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20 키로 장거리 걷기 대회가  시작될 예정으로 보였다.  곳곳에서 야외행사가 열리면서 오래만에 야외로 나온 사람들은 너도나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애가 머리도 식힐 겸 주말 나들이를 나가자고 해서 따라 나온 나도 어느새 기분이 상쾌해졌다.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강변이라 공기도 시원하고 나무들도 연두색 잎사귀들을 팔랑 이며 산들산들 춤추고 있는듯 싶었다. 나는 준비해온 핸드폰 카메라로 이 뜻깊은 순간들을 남기랴 아들 뒤를 따르랴 정신이 없었다. 

평소에 유산소운동 외에는 별 운동을 하지 않는 나지만 아들이랑 요즘 별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10 키로나 걸었다. 정오가 다가오면서 해볕은 점점 강해지고 아들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돋기 시작하는데도 오히려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다리가 시큰거리고 발바닥도 따끔거리고 숨도 차서 아들애을 따라잡을수  없었다.

 “아들, 우리 저기 벤치에 앉아 좀 쉬었다 갈까?”
 “아니, 난 계속 걸을 거야. 엄마 혼자 쉬고 천천히 따라와.” 

아들애는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 나도 울며 겨자 먹기로 아들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야했다. 그렇게 앞만 보고 한시간도 넘게 걷고 걸었는데 겨우 5 키로 더 왔다고 했다. 아들은 말수가 점점 적어졌고 점점 속도를 냈다. 하지만 나는 다리가 천근만근이 돼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다. 나는 끝내 멈춰서고 말았다. 
저만치 앞서 가던 아들애가 뒤돌아보더니 달려와 나의 어깨에서 배낭부터 벗겨서 자신이 멨다.

 “엄마, 난 오늘 꼭 100 명 안에 들거야. 그래야 대회에서 주는 경품을 받을 수 있거든.”
 “그까짓 상품 받아서 뭘 해? 별거 아닐 텐데. 오늘 좋은 체험 이만큼 했으면 됐어. 그러니 우리 이제 그만 걷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거나 해먹자.”
 “아뇨.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수 없어. 엄마는 천천히 와, 나 먼저 종착지에 가서 기다릴게.” 

말을 마친 아들은 배낭을 단단히 고쳐메고 앞사람들을 뚫고 뛰다싶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아들의 뒤모습은 엄청 커보였으며 배낭을 멘 어깨가 한없이 넓어보였다. 내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씩씩하고 듬직한 남자로 성장한 것인가?

아들은 여덟살 나던 해 나의 손에 끌려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기대에 부풀어 한국땅에 내렸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애 아빠의 코구멍만한 회사기숙사였다. 한 여름에는 작고 낡아 빠진 벽거리에어컨에 의지해서 더위를 식혀야했다. 저녁이 되면 집안이 불가마 같아 잠을 이룰수 없어 아들애를 데리고 근처 개천에 나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아들은 한국 오기전 넓은 거실에서 자전거를 타던 일을 생각하면서 자꾸 큰 집에 돌아가자고 졸랐다. 

그렇게 방학간에 아들한테 한국어를 좀 배워주고 나니 개학할 때가 되였다. 나는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서 홀로 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월세방 원룸을 맡았다. 아들을 근처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아들이 학교생활에 적응 하는걸 보면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는데 남편 혼자 월급으로는 세식구가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여 나는 친구의 소개로 중국어방문수업을 다니며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다. 아들한테는 대중교통 타는법 알려주고 폴더폰에 교통카드 하나 목에 걸어주고 왕복 2시간거리를 혼자 다니게 했다. 사실 집에서 학교까지는 셔틀버스도 있었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면서 아들 저녁밥까지 챙겨놔야했는데 전자렌지도 없어서 보온병에 밥과 반찬을 넣어두었다. 수업이 끝나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아들은 숙제를 하다 말고 학교 갈때 옷차림 그대로 이불도 펴지 않은 채로 몸을 움츠리고 잠들어있군 했다. 보온병에 반찬은 그대로일 때가 많았다. 

‘중국에 있었으면 아들은 아직도 응석 부리며 매일 내 품에서 잠들었을 텐데… 내가 끼니마다 해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학교 다녔을 텐데…’ 
엄마가 집에 돌아온것도 모르고 잠에 푹 빠진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느라면 그런 날은 이런 저런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군 했다.학교가는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타야 하니 아들은 늘 잠이 부족해서 하학해 집에 돌아오는 버스에서 잠들어버리군했다.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을 지금 생각해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군 한다. 

