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의 신비 그랜드캐니언

2005년 4월 20일, 나는 4박 5일 대륙 관광 나섰. 오전 8시 30분경에 엘에이 한인타운 자리 잡은 “아주 관광회사”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벌써 관광손님들로 북쩍거렸다. 나는 사무실에서 여행 코스를 체크한 버스에 탑승했다. 앞좌석 한글로 적은 “경로석”(敬老席) 메모지가 놓였다. 미국은 티켓의 순서에 따라 좌석을 정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번 관광팀은 일색으로 한국인이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어른 공경문화가 보존되여 앞좌석에 노인을 모시는 것이 절로 되였다.

 

가이드가 반복적으로 인원점검을 확인했다. 48명의 손님을 태운 버스는 오전 9시 40분경에 드디어 발차했다. 이윽고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그러나 가이드는 여전히 여행안내서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하긴 안내서에 신경을 쓰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함구무언하고 하회를 기다렸다. 이윽고 가이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위라고 합니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50대의 남자는 삭정이같이 버쩍 마른 체구였다. 남자 키로는 작은 편이였고 얼굴색은 유별나게 창백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요. 저는 삐쩍 말랐어도 먹은 나이는 없어요. 겨우 25세밖에 안됐어요. 왜 웃어요? 안 믿어지세요.

 

이번 관광은 4박 5일 코스입니다만 사실 서부대륙 여행에는 무리한 지요. 4박 5일간 무려 4000여 킬로를 달려야 해요. 구경을 하지 않고 내처 버스만 타도 벅찬 정이지요.

유럽이나 일본인 관광객들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9박 10일 또는 10박 11일 코스를 선택하군 하지요. 아무튼 4박 5일 부지런히 달려야 해요. 여러분 마음의 준비가 되였지요. 왜 대답이 시원치 안네요.”

가이드는 그제야 여행안내서를 나누어 주었다. 한편으로 여행 코스를 설명했다.

“그랜드캐니언은 해발 2000여 메 달하는 로키산맥의 고산지대에 했어요. 그랜드캐니언은 이미 세계 7대 자연 절경으로 선정되었어요. 그리고 라스베이거스는 네바다주에 했어요. 미국에서 최초로 도박과 매춘을 합법화한 곳이 바로 라스베이거스였어요. 그러므로 일면 <죄악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샌프란시스코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도 즐겨 찾는 관광명소지요.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미국 최대의 국립공원 중의 하나이지요.

미국은 청교도 나라란 다 아시죠. 달러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문구가 적혔어요. 남북 전생 시기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목사님이 어느 불현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문구를 달러에 적으려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어요.”

      태평양 서안에서 바다 낚시 기념(로스앤젤레스)
      태평양 서안에서 바다 낚시 기념(로스앤젤레스)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호주머니를 뒤졌다. 앞좌석에 착석한 노인은 건너편 좌석에 앉은 젊은이에게 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문구가 어느 곳에 적혀있는가고 다그쳐 물었다.

“여러분 조용들 하세요. 여행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유럽인들은 결혼할 때면 기도를 번만 하시는 잘 아시죠. 그럼 전쟁터에 나갈 때는 기도를 하는지 아세요? 한다고요- 잘 아시네요. 그럼 여행을 떠날 때는 기도를 하는지 아세요? 대답이 없는걸 보면 잘 모르시나 보네요. 유럽인들은 여행을 떠날 기도를 번씩 드려요. 왜 번인가고요? 일단 기도부터 하셔야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은 오늘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모두 기도를 드렸지요. 번만 기도하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괜찮으시니 나머지 기도를 꼭 다하셔야 해요. 잘 알아들으셨지요?”

씨글벅쩍하던 버스 안이 순식간에 죽은 조용했다. 나의 옆좌석에 앉은 중년 남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합장한 손을 이마에 부착했다. 입귀를 씰룩거리며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나는 괜스레 허구 웃음이 터졌다. 혹시 중년 남자에게 방해라도 될까 걱정 부랴부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끝없는 사막이 펼쳐졌다. 버스는 네바다주의 대평원을 줄기차게 내달렸다.

