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국의 자랑 요세미티 국립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Yosemite National Park)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하프 돔”(Half Dome)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바위산이 있다. 산 전체가 형태의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신기한 것은 바위산이 흡사 칼로 자른 반쪽만 남아 돔”으로 유명했다. 돔”의 높이는 8842피트(약 2695미터)였다. 빙하의 무게와 지반의 이동으로 형성된 기묘한 절경이었다.

 

한국인들이 금강산을 천하절경으로 간주하듯 미국인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미국의 자랑으로 간주하였. 요세미티 국립공원은 4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부동한 모습을 자랑하였. 특히 울창한 계곡 사이로 례한 자태를 뽐내는 9개의 폭포가 절경을 이루었다. 약 150만 년 전 이곳은 빙하기를 맞이했다. 수차례에 거친 빙하의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마침내 아름다운 계곡과 례한 폭포가 형성되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 기념

1864년,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레험 링컨이 이곳을 “요세미티 파크”로 제정하였다. 당시만 하여도 “요세미티 파크”는 캘리포니아주에 속하는 주립공원이었다. 1890년에 국립공원으로 제정되었다. 국립공원은 영어로 “National Park”라고 한다. 중국어로 표현하면 “国际公园” 또는 “世界公园”으로 된다.

 

“하프 돔”바위산의 맞은편에는 영어로 “El Capitan”이라고 명명한 아찔한 절벽 있다. 이산의 높이는 7569피트였다. 단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형성되었다. 지상에 노출된 덩어리 바위산으로는 세계 제1위를 차지했다. 이산은 피상적인 암벽등 코스로도 유명했다. 해마다 세계 각국에서 프로급 암벽등가들이 즐겨 찾는 스포츠 명소였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첫눈에 안겨오는 것이 천하절경을 이룬 요세미티 대폭포였다. 이 폭포는 개의 폭로로 구성되었다. 폭포 사이에 길이가 815피트의 급류가 흐르고 있어 폭포 전체의 길이는 무려 2565피트(약 770미터)에 달했다.

미국의 저명한 사진작가 이젤 애덤스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절경에 매료되여 평생을 이곳에 뿌리박았다. 그는 춘하추동 부동한 자태를 뽐내는 요새미키 국립공원의 절경을 수많은 사진 작품으로 남겨놓았다. 연방정부는 위대한 사진작가 애덤스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애덤스 사진 작품 전시관을 설치했다.

전시관에는 사계절에 따라 부동한 절경을 나타낸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자연경관을 담은 사진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었다. 특히 관광객의 눈길을 각별히 끌어당기는 사진 작품은 거폭의 "요세미티 대폭포"전경이었다. 사진 작품은 한때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널리 소개 수차례나 재판 인쇄되었다.

              4. 낭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

태평양의 서해안에 자리 잡은 샌프란시스코는 연래 미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낭만의 항구도시였다. 버스는 오후 15시경에 샌프란시스코의 관광명소로 유명한 39번 부두에 당도했다.

      샌프란시스코 명물 "금문교" 기념 
      샌프란시스코 명물 "금문교" 기념 

샌프란시스코는 시초에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이 어선의 선착장으로 용하였던 항구였다. 그러나 지금은 선착장이 종적도 없이 살아졌 대신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각양각색의 유람선이 정박 있었다. 부둣가에는 개떼들이 한가하게 햇빛 쪼임을 즐기고 있었다. 근처에는 리를 전문으로 하는 크고 작은 레스토랑이 빼곡히 들어섰다.

 

부두로 향하는 길목에서 짛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흑인 남자가 눈에 띠였다. 붉은색 비닐 물통을 뒤집어 놓고 맨손으로 강렬한 재즈곡을 신나게 연주했다. 옆에 놓인 쟁반에는 동전이 담겼다. 나는 1달러 지폐 장을 쟁반에 놓았다. 가이드가 대뜸 눈짓해 보였다. 이곳은 매일 재즈곡을 두드리며 구걸하는 흑인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몰랐다. 저마다 검은색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얼핏 보기에는 보는 맹인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팔다리가 멀쩡한 놈들이었다. 낮에는 구걸을 업으로 일삼고 밤이면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동성연애를 즐기는 변태 경이였다.

