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설대목이 되면 연변대학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정판룡교수의 부인 왕유녀사를 찾아뵙게 된다. 왕유(王瑜,1934- )여사는 강소성 상해 태생이요, 1950년대 중반 쏘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로씨야언어문학학원에서 유학할 때 정판룡교수를 만나 1959년에 결혼했다. 그는 상해나 북경의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고 남편을 따라 연변에 왔고 평생 연변대학에서 로씨야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정판룡교수가 서거한지도 어언 20년, 하지만 왕유녀사는 미수(米寿)를 바라보는 오늘까지 여전히 정판룡교수의 서재를 지키고 있다. 서재에는 정판룡교수의 많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정판룡교수와 왕유교수 내외에 대해서는 필자가 <정판룡교수의 사랑>, <한 그루 무궁화> 등 적잖은 글들을 발표했기에 오늘은 데카브리스트와 그 안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얼마 전 길림신문사의 취재를 받을 때도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왕유녀사를 뵐 때마다 이분이야말로 “연변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데카브리스트와 그 아내들의 이야기는 정판룡교수 생전에 여러 차례 들은 적 있고 바이두나 네이버와 같은 사이트들에서도 검색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이르크추크부터 소개해야 이야기가 풀릴 것 같다. 

이르쿠츠크라 하면 로씨야 동남쪽, 바이칼호 서쪽에 있는 상공업 도시이다. 말하자면 몽골공화국 수도 울란바또르 북쪽의 로씨야 경내에 있는데 동(东)시베리아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데, “씨베리아의 빠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르쿠츠크에 있는 나멘스키 수도원에는 데카브리스트(12月党人)와 그 안해들이 묻혀있다.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을 뜻하는 로씨야어 “데카브르'(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란 1825년 12월14일 알렉산드르 1세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 당일 새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씨베리아로 류배되였던 귀족혁명가들을 말한다.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는  19세기 로씨야 제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기를 시도한 보기 드문 운동인데, 그 후로 끊임없이 진행되는 로씨야개혁운동의 시발점으로 되였다. 하기에 레닌은 그들을 “귀족혁명가”라고 불렀고 “그들의 사업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의  묘비들은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들의 불꽃같은 삶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그 안해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내조와 순애보(殉爱谱)는 참된 애정의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귀족 신분의 청년장교들이 주축이 된 데카브리스트들은 나폴레옹황제 치하의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로씨야 병사들을 통해 민중의 애국심과 잠재력을 깨닫게 되였다. 또한 왕정(王政)을 무너뜨린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국민의 주권을 토대로 한 서구 계몽사조의 세례를 받았고 공화정(共和政)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직과 준비가 충분치 않았고 사령관을 맡기로 했던 사람이 도망치는 바람에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는 짜리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1826년 파벨 페스텔 등 5명의 지도자들이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고 120여 명의 혁명가들이 씨베리아로 류형살이(流刑)를 가게 되였다.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는 실패하였지만 로씨야황제의 유린을 받을 대로 받은 로씨야 민중들을 깊은 잠에서 깨여났고 광활한 로씨야대지에 자유와 민주의 씨앗이 뿌려졌다.   

데카브리스트의 봉기가 실패한 후 니콜라이1세는 그들의 안해들이 “죄범”인 남편들과 철저히 관계를 끊게 하기 위해 귀족은 리혼하지 못한다는 법률을 고쳤다. 데카브리스트의 안해들이 리혼을 제출하면 법원에서는 즉각 비준하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절대 다수 데카브리스트의 안해들은 남편의 뒤를 따라 씨베리아로 가서 류형살이를 하겠다고 견결히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을 무시할 수 없어 니콜라이1세는 그녀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잇달아 긴급법령을 공포해가지고 그녀들의 수족을 묶어놓으려고 했다. 남편을 따라 씨베리아로 갈 경우에는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며,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며, 귀족의 특권을 영원히 취소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령은 우아하고 고귀한 녀인들이 어린 자식과 일가친척들, 화려한 궁전을 떠나야 하며 그제날의 부귀영화와 고별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씨베리아에 류배당한 데카브리스트와 그 안해들은 이전의 귀족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프랑스어 기반의 사고체계를 버리고 로씨야어로 모든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18세기의 화려한 귀족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하인들도 없어졌다. 그녀들은 직접 빨래를 하고 청소를 했으며, 직접 빵을 굽고 식사준비를 했다. 남편과 함께 밭을 일구고 목공작업을 해서 손수 가구를 만들었다. 프랑스풍의 취미는 불가능했으며 흑빵과 양배추 스프를 직접 만들어 먹으며 보통 로씨야인들처럼 살았다. 물론 가정교사도 둘 수 없었다. 그들은 직접 아이들을 훈육하고 가르쳤다. 그녀들의 자식들은 그곳의 아이들과 똑같이 “로씨야식”으로 성장했다.

