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나무 그루 토끼 마리-
유년 시절 내가 잠투정을 때면 할머니는 이불깃을 다독이며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할머니, 속의 계수나무는 밖에 없어요? 속의 토끼는 왜 마리밖에 없어요?”
살배기 동심이 막무가내로 짓거리는 투정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마냥 보름달같이 환한 웃음을 지으 또다시 자장가를 부르셨다.
“아가 아가 우리 아가, 계수나무 그늘 아래 깡충 깡충 뛰놀 거라-”

유년 시절 할머니가 불러주셨던 자장가는 나의 눈앞에 달나라의 아름다운 동화세계 펼쳐주었다. 유년 시절 할머니의 자장가는 나의 마음속에 영원히 지을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조선 글자에 어섯눈을 떴을 때로 기억된다. 어느 유난히도 달빛이 밝았던 대보름날이었다. 할머니는 나의 손을 부여잡고 대뜰에 앉으셨다. 은쟁반 같은 둥근 달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들려주셨다.

         주당위 장덕강 서기와 함께(가운데 분)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리어 태백이 놀던 달아. 낭군님 그리울 달나라로 가고 지고.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리어 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아가 크거들랑 백과 놀고 지고-”

할머니는 낭군님이 그리울 때면 하늘의 밝은 달을 쳐다보며 애수에 젓은 노래를 부르셨다. 내가 장차 우썩우썩 커가면 속의 리어 태백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지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머리 들어 밝은 달 쳐다보고 고개 숙여 고향땅을 그리네”
(举头望明月低头思故乡)
중국의 시성 리어 태백 “오언절구”(五言绝句) “고향을 그리네”(思故乡)는 이미 천여 년간 전송되었다.

나는 성인이 되여서야 비로소 깨쳤다. 무엇 때문에 중국인들은 오언절구 “고향을 그리네”를 그토록 사무치게 애착하는지를 다소나마 있었다. 대보름날 할머니는 고사리 같은 손을 부여잡고 밝디밝은 보름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장차 크거들랑 리어 태백의 “오언절구”같은 아름다운 노래를 지으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나는 여태껏 할머니의 부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부탁하셨던 아름다운 노래는 여태껏 지어내지 못했다. 나에게는 시성 리어 태백의 호방한 기질이 없었다. 술잔에 비긴 둥근 달을 지켜보며 풍월을 읊었던 리어 태백의 낭만과 기량도 없었다.

멀고 이국땅 미국에서 나는 육신이 지치고 마음 지치고 생각마저 지쳤다. 밤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을 쳐다보며 무심코 할머니가 불러주셨 자장가를 떠올렸다. 할머니다 불러주셨던 노래를 상기했다. 어느 밝은 깊은 밤에 문뜩 노래 가락이 조용히 찾아왔다.

“강은 고향의 강이 맑으리, 달은 고향의 달이 밝으리. 고향의 강은 내 생명의 젖줄이여라, 고향의 달은 내 행복의 요람이여라.”

 

유년 시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시며 잠투정을 달려주셨던 할머니였다. 노래에 애수의 정을 담아주셨던 할머니였다. 노래에 사모의 정을 키워주셨던 할머니였다. 눈물겹도록 그리운 할머니였다. 내가 미국행을 떠난 할머니는 저세상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세상을 뜨시던 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 못해 슬피 슬피 울었다. 할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저버린 불효 때문에 가슴을 두드리며 구슬프게 울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굳게 맹세하였다. 언젠가 기어이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할머니의 영전에 불러드리려고 다지고 다지고 또 다졌다.

“강은 고향의 강이 맑으리, 달은 고향의 달이 밝으리. 고향의 강은 내 생명의 젖줄이여라, 고향의 달은 내 행복의 요람이여라-”

 

멀고 이국땅 미국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면 노래를 불렀다.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물어보는 이도 없었다. 바라보는 이도 없었다. 그러나 노래 하나만은 가슴 깊이 간직하였다.

어느 은은한 대보름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없는 쓸쓸한 대보름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밝은 달을 지켜보았다.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노래를 부르시던 할머니가 눈물겹도록 그리웠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할머니 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드려야 하였다. 구름도 울고 넘는 고향이 그리웠다.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하고 놀라며 잠투정을 달래주시던 할머니가 그리웠다. 발길이 고향으로 돌아섰다. 마음이 고향으로 달려갔다. 나는 재삼 재삼 마음을 가다듬고 차곡차곡 정리하였다.

