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핸드폰 명단에는 이름 대신 지기로 된 번호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전화번호이고 또 하나는 한국 전화번호인데 두 개 다 김봉숙 교장님의 것입니다.

할빈에 있을 때였습니다. 김봉숙 교장님이 감기 몸살로 전화요금 대신 내달라 해서 해드리고 전화하니 집 전화도 핸드폰도 받지 않아 불안안 마음에 달려갔더니 채소랑 과일 사 들고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핸드폰을 안 갖고 내려와서 나를 놀라게 하는가..."라고 투정 부렸더니 "명화야, 미안하다. 네가 보고 싶고 또 네가 끓인 된장찌개 먹고 싶어서 채소 사러 내려왔는데 깜박했구나."하시면서 안아주셨습니다.

내가 전화 몇 통이나 했는지 아는가 하고 핸드폰을 보여드렸더니 "뭐야? 내 이름 지기로 저장했어? 고마워, 이 늙은이를 지기라고 생각해 줘서"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네! 그래요 (지기) 교장님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아프지 마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 대충 드시면 안돼요. 연세도 있어 저항력도 약하고 면역력도 없는데..." 귀 아플 정도로 잔소리하는데도 그냥 웃으시면서 "그래 명화야, 너 된장찌개 정말 맛있게 끓였다. 고마워. 요즈음 밥맛 없고 온몸이 쑤시고 아프고 힘없었는데 같이 밥 먹으니 맛있고 기분 좋구나." 라고 하셔서 환하게 웃었습니다. 

늘, 항상, 그냥, 이유 없이 즐겁게 기다리고 행복하게 뜨는 그 지기 전화번호 두 개는 이젠 영원히 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길에서 "지기는 정말 아주 중요하다."는 도리를 당신이 돌아간 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땐 진심으로 좋아해 주고 축복해 주며, 또 외로울 땐 친구해 주며, 힘들 때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곤 했습니다. 공개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일은 지켜주며 서로 같이 고민하고 충고해주고 해결하곤 했습니다. 

교장님과 나는 그런 친형제보다 더 소중한 사이였습니다. 친척 하 나 없는 할빈 아성구에 이사 와서 나이 차이도 큰데 유별나게 마음이 통하고 또한 취미 생활도 같은 것이 많아 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교장님은 능력도 있고 자존심도 강하셔서 친구들이나 동료들 앞에서는 언제나 두 어깨에 힘을 주고 음성도 한 톤 높으시게 말씀하셨는데 나한테는 언제나 온화하고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다 신문이나 방송에 내가 쓴 글이 발표 되면 나 보다 더 기뻐하시며 축하해 주셔서 고마움에 원고료로 빨간 속옷과 내의를 세트로 사서 같이 입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흑룡강성 한글학과 글짓기 우수지도상을 받았을 때도 나보다 더 기뻐하시며 엄마처럼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니셔서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새로운 엔돌핀이 되어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기분도 배로 커져 교장님을 모시고 근사한 맛집에서 맥주 한 잔 기울이면서 기쁨을 같이 나누었습니다.

옷도 나와 같은 걸로 입기 좋아하고 멋 부리기 좋아해서 옷 살 때면 가끔 사드렸을 뿐인데 어찌 당신이 나한테 주는 관심과 배려, 사랑에 비기겠습니까? 나는 친정엄마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후 엄마 같은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 걱정과 관심, 배려와 사랑 감사하고 고마워서 당신한테 더 잘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강해 보이지만 외로움을 엄청 많이 타시는 교장님과 외로움을 같이 나누면서 친구 해드린 것뿐이었습니다. 교장님은 저의 남편이 49살 때 갑자기 뇌출혈이 온 후 학교에 출근도 못 하고 이유 없이 심술부리고 저를 괴롭히며 스트레스 주어 우울증이 올 것 같아서 아무에게나 화풀이하고 싶었지만, 힘들다는 말을 누구한테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당신한테만 남편 흉도 보고 욕도 할 수 있어서 고마웠고, 위로와 충고를 받고 힐링할 수 있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항상 저를 정 깊게 지켜보고 있어서 힘이 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담론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가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었고, 아들이 사춘기 때 속 썩여 교장님을 찾아가 소리 내어 울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열심히 돈 벌어 해변 도시 산동성 청도시에 집을 사서 세놓고 있었는데 남편의 청도시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해서 할빈검교학원 선생을 미련 없이 그만두고 이사 가게 되었는데 교장님은 너무 서운해하시면서 "명화야, 네가 이사 가면 나는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 "나도 교장님 옆에서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렇게 나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시고 이뻐해 주시는 교장님이 정말 고맙고 마음이 짠해서 교장님을 안고 소리 내 울었습니다. "청도에 놀러 오세요" "그래, 꼭 놀러 갈 거다." "거기 가서도 잘 살아라." 자식들이나 동료 선생님들 앞에서는 그렇게도 강하신 교장님은 내 앞에서 그렇게도 나약하셨고 어린아이처럼 잘도 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도로 이사 간 이듬해 여름, "명화야, 나 네가 보고 싶어서 청도 갈 거다. 네가 어떤 집에서 사는지도 보고 싶기도 하고.." 나는 또 한 번 큰 감동을 하였습니다. 고마워서 "신분증 번호를 불러주세요. 비행기표 사 드리겠습니다."고 했더니 오히려 당신이 고맙다고 더 좋아하셨습니다.