 

1789년 4월 3일. 미국의 제1임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성서”에 손을 얹고 경건하게 맹세했다.
“나는 아메리카합중국의 헌법을 보존하고 수호할 것을 엄숙하게 선언한다.”
조시 워싱턴은 세상에 처음으로 아메리카합중국의 탄생을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메리카합중국의 영토는 대서양 연안의 뉴욕 , 뉴저지주, 펜실베이니아주, 버지니아주 등 13개 주에 불과했다. 1803년 토머스 제퍼슨이 제3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프랑스에 15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당시 루이지애나로 호칭되었던 미시시피강 서쪽 지역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했다. 이것을 계기로 아메리카합중국의 영토는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서부 대륙에 대한 식민지 개척을 다그쳤다. 1862년 “자작농지 ”(HomeStead)를 새롭게 제정하였다. 무릇 국유지에서 5년 이상 거주하면서 서부 개척에 종사하는 사람은 정부로부터 160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수여받을 있었다. 1873년에는 “식목 법”(植树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무릇 40에이커의 토지에 나무를 심은 개척민은 160에이커의 토지를 무상으로 수여받았다. 1877년에는 “사막 개발 법”(沙漠开发法)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무릇 3년 내에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 관개수를 끌어들인 개척민은 무려 64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할 있는 특혜를 향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1에이커 토지가 불과 25달러의 싸구려 가격이었다. 같은 식민지 개척 정책은 수천수만의 개척민을 망망한 서부 대평원으로 전입시켰다.

 

그러나 서부 대륙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당시 “골드러시”(彩金者)로 불렸던 광부였다. 1848년부터 1858년까지 전후 10년간 무려 30여만 명의 “골드러시”들이 캘리포니아에 집결하여 무려 5억 5천만 달러의 황금을 채집했다. 1858년 콜로라도 지역에서 새롭게 금광이 발견되었다. “골드러시”들은 벌떼같이 콜로라도로 밀려들었다. 근근이 사이에 무려 10만여 명의 광부들이 집결했다. 하여 아루 아침에 덴버란 신도시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네바다주의 콤스틱에서도 금광이 발견되여 버지니아 시티와 같은 신도시가 생겨났다. 1890년대까지 몬태나와 와이오밍 등지에서 “골드러시”들은 여전히 황금과 백은을 채집했다.

 

서부 대륙의 개척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사람은 “카우보이”(西部牛仔)였다. 남북전쟁이 결속될 무렵이었던 1866년까지 텍사스주의 광대한 대평원에는 10만 마리에 가까운 야생 들소 떼들이 자유롭게 떠돌았다. 당시 텍사스주에서는 야생 들소 마리의 가격이 불과 3~4달러였다. 그러나 동부지역에서는 마리당 40달러를 호가했다.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카우보이”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소 떼를 이끌고 동부로 떠나는 대장정에 나섰다. 시초에 “카우보이”들은 캔자스주의 애빌 인도를 거쳐 와이오 지역까지 떼를 끌고 갔다.

 

“카우보이”이후 서부 개척에 나선 사람은 1870년대 말부터 대평원에 진출한 농부들이었다. 이들은 1880년까지 약 10년간 황량한 서부 대사막에 거대한 농경지를 개척했다. 1890년까지 서부 신대륙에는 이미 1평방 킬로미터의 땅에 6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 광대한 서부 대륙은 대부분 19세기 중 분기를 전후하여 연방정부에 가입하였다. 1845년부터 1850년까지 텍사스, 미네소타, 오리건, 유타, 캘리포니아 등 지역이 육속 연방정부에 귀속되었다. 1912년에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연방정부에 귀속된 대서부의 개척은 드디어 일단락을 지었다.

 

하루 종일 망망한 대사막을 달리던 버스는 오후 17시가 넘어서 "제2 라스베이거스"로 불리는 래플리에 당도했다. 우리 일행은 콜로라도 강변에 자리 잡은 “EDGEWATER”호텔에 투숙하였다. 호텔은 객방 무려 1200개에 달했다. 1층 로비는 대형 카지노장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축구 보였다. 가쯘하게 도열된 슬로 머신은 현혹스러운 불빛을 번쩍거렸다. 대부분 60~70대의 노인들이 신나게 슬로 머신을 작동했다. 간혹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과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아시아인도 눈에 띠였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호텔은 콜로라도 강의 서안에 위치해 있기에 네바다주에 귀속되었다. 네바다주는 도박이 합법화되였다.

