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간밤에 뒤치락거리며 내처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9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깨여났다.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한식경이 지나서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승무원 제복을 입은 흑인 아저씨가 한창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져 1달러 지폐를 팁으로 내밀었다.
“땡큐. 해브 나이스 데이.”(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세요)
“유투”(당신도 즐거운 하루가 되세요.)

흑인 아저씨는 아침식사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고 문의했다. 나는 손을 저어 보이며 괜찮다고 응답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여 이더니 물러갔다. 근데 잠시 쟁반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우유 , 바나나 , 시리얼(燕麦片)이 조금 담겨있었다. 아침식사를 넘긴 손님에게 마련된 서비스라고 했다.

나는 얼른 쟁반을 받아 쥐고 이렇게 물었다.
“익스큐즈미. 왓 타임 다운 더 시카 데이숀.”(몇 시에 시카고 역에 도착합니까?)
흑인 아저씨는 시간으로 11시경에 도착한다고 알려주었다. 손목시계는 이미 10시에 가까웠다. 내가 시간 후에는 시카고 역에 당도할 있겠다고 하였더니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카고와 워싱턴은 1시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나는 허구 웃음을 참으며 바늘을 시간 뒤로 늦춰 놓았다.

 

차는 11시 30분경에 시카고 역에 이르렀다. 플랫폼을 빠져나오니 터널같이 길게 뻗은 복도가 보였다. 나는 안내소를 찾으려고 이쪽저쪽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마침 청소를 하고 있는 흑인 아저씨가 눈에 띠였다.
“익스큐즈미. 캔유 톨 미 웨어 해브 인포 메이숀 오피스”
(미안한데요. 안내 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있어요?)
흑인 아저씨는 복도의 쪽에 위치한 식품가게를 가리켰다.

가게 앞에는 50대로 보이는 동양인 남자기 서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한국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 맞죠?”
동양인 남자는 덤덤한 눈길로 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내처 입을 다문 머리만 끄덕였다.
“죄송한데요, 안내소가 어디에 있어요?”
“저쪽이요.”
동양인 남자는 굳어버린 얼굴로 쌀쌀하게 외마디 대답을 남기고가게 안으로 살아졌다. 유별나게 무정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미국 견학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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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렁크를 끌고 이쪽저쪽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안내소를 찾았다. 30대의 이쁘장한 백인 여성이 웃는 얼굴로 반겨 맞았다.
“메이 아이 헬프 유”(뭘 도와드릴까요?)
나는 얼른 환승 티켓을 내밀었다. 백인 여성은 나를 침대 대기실로 안내했다.

실내에는 모니터 머신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별수 없이 다시 안내소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는 열차 발차 시간을 문의했다. 백인 여성은 여전히 웃는 모습으로 오후 15시 20분에 발차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보관소에 트렁크를 맡기고 식당으로 향했다.

 

시카고 역은 석조건물로써 매우 고풍스러웠다. 실내에는 널찍한 뷔페식당이 있었고 한편에는 당구대가 놓였다. 나는 쟁반에 칠면조 고기와 비프 양상추와 브로콜리를 뒤섞은 샐러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10대 후반의 훤칠한 백인 소녀가 음식을 체크했다. 모두 7달러였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한적한 자리를 찾았다.

한낮 때건만 손님은 별로 많지 않았다. 백인 남자들이 한창 당구를 즐기고 있었다. 백인 남자 명이 카운터를 향해 손을 저었다. 백인 소녀가 쟁반에 음료수를 챙겨들고 카운터를 나섰다. 나는 백인 소녀의 모습에 불현듯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건 완전히 수영복 차림인데?”

 

백인 소녀는 등허리가 완전히 드러났다. 가랑잎만 팬티가 가까스로 하신을 가렸다. 깊숙이 패인 엉덩이 훤이 드러났다. 백인 남자는 거침없이 백인 소녀의 엉덩이 어루만졌다. 그녀는 남자한테 무람없이 엉덩이를 내맡겼다. 한식경이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식사를 끝마치고 대합실을 나섰다. 전날 워싱턴을 출발할 때는 포근한 날씨였다. 그러나 이곳 시카고는 벌써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카고는 미국에서 번째로 큰 대도시였다. 인구는 300여만 명이었다. 그중 백인이 36%, 흑인이 41%, 히스패닉이 8%, 아시아인이 5%를 점했다.

 

"시카고"(ChiCaGo)란 지명은 인디언 원주민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야생 양파” 또는 “늪 지대의 ”이란 뜻이었다. 1803년까지 시카고에는 인디언 원주민들이 “Y자” 모양의 강줄기를 둘러싼 늪지대에서 모여살았다. 당시 “Y자” 모양의 강을 인디언 원주민들은 “ChiCaGo”라고 불렀다.