 

39번 부두에서 나는 영어로 “left hander”(左撇子)란 사인이 적힌 레스토랑을 발견하였다. 문자의 뜻대로 풀이하면 이곳은 왼손잡이 손님을 접대하는 식당이었다. 나는 의아쩍은 생각이 들어 가이드에게 무슨 영문인가고 물었다. 뜻밖에 가이드의 대답 역시 엉뚱하였다.
“백인들은 십중팔구 왼손잡이가 많아요. 사실은 누구든지 다 들어갈 있어요. 그냥 손님을 유혹하려는 기발한 아이디어지요.”
“저 같은 오른손잡이도 접대할까요?"
“물론이지요. 궁금하시면 한번 들어가 보세요.”

가이드는 애꿎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가이드의 말에 용기를 얻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른의 손으로 정도 되는 왕새우튀김이 대뜸 눈길을 끌었다. 워의터에게 값을 물었더니 하나에 5달러라고 하였다. 나는 5달러짜리 지폐 장을 넘겨주고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백인도 있고 아시아계로 보이는 동양인도 있었다. 아랍계로 보이는 이슬람 신도들도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왼손으로 왕새우튀김을 집어먹었다. 이터가 왕새우튀김을 가져왔다. 나는 울며 자먹기로 난생처음 왼손으로 음식을 집어먹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의 서해안에 자리 잡은 도시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항구도시였다. 미국은 1836년과 1846년 차례의 멕시코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태평양 연안의 광대한 서부지역을 통제하였다. 서부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1847년부터 아름다움 항구도시 샌프란시스코를 건설했다.

 

1848년 태평양 연안의 캘리포아주가 연방정부에 귀속되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일확천금을 노렸던 “골드러시”광부들이 삽시간에 샌프란시스코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 개통되자 샌프란시스코에도 기차가 통했다.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 연안지대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각광받았다. 1906년 4월 18일 유례없는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폐허로 되였다. 그러나 1919년에 이르러 샌프란시스코는 이미 마천루가 하늘을 찌르고 우중충 솟 있는 현대화한 항구도시로 변모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현재 10만여 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출신이었다. 지금 이곳 차이나타운에서는 의연히 광둥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러시아 타운과 이탈리아 타운도 있다. 1900년대 초 러씨야갱단과 이탈리아 갱단은 차이나타운에서 총격전을 벌려 중국인을 괴롭혔다. 당시 중국인들은 러씨야갱단과 이딸리 갱단의 몇몇 조직원을 붙잡아 차이나타운의 입구에서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후 드디여 살벌한 총격전이 살아졌다.

 

나는 유람선에 탑승하여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로 향했다. 중국어로 “金门桥라고 하는데 독일인 공정사가 설계하였다. 다리의 길이는 1.3마일이었 개의 대형 줄로 다리 전체를 들어 올린 독특한 구름다리 구조였다. 대형 줄은 도합 290개의 철사 줄로 묶였는데 직경이 자그마치 1미터를 넘겼다.

유람선은 “골든 게이트 브리지” 근처에서 머리를 돌려 알카트라즈 섬으로 향했다. 섬은 1775년, 스페인 탐험가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당시만 하여도 무인도였다. 그러나 1934년부터 1963년까지 이섬은 연방정부의 형무소로 용되였다. 그때로부터 일면 “악마의 섬”으로 불렸다. 당시 이곳에 수감된 죄범들은 미국 역사상 가장 흉악하고 극악한 살인범들이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애 고도에서 엄격한 통제와 감시를 당했다. 기재에 따르면 1963년에 감옥을 철거할 당시까지 이곳을 탈출한 죄범은 불과 3명밖에 되였다.


2차 세계대전이 결속될 무렵인 1945년 4월부터 6월 사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연합국 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중국.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50여 개 나라의 대표들이 참가해 “연합국 헌장”에 사인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한때 미국의 중요한 정치무대로 활약했다.

