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철 (경제학박사, 여행 작가, 서울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 본지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이남철 본지 객원논설위원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이주시킬 ‘소련인민위원회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1937년 8월 21일 나온 후 1937년 가을, 약17만 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이 강제이주는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예방책으로 이주를 시켰다. 카자흐 공화국 2만141가구 9만5,427명, 우즈베크 공화국 1만6,079가구 7만3,990명, 타지크 공화국 13가구 89명, 키르기즈 공화국 215가구 421명 등 총3만6,448가구 16만9,927명의 고려인들이 강제적으로 배치되었다. 

고려인들 강제이주 경로와 카자흐스탄 주변 국가들
고려인들 강제이주 경로와 카자흐스탄 주변 국가들

강제이주 행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용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해당 지역의 역을 출발하여 노보시비르스크까지 갔고, 거기에서 남하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소요 기간은 대략 30~40일 소요되었으며, 열차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차 이동 중 노약자 사망이 554명에 이르렀다. 강제이주 과정은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위생상태, 식수 부족, 의료 지원의 부족 등 한 달여 여정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카자흐 공화국에 배치된 고려인들 중 500여 가구는 이듬해 초에 러시아 공화국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재이주되었다. 카자흐 공화국의 우쉬토베는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의 첫 이주정착지로 선택된 도시였다. 1928년에 신생 공업도시로 설립된 우쉬토베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고 이곳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쉬토베의 바쉬토베 지역에는 고려인들이 토굴을 이용한 움막을 짓고 생활했던 흔적이 있다. 당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고통이나 낯선 중앙아시아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아야 하는 고난의 숙명보다는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특히 강제이주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일이 우리 민족 앞에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었던 숨막히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고통은가중되었다. ‘인민의 적’,  일제의 간첩행위를 한 ‘배신자’라는 딱지는 고려인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몰린 고려인들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약3시간 가량 떨어진 딸띄꾸르간(Taldykorgan)州의 작은 소도시인 우쉬토베(Ushtobe).
알마티에서 북쪽으로 약3시간 가량 떨어진 딸띄꾸르간(Taldykorgan)州의 작은 소도시인 우쉬토베(Ushtobe).

카자흐스탄공화국(Republic of Kazakhstan)은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한 공화국의 하나이다. 면적은 272만4,900㎢로 한반도의 12배, 남한의 27배로 세계에서 땅 크기로 9위이다. 2022년 현재 인구는 1,964만 명이며 수도는 아스타나(Astana)이다. 2022년 1인당 국민소득은 1만1,476 달러이다. 우리나라와 1992년 1월28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9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북한과는 1992년 1월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1998년 2월 주카자흐스탄 북한대사관은 철수, 현재 미설치이며 주중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2021년 현재 고려인 11만8,450명, 재외국민 944명이 카자흐스탄에 거주하고 있다. 

종족구성은 카자흐인(70.35%), 러시아인(15.54%), 우즈벡인(3.20%), 우크라이나인(2.02%), 위구르인(1.51%), 독일인(1.18%), 타타르인(1.14%), 아제르인(0.76%), 고려인(0.62%) 등이다. 언어는 카자흐어와 러시아어가 사용되며. 종교는 이슬람교(73.0%), 러시아 정교(20.0%), 개신교(2.0%), 기타(5.0%) 등이다. 기후는 고온 건조한 대륙성 기후이며, 지형의 반은 해발 500∼600m의 사화산 지대이다. 주요 자원으로는 철광석과 비철금속이 생산되며, 석유·천연가스의 대규모 생산국이다. 광물 자원 중 세계 순위에서 우라늄 2위, 아연 6위, 석탄 8위, 구리 10위, 철광석이 11위를 차지하고 있다.
카자흐민족은 15세기 중엽 우즈베크족과 분리되어 키르기즈 고원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함으로써 형성되었으며, 카자흐스탄은 원래 ‘반역자의 땅’을 의미한다. 17세기에 들어와 카자흐인은 유목생활  대신 농경생활을 하였으며, 그 일부는 러시아에, 다른 일부는 중국에 종속되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카자흐인의 독립운동이 일어나 1920년 카자흐(처음은 키르기즈)자치공화국이 성립되어 러시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24년 중앙아시아 행정구역 재편시 현재의 공화국 영토가 확정되었으며, 1936년 헌법시행과 함께 구소연방에 가입하였다. 1986년 모스크바 정부가 쿠나예프(Kunaev) 당서기장(1964∼1986)을 러시아인으로 교체하자 알마아타에서 12월 17∼18일 사이 저항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민족적 배경 하에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폭동의 성격을 띠었다. 구소연방의 해체과정에서 1990년 10월 주권선언, 1991년 12월 독립선언을 하면서 독립국가연합의 일원이 되었고, 1992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1993년 1월 28일 헌법을 제정하였다.