 

라플 1964년 카지노 업계의 대부 단 래플리에 의해 발견되었다. 당시 그는 자가용 경비행기로 라스베이거스의 인근 지역을 비행하던 콜로라도 강변에 펼쳐진 백사장을 발견했다. 1966년 그는 지역을 매입한 자기의 이름을 본떠서 래플리라고 명명했다. 객방 660개에 달하는 대형 카지노호텔을 건설했다. 현재 이곳에는 대형 카지노호텔이 9개나 있으며 객방 도합 12000여 개에 달하였다.

카지노호텔의 화장실은 샤워기만 설치되었고 욕조가 없는 것이 매우 특이했다. 가이드의 소개에 따르면 도박에 빠져든 손님이 일단 욕조에 몸을 담그면 대뜸 정신이 맑아져 쉽사리 카지노에서 물러서는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무려12000여 개의 객방에 단 개의 설치되지 않았다.

 

내일은 새벽 4시에 그랜드캐니언으로 출발하게 되였다. 나는 식사 객방으로 돌아와 여행 일지를 적었다. 나와 한방에 투숙한 중년 남자는 곧바로 1층 로비의 카지노장으로 직행했다.
 

다음날 버스는 새벽 4시경에 출발했다. 콜로라도 강을 사이에 두고 도박이 합법화된 네바다주는 아직도 카지노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강 대낮같이 환히 밝혀주었다. 그러나 도박이 금지된 애리조나주는 여전히 새벽 짛은 어둠이 강변에 침침하게 깔렸다.

 

애리조나주는 인디언 원주민의 언어로 “애리조나기”로 발음되었다. 불사조를 뜻하였다. 애리조나주의 주기(州旗)에는 지금도 불사조 도안이 찍혀있다. 이곳은 옛적부터 인디언 원주민들 정착하였다. 그러나1836년과 1848년, 선후 차례에 걸친 멕시코와의 전쟁을 계기로 백인 이주민들이 이곳으로 하였다. 특히 1848년 미국과 멕시코 간에 “과달룰페히달그조약”이 체결된 연방정부는 애리조나주를 합법적으로 점령하였다. 당시 새롭게 이주해온 백인 청교도들은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신앙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인디언 원주민들의

절을 당하자 잔혹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버스는 새벽어둠을 뚫고 내처 대사막을 달렸다. 나와 한방에 투숙한 중년 남자는 드렁드렁 요란스레 코를 골며 꿈나라에 빠졌다. 우리 일행은 7시경에 한국인 뷔페식당에서 부랴부랴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식사 중년 남자는 또다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대사막을 바라보다가 어렴풋이 잠들었다

“그만 주무시고 깨나세요. 조금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해요.”
나는 놀라 잠결에서 깨여났다. 옆좌석의 중년 남자는 아직도 드렁드렁 코를 골았다.

 

“여러분. 지금부터 저의 말을 귀담아들으셔야 합니다. 아니면 오늘 관광 억만으로 망가져요. 알아들으셨죠. 그랜드캐니언은 애리조나주의 북부에 있어요. 1869년 영국의 탐험가 잔 웨슬러 파월(John Wesly Powel) 소령이 콜로라도 탐험에 도전했어요. 당시 그는 9명의 대원을 이끌고 뗏목을 용해 3개월간 콜로라도 강을 탐험했어요. 마침내 신비한 그랜드캐니언을 발견했어요

 

            그랜드캐니언 기념 사진
            그랜드캐니언 기념 사진

그랜드캐니언은 1919년에 정식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어요. 세계 각국으로부터 찾아오는 관광손님은 해마다 300만 명을 넘어요. 그랜드캐니언의 길이는 277마일(446千米)인데요. 이는 우리나라 경부고속철의 길이와 비슷하지요. 그랜드캐니언의 넓이는 약 10마일(16千米)이고 그사이로 콜로라도 강이 흐르며 거대한 협곡을 형성하였어요. 그랜드캐니언의 평균 깊이는 1마일(1500米) 정도 고요. 이는 지리산의 높이와 비슷하지요. 그랜드캐니언의 가장 깊은 곳은 5700피트(1829米)이지. 이는 태백산의 높이와 비슷하지요.