            "코레아 쇼핑" 회사 직원들과 함께

이국땅 워싱턴 역에서 “코레아 쇼핑”회사의 직원들과 별하며 코마 루가 찡- 하니 저려났다. 다년간 주고받은 애틋한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나는 고향의 강이 떠올랐다. 고향의 달이 떠올랐다. 귀향의 절절한 마음은 한달음에 고향으로 달렸다.

                  안사장님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면 부디 꼭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안사장님의 진심 어린 부탁이었다. 고향으로 달려가는 나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사세요.”
나를 향해 오래오래 손을 젓던 한국인 직원들이었다. 애틋한 모습이 인제는 영원한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류기종 목사님과 함께
          류기종 목사님과 함께

귀국을 앞두고 미국 감리교 대학원에서 장장 120여 분간 류기종목사님의 “하이드 헤드 과정 신학 특강을 청취했다. 목사님의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지금도 귀전에서 쟁쟁하게 울. 그러나 인제는 목소리를 더는 들을 수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가슴이 오리 오리 찢어졌다.

“목사님도 38세에 신학박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미스타 조도 늦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신학공부 시작하세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애절한 충고를 주시던 사모님이었다. 가을바람같이 시원시원하시던 사모님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올랐다

                   심경옥 사모님과 함께 
                   심경옥 사모님과 함께 

“조 서방, 미국에서는 교회에 꼭 다녀야 해, 그래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모든 일이 뜻대로 성사될 있는 거야, 내 말 명심하고 내일부터 당장 교회에 나와.”


89세 씨는 손을 잡아 쥐고 무작정 교회로 끌었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가건만 씨의 간곡한 부탁은 도리여 새록새록 기억 상기된다.

2004년 여름 노모 씨는 이미 세상을 타계하셨다. 운명 직전에 멀리 중국에서 온 서방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나에게 두툼한 “성경” 책을 남겨놓았다. 나는 노모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 천천히 큰절을 올렸다. 노모 부탁대로 열심히 열심히 “성경”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대모님과 함께

“코레아 쇼핑”의 창시인 심사장님은 귀국을 앞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01년 12월 “엔론”의 주식 투기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당시 갑자기 들이닥친 자금난 때문에 웨스트비치의 호화 저택마저 은행에 저당잡혔다. 회사 업무량은 하루가 다르게 위축되었다. 직원들도 대폭적으로 감원되었다. 과도한 스트레는 심사장님을 아사 직전으로 몰아갔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카지노에 파뭏혔다. 롤렉스 손목시계마저 카지노에 밀어 넣었다. 하늘땅이 맞붙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심사장님은 밤새도록 하염없이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심사장님은 다시 다시 마음을 새롭게 정리했다. 중국 상해에 “코레아 쇼핑”지사를 새롭게 설치하고 상품 구입에 착수했다. 놀랍게고 지난 년간 상해지사는 하루가 다르게 업무량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코레아 쇼핑”은 드디어 원기를 회복했다.

 

“미스타 조. 이건 중국 상해지사 대표 미스타 왕의 명함장이예요. 귀국하면 꼭 상해지사로 한번 찾아가 보세요. 앞으로 중국 경내에 지사 하나를 더 설치하려고 해요.

미스타 . 그간 참으로 로고가 많았어요. 어때요? 코레아 쇼핑하고 손잡고 함께 사업을 해보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중국은 앞으로 길게 잡으면 10년 정도 짧게 잡아도 5년 정도 제조업은 여전히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같아요. 기회만 잘 잡으면 사업을 크게 확장해 한몫 든든히 잡을 같아요.”

심사장님의 권유는 귀국을 앞둔 나에게 너무나도 현혹스러운 유혹이었다. 나는 장미꽃 같은 아름다운 미래를 간직하고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후 상해 외탄공원 기념

2005년 6월 나는 남중국의 찌물쿠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상해시에 도착했다. 남로(祁连山南路) 92번지에 위치한 “코레아 쇼핑” 상해지사로 찾아갔다. 상해지사 대표 미스타 왕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무더운 날씨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네요. 미국에 계시는 심사장님이 저한테 수차례나 전화를 걸어왔어요.”

40대로 보이는 미스타 왕은 류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시초에 나는 미스타 중국 태생인 줄로 알았다. 근데 알고 보니 한국 출신이었다. 나는 한국 사람도 성을 갖고 있는가고 물었다. 그는 성을 가진 한국인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코레아 쇼핑”상해지사는 2002년 3월에 정식으로 엄무를 가동했다. 시초에는 미스타 왕과 한국인 직원 2명이 지사를 경영했다. 그러나 년간 업무량이 급증하여 지금은 12명의 직원을 채용했다. 상해 당지의 중국인 직원은 5명이었다. 현재 상해지사의 엄무는 광동, 절강, 복건, 강서, 산동 등 연해지역으로 파급되었다. 상품 구입 품목은 이미 1000여 종에 달했다.

