간 피비린 살육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먹을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몸에 걸친 짐승 가죽을 빼앗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주거지를 강탈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피비린 살육은 지극히 단순했다. “구경 누가 누구를 정복할 있는가?”라는 야릇한 욕망과 충동을 만족시키려고 시도했다.

 

피비린 살육전은 구경 어떻게 되였을 ? 프란시스 후크 야마는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첫째. 피비린 살육전은 쌍방을 모두 무참하게 죽여버렸다. 역사는 생명의 종말을 맞게 위기에 처했다.
둘째. 피비린 살육전에서 한쪽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모두 죽어버렸다. 살아남은 일방은 좋게 승전했지만 정복을 인정받지 못하는 비운을 당했다.
셋째. 피비린 살육전에서 죽음에 직면한 한쪽이 마침내 굴종하였다. 승전한 한쪽은 드디어 정복의 야릇한 욕망을 맛보았다. 그러나 굴종한 한쪽은 복종과 지배의 불운을 당했다.

 

문명의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를 형성했다. 주인과 노예를 형성했다.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형성했다. 부유한 자와 빈한한 자를 형성했다. 이것이 프란시스 후크 야마가 주장한 계급사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후크 야마가 인정한 정복과 피정복의 역사 스토리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가설이었다. 그러나 기정된 사실로 인정하였다. 결국 형이상학적인 시행착오를 범했다. “문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분명히 “정복과 굴종, 지배와 복종”이란 불평등이 있었다. 지금도 부자와 빈자가 공존하고 있다. 부자는 분명히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빈자는 아부와 굴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
       애덤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

“국부론”(国富论)의 저자 애덤 스미스(亚当•斯密)는 18세기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는 재부의 무한한 창출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경제학 론을 천명했다. 18세기 유럽의 자본부의 열강들은 산업자본이 창출한 막대한 재부에 의탁해 폭력적인 피비린 식민지 정복의 역사를 개척했다. 19세기 영국은 식민지 전쟁을 통해 마침내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으로 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지난 5천 년간 드팀없이 지켜왔던 “세계제국”의 자존심을 빼앗겼다. “식민지 반식민지”의 치욕을 당했다.

1867년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출간했다. 그는 자본론에서이렇게 지적하였다.

“사회개혁은 절대로 강자가 약해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약자가 강해져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학설이었다. 20세기 전반기에 방방곡곡에서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학설이 신봉되었다. 드디어 약자가 부단히 강해져 혁명이라는 새로운 폭력으로 강자를 정복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문명의 역사는 시초부터 피비린 정복의 역사였다. 정복의 역사는 언제나 폭력이 동반되었다. 폭력은 힘을 낳았고 힘은 국가를 낳았다. 국가는 정부를 낳았고 정부는 군대를 낳았. 군대는 전쟁을 낳았 전쟁은 언제나 폭력을 동반했다. 폭력적인 전쟁은 언제나 새로운 정복의 기회를 창출했다. 새로운 정복을 맞을 때마다 역사는 또다시 진보하고 발전하였다. 토인비가 언급한 “죽음의 문”도 같은 역사관을 기술했다. 후크 야마가 주장한 “정복과 피정복”도 같은 역사관을 천명했다.

 

역사 이래 수메르인들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인들의 상형문자는 “죽음의 문”을 넘지 못하고 가뭇없이 살아졌다. 유독 중국의 갑골문은 “죽음의 문”을 넘어 찬란한 5천 년의 중국 문명을 보존하였다. 이것이 역사의 우연인지 아니면 역사의 필연인지는 . 그러나 문명의 역사는 언제나 확실한 것이었다. 반면에 역사 속의 문명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었다. 문명의 역사는 언제나 결정론적이었다. 그러나 역사 속의 문명은 언제나 불확정적인 것이었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다. 하지만 파도같이 밀려드는 생각에 잠기가 말끔히 살아졌다. 나는 조명등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에서 보석같이 초롱초롱 빛나던 무리도 가뭇 없이 살아졌다. 하늘 저켠에서 은은한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불현듯 이런 글귀가 떠올랐다.

“불지산진면모. 지연신재산중
(不知庐山真面目. 只缘身在此山中)

 

나는 은은한 달빛에 도취되었다. 여태껏 쌓였던 모든 번뇌와 고독과 외로움과 고달픔과 괴로움과 허전함과--- 마음속의 온갖 잡념을 훌훌 털어버렸다. 날개라도 돋쳐 은은한 달빛이 쏟아지는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신선 같은 무아지경을 맛보고 싶었다. 선인(仙人) 같이 은은한 달빛을 잡아타고 고향땅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도인(道人) 같이 은은한 달빛을 지르밟고 고향땅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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