 

그랜드캐니언을 관광하는 최상의 투어는 당나귀를 타고 계곡의 밑바닥을 답사하는 1박2일 코스가 있어요. 근데 요즈음 어를 오픈하지 않았어요. 아쉽지만 없어요. 그러나 오늘 같이 맑게 날씨에는 하늘에서 그랜드캐니언의 절경을 한눈에 굽어볼 있는 절호의 기회지요. 그랜드캐니언의 경비행기 투어는 약 40분이 걸리고요. 티켓값은 120불이에요. 오늘 비행기 투어를 하실 분은 지금 손들어 주세요.”

버스는 오전 9시 40분경에 “Tusayan”이란 수판이 걸려있는 경비행장에 당도하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나까지 포함하여 12명이 경비행기 티켓을 구입하였다. 비행기는 한동안 메마른 사막 위를 날아가다가 갑자기 고도를 낮추었다.

 

“와- 와- 와-”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터지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랜드캐니언의 신비한 모습이 순식간에 한눈에 안겨왔다. 대협곡의 황홀한 절경은 벅차오르는 감탄을 자아냈다. 그랜드캐니언은 말 그대로 “신이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이었다.

1869년 탐험가 잔 웨슬리 파월은 그랜드캐니언을 발견하고 이렇게 개탄했다. “그랜드캐니언은 역사 이래 지구 위에서 발견한 가장 위대한 기적이었다."
탐험가 파월에 앞서 1540년경에 그랜드캐니언을 발견한 사람은 스페인 탐험가였다. 그러나 탐험가의 이름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그랜드캐니언 (사진 자료)
                그랜드캐니언 (사진 자료)

당시 스페인 탐험가는 신비로운 그랜드캐니언의 절경에 매료되여 이런 명언을 남겨놓았다.

“나는 그랜드캐니언에 오기 전까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그랜드캐니언을 보는 순간 부득불 유심론자로 전면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캐니언의 절경은 오로지 거룩한 신만이 만들어낼 있는 위대한 걸작이었다."

경비행기는 그랜드캐니언의 상공을 감돌며 차츰차츰 고도를 낮추었다. 서리 발치는 아찔한 절벽이 한눈에 안겨왔다. 칼날같이 우뚝 적색의 암벽이 코앞 닥쳤.
“와-와-와-”
일행은 다시 한번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순간 나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직것 나는 드팀없는 무신론자로 살아왔다. 그러므로 신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유심론자를 도무지 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랜드캐니언의 절경을 만끽하는 순간 부득불 신의 위대함을 인정하였다. 유심론자를 인정하였다. 천지간에 신의 위대함이 없으면 단연코 그랜드캐니언이 태어날 . 그랜드캐니언의 신비로운 절경은 신의 위대한 존재를 다시 한번 확고부동하게 인증하였다.

무엇 때문에 자연의 신비함은 항시 신의 위대함을 동반하는가? 전지전능하신 신은 언제부터 자연의 신비로운 절경 그랜드캐니언을 만들기 시작하였는가?”

 

현대 과학이 입증한 우주의 물리적인 시간은 빅뱅(大爆炸)에서 시작되었다. 빅뱅이 발생하기 전에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시각으로 빅뱅은 우주 밖의 존재였고 시간 밖의 존재였던 신의 창조물이었다.

그러므로 유심론자의 시각으로 지구 위에 생겨난 신비로운 그랜드캐니언은 신의 존재의 계시이고 현시였다. 신의 위대함의 표현이었다. “신비”의 원뜻은 고대 그리스어의 “muein”에서 생겨났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무신론자의 시각으로 빅뱅은 물질의 존재방식이었다. 지구 위에 생겨난 신비로운 그랜드캐니언은 물질의 계시였고 현시였다. 그리고 시간의 위대함의 표현이었다. 나는 신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시간의 대함에도 감탄했다.


여태껏 세계 각국에서 수없이 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그랜드캐니언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랜드캐니언의 신비롭고 황홀한 절경을 폭의 그림과 장의 사진에 담은 사람은 여직것 사람도 없었다. 하물며 문자를 빌어 그랜드캐니언의 신비함을 찬미하는 것은 흡사 쥐새끼를 보고 코끼리를 상상하는 격으로 어리석고 아둔하고 부질없는 짓이었다.