나멘스키 수도원에는 세르게이 공작(1790~1860)의 안해가 세 딸과 함께 묻혀있다. 세르게이는 데카브리스트의 봉기 당시 황실 근위대 장교였다. 봉기가 실패한 뒤 그 역시 시베리아로 류배되였다. 남편과 리혼한 뒤 재혼해서 귀족의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귀족 신분과 특권, 재산을 모두 박탈당한 채 시베리아로 가서 류배된 남편의 뒤바라지를 해야 하느냐? 세르게이의 아내 예까제리나는 고난의 씨베리아를 선택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씨베리아로 갔는데 그 당시 26살이였다. 그녀가 모스크바를 거치게 되자 현지인들은 그녀를 위해 성대한 송별연회을 차렸다. 일찍 그녀를 사모했던 뿌쉬낀도 그 자리에 있었다. 뿌쉬낀은 <볼따바>라는 장시에서 예까제리나를 두고 “씨베리아 황량한 들판에서/ 그대가 남긴 마지막 목소리/ 내 진귀한 보배요, 신성한 선물이며/ 내 마음 속의 유일한 사랑의 꿈이여라” 하고 노래하였다.

뿌쉬낀은 또 자기가 사모하던 뽈꼰스까야가 남편을 따라 씨베리아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깊이 감동되여 <씨베리아로>라는 시를 썼다. 원래 이 시를 볼꼰스까야에게 부탁해 씨베리아로 보내려고 했으나 미처 다 쓰지 못해서 1827년 1월 초에 남편과 함께 떠나는 무라위요바의 인편에 보냈다. 당시 이 시는 수사본으로 널리 유포되었다.  

“씨비리의 광산 벽지일망정/ 자랑 높은 견인성 고이 간직하라/ 그대들이 지닌 숭고한 지향과/ 고달픈 로역은 헛되지 않으리// 불행 속의 충실한 벗 희망은/ 어둡고 습기 찬 갱 속에서도/ 용기와 즐거움을 깨우쳐주리/ 그리고 기다리던 때는 돌아와//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을 찾아/ 검은 옥문 깨고 미쳐가리라/ 그대들이 갇힌 감방 속으로/ 자유의 내 목소리 울려가듯이// 무거운 철쇄들이 끊겨나가고/ 옥문이 부서질 때 문어구에서/ 자유는 그대들을 반가이 맞고/ 형제들은 장검을 들려 주리라.

남편을 찾아 씨베리아로 간 다른 녀성 예까제리나를 보기로 하자. 그녀는 남편과 상봉하던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세르게이는 나한테 덮치듯이 달려왔다. 옷은 람루했고 봉두란발에 얼굴은 먼지투성이였다. 족쇄가 절그렁거리는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고귀한 두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니? 이렇게 무서운 감금생활을 하다니? 나는 금세 그가 얼마나 무서운 고통과 굴욕을 당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목에 걸린 족쇄에 입을 맞추고 나서 그의 몸에 키스를 하였다…” 

이 글은 로씨야의 다른 저명한 시인 네크라소프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나는 그의 앞에 풀썩 무릎을 꿇고/ 내 남편을 포옹하기에 앞서/ 그의 족쇄에 입을 맞추었네 !…/ 순간 수런거리던 말소리도, 우르르 쿵쾅 작업하던 소리도/ 모든 움직임도 멈추어 버렸네/ 주변의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두 눈에 눈물이 글썽해졌네/ 사면에 둘러선 사람들/ 그 창백하고 엄숙한 얼굴에 격동의 파도 일고…/ 마치도 모든 사람들이 우리 둘과 같이/ 상봉의 기쁨과 고통을 나누어 가지는 것 같았네!/ 오, 신성하고 신비로운 고요함이여!/ 그 고요함 속에 얼마나 큰 근심과 슬픔/ 또 얼마나 장엄한 사상이 넘치고 있는가…”