 

그러나 근래에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연애자를 상징하는 “게이 보이 거리”가 생겨났다. 게이 보이들은 동성연애결혼을 합법화하기위해 수차례나 데모를 조직하였다. 근래에 이탈리아계가 집거한 노스비치 일대는 포르노가 극성스레 성행했다. 변태적인 색마 경들이 밤에 낮을 이어가며 섹스에 몰입하는 “환락의 거리”로 변모했다. 미국에는 “돈을 벌려면 뉴욕으로 가고 환락을 즐기려면 샌프란시스코로 가라"라는 말이 있다. 오늘의 샌프란시스코는 어젯날의 낭만의 도시에 비해 그 이미지가 많이 추락되었다.

유람선은 알카트라즈 섬을 떠나 39번 부두로 향했다. 나는 선창가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바라보았다. 황급 낙조가 짛게 물든 항구도시는 마치도 폭의 아름다운 유화를 방불케 하였다.

 

               5. 동화 같은 도시 몬트레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120마일가량 달리면 동화 속의 아름다운 해변도시 몬트레이(monterey)에 도착한다. 몬트레이는 사계절의 기후가 온화해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 명승지였다. 버스는 오전 9시경에 몬트레이에 당도하였다.

몬트레이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럽인은 포르투갈 탐험가 카빌로(Cabrillo)였다. 1542년 카빌로는 스페인 왕의 특명을 받고 아메리카 탐험에 나섰다. 1602년 스페인 탐험가 비즈 카이는 태평양 연안에서 영국 함대를 피면할 항구를 모색하다가 우연히 몬트레이 반도를 발견했다. 비즈 카이는 멕시코 총독 몬트레이 백작의 이름을 빌어 이곳을 몬트레이라고 명명했다.

         몬트레이 해변 기념 
         몬트레이 해변 기념 

1770년대부터 스페인이민자들이 본격적으로 몬트레이 반도에 정착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의 영토에 귀속되었다. 몬트레이는 캘리포니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지로 발전했다. 1846년 멕시코는 미국의 영토 확장에 맞서 몬트레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심각한 타격을 당해 부득불 몬트레이 반도에서 물러났다.

1848년 미국은 멕시코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몬트레이를 비롯한 광대한 서부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확정 지었다. 캘리포니아를 휩쓸었던 “골드러시 붐”이 닥쳤다. 이를 계기로 태평양 연안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몬트레이에서 북상하여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갔다.

 

185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은 고래기름의 수요량이 급증하였다. 당시 몬트레이는 고래잡이에 나선 포경선의 본거지로 되였다. 1900년도까지 몬트레이항에는 의연히 포경선이 정박하였다. 그러나 포경선이 점차적으로 살아졌다. 대신 정어리 잡이에 나선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몬트레이는 의연히 정어리 잡이에 나선 어선을 목격할 있었다. 부둣가에는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가동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정어리 통조림 공장 이미 흔적도 없이 살아졌다. 대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호텔과 레스토랑, 술집이 성황을 이루었다.

 

해마다 10월 말이면 어마어마한 나비떼들이 겨울나기를 위해 몬트레이로 날아왔다. 조지 워싱턴 파크를 중심으로 주변의 나뭇가지에 눈송이같이 붙어있다가 이듬해 3월이면 다시 북쪽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했다. “모나크”(monarch)라고 부르는 나비떼가 무엇 때문에 해마다 어김없이 몬트레이로 찾아와 겨울나기를 하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았다. 매년 10월이면 어린이들은 나비 모양을 본떠 만든 아롱다롱한 의상을 차려입고 거리로 떨쳐 나왔다. “모나크”를 환영하기 위한 화려한 “나비축제”를 개최했다.

몬트레이에는 바다 가를 따라 길게 뻗은 환상적인 산책로가 있다. ““세븐틴 마일 드라이브 코스”(Seventeen miles Drive)로 유명하. 이곳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의 극치로 간주되었다. 관광객들이 앞다투어 둘러보는 명소로 되였다.

 

버스가 “세븐틴 마일 드라이브 코스”에 당도하자 30분간의 산책 시간이 주어졌다. 해안가를 거니 노라니 비릿한 바닷바람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멀리 바위섬이 바라보였다. 찬란한 아침 해살이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났다. 솜뭉치 같은 물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백사장을 실북 나들듯 들락날락 신나게 춤췄다.