 

불교 용어에 “대각”(大觉)이란 말이 있다. 석가여래가 위대한 것은 보리수 아래에서 6년이란 기나긴 좌선 끝에 우주 만물의 “연기”(缘起)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용어에 “계시”(启示)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위대한 것은 성지의 땅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10계명”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항시 "깨달음"이나 “계시”가 없이는 위대함이란 무엇인지를 수가 없다. 이것이 종교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그랜드캐니언은 오로지 인간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자연의 신비함과 자연의 위대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무신론자가 발견한 그랜드캐니언의 가장 신비로운 매력이었다.

 

그랜드캐니언의 서쪽 지역은 하바스 캐니언이었다. 하바스 캐니언은 지금도 의연히 인디언 부족의 한갈래인 하바스인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곳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하바스 추장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문자의 역사가 없는 하바 족이 구경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하였는지는 여태껏 밝혀지지 않았다.

 

16세기경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현 하바스 캐니언에는 이미 기독교 성당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접대할 있는 호텔도 부설되였다. 그러므로 하바스 캐니언은 인디언 전통문화를 답사하는 피상적인 관관 명소로 부상되었다.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의 입구에는 관광객 센터가 있었다. 이곳에는 그림과 사진, 문자를 통해 그랜드캐니언이 형성된 지질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나는 이곳을 둘러보며 그랜드캐니언의 과거 역사에 심취했다.

                 2. 죄악의 도시 이거스

 

모하비사막에 황급 낙조가 짛게 물들었다. 버스는 “사막의 시” “불야성의 도시” “죄악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 당도하였다. 우리 일행은 여장을 풀어놓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1층 로비의 카지노장을 거쳐 식당에 이르렀다. 근데 문어구 손님들이 장사진을 치고 섰다. 호텔 직원이 번에 손님 5명씩 안내했다. 나는 30여 분을 족히 대기한 식당에 들어섰다.

 

대형 뷔페식당은 좌석이 1000여 개에 달했다. 그러나 빈자리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빈자리를 대기했다. 때마침 백인 할머니가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식사가 끝났으니 좌석에 앉으라고 권장했다. 나는 연신 “땡큐”를 곱 싶었다. 식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하 라스베이거스 관광에 나섰다.

 

       라스베이거스 기념 사진
       라스베이거스 기념 사진

라스베이거스(LasvaGas)는 스페인어로써 “초원”이란 뜻을 나타냈다. 1829년 스페인 탐험가와 상인들로 구성된 일행 60여 명은 뉴멕시코 주의 샌타페이에서 출발했다. 당시 무더운 모하비사막을 지나다가 우연히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곳을 초원으로 하는 “LasvaGas”로 명명하였다.

 

라스베이거스에 처음 정착한 유럽 이민은 모르몬교도였다. 이들 인디언 원주민에게 선교활동을 하고자 튼튼한 요새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모하비사 악렬한 기후 때문에 불과 3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부득불 유타 주로 이주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캘래포니아 주로 이동하는 행인들이 반드시 들러가는 휴식터로 되였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와 솔트레이크시티를 연결하는 철도의 간이역이 라스베이거스에 설치되었다. 당시 기차역 주변에 개의 허름한 여관방과 상가. 간이 술집이 생겼. 인구는 불과 1000여 명밖에 안되는 지벽한 시골이었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연방정부는 서부지역의 수력자원 개발에 진력했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서 40키로메터 떨어진 네바다주에 후버 땜을 건설하였다. 대공황 이후 일자리를 잃은 수많은 실업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후버 공사장에 밀물같이 밀려들었다.

네바다주 정부는 같은 절호의 기회를 빌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박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1931년 라스베이거스에 합법적인 카지노 시설이 마련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결속된 라스베이거스의 스트림(小河) 지역에는 이미 대형 카지노호텔이 건설되었다. 라스베이거스는 세계 도박의 도시로 급성장하였고 새로운 관광명소로 주목받았다.

