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석서아 본지 기자

[동북아신문=석서아 기자]지난 11월 19일 저녁, 도쿄 다키노가와회관(滝野川会館)에서 열린 “2023년 Astalive컵 세계조선족 노래자랑대회”는 차츰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갓을 쓴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등장하더니 무대중앙에 설치된 커다란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앉아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가수가 있다.

2023년 Astalive컵 세계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서 피아노를 치며 자작곡을 부르고 있는 홍성길 가수
2023년 Astalive컵 세계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서 피아노를 치며 자작곡을 부르고 있는 홍성길 가수

이윽고 장내에 부드럽게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률에 더불어 우아한 첼로 소리가 어울어지며 관객들의 귀와 시선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감미로운 연주곡에 몰입되어 있을 때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시작된 애절한 노래소리가 순식간에 관객들의 마음을 훔쳤다. 노래가 후렴구로 향하며 차츰 고조를 이루자 어느새 묵직한 감동이 장내에 스며들며 여기저기 관중석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가슴 절절한 구슬픈 노래로 관객들의 마음을 훔친 남자, 그가 바로 이번 노래자랑대회에서 우수상을 따낸 홍성길 가수다.

 

 진정한 음악인을 꿈 꾸다

1980년9월25일 길림성 통화현에서 삼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던 아버지의 끼와 재능을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그 뿐만아니라 누나들도 노래를 잘했는데 작은 누나는 길림성 시합에 참가하여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누나들은 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아쉽게 꿈마저 접어야만 했다.

삼남매중 유일하게 학업을 견지했던 그는 소학교때부터 자연스럽게 나중에 음악학원에 진학하여 음악인의 길을 걷고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해서부터는 학교악단에서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탁월한 실력 덕분에 악단단장까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음악실력을 쌓아가던 그는 제대로 된 음악을 하고싶은 마음에 일반 고중이 아닌 매하구시 산성진에 있는 음악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그곳에서 음악스승인 김홍광 선생님과 김병갑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더욱 성숙하고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됐다.

고중에 입학해서부터는 피아노도 배웠을뿐만 아니라 성악까지 배우며 음악전문 지식을 연마하게 됐다. 그때부터 음악 창작을 좋아하게 된 그는 틈틈히 창작작업을 하며 실력을 높여갔다.

고중에서 3년의 배움끝에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과에 진학하였다. 전공은 음악교육이었지만 창작에 대한 불타는 학구열을 못이겨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작곡반 수업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또한 뜻이 맞는 동기 친구들과 ‘몽회밴드’라는 5인조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는데 그때 당시 연길에서 꽤나 유명했다고 한다. 그들은 연변방송국이 주최하는 “장기프로그램”, “사랑으로 가는 길”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차곡차곡 실력을 다지며 묵묵히 걸어온 음악의 길이 영원할줄 알았다.

그런데 2003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하며 더 큰 꿈을 위해 북경중앙음악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생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워낙 어렵던 집안형편이 더 기울어지며 더이상 학업을 이어가기 힘들어졌다. 어린 마음에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지만 그는 생계를 위하여 음악과 잠시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어쩔수없이 한 게임 회사에 취직한 그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게임음악 컬러링 제작 등 여전히 음악과 관련된 업무를 맡게 됐다. 그 뒤로 삼성회사 콘텐츠 부문에서도 잠깐 일을 한 적 있었다.

일본과의 인연

사실 그의 일본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중국에서 3년정도 회사를 다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에 사는 친구 소개로 일본 게임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 친구가 바로 이번 창작곡의 작사를 한 변소화 씨인데 두 사람의 인연은 고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자주 창작 작업을 하곤 했다. 창작 작품으로는 ‘梦回’, ‘我亲爱的宝贝', '1004',同窗歌','혹시', '아버지의 가방' 등이 있다.

그렇게 2007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현실과 타협하며 회사원 생활을 했지만 그동안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좀처럼 사그라들줄 몰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음악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다시 굴뚝같이 들었으나 정작 일본이라는 이국땅에서 음악을 이어가기에는 외국인이라는 장벽이 너무나 컸다.

그래서 오랜 고민과 갈등끝에 다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6년의 일본생활을 과감히 접고 꿈의 꽃을 피우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갔다.

2007년 쉼터에서 조직한 노래자랑에서
2007년 쉼터에서 조직한 노래자랑에서

꿈의 행보

2013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청도에 있는 조선족 학교에서 음악교원이 돼 교편을 잡았다. 그렇게 그의 음악 행보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3년후, 그는 자신만의 음악학원 “베토이 음악학원 (贝多艺艺术培训中心)”을 차렸다.

음악학원을 운영한지도 벌써 6년, 그런데 늘 순리로웠던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학생이 100명이 넘을 정도로 번성했는데 2019년 코로나가 터지면서 급격히 줄어드는 바람에 학원 운영에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그가 좌절하지 않고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르친 학생들이 저마다 우수한 성적으로 유명대학교에 진학하거나 꿈을 위해 해외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은 꿈을 꾸고있는 제자들이 자유롭게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하며 항상 노력하는 멋진 스승, 그야말로 진정한 음악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중국모범학생 선발대회에서 제자들과 함께
중국모범학생 선발대회에서 제자들과 함께

현재 그는 음악학원을 운영하는 한편 청도에서 조직하는 조선족노래자랑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고, 한국연예인의 콘서트를 주최하는 등 다방면으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음악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19년도에는 한국의 트로트 가수 장민호 가수의 청도에서의 콘서트를 주최하기도 했다.

2019년 청도에서 열린 장민호가수의 콘서트
2019년 청도에서 열린 장민호가수의 콘서트

‘아버지의 가방’을 부르게 된 사연

이번 “2023년 Astalive컵 세계조선족 노래자랑대회”에서 그는 친구 변소화씨가 본인 장인어른의 스토리로 직접 쓴 가사에 자기가 곡을 붙여 창작한 노래를 불렀다.  

사실 홍성길 가수도 고중 2학년때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아버지를 위한 노래를 꼭 만들겠노라 생각하고 있던 때에 변소화씨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다시 합작하게 되었고,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노래 ‘아버지의 가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왼쪽부터 변소명 씨, 홍성길 가수, 변소화 씨
왼쪽부터 변소명 씨, 홍성길 가수, 변소화 씨

10년만의 일본행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 특별한 발걸음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순간, 마치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됐다. 어쩌면 6년이라는 청춘시절을 일본에서 보냈었기에 더 기쁘고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불러 우수상까지 받게 되는 영광을 품게 돼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음악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열정과 애정으로 앞으로도 계속하여 후대양성에 힘을 쏟는 한편 더 좋은 창작 작품으로 대중들 앞에 서겠다고 포부를 밝히는 홍성길 가수, 훌륭한 음악인으로 자리매김하며 더욱 밝은 앞날을 개척해나갈 힘찬 행보가 기대된다. 

석서아 본지 기자 
석서아 본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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