알지르 박물관 입구.
알지르 박물관 입구.

알지르 박물관은 수도 아스타나에서 약 3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구소련 스탈린 체제 당시 여성정치범(남성 정치범의 부인)수용을 위해 유배지에 세운 것이다. 알지르는 ‘Akmola Prison for Wives of Traitor’ 라는 내용의 러시아어 앞 글자들을 따서 불리게 된 명칭이다. 문을 연 1938년부터 폐쇄된 1953년까지 단지 스탈린 체제를 반대하는 남편을 두었다는 이유로  1만7천여 명의 여성이 수용되었고,  이 가운데 고려인도 수백 명이 있었다. 알지르 수용소가 건설된 부지는 카자흐인 마을과 러시아계 주민들이 살던 7개 마을로부터 압수된 것이었고, 지역주민들의 일부 가축도 수용소의 필요에 의해 몰수를 당했다고 한다. 이곳 수용소에는 ‘조국의 배신자 가족’에 대해 5 년에서 10 년의 징역 또는 먼 지역으로의 추방’이라는 형태의 처벌을 받은 정치범의 부인들이다. 

1950 년 초에 알지르 수용소는 폐쇄되었지만 이들은 1958년까지 이전 거주지로 돌아갈 권리가없었다. 당시 수감자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하나는 카자흐 대초원의 혹독한 기후였다.

여름에는 40도의 더위와 모래바람, 모기와 벌레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과 눈보라는 수감자들을 괴롭혔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수용소 한가운데는 갈대가 무성했는데 이 갈대는 겨울에는 막사를 데우는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여름에는 수용소 막사를 건축하는 재료로 흙과 함께 사용되었다.

노동교화소였던 알제르 수감자들은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과 소포 수령이 금지되었고 과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는 음악가, 시인, 교사 등도 있었지만 농업이나 건설 현장의 보조로 일했고 병든 노약자와 아이들은 자수와 봉제 공장에서 일했다. 필자는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이 당시 수감되었던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2013년 제막된 고려인 정치탄압 희생자 추모비. 스탈린 정치 대 탄압 70주년을 맞이하여 정치탄압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2013년 제막된 고려인 정치탄압 희생자 추모비. 스탈린 정치 대 탄압 70주년을 맞이하여 정치탄압으로 희생된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동행한 고려인은 박물관 관람 중 필자에게 카자흐스탄 고려인 중 유명한 김준이라는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1900년 10월 4일에 김중섭의 차남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군 오인발촌에서 태어나 1979년에 사망했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노동학원을 졸업 후 1933년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였지만, 이후 학업을 포기했다. 그는  해방 이후 소련에서 ‘십오만원 사건’, ‘땅의 향기’ 등을 저술한 작가로, 고려인이자 언론인이다. 선봉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문학가의 길을 걸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에 정착했으며, 1946년부터는 한인신문사 레닌기치에서 근무했다. 

소설 ‘십오만원 사건’은 모두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920년 1월4일에 애국청년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최계립),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용정지점으로 운송되던 일화(日貨) 15만원을 탈취하였지만, 20여 일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 소설은 1971년에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조선 소나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5만원은 당시 소총 5,000정과 탄환 50만 발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군이 갖췄던 소총이 1,300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큰돈이었다.

독일,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등 6개국이 자국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설립한데 이어 일곱 번째로 한국은 추모비를 제막하였다. 박물관 외부에는 1937년 당시 고려인들이 타고 왔던 화차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동행한 고려인과 필자는 이 기차 내부에 들어가 구경하는 동안 강제이주 과정에서 비참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과 각종 질병과 혹한에 고생한 고려인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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