 

라스베이거스는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빛 때문에 개미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죽은 도시였다. 그러나 어둠이 깃들면 오색 령롱한 불빛이 현란하게 눈부셨다. 거리마다 인파가 쏟아졌고 환락으로 들끓는 생명의 도시로 탈변했다.

가이드는 관광 시의 주의사항을 재차 반복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핸드폰 번호까지 알려주었다.
“출발하기 전에 라스베이거스에 대해 잠깐 설명드릴게요. 라스베이거스는 스트립 지역, 다운타운, 주거지역으로 구분해요. 지금 여러분들이 있는 곳이 바로 스트립 지역인데요. 라스베이거스의 심장 부위에 맞먹지요. 이곳은 약 6키로메터 구간에 무려 70여 개의 대형 카지노호텔이 빼곡히 자리 잡았어요. 세계 10대 관광 리조트호텔 9개가 이곳에 있어요.

 

지금부터 관광을 시작하겠어요. 절대 개별적으로 욺직이면 돼요. 일단 대오에서 떨어지면 다시 찾을 방도가 없어요. 뭔 말인지 알아들으셨지요?”

가이드는 선참으로 시저스팰러스호텔로 안내했다. 호텔의 대형 천정은 구림이 떠도는 푸른색으로 장식되었다. 천정만 올려다보면 흡사 대낮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천정이 왜 대낮으로 장씩 되였을 가요? 그건 분명히 손님들이 낮과 밤을 분별할 없게 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래야 내처 카지노에 심취될 있지요. 고약한 심보지요.”

 

“그보다 더 고약한 수작도 있어요. 라스베이거스의 모든 카지노장은 3무(三无)로 유명해요. 첫째 시계가 없어요. 둘째 창문이 없어요. 셋째 의자가 없어요. 왜 그럴까요? 시계가 없으면 당연히 시간 가는 줄을 모르지요. 창문이 없으면 당연히 낮과 밤을 의식하지 못하지요. 의자가 없으면 당연히 휴식을 취할 없어요. 그러니 잠시나마 도박에서 손을 떼려는 생각도 수가 없어요.”


우리 일행은 대형 샤핑 몰을 구경한 그랜드호텔로 이동하였다. 호텔은 MGM 영화 회사에서 건설했다. 객방 무려 5005개였다. 객방 많기로 유명했다. 다음 행선지는 베니키아 호텔이었다. 호텔은 실내에 대형 수로를 설치했다. 곤돌라(小木船)에 관광객을 싫고 유유하게 돌아다녔다. 이날 우리 일행은 뉴욕의 자유신상과 맨해튼의 전경을 재현한 뉴욕 호텔 둘러보았다.

 

나는 이동 도중에 문뜩 중국 글을 발견했다. “공희발재”(恭喜发)라고 대형 현수판이 한눈에 안겨왔다. 근래에 라스베이거스를 찾는 손님 중에 중국계 손님이 무려 30%를 점했다.

라스베이거스는 밤마다 천여 가지의 각종 프로가 관광객의 시선을 끌었다.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 각종 레이저쇼가 각별히 각광받았다. 그밖에 16세기 영국 해적의 모습을 재현한 해적쇼도 있었다. 2000년 전 이집트 전생 쇼도 있었다. 지진쇼, 화산쇼도 있었다. 세계 챔피언을 판가름하는 복싱쇼도 있었다.

나는 벨리호텔 공연하는 “쥬빌리 쇼”를 예약했다. 티켓값은 80달러였다.

“오늘 밤 주빌리 쇼를 구경하실 분들은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구경을 하실 분들은 10시 30분부터 자유시간을 주겠어요. 카지노를 하실 분들은 지금부터 저의 말을 명심해 들으세요.

라스베이거스는 여러 가지 카지노 시설이 있어요. 그중 가장 쉬운 것이 <슬로 머신>(Slot Machine) 이지요. 슬로 머신은 속칭<파친코>라고도 하는데요. 동전을 넣고 레버를 당기면 돼요. 번에 25센트에서 1불까지 있어요. 카지노 재미를 보실 분은 그냥 슬로 머신만 당겨봐요. 그래도 짜릿한 손맛이 감촉돼요.