1837년 시카고는 미국 련방 정부로부터 시티로 확정되었다. 당시 시카고의 인구는 불과 4만 2천여 명이었다. 그러나 1871년에 이르러 이미 몇십만 명으로 급증하여 번창한 시가지로 발전하였다. 이해 10월 유례없던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했다. 다운타운과 시가지 북쪽 지역은 하루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현재 시카고는 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고 우중충 솟아있는 모던의 대도회지로 변모했다. 시카고에는 한인타운이 있다. 이곳의 한국인은 대부분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나는 찬바람을 한껏 쐬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손님들은 이미 출입구에 줄서있었다. 나는 트렁크를 찾아들고 행렬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오후 15시 20분을 훨씬 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탑승 체크를 하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기했다. 한식경이 지나서 여직원이 나타났다. 로스앤젤레스로 떠나는 열차 발차 시간이 지연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실내에서 계속 대기하라고 안내했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시발역에서 발차 시간이 지연되다니?”
미국에서 시간은 돈이었다. 시간은 곧 생명이었다. 근데 열차 시발역에서 발차 시간이 지연다니 진짜 신기하였다. 게다가 대기 중인 탑승객 도무지 불평 한마디 없었다. 흡사 유순한 떼처럼 조용했다. 참으로 이상하리만치 별스러웠다.

 

시간을 족이 대기했다. 그제야 일행은 여직원의 안내하게 플랫폼에 나섰다. 열차 몇십 개의 차량을 연결했다. 머리 부분은 기관차 개가 결되였다. 뒤에 침대 결되였고 뒤에 일반석이 결되였다. 뒷부분은 목재, 석탄, 컨테이너를 적재한 각종 화물차량이 줄줄이 결되였다. 차는 오후 17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시카고 역을 출발했다.

열차 한참 내달리자 시가지 모습이 차츰차츰 살아졌다. 그러다 문뜩 드넓은 광야가 뿌리가 시리도록 모르게 펼쳐졌다. 나는 잃고 창밖으로 흘러가는 전경에 심취했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저녁식사시간을 알려주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19시 30분에 식당으로 향했다.

 

전날과는 달리 손님은 일색으로 백인이었다. 대부분 60~70대의 노인들이었다. 40대의 백인 남자와 동양인인 내가 젊은이였다. 나와 마주 앉은 백인 할머니와 백인 할아버지는 부부인듯하였다. 유대인의 전통복장을 연상시키는 짛은 검은색 옷을 착용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정수리에는 없었다. 할머니의 머리에는 검은색 가운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검은색 양복바지는 정강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짤룩했다. 유난히도 나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익스큐즈미. 아유 푸람?”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백인 할머니는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이. 아이 프롬 차이나”
(안녕하세요, 저는 중국에서 왔습니다.)
백인 할머니는 홍콩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카오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역시 아니라고 대답했다. 백인 할머니는 난해한 기색을 지었다.

“아임 프롬 차이나 베이징.”
(저는 중국 북경에서 왔어요.)
백인 할머니는 그제야 알았다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히 이즈 마이 하즈 번드. 앤드 위 감투 푸람 머니.”
(이분은 저의 남편이고요. 우리는 독일에서 왔어요)
사람이 늙으면 수다스러운 것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모두 마찬가지인 같았다. 백안 할머니는 음악 교원이었고 백인 할아버지는 엔지니어였다. 전에 정녕 퇴직을 했고 미국 관광은 이번이 번째였다.

 

백인 할머니는 나보고 공부하러 왔는가고 물었다. 나는 년간 직장 생활을 하였다고 대답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당도하면 중국으로 귀국한다고 알려주었다. 백인 할머니는 여태껏 중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을 무척 좋아한다고 하였다. 한옆에서 줄곧 침묵을 지키던 백인 할아버지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두 유 라이크 아메리카.”(당신은 미국을 좋아합니까?)
나는 백인 할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물어보는지 일시 종잡지 못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Yes”라고 대답했다.
백인 할아버지는 나의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시무룩이 웃었다. 백인 할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머리가 비상한 학생은 여전히 신학원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대개 하버드의 경영학과나 예일대의 법학과를 선호하고 있다. 독일은 여전히 신학대학에서 우수한 정신적 엘리트를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줄곧 탁월한 주식투자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청산 수같이 웅변을 잘하는 변호사, 판사, 법관을 양성하고 있다. 나보고 중국의 형편은 어떤가고 물었다.

