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희 경희대학교 박사과정

돌봄이 하나의 직업으로 인식되었던 것은 언제부터일까. 사람을 돌보는 일은 전통적으로는 가사노동의 범주와 연결된 것으로 여성적이며 비경제적이며 경쟁적인 가치와는 상반되는 개념이었다. 한국의 경우, 2008년 “사회적 효”를 실천하기 위한 “돌봄의 사회화” 제도를 도입하며 요양보호사를 직종으로 신설하였다. 이에 따라 가족 안에서 논의되던 돌봄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넓혀지면서 인식의 확장을 불러왔다.

한편, 2008년의 통계에 따르면, 노인 요양병원 직원 중 외국인은 5%의 수치에 달하며, 이들 대부분은 조선족이라고 한다. 조선족은 다양한 직종 및 계층에 존재하지만, 그중 많은 조선족 여성들은 돌봄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조선족에게만 한정되는 현상은 아니다. 세계적인 이주의 여성화 현상,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이 돌봄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적 창출을 위한 것이라는 점 등을 상기한다면, 돌봄에 대한 위의 전통적 인식인 비경제적이라던가, 비경쟁적이라는 등의 가치적 관점은 한낱 옛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봄은 여전히 ‘여성적’이지 않는가.

이러한 시선이라고 해야 할까,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 이데올로기라고 해야 할까, 단어 선택은 잠시 차치해두고, 최근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선족 여성의 재현에 주목해보기로 한다. 2022년 11월에 개봉한 첫 번째 아이(감독 허정재)에서는 출산 휴가를 끝낸 정아(박하선 역)가 회사로 복직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과 육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정아는 출근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를 돌봐줄 베이비시터를 찾던 중 화자(오민애 역)라는 조선족 여성을 만나게 된다. 정아는 화자가 조선족인 것을 알고 망설이지만, 자녀가 없다고 하는 화자가 아이를 능숙하게 다루고 또 아이가 잘 따르니, 화자를 믿고 맡기기로 한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도 잠시, 화자는 아이와 함께 온종일 사라진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와 함께 돌아온 화자에게 정아는 화를 내면서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한다. 얼마 후 화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과 그날의 사정에 대해서 알게 된다. 워킹맘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정아는 화자를 찾아가 사과의 뜻을 전하면서 같은 처지를 운운하지만, 화자는 정아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정아의 마음과 돈봉투를 거절한다. 영화는 돈으로 전달할 수 없는 마음과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비꼬듯이 보여준다. 육아의 문제를 전적으로 정아의 몫으로 돌리는 그녀의 남편과는 다르게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화자의 남편을 보고 정아는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이 두 가정에서 젠더적 문제는 눈여겨볼 만하다. 버틀러에 따른다면, 주체는 법과 규범을 반복적으로 실천하는 수행자로 그 수행성에 따라 젠더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즉, 남성적 혹은 여성적으로 정형화된 어떤 행위들을 반복함으로써 젠더를 구성한다. 화자의 집에서 화자는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그 남편은 ‘아내’ 또는 ‘엄마’라는 역할의 빈자리를 대신 메꾸기 위해 여성화된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 정아의 가정 공간에서는 화자의 역할이 여성적이지만, 화자의 가정 공간에서는 오히려 화자가 남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이를 통해 행위적인 젠더 각본을 교란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 영화와 같이 조선족 여성과 돌봄은 젠더 문제와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장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 <미씽:사라진 여자>(이언희 감독, 2016)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비록 비중은 아주 작지만, 드라마 질투의 화신(2016)에도 조선족 여성 리홍단(서은수 역)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상남자로 살고 싶었던 주인공 화신()이 남성성을 제거당하는 과정에서 타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을 통해 타자에 대한 편견 대신 사랑을 이야기한다.

리홍단이라는 인물이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 역시 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표나리(공효진 역)의 새엄마인 리홍단은 거의 모두의 엄마 역할을 자처하면서 누구 하나 빠짐없이 끔찍이 끼니와 건강을 챙긴다. 이처럼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이 드라마에서 조선족 여성인 리홍단의 역할은 단지 타자인 조선족이나 새엄마에 대한 편견을 나타내기 위함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가족과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은 분명하나, 이들이 놓치고 있는 문제 역시 피할 수 없다. 미셸과 팽은 돌봄 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 중 한국은 순혈주의의 뿌리가 깊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관계로 인종적 타자의 돌봄 시장 진입을 막는 방책으로 동포를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타자를 향한 연대의식을 나타내는 조선족과 돌봄의 영화적 재현이 역으로 그 불가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영화와 드라마가 쏘아 올린 공이 허공에 던져진 것은 아닐 것이다.

최언희 프로필 

1991년 생,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현대소설 박사 재학 중. 
재한동포문학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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