이때로부터 족쇄와 수갑에 입을 맞추는 것은 로씨야적인 애정의 상징으로 되였다. 인류의 애정은 이러한 랭혹하고 차디찬 족쇄와 수갑 때문에 더더욱 거룩하고 순결한 것으로 되였다. 예까제리나는 시베리아에서 28년을 보낸 뒤 남편이 사면을 받기 두해 전에 숨졌다. 그녀의 묘비에는 지금도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는 련인과 신혼부부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리예브나는 제정 로씨야 당국과 한달 동안 싸워서야 류배살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의 남편 무라비요프는 옥중에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이, 우리 둘이 결혼한 후 나는 이번 봉기를 내놓고는 그 어떤 일도 그대에게 감춘 일이 없다네. 나는 여러 번이나 이 상서롭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그대가 놀라서 잠을 이루지 못할가봐 끝내 말하지 못했다네… 나는 그대에게 놀라움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지. 나의 천사여, 내가 그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빌 터이나 제말 용서해 주시게.”

무라비요프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안해인 무라비요와는 그 해에 21살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세번째 아기를 임신하고 있었다. 남편의 편지를 받은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남편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에게 제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당신은 나에게 용서를 받을 게 없어요. 당신에게 시집을 간지 3년이 되였는데 저는 마치 천당에서 사는 것 같았어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저의 근심은 하지도 마세요. 저는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요. 저를 죄수의 안해로 만들었다고 당신은 자신을 질책하고 있다고 했지요. 하지만 저는 이 세상의 모든 녀성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녀성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기다려 주세요. 저에게는 당신의 눈물과 미소의 절반을 가질 권리가 있어요. 저의 몫을 저에게 주세요. 저는 당신의 안해이기 때문이에요.”

마침내 무라비요프는 모스크바에서 달려온 안해를 만났다. 북풍한설을 맞받아 달려온 안해는 여전히 화장을 했고 의상이 호화로왔다. 아릿답고 요염하면서도 얌전했다. 시원시원하면서도 부드러운 일거수일투족은 얼마나 당당한지 몰랐다. 순결한 애정을 상징하는 별모양의 작은 꽃이 머리에 꽂혀 있어서 더더욱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무라비요프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 그대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해. 나와 함께 이 곳에서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어.” 
그러자 그의 아내는 “우리 둘의 애정을 위해 저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해요. 다 가져가라고 해요, 명예와 지위, 부귀영화와 목숨까지도!” 하고 도박또박 말하는데 그녀의 새하얀 얼굴에 살짝 홍조가 비꼈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가 씨베리아에 온 몇 달 사이에 아들애가 요절했다는 흉보가 날아왔다. 얼마 후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씨베리아에서 낳은 아이 둘도 악렬한 기후 때문에 몸이 허약하고 병에 자주 걸렸다.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모스크바에 두고 온 두 딸애도 만성병에 걸렸다. 두 딸애를 지켜주지 못하는 일을 두고 그녀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슬피 울었다.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어머니, 저도 늙었어요. 이제는 어머니의 ‘귀여운 아가씨’가 아니에요. 저의 머리가 백발이 된 걸 어머니는 모르실 겁니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

마침내 그녀가 죽자 그 해에 36살 되던 그의 남편은 하루 밤 사이에 호호백발의 로인이 되고 말았다. 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중에서 제일 온화하고 유순한 무라비요프의 안해가 첫 희생자가 되였다. 그녀의 림종은 아주 비참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는데 두 눈에서 나오는 눈물이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나중에 그녀는 조용히 잠든 딸애의 얼굴에 키스를 하고 나서 눈을 감았다. 

데카브리스트들 중에는 일찍 프랑스에 가서 류학한 적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씨베리아에 류배된 그들의 안해들 중에는 프랑스녀성도 적지 않았다. 그녀들은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 프랑스녀성의 랑만적이면서도 섬세한 마음씨로 거치른 씨베리아 벌판에 눈부신 사랑의 꽃을 피웠다.  