 

중국에서는 머리가 비상한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바로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 또는 버클리대학이었다. 그러나 같은 실정을 이실직고할 수가 없었다. 타국인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중국을 좋아한다며 흥분하던 백인 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백인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에는 명문 대학으로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이 있다. 청화대학은 공과대학으로 으뜸이고 북경대학은 문과대학으로 으뜸이라고 설명했다. 북경대학은 일찍 중국의 거물급 정치 엘리트가 집중되었던 곳이라고 첨부했다.

 

백인 할머니는 언젠가 꼭 중국으로 관광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백인 할아버지도 연신 머리를 끄떡였다. 나는 팁을 챙겨놓았다. 백인 부부와 인사를 나눈 방으로 돌아왔다. 전날 샤워를 하지 않은 탓인지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두발은 화독에 닿은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오늘은 시원하게 샤워하고 자야지.”

 

나는 눈덩이같이 하얀 타월을 찾아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침대 열차 위층에 침실과 식당이 있었고 아래층에 샤워룸이 있었다. 계단에서 내린 왼편으로 접어드니 사람이 오갈 있는 좁다란 복도가 있었다. 양편으로 마주 출입문에는 번호판이 걸려있었다. 안쪽을 바라보니 8번까지 한눈에 보였다. 나는 가까운 2번 룸을 노크했다. 한식경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번호판을 유심히 살폈다. 번호판에 푸른 등이 켜져 있었다. 그제야 2번 룸이 사용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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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옷걸이가 있었다. 아래에 자그마한 의자가 놓였다. 맞은편 벽에는 거울이 있었다. 거울 아래의 선반에는 일회용 비누와 샴푸, 로션, 남성용 면도기, 여성용 생리대가 놓였다. 안쪽에는 유리문으로 칸막이를 한 샤워실이 있었다. 사람이 겨우 서있을 정도의 비좁은 공간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더운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샴푸를 하고 머리부터 감았다. 온몸에 보디로션을 하고 다시 더운물을 틀었다. 근데 방금까지 콸콸 쏟아지던 더운물이 웬일인지 끊겼다. 나는 다시 한번 수도꼭지를 비틀었다. 여전히 더운물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이걸 어떻게 하지?”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일시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곳저곳 살폈다. 어딘가 콜버튼(呼叫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뜩 샤워기 아래에 부착된 안내도가 눈에 띠였다. 나는 한식경이나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원래 사워 물은 번에 30갤런씩 공급되었다. 재차 사용할 때는 먼저 가운데 버튼을 누른 다시 손잡이를 오픈하면 되였다. 안내도 따라 조작하였더니 또다시 더운물이 쏟아졌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전신이 거뜬했다.

 

                              4.

전날 나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밤새도록 히터가 작동 아침에 깨여나니 안이 바싹 말라들었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우중충한 산림이 눈앞에 나타났다. 전날 열차 끝없는 평야를 질주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나절부터 아찔하게 치솟은 울창한 살림 속을 달리고 있었다.

“찌르륵… 찌르륵…” 따가운 쇠붙이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열차 서서히 수림 속에서 뭠춰섰다.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누런 황토로 구축된 자그마한 단층집이 눈에 띠였다. 처마 위에 LAMA”라는 수판이 걸려있었다. 아마도 시골역 같았다. 역내에는 개찰구가 따로 없었다. 몇몇 안되는 손님들이 황토로 뒤덮인 플랫폼에서 열차 대기하고 있었다. 단층집의 왼편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주차장으로 보였는데 역시 포장이 되지 않아 황토 먼지가 깔렸다.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열차 점검하고 있으니 안에서 대기하라고 하였다. 웬일인지 손님들의 하차가 금지되었다.

나는 의구심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중국은 아무리 벽한 시골이라도 기차역 주변에는 십중팔구 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LAMA”역 주변 신기하게도 도무지 인가를 찾아볼 없었다. 모던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인가 하나 찾아볼 없는 지벽한 시골역이 있다는 참으로 신기했다. 그리고 아직도 시누런 황토로 뒤덮인 미개발지역이 남아있 것도 거짓말 같게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저편 산림 속에서 시뿌연 황토 먼지가 타래쳐 올랐다. 유심히 살펴보니 승용차 대가 황토 먼지를 꿰뚫고 질주해 오더니 다급하게 뭠춰섰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어린 남자애와 여자애를 이끌고 부랴부랴 플랫폼으로 뛰어왔다. 남자와 여자는 40대로 보였다. 남자애와 여자애는 안팎이었다.

“중국인인가? 아니면 일본인인가? 아니면 한국인인가? 두메산골에 어떻게 동양인이 다 있는 걸까?”