그립던 회포를 나누면서 청도 맥주도 한잔하고, 예쁜 잔에 내가 담근 포도주도 마시고, 교장님의 손을 잡고 팔짱도 끼고, 바다 구경에 배도 타고 공원 놀이도 하면서 즐겁고 정다운 모습 렌즈에 담아 찰깍찰깍 사진을 찍으면서 신나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명화야, 우리 수영이도 한국에서 좋은 집을 사서 살고 너도 바다가 있고 산도 있고 기후도 좋은 청도에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이제 우리 광이만 한국에서 집을 사면 되겠는데..."라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또 울고 말았습니다.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 부족한 나를 당신은 자기 자식처럼 생각해 주셨습니다.

할빈에 돌아가는 날에는 내가 사드린 비행기표 값을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탁자 밑에 두고 가셨습니다. 그렇게 내 성의를 무시하고 되느냐고 화나서 전화로 소리소리 지르는 나한테 당신은 "명화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퇴직금도 많이 나오고 네가 아들의 유학 뒷바라지하느라 그렇게 열심히 살고 너의 신랑도 아프고 또한 이 늙은이 도움도 없이 와서 네가 회사에 휴가도 내고 가정교사, 학원 수업도 못 나가고 아무튼 그 돈은 비행기표 값 아니고 예쁜 옷 사 입어라고 주는 돈이다. 그러니 그만 소리 질러라, 귀 아프다." 하셔서 나와 당신은 그만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청도시에 직접 와 살아 보니 별로였던지 남편이 또 할빈에 돌아가겠다고 고집부려서 할빈에다 사 놓고 온 집을 인테리어 하러 가야한다고 하니까 당신은 "명화야, 그러면 우리 집에 있으면서 해라. 네가 할빈에 와서 살면 나도 곧 중국에 들어갈거다..." 한국에 가 있던 당신은 좋아하셨고 나도 덕분에 마음 편하게 교장님네 집에 있으면서 인테리어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한번은 작은 언니가 할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엄청 추운 동지섣달이었습니다. 내가 출근하며 언니 간호에 밥까지 해서 가져다 주느라 마음도 몸도 여러 가지로 힘들어 몇 주 교장님 보러 못 갔더니 하루는 전화 와서 "몇시에 집에 도착 하니?  역까지 마중나갈께"라고 했다. "추우신데 나오지 말아요. 내가 요즘 정신없어서 가보지 못해서 미안해요."  "미안하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리 알라."고 하시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성 역에 도착하니 당신은 손녀 찬이와 같이 " 명화야! 추운데 고생한다. 배고프지?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가라, 네가 좋아하는 두리안도 샀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울고 말았습니다. "추운데 찬이까지 데리고..." "야, 찬이도 네가 보고 싶다고 요즘은 명화 이모 어째 안 오는가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나를 울보라고 하더니, 너 나보다 더 울보이면서 야, 그만해라 사람들이 본다." 누가 보고 싶다고 기다리고 찾아주는 것이 그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나는 당신한테서 느끼고 배웠습니다.

나는 두리안을 좋아하지만, 까다로운 남편이 냄새 난다고 싫어해서 먹고 싶어도 집에서 먹지 않는데 당신의 특별한 배려로 찬이랑 셋이 맛있게 두리안 한 통 다 먹고 청국장에다 밥도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시간으로 힐링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고 지쳐있는 나한테 힘이 되여주시느라 추운데 나와 같이 언니 병문안도 가 주셨습니다. 감사하고 잊지 못할 사연들이 왜 이렇게도 많은지... 

생로병사라 하지만 내 가슴에 사랑으로 가득 찬 당신의 이런저런 모습들이 자꾸자꾸 생각나서 이렇게 필을 들고 그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교장님이 칠순 고희연 때 "명화야, 혹시 한국에 올 수 있나?" 사회적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으시고 또한 우수한 제자들도 많으신 교장님이라 당신의 고희연을 진행할 사회사를 쓰고 읽어주실 분들이 많겠는데도 "명화야, 네가 오면 사회사를 쓰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며 배려해 주시는 당신의 전화 한 통에 밤새 흥분되어 잠 못 잤습니다. 고희연 날짜가 앞당겨 지는 바람에 그날에 갈 수가 없어 서운했지만 그래도 보고 싶어 늦게라도 축하드리고 싶어서 간다고 했더니 "명화야, 이미 지나갔는데 회사 휴가 청구 내지 말고 오지 마라."고 하셨지요. 정작 한국에 도착하니 내 손 꼭 잡고 포옹해 주시며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로 웃으시면서 세수하셨습니다. 

작년에는 전화할 때마다 아들 집에 와서 손주 봐주고 있는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나 보러 오고 싶은데 코로나 때문에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날이 발전 해가는 이렇게 살기 좋은 세월에 퇴직금도 많이 나오고 가정에서나 친척 동료 제자 또한 많은 사람한테도 알게 모르게 힘이 되여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당신인데 좀 더 사시다 가시지.

돌아가시는 전날 3월 13일 새벽, 꿈에는 내가 좋아하고 이쁘고 필요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손거울이 스르르 떨어지면서 깨져 너무나 아깝고 놀라서 "어머" 하고 눈 떴는데 이튿날에 수영이한테서 당신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날아왔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김명화도 당신이 너무너무 보고싶어서 오늘 밤에는 단필에 이 글을 썼습니다.

당신과 같이 보낸 26년이란 시간이 감동의 기나긴 장편 드라마처럼 감사하게 나를 울립니다.

잘 살게요. 건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코로나 끝나면 언젠가 꼭 당신 보러 한국에 날아 갈거예요. 당신이 좋아하는 꽃 사들고.

잠 오지 않는 밤

아들 집에서 

김명화 프로필 

흑룡강성 동녕시 출생. 퇴직교원. 흑룡강성 조선말방송에 수필 우수상. "아동문학샘터"에 시와 수필발표. 동북삼성 한국어학과 한글짓기 우수지도상 등 수상. 논년세계잡지에 수필 발표. 한국 KBS라디오 방송에 수필 통신 다수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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