그날은 오전부터 날이 흐리고 눈꽃이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수업하러 들어갈 땐 핸드폰을 무음상태에 놓고 수업이 끝나서야 핸드폰을 확인한다. 그날도 점심때부터 시작된 수업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몇 군데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밖은 새까맣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들한테서 수십통의 전화가 걸려와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참에야 아들은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울면서 집 못 찾아 오래동안 밖에서 헤매고 있다고 했다. 한국어도 서툴러 주위에 도움요청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일단 아들을 진정시키며 방법을 찾아야했다. 아들은 한국어은 서툴러도 방학에 한국글자는 배웠기에 글자는 알아봤다. 그래서 일단 근처에서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을 찾으라고 했다.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이름을 알려주면 엄마가 제일 빠른 속도로 찾아갈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기다리라 했다. 아들은 한창 걸어서야 전철역을 찾았다고 했다. 전철역이름을 듣는 수간 나는 길옆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 같으면 돈이 아까워 택시 탈생각을 하지못하는 내가 아들한테 빨리 가기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그 날따라 수업도 다 취소하고 아들한테로 가는 길이 어찌나 조바심이 나게 길던지. 

드디어 전철역에 도착했다. 역안으로 정신없이 뛰여갔다. 먼곳에서부터 입구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들이 보였다. 아들 이름을 불렀다. 아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고 한걸음에 뛰여와 내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아들을 껴안고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아들은 나의 품에서 한참 서럽게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그제야 눈물 닦아주려고 보니 겨울 패딩은 다 벌어져 있고 바지는 내려와서 그 추운 날씨에 배가 훤히 보였으며 신발은 눈에 푹 젖어 있고 가방은 질질 끌고 다녀 볼모양이 없게 되였다.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엿는데 새까만 손으로 문질러서 알락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웃음이 빵 터졌다. 아들은 영문도 모른채 따라 웃었다. 그제야 아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역을 나오니 바로 앞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있었다. 아들은 그때까지도 그런 곳에 못 들어가봤다. 나는 큰마음 먹고 아들애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래도 아들한텐 파스타 한 접시 시켜주었다.나는 밑반찬만 좀 집네하다가 집에 와서  물에 밥을 말아 김치를 곁들어 먹고 나서야 허기진 배를 달랠수 있었다. 그후로도 아들은 종종 버스에서 잠들었지만 어떻게든 집을 찾아왔다.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집 찾는 방법을 알게 된것이다. 아들은 스스로 많은일을 하게 되면서 독립성을 키워갔고 혼자서  점점 많은 일을 잘해가고 있었다. 과외도 안 시켰는데 공부도 제법 잘해서 상도 타오고 말하기 대회도 나가 1 등도 하고 학급에서 반장도 하면서 너무나 씩씩하고 훌륭하게 커갔다. 그 덕에 우리 부부도 열심히 일하였고  지금은 살림집도 마련해놓고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어느덧 아들은  커서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다. 갑자기 아들이 너무 보고싶어졌다. 온몸에 힘이 생기는것 같았다. 뛰다싶이 한참을 걸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도 사람이 많아 한참 찾아서야 의자에 앉아 땀을 닦으며 쉬고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너무 반가웠다. 오래만에 아들을 보는것 같았 다. 아들도 나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내 손에 빨간색케이스를 쥐여주며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 하였다. 완주한 아들이 기특해서 엄마가 선물해줘도 모자랄판에 오히려 선물을 받다니.나는 빨간색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빨간뚜껑의 예쁜 쿠션이 있었다. 알고보니 100 명안에 들고 싶었던 이유가 이것때문이였다. 작은 쿠션 하나지만 무겁게 느껴졌다. 이 작은 케이스 안에 아들의 얼마나 많은 노력과 따뜻한 마음이 쌓여있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아들을 와락 껴안았다. 아들한테 고맙다고 했다. 귀가 길에  아들애의 걸음이 이상했서보니 발에 물집이 생겼던것이다. 그래도 선물 탔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 아직도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거리 걷기대회 참석하고 나서 아들은 마음을 다잡고 시험준비에 들어갔다. 하루에 몇시간식 쪽잠을  자며 공부 하면서도 힘든 내색 한번 내지 않았다. 고생끝에 낙에 온다고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한국의 모 명문대에 입학했다. 첫 학기엔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도 힘들 텐데 주말에도 집에 오지 않고 공부하더니 그렇게 받기 힘들다는 최우수성적을 따낸 학생한테 주는 장학금을 따냈다.

책가방을 메고 대학교 교문을 들어가는 아들의 뒤모습은 너무나 단단하고 듬직해 보였다. 예전 8 살때 모습은 찾아 볼수 없이 진정한 사나이가 되였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것도 있는 법인가 보다. 이국땅에서 돈 버느라 아들한테 많은 시간을 할인해 주지 못한 바람에  아들은 많은 일을 자기 스스로 해야만 했는데 그러다보니 아들은 또래친구들보다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들은 공부도 공부겠지만 독립정신과 배려심을 키우게 되였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가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생경험을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의 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며 바르게 성장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아들의 커다란 뒤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지난  세월 감내해온 힘겨움과 서러움들이 내 삶의 밑거름이 되여 밝은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십여년 그 세월의 중간에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우리 모자는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었다.힘든 세월이였지만 삶의 보람을 가져다준 아들한테 고맙기만 하다.


엄분자 프로필 
•1975년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출생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교사 출신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흑룡강신문>에 첫 수필 <다시 떠날 수 없는 교단> 발표 
•여러 중국 문학지에 다수 교원수기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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