멀리 아득하게 뻗은 산책로는 아침 안개가 서리서리 피여올라 가뭇가뭇 시선을 흐리웠다. 양편에는 초록색 잔디가 파릇파릇 돋아났다. 구슬 같은 이슬을 머금고 뿌리가 시리도록 모르게 펼쳐졌다. 잔디밭 너머로 하늘을 찌를듯한 아름드리 거목이 우중충 솟았다. 거목들 사이사이로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아침 해살이 오리 오리 스며들었다. 숲속에는 이쁘장한 서양식 가옥들이 띄염띄염 자리 잡았다. 볼수록 폭의 아름다운 유화를 방불케했다. 볼수록 눈과 마음이 모두 취했다.

 

버스가 한창 수림 속을 달렸다. 문뜩 창밖으로 일본식 전통가옥이 바라보였다. 뒤미처 가이드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일본식 가옥은 겉보기에는 빛나는 낡은 가옥으로 보이지요. 근데 시가로는 몇천만 불에 가까운 고급 주택이거든요. 일설에 따르면 일본의 재벌기업 도요타 회사의 둘째 공자님이 전에 저 가옥을 매입했어요.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둘째 공자님은 극심한 대인기피증을 앓았어요. 저 가옥은 내내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아요.”
궁금증이 많은 한국인들은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웃기웃 창밖을 살폈다.

 

레이의 페블비치에는 세계 정상급의 골프장이 있다. 이곳의 골프코스는 연간 티켓값만 하여도 30만 달러를 넘겼다. 이곳의 골프 회원은 미국에서도 특수한 계층으로 존대 받는 귀족 출신의 신사들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제41대 대통령 조지 부시는 영국 귀족 혈통을 소지했다. 그러므로 퇴직 이곳의 골프장 출입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은 빈한한 평민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퇴직 이곳의 골프장 출입이 금지되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최상의 가치로 신봉하는 미국에도 여전히 신분 의식이 살아있었다. 아직도 귀족과 평민이 차별 시 되는 퇴폐적인 문화가 생존한 것이 믿기 어려운 흑색 유머로 느껴졌다.

 

                6.  덴마크 마을 솔뱅

버스는 “미국 속의 덴마크”로 주목받는 “솔뱅”(Solvang)으로 향했다. 솔뱅은 아담한 덴마크 마을이었다. 입구에는 세계적인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덴마크 대형 풍차가 한눈에 안겨왔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대부분 관광객을 접대하는 레스토랑이나 기념품 가게였다. 솔뱅 특산품은 덴마크 와인이었다. 와인 생산과정을 견학할 있는 투어까지 마련되었다.

솔뱅은 1911년부터 덴마크 미국인들이 모여살면서 새롭게 생겨난 마을이었다. 1914년부터 덴마크계 미국인들은 해마다 솔뱅에서 전통적인 덴마크 명절 행사를 개최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덴마크 문화의 중심지고 각광받았다. 솔뱅에서 제조한 덴마크 와인은 업계에서도 인정하는 일품이기에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덴마크 마을 솔뱅 기념 
               덴마크 마을 솔뱅 기념 

마을 입구에서는 덴마크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주민들이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녀가 서로서로 어깨를 맞대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전통적인 덴마크 춤인듯하였다. 이들의 춤판에 끼어들어 흥겹게 춤추며 환락을 즐기는 관광객도 있었다.

 

                 7. 아메라칸드림 로스앤젤레스

한낮에 솔뱅을 떠난 버스는 어둑어둑 황혼 무렵에 마침내 엘에이 한인타운에 당도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를 맞아주었다.
“미스타 조. 수고했어. 그래 구경은 잘했어?”
70고령의 목사님은 언제 보나 상냥한 얼굴에 거울같이 밝은

음을 지었다.
“네. 그랜드캐니언도 구경했고 라스베이거스에두 가봤고요. 진짜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어요.”
“잘했어. 중국의 등소평은 백두산 천지를 보면 평생의 유감이라고 했다면서. 미국에선 그랜드캐니언 하구 라스베이거스를 못보면 평생 후회하게 되는 거야."