프랑스의 아가씨 단띠는 빠리에 있었는데 옛날의 련인 이와세프가 씨베리아로 류배당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번개같이 로씨야로 달려갔다. 그녀는 당국을 찾아가서 씨베리아로 가서 련인과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당국에서는 이를 결정할 수 없어 로씨야황제에게 보고했다. 니콜라이 1세는 씨베리아에 가면 모든것을 잃게 될 것이며 지어는 로씨야 녀인들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히 사랑하는 사람의 뒤를 따라 씨베리아로 달려갔다. 니콜라이1세는 버럭 화를 냈지만 이 프랑스 아가씨의 견정불이한 애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띠가 씨베리아로 찾아갔을 때 현지의 관원들은 황제의 명령을 구실로 련인인 이와세프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류배된 범인들로 들끓는 작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련인의 소식을 물었다. 어느 날 험상궂게 생긴 강도와 맞딱뜨리게 되였는데 이 강도조차 그녀의 정신에 감동되여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끝끝내 이와세프에게 단띠의 소식을 전했다. 마침내 단띠는 허가증을 손에 쥐고 이와세브와 결혼하게 되였다. 그녀는 길고도 험난한 고역을 치르었지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몇년 후 고역을 영구류배로 바꾸자 조금은 살기 좋아졌으나 열악한 기후와 어려운 생활은 단띠를 끝내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남편도 1년 후에 죽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나라에서 나서 자란 두 청춘남녀는 씨베리아의 거친 들판에 나란히 묻혔다. 

프랑스의 의류디자이너였던 가이베리의 혼례는 후바이칼호지역에 있는 감옥 안에서 거행되였다. 그의 남편인 안닝코프는 전도가 유망한 귀족군관이였다. 안닝코프가 감옥에 들어간 후 가이베리는 니콜라이1세를 보고 씨비리에 가서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그 당시 니콜라이1세의 기분이 좋았는지, 그녀의 청구는 쉽게 비준되었다.

가혹한 환경, 숨 막히는 생활로 우울하게 지내던 청년군관 와씰리 이반소프는 감옥에서 탈출하려 하였다. 그는 더는 감옥에서 살 수 없어 “이렇게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했다. 그가 이처럼 비관실망해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려고 할 때 가정교사로 일하던 프랑스 아가씨 유드밀라 레단쥬가 보낸 구혼의 편지를 받게 되였다. 그들은 정조와 흥취가 같았으며 서로 상대를 존경하였다. 그런데 둘의 부동한 사회지위는 애정의 길을 가로 막았다. 이반소프는 순결한 프랑스 아가씨에게 련루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드밀라 레단쥬는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곁으로 찾아온 것이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은 씨베리아의 거치른 들판에 영원한 기념비로 솟아 있다. 그녀들의 몸에서 빛나는 인간적 미는 시공을 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을 떠난 영웅을 노래하고 그들을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 대신 인간성 가운데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질박하고 가장 진실한 것에 대해서는 홀시한다. 그 결과 인간적인 원래의 모습은 오히려 눈부신 후광(光环)의 그림자로 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시경》에서는 “죽거나 살거나 만나거나 헤여지거나/ 그대와 함께 하고자 언약했네/ 그대 손을 잡고서/ 그대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하리니” 라고 노래했다. 진지한 감정은 이처럼 소박하고 진실한 법이다. 데카브리스트의 안해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세상을 하직한 이완노브야의 말을 들어보자.

“시인들은 우리를 영웅으로 찬송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어찌 녀성영웅일 수 있겠어요? 우리는 다만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왔을 뿐이에요…”
각설하고 며칠 전 왕유녀사를 찾아뵙고 돌아와 쓴 <사모님>이라는 시조로 이 글을 끝맺어야 하겠다.
 
데카브리스트들 그 아내들의 동상이
동토의 땅 씨비리에 있다고 하더라
짜리황제 뒤엎으려 총검 들고 나섰다가
씨베리아 벽지에 추방당한 남아들
호화로운 생활도 귀족의 명예도
저리 가라 멀리 하고 따라나선 녀인들 
30년 긴긴 세월 남편을 지켜주고
교육과 봉사로 광야의 별 되었네
부쉬낀과 레닌도 찬미했던 그대들
오늘은 연변대학 아파트에 산다네
정판룡을 따라 와서 연변을 밝혀준
동방의 미인이요 로씨야어 교수라네
오늘도 
남편과 마주앉아 이야기꽃 피우네 

-2020.12.31, 왕유교수님 댁을 찾아 뵙고     

김호웅 프로필

연변대학교 조한문학원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 작가협회 회원.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소장 
문과 학술위원회 주석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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