나는 부쩍 호기심이 동해 일행을 지켜보았다.

 

중년 남자가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기차에 탑승하려고 하였다. 그때 남자애가 갑자기 튕길 듯이 앞으로 달려갔다. 중년 남자의 손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쳤다. 중년 남자는 마디 말을 건넨 그냥 기차에 오르려고 하였다. 남자애는 무가내로 중년 남자의 다리를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들을 지켜보고 서있던 중년 여인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반쯤 돌아섰다. 그녀의 옷깃을 부여잡고 서있는 여자애는 분명히 엉엉 울고 있었다.

"맞아. 한국인이 맞아."
나는 직감으로 이렇게 단정했다. 그러나 지벽한 산골에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중년 남자는 발버둥을 쳐대는 남자애와 밀고 당기며 승강이질을 했다. 나중에 남자애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마디를 하였다. 그제야 남자애는 중년 남자의 다리를 풀어주었다. 중년 남자는 저편에 서있는 인한테로 다가가 무슨 말인가 마디를 주고 받았다. 연후에 남자애의 손을 잡고 함께 기차에 올랐다. 뒤편에 서있던 인이 황토 위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여자애는 인의 옷깃을 당기며 또다시 엉엉 울었다.

“뿌-웅-” 열차 서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황토 먼지로 뒤덮인 “LAMA”역이 차츰차츰 멀어졌다. 땅에 주저앉은 여인과 옆에 서있는 여자애는 흡사 바위돌같이 한곳에 굳어버렸다.

 

       캐나다 견학 기념
       캐나다 견학 기념

“중년 남자와 여인은 부부인가? 남자애와 여자애는 그들의 자식인가? 혹시 생리별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왜 눈물겹도록 애처로워 보이지? 도대체 무슨 애틋한 사연이 있는 걸까?”
나는 “LAMA”역이 하나의 흑점으로 살아질 때까지 깊은 생각에서 깨여나지 못하였다.

차는 황혼 무렵에 뉴멕시코 역에 도착했다. 스피커에서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뉴멕시코 역에서 약 1시간 정도 대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손님들은 차에서 내려 휴식 취하게 되였다. 나는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맛보려고 하차했다.

 

뉴멕시코 역은 4층 건물이었다. 겉보기에는 구식으로 낡아 보였다. 별로 고풍스러운 멋도 없었다. 역구내의 광장에는 간이 상가가 빼곡히 자리 잡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흡사 한국인들의 포장마차를 방불케했다. 나는 호기심에 끌려 상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이 상가의 주인은 일색으로 인디언이었다. 너부죽한 얼굴에 삐어진 관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무칙칙한 적갈색의 얼굴은 유난히도 주름이 많았다. 대부분의 상가는 목걸이, 귀걸이 등 인디언 전통의 액세서리와 성조기가 도색된 자질구레한 기념품을 전시했다.

 

나는 문뜩 깜찍한 손칼을 발견했다. 가게 주인은 수공으로 만든 것인데 토끼나 다람쥐 가죽을 벗길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물어보니 5달러였다. 뉴멕시코 기념으로 5달러를 넘겨주고 손칼을 집어 들었다. 앞으로 내처 걸어가다가 정교하게 제조된 화살을 발견했다. 나는 여태껏 쇠붙이로 제조된 화살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인디언의 전통화살촉은 납작한 돌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예리하게 마모한 것이었다. 얼마에 파는가고 물었더니 가게 주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20달러를 요구했다. 어쩐지 무리한 가격으로 느껴졌다. 나는 다른 상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61년경까지 뉴멕시코를 비롯한 광대한 서부지역에는 약 30여만 명의 인디언이 거주했다. 이들은 황량한 사막에서 풀과 물을 찾아 떠도는 야생 들소 떼를 쫓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다.

 

북미 대륙의 고대 인디언 원주민은 천입 민족이었다. 인디언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입하였다는 가설이 있다. 또는 유럽에서 입하였다는 가설도 있다. 그리고 남태평양 섬에서 입하였다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제4기 빙하기에 아세아에서 발원한 몽고리 아인(蒙古利亚人)이 고대 북미 대륙 인디언 원주민의 선조라고 인정하였다. 당시 몽고리 아인은 육지로 결되였던 베링해협(白岭海峡)을 통해 북미 대륙으로 하였다.



1492년 대항행가 콜롬 비스가 북미 대륙을 발견했다. 당시 북미 대륙의 인디언 원주민은30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의 주거지는 대서양 연안의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1703년 영국은 식민지 확장을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회의에서 소름 끼치는 야만적인 식민지정책을 제정했다.