 

“미스타 조. 오늘은 시원하게 냉면 드시는 어때요?”
사모님은 한성랭면이 일품이라고 소개하였다. 우리 일행은 올림픽거리에 자리 잡은 한성으로 향했다. 좌석을 정하고 앉자 목사님이 문뜩 이렇게 물었다.
“미스타 조. 일전에 로스앤젤레스를 좀 구경했었나?”
할리우드  디즈니랜드는 가봤고요. 샌디에이고 가봤어요.”

“안 그래도 목사님 내일 미스타 조를 위해 스케줄을 잡았어요.”
후리후리한 치골의 사모님은 언제 보나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일 로스앤젤레스 인근 지역을 좀 돌아보면 어때? 어디 가보

싶은 곳이 있으면 말해봐.”

“진짜세요. 아멘… 감사하고 또 감사하네요. 할렐루야-"
나의 익살에 목사님 내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 웨이트리스가 냉면을 가져왔다.

목사님은 식전 기도를 드렸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에게 좋은 음식 선물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멀리 중국에서 온 미스타 조 4박 5일여행을 털끝 하나 다침이 없이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 고맙고 감사하고 지극합니다. 미스타 조 내일여행길에 오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착하고 착한 미스타 조 많이 많이 살펴주시고 무사귀환하도록 지켜주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기도가 끝난 목사님은 로스앤젤레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로스앤젤레스는 1542년에 처음으로 스페인 탐험대의 지휘관 카브 리요 의해 발견되었다. 200여 년간 스페인 탐험대와 영국인 탐험대가 수차례나 이곳을 탐험했다. 그러나 줄곧 방치된 상태로 식민지 개척이 지연되었다. 1781년 44명의 스페인 이민자들이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본격적인 식민기 개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헌팅턴 식물원 기념

1846년 캘리포니아는 31번째 주로 연방정부에 귀속되었 로스앤젤레스는1850년 시티(City)로 승급되었다. 그후1854년경에 서부 대륙을 휩쓸었던 “골드러시 붐”이 점차 막을 내렸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는 도처에 실업자가 넘쳐났다. 그러나 1876년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자 이곳은 또다시 새로운 활기를 띠였다.

 

1875년 연방정부는 서부개발을 목적으로 캘리포니아에 그루의 오렌지 묘목을 선물했다. 이 묘목이 뜻밖에 "네이블오렌지"(脐橙)로 되여 서부 개척에서 한목을 담당하였다. 오렌지 재배는 18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기 폭발적인 토지 붐이 형성되었다. 1886년 사이에 농경지가 10배로 확장되었다. 1892년,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 “오일 러시 붐”이 일파만파로 확장되었다. 로스앤젤레스는 또다시 새로운 비전과 도약을 맞이했다.

1930~1940년대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로스앤젤레스는 “영화의 도시”로 각광받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한 로스앤젤레스는 중요한 군수품 생산기지로 부상해 동자 수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1971년, 로스앤젤레스 대지진이 발생했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는 제23회 국제 올림픽을 개최했다.

 

다년간 로스앤젤레스는 세계 각국에서 밀려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는 가장 피상적인 도시로 주목받았다. 근래에 태평양 지역의 경제권이 급성장하면서 아세아 지역의 이민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로스앤젤레스는 주변에 94개의 크고 작은 위성도시와 커뮤니티를 갖고 있다. 지역 인구는 무려 900만 명에 달해 이미 미국에서 제1위를 차지했다.

식사 목사님은 그리피스 천문대로 안내했다. 천문대는 1933년에 건설되었고 1935년부터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시청에는 망망한 우주의 기안한 현상을 포착한 각종 들이 전시되었다. 전시 정상에는 대형 천체 원경이 설치되었다. 관광객들은 천체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에서 뿌리는 무리를 무상으로 관측하였다.

 

나는 천문대 정상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야경을 한눈에 굽어보았다. 모르게 아득히 펼쳐진 시가지의 등불은 흡사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위에 내려앉은 눈을 현혹시켰다.

 

         헌팅턴 도서관 기념
         헌팅턴 도서관 기념

다음날 나는 목사님 함께 “헌팅턴 라이브러리”(Huntington Library)로 향했다. 110번 샌버너디노 하이웨이(San Bemardino Fwy)를 타고 동쪽으로 35마일가량 달려 산마리노에 이르렀다.

