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1억이 생기면 뭐할래?

친구가 재미 삼아 물으면 난 늘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고 0.1초 만에 답하곤 했다. 온갖 볼거리와 먹을 거리에 놀거리들이 가득인 세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었다. 목적지 없는 여행, 여행이 곧 삶인양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세계일주를 꿈꿨었다.

어디로 떠나고 싶어?

머뭇거려졌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왔지만, 막상 하나만 말하라니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학교 때, 친구와 유럽여행을 계획한 적이 있다. 22살을 맞아 22일의 유럽여행을 하겠노라 당찬 다짐을 했다. ‘무우도 단김에 빼야한다’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경비, 항공편, 비자부터 가고 싶은 장소, 역사까지 조목조목 적어가며 여행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 여행이 시작된 것 같아 벅차고 행복했다. 그러나 공부에 바빠, 시간이 없어, 주머니 사정이 궁해 우리는 결국 여행계획을 잠시 접기로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겨울방학, 친구가 북경에 놀러 오게 되었다. 22살을 기념으로 떠나려 했던 유럽 여행은 물 건너 갔지만 일말의 미련은 남아 친구와 함께 ‘세계테마파크(世界公园)’에 놀러 갔다. 작정하고 찾아간 세계공원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사람이라곤 우리뿐이었다. 세계 랜드마크들 앞에서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 날세라 폭풍 인증샷을 찍었다. 그렇게 추위와 싸우면서도 넓디넓은 공원의 모든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야 세계공원을 빠져나왔다. 처음으로 한 장소에서 300장의 사진을 찍은 기록적인 하루였다. 북경의 어느 인적 드문 곳에 만들어진 세계공원이 아닌 하늘을 날아 유럽에서 함께 보내는 22살 기념일이었다면 어땠을까. 돌이켜보니 처량한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22살 다운 찬란함으로 추위도 모르고 처량한지도 모르고 함께하는 모든 것이 마냥 즐거웠지만 말이다.

여행이란?

여행에는 벽이 많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어느 순간부터 여행을 다니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할일이 많아도 시간을 일분 단위로 쪼개서 여행을 다녔던, 잠을 포기했으면 했지 여행을 끝까지 고집했던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나를 발견했다.

‘대학 때 여행을 많이 다녀야 해. 앞으로 점점 더 여행을 다니기가 어려워 질거야.’ 그때는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시간에 스며들듯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과감하게 떠나지 못한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같이 여행과는 연결고리가 없어 여행은 늘 안타깝더라도 마음이 편하려고 포기하는 선택지였다. 나에게 여행은 숨 가쁜 일상 속 달달한 쉼이었다. 하지만 달콤한 휴식 같은 건 사치라고, 굴러온 여행마저 차버리며 ‘열심히’ 자신에게만 모질었다.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각자의 몫이지만 여행에는 시간을 내기가 아까웠고,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여행을 1순위로 꼽을 만큼 여행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지난 과거가 후회로 다가올 줄은 나도 몰랐다.

사람은 미래를 모르기에 과거를 돌아보고 결국 현재를 낭비하며 산다고 했던가. 회의를 느끼다가도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자조하며 웃는 요즘이다. 그저 무질서한 감정들을 느껴도 질식하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하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여행은 못 가도 언젠가 시간 앞에 당당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바뀌어 가는 계절을 보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며, 무던히 혹은 슬며시 우리 곁을 맴도는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 거겠지.

이제 나는, 세계일주고 뭐고 끝나가는 2023년 끝자락을 부여잡으며 통영으로 보따리 싸서 떠나고자 한다. 한 번쯤은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올해의 마무리는 통영에서 마무리를 하련다.

안미화 약력: 
고향은 연변 화룡. 현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방언학을 전공하고 있다.
위쳇계정 '노랑글방'을 운영하는 글방 주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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