“무릇 장의 인디언 두개골 가죽에 40파운드(英镑)를 장례한다” 같은 피비린 살육 정책은 1720년에 이르러 100파운드로 상승했다.

1744년 매사추세츠 연안의 인디언 원주민은 반기를 들고 영국 식민주의자들을 집단학살했다. 영국정부는 인디언 원주민을 탄압하기 위해 더욱 혹독한 식민지정책을 채택했다. 무릇 12세 이상 인디언 남자의 두개골 죽은 100파운드를 장례했다. 인디언 여성 어린이의 두개골 죽은 50파운드를 장례했다.

 

1783년 독립전쟁이 결속된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야만적인 강탈과 살육은 의연히 지속되었다. 1830년 미국 연방정부는 “인디언천입법안”(印第安人迁移法案)을 채택했다. 대서양 연안의 동부지역에 정착한 인디언 원주민을 강제적으로 미시시피강 이서 지역의 황량한 산악지대와 사막지대로 축출하였다. 그러나 끊임없는 식민지 확장은 부단히 인디언 원주민과 유혈적인 충돌을 야기했다.

1862년 민네소타주(明尼苏大州)에 거주하는 수유족은 빼앗긴 주거지를 찾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700여 명의 백인 식민주의자들을 집단살해했다. 연방정부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했다. 당시 380여 명의 수유족이 공개처형되었다. 결국 수유족은 들소떼도 목말라 죽는다는 황량한 다코다(达科他) 지방으로 재차 축출되었다.

 

1884년 콜로라도 지역에 갑자기 “골드러시 붐”이 덮쳤다. 당시 일확천금의 횡재를 노렸던 백인 광부들이 파도같이 밀려들었다. 아르파 호족과 샤이엔족은 즉시 폭동을 일으켰다. 연방정부는 인디언 부락을 기습해 500여 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후에 수차례의 집단 폭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모두 피비린 학살을 당했다. 1886년 애리조나주의 아파치족은 연방정부가 지정해 오클라호마 일대의 지정구역으로 강제 이주하였다. 인디언 원주민의 집단 폭동은 마침내 결속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인디언 원주민은 30여만 명으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924년 미국 국회는 “인디언 공민 자격법”(印第安人公民资格法)을 통과했다. 무릇 미국 경내에서 출생한 인디언은 모두 미국 공민증을 발급했다. 당시 인디언 원주민은 자체로 정부를 성립할 있었다. 2003년도의 통계에 따르면 전통적인 인디언 생활풍속을 유지 인디언 원주민은 불과 3만여 명밖에 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방목이나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관광산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뉴멕시코 역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찾아들었다. 그제야 열차 서서히 발차하였다.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황량한 사막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문뜩 인디언 원주민의 화살촉이 떠올랐다.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예리하게 마모하여 제조한 화찰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날 열차 아침부터 “치-익-치-익-”가쁜 숨을 토해냈다. 우중 산봉우리를 향해 힘겹게 톺아 올랐다. 열차 시간 내내 설경으로 뒤덮인 산봉우리를 에돌았다. 미구에 이글이글 작열하는 태양이 하늘 중천에 걸렸다. 열차 드디어 북미 대륙의 등줄기 로키산맥을 넘어섰다. 한순간 끝없이 펼쳐진 광대한 서부 대륙의 대평원 시야에 들어왔다.

 

해발 2000여 미터에 달하는 로키산맥은 북미 대륙을 동부와 서부로 갈라 놓은 천연적인 경계선이었다. 로키산맥을 넘으면 광활한 서부 대평원이 펼쳐진다. 이곳은 사시장철 비가 내리지 않는 깡마른 사막지대였다. 황금빛 모래사막도 아니었고 붉은색 적토 사막도 아니었다. 크고 작은 돌멩이가 모르게 깔렸고 풀 포기도 찾아 보기 힘든 암회색 사막이었다.

18세기에 스페인 탐험가 코로나도 처음으로 북미 대륙의 서부 대사막을 발견했다. 그는 이곳을 “죽음의 황야”라고 개탄하였다. 멕시코와 캐나다로 모르게 펼쳐진 황량한 돌사막은 망망한 대해같이 무시무시하였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공포의 땅이었고 지옥의 땅이었다

 

열차 밤새도록 황량한 사막에서 느릿느릿 내달렸다. 은은한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사막은 마치도 계수나무가 있고 상아가 있다는 달나라를 방불케하였다.

다음날 로스앤젤레스 시간으로 오전 9시 30분에 열차 서서히 종착역에 도착하였다. 나는 3박 4일의 아메리카 대륙 횡단 여행을 끝마치고 출입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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