 

혹시 원반 위에 38개의 수자가 적힌 <률렛>(轮盘赌)을 보셨는지요. <룰렛>은 유럽인들이 많이 선호해요. 그러나 우리나라 분들은 그래도 포커를 용한 <블랙잭>(Black Jack)을 가장 선호해요. <블랙잭>은 이상의 카드가 합계해 21점을 계루는 게임이지요. 그러나 중국인들은 <크립트>(Craps)를선호해요.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 눈금의 합계로 승부를 가르는 게임이지요.

 

라스베이거스에서 최상의 카지노 게임은 <비카라>(Bacarat)예요. 게임은 9점이 최고점이지요. 카드 틀을 갖고 많게는 손님 12명이 동시에 게임을 하지요. 그러나 카지노 자금이 엄청 많이 나들어요. 번에 거는 돈이 최저로 2000불이지요. 당연히 부자들만 즐기는 게임이지요.

 

들으셨지요? 오늘은 그냥 슬로 머신만 당기세요. 블랙잭은 손도 대지 마시고요. 특히 부부동반하신 분들은 절대 카지노장에 들어가면 돼요. 뭔 뜻인지 알아들으셨지요? 안 그러면 남은 여행 억만으로 깨져요.”

미국에는 이런 흑색 유머가 있다.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카지노에 손을 대지 않으면 마치도 첫날밤 새색시를 안아볼 모르는 병신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나는 직것 도박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불빛이 현란한 슬로 머신보다 “쥬빌리 쇼”음이 끌렸다.

 

“주빌리 쇼”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축제 분위기쇼였다. 이미 50 년의 공연 역사를 갖고 있었다. 명랑한 선율과 함께 막이 열렸다. 시원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무희들이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등장했다. 배경은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망망한 대평원이었다. 황량한 대사막이었다.

대형 돛배가 등장했다.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던 돛배였다. 창망한 대서양에서 거친 파도와 박투하며 힘겹게 전진했다. 돛배가 살아지고 망망한 대평원이 펼쳐졌다. 수천 마리의 들소 떼가 등장했다. 카우보이와 들도 구름같이 뒤엉켜 장사진을 이루었다.

 

“쥬빌리 쇼”는 90여 분간 줄기차게 펼쳐졌다. 수백 명의 무희들이 번갈아 등장했다. 때로는 어린애 손바닥만 천으로 사타구니만 가렸다. 알몸이나 다름이 없었다. 관중석에서 요란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알몸의 무희 중에는 아시아계로 보이는 무희 들고 끼였다.

“쥬빌리 쇼”는 자정이 넘어서야 막을 내렸다. 우리 일행은 호텔 주차장에서 버스를 대기했다. 그때 히스패닉계 남자와 여자가 다가왔다. 순식간에 20여 장의 전단지를 돌렸다. 알몸을 드러낸 기녀들의 사진이었다. 전화번호도 적혀있었다. 매춘을 알선하는 전단지였다.

 

라스베이거스는 비단 도박이 합법화되였을 뿐만 아니라 매춘도 합법화되였다. 다년간 카지노업과 함께 매춘업도 대형 산업으로 발전해 막대한 재부를 끌어들였다. 라스베이거스는 인간의 동물적인 욕망을 극도로 부추키는 “인욕의 도시”였고 “죄악의 도시”였다.

1931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에서 도박을 합법화한 곳은 다만 라스베이거스 곳뿐이었다. 지난 40여 년간 라스베이거스는 카지노업을 독점 경영하여 이미 세계 제1위 카지도 도시로 부상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1년도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수입은 무려 76억 달러였다. 라스베 지역의 인구는 1991년도에는 근근이 78만 명으로 집계되었지만 2001년에는 무려 156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2000년도 이전까지만 하여도 라스베이거스는 단순히 도박과 매춘을 알선하는 “죄악의 도시”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IT 박람회와 각종 전자제품박람회, 스포츠용품 박람회. 명품 의류 박람회 등등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라스베이거스는 해마다 4000여 개의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참가인수는 무려 400여만 명이었고 소비금액은 50억 달러에 달했다.

이날 우리 일행은 대형 리무진에 탐승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외관이 지프 같게 생긴 리무진은 좌석이 20여 개나 되여 소형버스와 맞먹었다. 객방에 돌아오니 함께 투숙한 한국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떠나게 되였다. 나는 대충 샤워를 끝내고 여행 일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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