“헌팅턴 라이브”는 철도왕 헨리 헌팅턴이 1919년에 수건 하였다. 도서관에는 무려 35000여 점의 도서와 600여만 점의 친필 원고. 50여만 점의 국보급 사진이 소장되었다. 그중에는 유럽의 르네상스시대에 기록된 각종 서류 원고도 있었다. 그리고 1501년 이전에 출간된 인쇄본 도서와 지도도 있었다. 그밖에 역사, 문화, 의학, 미술, 과학 등 분야의 도서와 미국 서부 개척에 유관된 문헌자료도 있었다.

 

전시청의 입구에는 대형 “성서”책이 전시되었다. 책은 1455년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금속활자를 용해 인쇄한 성서 초판본으로 유명하였다. 책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책의 두께와 무게도 상상을 초월했다. 시청에는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623년에 런던에서 출간한 희극. 사극. 비극 작품의 초판본과 부분적인 친필 원고가 전시되었다.

그밖에 15~16세기 유럽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창작한 대량의 원본도 전시되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시 워싱턴이 1776년에 발표한 연설문 원고도 소장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친필 편지도 소장되었다. 특히 18세기에 저명한 계몽주의 사상가로 활약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유고(

稿)가 많이 보존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8세기 미국의 저명한 자유주의 사상가였고 계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로 피뢰침을 발명한 과학자이기도 하였다. “모든 지식은 경험을 기초로 한다. 경험을 떠나면 어떤 인식도 얻을 없다” 프랭클린의 같은 주장은 그를 감각주의자로 인각시켰다.

프랭클린은 계몽주의 사상사로 활약했다. “청년들에게 알리는 글”에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시간은 곧 금전이다.”라는 실용주의 가치관을 주장했다.

프랭클린은 국가가 재부를 획득하는 도경에는 전쟁, 상업, 농업 가지 방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전쟁은 약탈에 의해 재부를 획득한다. 둘째. 상업은 기편 수단으로 재부를 획득한다. 셋째. 농업은 동에 의해 재부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농업만이 가장 정당한 도덕적인 행위이다.

 

미술전시청에는 진귀한 미술작품들이 소장되었다. 15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유럽 국가에서 창작된 미술작품이었다. 그밖에 프랑스 르네상스시대의 귀족 생활상을 엿볼 있는 호화로운 응접소파

세트로 소장되었다.

 

        헌틴텅 식물원 기념(일본식 전통 정원)
        헌틴텅 식물원 기념(일본식 전통 정원)

“헌팅턴 도서관”에는 부지면적이 84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식물원이 있었다. 이곳에는 무려 14000여 종의 희귀식물을 재배하였다. 식물원은 도합 15개의 크고 작은 정원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한식경을 돌아다녔지만 겨우 3개 정원밖에 견학하지 못했다. 정갈하고 아담한 일본식 정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오후에는 시미밸리에 위치한 “레이건 라이브러리”로 이동했다. 도서관은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기념하여 수건 하였다. 평민 출신의 레이건은 다년간 할리우드 무대에서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1966년 그는 압도적인 투표수로 캘리포니아주의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8년간의 임기 시기 캘리포니아주의 경제를 거족적으로 발전시켜 시민들의 대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은 제40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하였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령으로 되였다. 8년간의 대통령 임기 시기 그는 “강대한 미국을 구축해야 한다”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했다. 시기 미국의 국방력은 대폭적으로 강화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냉전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대통령으로 호평받았다.

 

도서관 입구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조각상이 놓였다. 가죽옷을 입은 “카우보이”차림새가 매우 이색적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멕시코 문화가 살아 쉬는 “천사들의 여왕 마을”을 둘러보았다. 마을은 스페인어로 “엘 푸에볼르 데라 레이 나데 로스앤젤레스”라고 했다. 빨랫줄같이 길게 늘어진 괴상한 이름이었다. 1781년 44명의 스페인이민자들이 이곳에 정착했다. 지금도 이들이 주거하였던 주택 건물이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곳에는 최초의 소방서, 극장, 교회, 관공서가 건물 그대로 보존되었다.

이날 저녁 우리 일행은 롱비치 부근의 해물요리점에서 식사했다. 나는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알래스카에서 잡았다는 털게를 대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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