미스타 왕의 소개에 따르면 황포강 부두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발송하는 상품의 물량은 최소한 20~30톤이었다. 상품의 품목에 따라 자금 수요량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컨테이너 1개 분량에 중국 15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였다. 떨어지는 수익금은 적게는 10% 많게는 15%였다. 엄무가 순조로우면 매달 2~3회 컨테이너 발송이 가능하였다.

 

나는 미스타 왕에게 30톤 분량의 종이제품을 약속하고 항주시로 이동했다. 당시 항주시의 고신기술 개발구에는 크고 작은 종이제품 생산공장이 밀집하였다. 종이제품의 품목은 쉽게 선정하였 가격도 순조롭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나 번다한 수출입 업무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였다.

대외무역 엄무는 우선 번다한 절차를 거쳤다. 상해지사를 통해 제품을 발송하려면 별도로 높은 가격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였다. 수수료가 적은 중국 회사를 용하면 제품이 해관에 머물러있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그만큼 별도로 보관비를 지불하였다. 제품 구입에서 발송까지 어차피 20여 가지의 지루한 절차를 밟아야 하였다.

 

번다한 절차를 무사히 통과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돈을 찔러주는 “물밑 거래”(潜规则)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천성이 돈거래에 아둔했다. 때로는 남들보다 갑절이나 찔러주고도 쉽사리 도장을 찍지 못했다. 그때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몰려왔. 저마다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고 허풍을 떨었다. 자칫하면 사기를 당했다. 심할 경우 엄청난 벌금액도 부과되었다.

30톤 물량의 종이제품을 발송하고 전자계산기를 부지런히 두드렸다. 이런저런 비용이 산더미같이 루적되였다. 손에 남은 수익금이 마이너스로 되였다.

“아니? 이건 대체 어떤 상황이지? 계산기가 오차가 생긴 아니야? 분명히 수익금은 15%가 아닌가?”

나는 불현듯 미스타 왕의 말을 되새겼다. 분명히 수익금은 적게는 10%, 많게는 15%라고 하였다. 그러나 말의 진가가 의심되었다. 심사장님은 미스타 왕과 손잡고 사업을 크게 구상해 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미스타 왕은 분명히 나한테 뭔가를 덮어감췄다.

나는 항주에서 3개월간 체류한 끝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난 년간 중국은 급격하게 변화 발전하였다. 내가 미국행을 떠날 적에 누군가 핸드폰을 쥐고 폼을 잡으면 가던 행인들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가용을 끌고 나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개혁개방 시초에 “만원 ”는 대부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백만 원”을 넘겨도 부자가 아니었다. “천만 원”을 넘겨야 그나마 부자행세를 하였다.

          북경에서 조남기 장군과 함께 (가운데 분)

나는 귀국 “남방주말”지를 열심히 구독했다. 1984년에 출간된 “남방주말”지는 다년간 민생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정의를 수호하고 사회량지(良知)를 지켜왔다. 그러므로 거대한 공신력(公信力)을 쌓았다. 나는 “남방주말”지를 통해 격변하는 중국 사회의 실태를 다소나마 파악하였다. 그러나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중국 사회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 수년간 나는 뼈를 깎아내는 각고의 노력으로 열심히 미국 공부를 하였다. 귀국 중국 각지를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중국 사회의 실태에 눈길을 모았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다시 또 3년이 지났다. 세월과 더불어 마음속에 뭔가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느 은은한 달빛이 부두럽게 흐르던 대보름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밝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불현 지필묵을 잡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여태껏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피부로 감촉한 것을 하나 둘씩 기록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남은 기억과 마음속에 터득한 진실을 차곡차곡 글로 남기고 싶었다.

 

“계수나무 그루 토끼 마리-”
유년 시절 나의 잠투정을 달래주던 할머니의 자장가는 세상 가장 아름다운 자장가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리어 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아가 크거들랑 태백과 놀고 지고.”

어린 시절 할머니의 노래는 나에게 동화 같은 환상의 세계를 펼쳐주었다. 적부터 나는 할머니의 노래를 들으며 하루가 다르게 우썩우썩 커갔다. 밝디밝은 보름달은 어느덧 할머니에 대한 영원한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지금도 나는 대보름날의 둥근 달을 사무치게 좋아한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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